이제 본격적으로 설산의 초대를 받는 것인가 싶어
마음을 다시한번 추스르며
삼보일배를 올리는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조붓한 발걸음을 옮긴다.
탐세쿠, 캉테가(kangtega) 영봉들이 연이어 마중을 나오고
설산의 빙하가 녹아 흘렀을 남빛 계곡물이 길벗이 되어 흐르며,
이 믿기 힘든 풍경 위로 그림 같은 아름다운 계곡마을이 펼쳐진다.
아! 이것은 한 폭의 그림,
어찌 이 속에 애살스럽고 어루꾀는 천박한 사람들이 살 수 있겠는가.
그를 애워싸고 있는 둘레 환경은
곧 자기의 분신처럼 업의 투영으로 그곳에 있는 것이다.
내 주변에 사기꾼이 많다면
그것은 곧 내 마음에 사기의 업이 있는 것이고,
내 주변에 나를 돕는 이들이 많다면
나의 마음 한 켠에 이타심이 춤추기 때문이다.
내가 살면서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상황도, 그 어떤 문제도, 그 어떤 환경도
사실은 모두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내 마음이 외적으로 투영된 것일 뿐이다.
내 안에 없는 것들은 내 앞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똑같은 환경 속에서, 똑같은 일터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어떤 사람에게 그곳은 지옥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 그곳은 천국일 수도 있다.
마음이 세상을 만들어내기 때문.
똑같은 조건, 똑같은 세상 속에서
어떤 이는 지옥을 경험하고 어떤 이는 자유를 경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 하나가 바뀌면 세상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마음이 바뀌면서 세상 자체가
그 어떤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개벽을 이룬다는 말이 아니라,
내 마음에 비친 세상이 바뀜을 의미한다.
똑같은 물을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되지만
젖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는 것처럼.
마음이 바뀌면 독이 우유로 바뀌고 불행스럽던 현실이 행복으로 바뀐다.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주변 환경은 그 속의 사람을 바꾸고,
사람은 그 주변 환경을 바꾼다.
모든 것은 상의상관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이 사는 곳은 그 풍경도 아름다워지고,
아름다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풍경 덕분에 마음이 아름다워진다.
그것이 바로 신토불이의 소식!
큰 산이 큰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반대로 큰 사람이 그 산을 위대한 산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큰 산, 명산, 명당 자리에서 위인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 산에 위대한 영혼이 깃들어 있다면 그 산이 거꾸로 성스러워지는 것.
이 아름답고 성스러운 쿰부 계곡 자락에
어찌 마구잡이로 시류에 휩쓸린 사람들이 깃들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와중에도 희말라야의 성스러운 품어줌과 길들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에고와 아집의 길에서 길을 잃은 영혼들이야 어쩔 수 없는 일.
세상 어디에나 돌연변이는 있게 마련이니까.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이 가지는 또 다른 역설이요,
어쩌면 그 또한 꼭 필요한 더 깊은 차원의 다양성이고
삶이라는 연극을 위한 필수적인 신의 장치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밴커(Bankar)와 몬조(Monjo) 마을을 연이어 지난다.
마을을 정확히 관통하는 마을길을 따라 걷자니
아기자기한 집들과 지붕 위에 흩날리는 룽다,
그리고 집집마다 작은 돌담을 쌓아올려 밭농사를 짓는 모습들이
새삼스런 진풍경으로 다가온다.
아침 햇빛에 반짝이며 빛나는 배추잎사귀며
흡사 상추나 쑥갓을 같은 소담한 초록빛 채소들이
어쩌면 저렇게 싱그러울 수 있는지,
저 평범한 채소들조차 이 희말라야 대자연의 품 속에서
그 기운을 먹고 자란 것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저들에게서 마구마구 생명력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다.
나른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집 앞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지나치는 여행자들을 보며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아침밥을 짓는 것인지
집집마다 하얀 연기를 뿜어올리며
여행자의 가슴에 고향의 정감을 선사하고 있다.
머얼리 하얀 구름 테를 두른 캉테가가 올려다 보이는
몬조 마을의 풍경이 선명하다.
그림 같은 마을 풍경들이 계속된다.
몬조 마을을 지나서 조금 더 걸으니
조르살레를 조금 못 미쳐
퍼밋과 팀스를 체크하는 조르살레 체크포스트가 나온다.
팀스(TIMS, 트레커 정보운영 시스템)는
카투만두에서 미리 준비 해 와야 하고
퍼밋(Permit, 입장허가서)은 이 곳에서 직접 발급을 받을 수 있다.
잠시 팀스와 퍼밋을 체크하고 숨을 돌린 뒤에 곧장 조르살레로 향한다.
이른 점심을 조르살래의 빛이 잘 드는 식당에서 가볍게 먹고
오후의 여유를 즐긴다.
부서지는 햇살이 온 세상을, 순례자의 얼굴을,
한 포기 이름 모를 풀을 향해 축복을 내린다.
이 투명한 여유와 평화로움을 시끌시끌한 식당 앞 뜨락에서 가만히 누려본다.
지텐이 너무 이른 식사라 조금 더 가다가 점심을 먹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 말에
앞으로는 남체까지 전혀 밥 먹을 수 있는 마을이 없다고 하더니
역시 점심 이후에는 그동안의 나지막한 계곡이 완만함을 뛰어올라
폭포 같은 거친 가파름으로 바뀌더니
인간의 길 또한 가파른 오르막으로 바뀌고 있다.
호흡에 발걸음을 일치시키며
한 숨 한 숨 지켜보는 걸음걸이로 오르막을 오른다.
이 높은 계곡 중턱에 아찔한 출렁다리 위로
사람도 건너고 야크도 건너고 룽다와 산골 시린 바람도 함께 건넌다.
그 오금이 저려오는 절벽 위 출렁다리를 중간 쯤 걸어갔나 싶은데
저 쪽 반대편 끝에서 야크의 육중한 행렬이 이어지는게 아닌가.
이 비좁은 흔들다리 위에서 야크와 마주치는 운명이라니.
다리 위로 펄럭이는 룽다가 점점 거세진다.
계곡의 바람치고는 너무 거칠다.
아슬아슬 다리를 건넜는데 이번엔 이쪽 야크 떼와
조금 더 규모가 큰 저쪽 야크떼가
내 바로 앞에서 비좁은 길을 앞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 싶어
그 가파른 산자락을 숨도 안 쉬고 아슬이 야크떼를 피해 뛰어오른다.
그리고 이윽고 계속되는 오르막길.
천천히 천천히 오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발 한 발만을 숨과 함께 내딛다 보니
어느덧 남체의 그림 같은 마을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이얀 설산으로 둘러싸인 옴팍하게 부채꼴을 이루며
마치 야외 콘서트장을 연상케 하는
쿰부지역 제일의 마을이자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의 전초기지,
바로 남체바자다.
마을의 입구에는 티벳과 가까운 마을임을 알려주듯
티벳불교의 스투파와 스투파 주위를 감싸며 휘날리는 룽다와 타르초가
여행자를 반기듯 맞아 준다.
가려고 했던 시설 좋고 값도 싸고 음식 맛도 좋다던 유명한 롯지는
오전에 이미 꽉 차고,
조금 허름하고 오래되었지만
지텐의 친구가 운영한다는 롯지가 있어 그리로 방을 정한다.
이 산중에서 하룻밤 싱글룸이 200루피,
지텐 친구라고 특별히 할인하여 150루피에 얻었다.
약 2,000원 남짓하는 돈이니 시설은 허름하지만 가격대비 재법 만족스럽다.
이렇게 거의 모든 롯지가 방값은 200~300루피를 오르내리지만
한 끼 밥값도 똑같이 200~300루피를 심심치 않게 넘어선다.
그도 그럴 것이 방에는 침대 하나 달랑, 희미한 형광등 하나가 전부다.
난방이며 전기 충전시설, 화장실이나 욕조는 꿈도 꾸지 마시라.
물론 500~600루피를 생각한다면
몇몇 고급 롯지에서 묵으며 욕실 겸 화장실이 딸린 방에서
마음껏 전기 충전도 하며 호화롭게 묵을 수도 있다.
하기야 그래 봐야 우리 돈으로 7,000~8,000원 정도의 돈이지만
이 곳 네팔에서는 손을 덜덜 떨며 쓰기 어려운 돈에 속하다 보니
길 위의 여행자에게도 마찬가지의 큰 돈이 되고 있다.
작은 방에 짐을 풀어 놓고 잠시 남체바자의 시내를 돌아본다.
이 산중에서 지금까지 보아 온 마을하고는 차원을 달리하는 제법 큰 마을이다.
어떻게 이 많은 건물들과 상점들과 다양한 물건들을 도로도 없는 곳에서
그것도 3440고지나 되는 고산 마을에 이렇게 지어다 날랐을까를 생각해 보면
인간의 능력과 의지가 신비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길 없는 곳에, 그것도 걸어서 이틀을 꼬박 걸어 와야 하는,
그것도 루클라에 공항이 없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투만두에서 버스로 이삼일을 달려 와야 루클라에 도착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 기적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체바자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 없이 다 있다.
주로 트레킹 관련 장비를 팔거나 대여해 주는 상점들이 많고,
여행자들이 많다 보니 여행자를 위한 편의시설들도 제법 있다.
제과점이나 빵집, 에스프레소 커피 카페에, 인터넷방,
국제전화가 가능한 인터넷 전화방, 책방, 편의점 같은 마트도 있고,
여행자들에게 현지의 티벳 전통 물품들을 파는 기념품 가게나 옷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점과 마트가 즐비하게 늘어 서 있다.
잠시 마을길을 따라 언덕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남체바자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건물들이 주로 롯지며 게스트하우스인데,
현대식으로 또 유럽풍으로 아름답게 지어 놓은,
그것도 최근에 지었을 법한 최신식 건물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의 색색의 롯지들이 선명하고도 아름답다.
이런 풍경은 사실은 매우 낯선 풍경이어야 하는데
내 눈에는 낯설다기 보다는 오히려 고향에 온 것 같은
아주 친숙하고도 설레는 친근한 마을풍경으로 다가온다.
산그림자가 일찌감치 슬금슬금 기어오더니 금방 마을을 뒤덮는다.
어둑어둑한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얕은 집 지붕 위로 야크똥과 함께
바로 그 곁에서 무슨 야채인지 나물인지를 말리는 풍경이 한눈에 잡힌다.
먹거리 바로 옆에 야크똥을 함께 말리고 있는 풍경이 낯설지만
인도와 네팔을 한두달 다니다 온 나로서는 제법 익숙하게 느껴진다.
다시 마을로 내려오니 어둠이 완전히 내린 작은 시내 상점들이
모두들 흐릿한 불빛을 켜 놓고 막바지 여행객들을 호객하며
여전히 장사를 이어가고 있다.
여행자들도 모처럼 큰 마을의 시내구경에
흥미로운 눈빛으로 거닐며
이런 저런 필요한 것들을 구입도 하고, 산책도 하고,
트레킹에 필요한 물품들을 빌리기도 하는 듯 밤풍경이 제법 활기차다.
다시 롯지로 돌아오니 롯지 식당이 여행자들로 꽉 차 만원을 이룬다.
그야말로 한 명 끼어 앉을 자리가 없다.
이럴 때는 지텐의 친구가 경영하는 롯지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텐의 친구인 20대 초반의 롯지 사장이
지텐 친구면 자신에게도 친구라며 의외로 후한 대접을 해 준다.
자신의 안방을 내어주면서
그곳에서 저녁밥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카메라 밧데리 충전비용이 한 시간에 200루피인데
모든 밧데리와 핸드폰, 전기기구를 몇 시간이든 마음껏 사용해도 좋다는
특별 대접도 받는다.
그 뿐 아니라 내 작은 침낭을 보더니
두툼한 이불을 두 개나 가져다 주면서 따뜻하게 자야 한다고 말해 주는데
이 작은 관심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고맙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모처럼 따뜻한 방에서 맛있는 저녁 공양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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