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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밝은도량에는 온갖 나무와 야생화들 그리고 산나물과 약초들 하늘거리는 바람소리 바람에 낙엽 서걱이는 소리까지 가만히 앉아 느껴보면 온갖 대자연의 소리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새소리가 얼마나 경쾌하게 들리는지 몰라요. 내가 가만히 들어 본 새소리만 해도 한 10가지는 족히 넘을 것 같습니다. 그 울음소리들도 얼마나 신기하고 독특한지... 또 작년 가을까지 도량 주위에서 놀던 꿩 가족들도 겨우내 자취를 감추었는데 여름이 되면서 다시 도량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어디로 다녀 온 건지, 아니면 겨울잠을 자고 온 건지는 몰라도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좀 야속한 건 이녀석들이 예뻐서 다가가는데 조금만 인기척이 들리면 냅다 꼬리를 빼고 도망쳐 버리는 것이 몹시 서운해요. 요즘에는 이제 본격적인 여름꽃들 나물들 산야초들이 한창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고마리, 며느리배꼽, 닭의장풀 괭이밥, 수영, 소리쟁이,엉겅퀴, 며느리배꼽, 메꽃, 망초꽃, 고들빼기꽃, 원추리꽃, 괭이밥꽃, 씀바귀꽃, 수영, 소리쟁이, 별꽃, 돌나물꽃, 뱀딸기열매, 다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고 이렇게 내가 알 수 있는 것들 외에도 아직까지 그 이름도 쓰임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관심을 가지고 산야초들 산나물이며 약초 꽃들을 바라보고 공부하다 보면 정말 한도 끝도 없기도 하고 그 신비로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한참 농사지은 것을 수확하고 있는데 법당에서 지은 농사는 거의 수확이랄 게 없을 정도입니다. 산 중턱인데다 낙엽 떨어져 썩은 부엽토가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 그냥 조금 개간해 씨만 뿌렸더니 이 녀석들이 처음에 조금 고개를 내미는가 싶더니 기운이 달리는지 영 올라오지를 못하데요. 정말이지 혹독하게 실패를 맛보고 있는 중입니다. 저 아래 마을 내려가면 누가 지은 농사고 할 거 없이 모두 다 잘 크고 싱싱한 채소들이 푸르른데 법당만 영 기척조차 없으니 신도님들께서 비료 조금만 뿌리자는 말이 왜 그리 혹하게 만들던지요. 내가 농사지어 팔아먹을 거였다면 아마도 당연히 비료를 주고 말았을 겁니다. 안 되겠다 싶어 인근 나무아래에서 부엽토를 긁어다가 한 몇 일 깔아주고, 인근 마을에 인심좋은 모종파는 할머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조언을 구했더니 좋은 거름을 한 포대 주셔서 그놈을 조금 섞어 뿌려주고는 씨앗을 다시 뿌려 보았습니다. 좀 늦는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조금 힘을 쓰고 올라오는 듯도 해요. 또 감자 심은 것들도 나무들 사이에 햇빛 조금씩 비치는 곳에 심었다보니 이녀석들이 햇빛 서로 받으려고 위로만 자꾸 크다가 넘어져요. 아무리 북주기를 해 줘도 고개를 떨구데요. 게다가 거름도 얼마 없다보니 줄기가 굵지는 못하고 위로만 크니 감자 농사도 영 시원치 못합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을 겁니다. 그나마 조금씩 큰 것들도 있거든요. 저 아래 땅콩도 몇 개 안 되지만 잘 살고 있고, 상추도 거름 하나 없어서 하나도 안 크나보다 했더니 아래 모종한 상추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커서 요즘 먹고 있습니다. 전에 강원도 영월에서 이모님댁 모종을 몇 개 얻어 온 배추도 처음에는 영 안 클것 같더니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크고 있습니다. 콩 심은 곳은 법당 있는 쪽에서 조금 먼 곳이라 아예 물도 주지 않고 심기만 했었어요. 물론 처음 심을 때는 그 날 저녁 비 오는 날을 택했지요. 그래도 올해에는 꼬박꼬박 비가 제 때 내려 주어서 아직까지는 콩도 제법 올라오고 있습니다. 물론 콩이 아직 달리지는 않았으니 좀 더 지켜봐야 겠지만요. 또 법당에서 한 100미터 떨어진 곳에 고추, 가지, 오이, 토마토, 방울토마토, 참외, 호박 심어 둔 곳에도 거름이 덜 하다 보니 그리 크고 실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더디게 크고는 있어요. 물론 모종 두세개가 이유없이 죽기는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죽은 곳 주변에 개미가 많은 곳도 있고, 칡뿌리가 방해하는 곳도 있어서 그런 것이 이유일 수 있겠다 추측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내 농사는 모든 면에서 너무 게으르고 일반 상식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 신도님들이 성격이 좋아 말씀은 안 하셔도 속으로는 안타까운 마음 한창일겁니다. 아직 많이 모르지만 그래도 전 좀 더 연구해 볼까 합니다. 자연 그대로의 힘으로 농사도 자연이 지어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자연과 하나되는 농사법. 내가 뿌린 채소씨가 잘 안 크잖아요. 그런데 그 곁에서 잡초들은 정말 잘 자라고 있거든요. 잡초들은 거름 없어도 잘 자라고 비료 뿌려주지 않아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문제는 거름이 없어서가 아니고, 비료를 뿌리지 않아서가 아닌것 같습니다. 씨앗에 그 문제가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전 생각해 봅니다. 씨앗을 그동안 너무 약하게 키웠던 거지요. 사람의 힘으로 돌보고 비료도 주고, 잡초도 뿌려주고 해서 끊임없이 스스로 클 수 있는 야생의, 자생의 힘을 사람들이 없애버리지 않았나 싶은 생각입니다. 요즘 나오는 무슨 종묘상에서 파는 씨앗들이 거의 그렇게 너무 약합니다. 자연의 것들은 따로 물 주지 않아도 하늘에서 내리는 물만 가지고도 잘 자라고, 거름이나 비료 주지 않아도 흙에 있는 것 만으로도 잘 자라고, 제초제나 농약 뿌리지 않아도 스스로 커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뿌리는 씨앗만 안 그렇다면 그 이유는 사람들이 뿌리는 씨앗이 너무 약하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야생스럽지 않은 온실에서 조심스레 큰 여리디 여린 씨앗을 제 마음이나 신념만 가지고 야생의 잡초들과 경쟁을 시키다 보니 당연히 경쟁에서 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요즘 또 하나의 관찰이 어느정도 경쟁에서 지고 또 어느정도 이기는가 그것도 주 관심사 중에 하납니다. 아래 모종 심은 상추나 배추도 처음에는 시들시들하여 다 죽은 듯도 하고 영 거름이 없어 죽어가는 듯 하더니 그래도 크게는 아니지만 조금식 다시 되살아납니다. 상추는 힘없이 그래도 다른 야생초들과 어렵게 겨루고 있어서 대견합니다. 상추 심은 곳에 피어났던 민들레 두 송이를 그대로 놓아두었었습니다. 민들레 잎이 크게 자라면 상추잎만큼 자랍니다. 그리고 그 영양가도 못지 않아요. 그래서 요즘은 오히려 상추보다 그 곁에서 더 힘있게 자라나는 민들레 잎을 뜯어다가 상추처럼 쌈 싸 먹고 있어요. 그런데 이 두 녀석만 봐도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상추는 힘겹게 커가고 있고 그 속도도 한참을 더디게 크는 반면에, 민들레는 그야말로 쑥쑥 커가고 있습니다. 똑같은 땅 똑같은 조건에서 이렇게 큰 차이가 나요. 요즘 같아서는 정말이지 농사지으려고 씨 뿌릴 것 없겠다 싶어요. 이렇게 민들레처럼 그냥 야생의 것들을 따먹을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아요. 아니 너무 많은 게 아니라 따 먹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다는 말이 더 맞을 정돕니다. 앞에서 조금 언급했지만 요즘 밥상에 오르는 것들만 해도 고마리, 며느리배꼽, 닭의장풀 괭이밥, 수영, 토끼풀, 소리쟁이,엉겅퀴, 며느리배꼽 등이 있어요. 여린 것은 먹을 수 있고 조금 크거나 꽃이 피면 못 먹는다는 것도 알고보면 못 먹는다는 게 아니고 좀 억새서 먹기 힘들다는 말이거든요. 다 먹을 수 있습니다. 농사를 좀 게으르게 하고, 내 노력 좀 덜 들이면서 자연의 노력을 흠뻑 받을 수 있도록 대자연의 온전한 흐름에 턱 내맡기면서 자랄 수 있도록 참된 부처님의 농사가 꼭 있을 것입니다. 그런 농사를 발견했으면 하고 모든 이들이 그런 대자연의 부처님 농법으로 농사 지을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완전 초보 농사꾼이 너무 말만 앞서는거 아닌지 부끄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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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마리] 요즈음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밝은도량 주위 자연의 새로운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 도량에 또다른 사랑이 마음 속에서 싹튼다. 봄이 오고 산에 도량에 꽃이 피니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이래서 봄이란 사람들 마음을 생기롭게 움트게 하는 계절. 연한 초록의 산빛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냥... 어찌 할 수 없게 만든다. 정말이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온갖 꽃들이 앞다투어 핀다는 말도 그냥 가슴에 팍팍 와 닿는다. 수많은 야생화들하고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들 그리고 새순이며 약초들 봄나물들이 얼마나 화알짝 신명나게 피어있는지 하루 종일 거닐며 바라만 보아도 도무지 질리지 않는다. 더구나 봄이 되고 보니 더욱 이 산의 멋스러움과 소중함이 더하다. 얼핏 보면 그냥 얕은 산이고 멋 없는 산일지 모르지만 이 산엔 그야말로 없는 것 없이 다 있다고 하면 조금 과정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불러주고 싶을 정도. 온갖 작고 앙증맞은 야생화가 군락을 지어 피어오른 곳이 곳곳이고, -이름을 명확하게 다 모르는 것이 너무 애석- 또한 작고 앙증맞은 우리꽃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고 있는 꽃들로 주름잎, 꽃마리, 냉이꽃, 꽃다지, 민들레, 제비꽃, 하얀 각시제비꽃, 양지꽃, 뱀딸기꽃, 별꽃, 산괴불주머니... 등이 피어있고, 나무도 주로 참나무, 밤나무, 자작나무, 오동나무 정도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곳곳에 예쁜 꽃들을 피워내는 이름모를 나무들이 봄 연출에 한창이고, 봄 밥상을 풍성하게 해 주는 두릅나무 새순도 막 올라와 있고, 고사리도 막 올라오고 있으며, 참나물 원추리 돋나물 민들레 제비꽃 꼭두서니 쑥 고들빼기도 봄나물로 무쳐 먹으니 입맛이 돈다. 민들레나 고들빼기는 쓴 봄나물의 명성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는 듯 야생의 그것이라 그런지 시장에서 파는 재배된 봄나물에 비해 써도 너무 쓰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이란 계절에 너무 더워 수분이 많은 수박이나 참외 같은 것이 많이 나오듯, 봄에는 춘곤증 같은데 좋은 쓴 나물 들이 많이 나온다고, 봄에 쓴 나물들은 법계에서 내려 준 선물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요즘 재배되는 나물이며 채소들은 그야말로 온실에서 고이 자라다 보니 모든 채소들이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맛이고, 거의가 연하고 질기지를 못하며, 저마다 특유의 쓴맛이라던가 특유의 향들이 많이 사라져 버렸다. 똑같은 비료주고, 똑같은 거름주고 늘 똑같은 땅에서 키워지니 맛도 다 똑같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온실이나 검은비닐 같은 것으로 경쟁할 수 있는 다른 풀들이 아주 자라지 못하게 막아 놓고, 심지어 재초제로 채소외의 다른 것들은 다 죽게 해 버리니 경쟁할 수 없어 생명력이 약화되고 연하고 당장 입에는 질기지 않고 달지 모르겠지만 그 내적인 생명력은 그냥 작살이 나고 마는 것이다. 사람도 저마다 특유의 삶이 있고, 향기가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만이 가지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그는 그 자신의 모습으로써 부처님의 성품을 확연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특이하게 보일 것은 없겠으나, 요즘같이 교육도 똑같이 시키고 똑같은 것들만 똑같이 머릿속에 주입을 시키고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먹을거리에, 똑같은 주거환경이며 똑같은 TV를 보고, 책을 읽으며, 삶의 학습을 받아오고, 돈, 명예, 권력, 학벌, 등 똑같은 삶의 욕망을 삶의 제일가치로 알고 똑같은 삶의 방식을 따르다 보니 저마다의 색깔이 없어지고 '자기자신'의 모습으로 나툰 자신만의 화신불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장 나답게 살 때 그것이 가장 진리답게 사는 것이고, 부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자연도 그러하지만 애석하게도 요즘의 대자연은 인위적인 힘으로 인해 자기자신의 삶의 모습을 훼손당하고 있어 안타깝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도량 주위에 돋아난 봄나물들만 캐어 먹어도 어지간한 채소는 농사지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지천으로 먹을 것이 널려있으니 말이다. 모를 때는 그냥 다 잡초라고 치부해 버리고 지나치지만 조금만 알고 나면 봄들녁의 새싹들은 그야말로 다 먹을거리가 된다는 것이 신비로울 정도다. 무슨 무슨 대형 마트에 가서 에어콘 바람 쐬가며 쇼핑도 하고 카트를 끌고다니며 채소를 고르는 것 보다 조금 덥더라도 차라리 산으로 들로 호미 하나 들고 뛰어들어 자기 자신의 무한한 생명력을 드러내는 것은 어떨지. 사실 올바른 농사란 그런 것이 아닐까. 사람의 노력을 들여 심고 물주고 뿌리고 가꾸고 나아가 농약주고 풀 뽑아주고 비료에 재초까지 해야 하는 고된 노동을 생각했을 때, 또 반환경적이고 반생태적인 현재의 농사법을 생각했을 때, 그저 대자연에서 제 스스로 씨앗 뿌리고 가꾸고 만들어 내는 그런 것들이야말로 가장 온전한 먹거리일 것이고,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것을 필요한 만큼 가져다 먹는 것이야말로 가장 온전하고 깨어있는 농사고 농부의 일이 아닐까. 그랬을 때 인간의 노력과 욕심, 또 반환경적인 어리석음을 투여해서 일구어낸 먹거리 보다 더 생명력이 강할 것이고, 더 온전한 영양이 깃든 먹거리가 될 것이며 온전한 삶과 건강의 토대가 되어 줄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법계에서 내려 준 선물이고, 부처님의 음식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산은, 대자연은 가만히 두어도 날마다 비옥해 지지 않나. 물주고 가꾸고 비료주고 농약이며 재초재 비료 뿌려주고 갈아주고 잡초 뽑아주고 북주고 그러기 위해 온갖 것들을 돈들여 사야하고 노동력을 탕진해야 하며 많이 수확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뭐 그런 것 하나도 하지 않더라도 산은 항상 비옥하며 항상 그 자리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숲을 가꾸고 모든 생명들을 품어내고 있다. 그것이 참된 법계의 모습이고, 진리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게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우리 사람들도 자연을 가까이 할수록 진리와 가까워지고 행복해지며 평화로움이 내면에 깃드는 것이다.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다.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 법신 부처님을 닮아가는 것. 봄 따스한 햇살에 앞다투어 하루가 다르게 피어나는 봄의 생명을 보며 내 안의 생명도 한없이 피어남을 느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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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평생가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자연의 소리는 아주 작고 여리기 때문에 아무나 들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하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그 살뜰한 소리는 고요한 법계法界의 울림과 모든 존재 내면의 쩌렁쩌렁한 깨우침을 담고 있다.
그러나 보통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은 세상사에 찌든 온갖 소음들만 귀 고막이 터져라 듣고 산다. 세상의 소음에 익숙해지다 보면 작고 여린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 본래의 청음 능력을 상실한다.
내 삶 속에 자연이라는 경이와 축복이 들어오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매 년 반복되는 계절을 그냥 저냥 흘려보내다가 어느 순간인가 자연 속에 깃들어 자연 그 자체가 되는 듯한 심연深淵의 떨림을 느끼면서부터 내 삶에 자연은 더없는 신비요 스승이며 벗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리산 종주길에 올라 하염없이 떨어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걷다가 문득, 아주 문득 자연의 가녀린 그러나 청청한 소식을 들었다. 그 작은 자연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마치 지리산 전체가 아니 이 우주가 그대로 내게 속삭이는 듯, 침묵 속에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러면서 자연은 둘도 없는 내 벗이요 도반이 되었다.
우리들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 육근六根이라는 것이 본래는 세상의 작고 여린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고 우주와 자연의 작지만 커다란 울림과 공명할 수 있었지만, 감각적이고 자극적인데 서서히 익숙해지다 보니 그 본래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한다.
동물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공인까지 받았다는 호주의 트리샤 맥카라는 분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녀의 말을 빌자면 ‘인간은 원래 텔레파시 능력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언어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이 능력은 퇴화돼 버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탄트 메시지』에서도 참사람 부족 사람들은 ‘인간은 본래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하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하며 실제 생활에서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고 거짓을 없앰으로써 부족 사람들은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자유로이 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그뿐인가. 『물은 답을 알고 있다』나, 『식물의 정신세계』같은 책에서는 물이나 식물 또한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받고 영향을 받는다는 기록과 과학적인 증명을 담고 있다.
그 뿐인가. 얼마 전에 지진해일이 있었을 때 동물들은 미리 알고 피했다고 했고,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원시적으로 사는 원시 부족인들 또한 미리 피함으로써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동물들이나 원시 부족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며, 자연의 미세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자들이다. 분명 대자연은 그러한 큰 피해에 앞서 그 어떤 힌트를 보냈을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자들은 몸을 피했지만 듣지 못한 자들은 고스란히 그 아픔을 감당해야 했다. 자연에 깃들어 삶을 살 때 대자연은 어머님 품처럼 우리를 품어준다.
이처럼 사람들은 본래부터 사람들 서로간 뿐만 아니라 동식물이나 자연의 무정물과도 미세한 마음의 공감과 대화를 텔레파시로써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을 만큼 감성적인 예민한 감각이 발달되어 있었고, 자연 속에서 신의 소리,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순수하고 청명했다. 그러나 인류역사 속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그 모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건 우리 스스로 작고 미세한 감각의 소중함을 버린 채 외부의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에만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마음을 돌이켜 정신을 내면의 미세한 느낌에 집중하고, 외부의 소박한 자연에 집중하며 관찰할 수 있다면 다시금 그 본래의 능력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봄이 오니 한겨울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그러면서 봄나물이며 봄꽃들이 얼마나 신이 나 있는지 모른다. 나도 처음엔 수필가들이 얘기하는 눈 녹는 소리며 바람 스치는 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서걱이며 온산을 놀라게 한다는 그런 표현들을 그저 시적인 표현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귀를 닫아 놓고 살아서 그렇지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정말 그 소리가 성성한 깨우침으로 귓전을 맑게 스치운다.
조용한 가을 낙엽이 떨어지면 뒷산 전체가 서걱이고, 산 속 나무 그늘에 덥석 누워있다 보면 바람 지나가는 소리가 사람들 지나가는 소리만큼이나 선명하게 들리고, 초봄의 산사에는 눈 녹는 소리가 꿈틀거리듯 세속에 찌든 귀를 맑게 씻어준다.
이러한 자연의 소리는 아주 작은 것이라 사소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건 결코 작은 소리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런 작은 것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깨어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만큼 내 마음이 맑게 비워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연의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에 복잡한 소음이 너무 많기 때문이고, 해야 할 일들로 마음이 꽉 차 있기 때문이며, 또 머리 속은 정신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내 안이 맑게 비어 있어야 비로소 이 법계의 작지만 우주를 울리는 이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듣지 말아야 할 것들만 듣고 사는 우리이고,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들만 보고 사는 우리이며, 먹어야 할 것은 먹지 않고 먹지 말아야 할 것들만 먹고사는 우리들이다. 그러니 우리의 육근六根인들 어디 좀처럼 온전할 수 있겠는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잘 다스려야 몸도 마음도 경쾌하게 추스릴 수 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육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대상인 육경六境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작고 소박한 데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하고, 자연이 가져다주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고요하게 앉으면 내 안에서 울려나오는 쩌렁쩌렁한 속 뜰의 메아리를 들을 수도 있고, 이 우주의 작은 한 켠에서도 전 법계의 소리 없는 거대한 울림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마음을 맑게 비우고, 속 뜰의 소리며 대자연이 전해주는 맑고 밝은 소식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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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나와의 관계, 공존 (0) | 2009.0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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