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이틀전 새벽예불을 보고 절문을 나서는데 
낯익은 분이 맨발에  주저앉아 절망을 남편에게 마구 쏫아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산길을 돌아 내려오며 만감이교차  올 것이 와나보구나 하는 직감이었습니다
이분들을 두번 보았습니다 .
한번은 절 문전을 기웃대며 바라보기만 다가가서 법당을 들어가 보시라니까  쓸쓸한 웃음만...
두번째는 남편께서  언제 들어가도 좋으냐고 물어오더군요.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 들어가시라고.....
땅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는 모습,남편이 어찌 해야 할찌 기로에 서있는 모습 에 
점점 죽음의 늪에서 포기 하는 상태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절을 가면  무언가 위안을 받기에  그럼에도 절 문턱을 넘지 못하는 애처로움,,,,

그분들의 모습에   나는 살아있음에  감사. 건강함에 감사.
나의기도가 탐진치 삼독에 물들지 않기를 발원했습니다
그 부부들에게 부처님의 자비 함께하길  이틀내내 마음이 쓰였습니다
오늘 새벽예불을 보고 산 모퉁이를 내려오는데 만났습니다
차 앉에 기대어 축 늘어져있는 상태로 컵라면을 들고
한젓가락 입에 넣는 힘없는 애처로운 모습 살기위해  먹어야 한다는 그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없이 눈물이 나도 모르고 흘렀습니다.
과감히 도와드리고 싶다고 전화번호를 받아냈습니다

내일은 그분을 만나  병마와 싸우는 부인을 힘이 되어주고자 방문을 하려고 합니다
언제 까지일지 모르지만 그 분이  가는길에  한 번이라도 
법당의 부처님을 뵙게 해 주고 싶습니다
스님 , 망설임 없는 결정에 다소 긴장이 됩니다
어떤 자세로 대하여야  하며 혹여   저로 인해 상처않받고
마음편히 가슴에 담았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갈수있게 할 수있을까요?


[답변]

예... 아름다운 마음을 내어 주셨네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은 어렵고 힘겨운 분들을 만났을 때,

눈물이 나오고, 함께 가슴 아프고,

그럴 때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첫마음은 누구나

'돕고싶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그 투명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 일어남을

외면하지 말고 저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법우님, 아주 잘 하셨어요.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돕고싶은 마음이 일어나다가도,

그 다음에 연이어 일어나는

아상에서 기인하는 생각, 판단, 분별, 과거를 개입시키기 때문에

얼른 저질러 돕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법우님처럼 그렇게 탁 저질러 돕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지만,

그 뒤에 우리 마음은

또 다시 아상에 기인한 생각, 분별들이

끊임없이 솟구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부터가 제대로 된 생활 속의 수행을

시도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순간을 맞는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그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생활 선원이요, 선방이 아닐까 싶습니다.

 

잘 한 일일까?

너무 성급한 일은 아니었을까?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 도움을 순수하게 여기지 않으면 어쩌지?

오히려 저들에게 상처를 주면 어쩌지?

언제까지 도울 수 있을까?

끊임없이 도움을 주지 못할 바에는 도움을 주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

 

하면서 끊임없이 분별이 올라올 것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 분별들을 잘 지켜보면서,

놓아가는 것이야말로

생활 속의 수행이고 명상이며 선인 것입니다.

 

그런 분별들은 잘 지켜보고,

탁 내려놓으세요.

내려 놓는 것이 잘 안 되면,

내려놓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아, 이런 마음이, 이런 생각이 또 일어나는구나'

하고 가만히 내버려 두고 지켜보기만 하시기 바랍니다.

 

내일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말을 꺼낼까,

무엇부터 시작할까,

어떻게 구체적으로 도와주어야 할까,

어떤 말을 해야 상처받지 않을까

하고 많은 생각과 계획을 세울 필요 없이,

그저 텅 빈 마음으로

저질러 보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생각보다

우리의 텅 빈 마음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사랑과 자비의 근원적인 마음이

더 깊고 더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텅 빈 마음으로 저지르는 것이

온갖 생각으로 계획을 짜는 것 보다

더 지혜롭단 말입니다.

 

너무 고민하지 마시고,

턱 맡겨 버리세요.

생각도 놓아버리고

그렇게 올라오는 생각들도 가만히 지켜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대학을 다닐 때였습니다.

한번은
겨울에 기름값이 없어
추운 방에서 잠바 입고 이불쓰고 산 적이 있었습니다.

형님같은 스님이 계셨답니다.
집에 놀러 오셨다 가셨는데
기름값을 하라고 메모만 남겨두고는
한 30만원을 놓고 가시는 겁니다.

또 한번은
학비를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부르셔서는
학비로 쓰라고 또 돈을 주십니다.
받을 수 없다고 했더니
어차피 내 돈도 아니라며
그냥 인연따라 온 돈이니
필요한 사람에게 가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학생 때, 그 소중한 시간에
공부를 해야지
다른 거 해서 시간 버리지 말라시며 말입니다.

고마워 할 것도 없고,
부담 가질 것도 없다시며 말입니다.

또 하루는 방을 구하려고 다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절 앞에 방을 구해 놓았으니
빨리 이사오라고 그러십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많이 받고만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스님께서는
주고 받은 게 없으십니다.

그런 스님께서
제가 출가할 적에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입으시던 옷들 물려주시면서
입가에 미소가 가득이셨습니다.

제게는 친형보다 더한 스님이십니다.

연말이 되니
또 생각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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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와 13년 동안 잘 지내다가 최근에 관계가 너무 안좋아졌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너무나 화가 나서 말도 하기 싫고 얼굴 보기도 싫으시다며 식사도 제가 출근후에 혼자서 따로 하십니다. 밥도 먹기 힘들고 잠도 잘 못자고 직장에서도 일을 하기가 힘드네요.

 마음에서 문제가 완전히 풀리고 나면 현상 세계는 발맞추어 함께 따라 풀려집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마음이 투영되어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내 안에서 문제가 해결되면 나와 연결되어 있는 세상의 문제도 해결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 보세요. 내 안에 어떤 원인이, 혹은 어떤 생각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는가! 하고.

그러나 도대체 어머님과 왜 이렇게 틀어지게 되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면, 그래도 상관 없습니다. 어쨌든 그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다고 인정하고 들어가세요. 사실은 그 모든 것이 내 안의 문제거든요. 그러니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내 안의 문제고, 나 때문에 벌어진 문제라고 인정하고 참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겨운 바깥 경계를 만나게 한 내 내면의 무언가에 대해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님 앞에 섰을 때 매 순간 깨어있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져요. 그러나 어머님을 향한 참회와 자비의 마음으로 그 앞에서 깨어있게 되면 법우님의 깨어있음의 힘이 어머님의 마음을 녹일 것이고, 법우님의 마음 또한 평화롭게 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어머님 때문에 일도 잘 안 잡히고, 불편한 그 마음도 잘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자신과의 약속을 매번 어깁니다. 특히 새벽기도 해야지 하는 결심만 할 뿐 제대로 실천을 못 합니다. 왜 저는 매번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기만 할까요. 이젠 저에게 화가 납니다.

 수행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기도를 해야겠다 싶으면 알람을 켜 놓고 일어나면 되고, 만약 도저히 못 일어나겠었다면 조금 더 노력해 보거나 아니면 그냥 자면 됩니다. 단순하게 사세요. 그냥 잤다고 해서 알람이 울렸는데 그냥 잤다는 그 단순한 상황에, '내가 졌다'고 하는 상을 만들어 놓고, 연이어 두번째 세번재 화살을 맞느라고 '나는 끈기가 부족하다'거나, '나는 왜 이렇게 못난 사람이지'라거나 하고 연이어 생각으로 전투를 이어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생각이 많으면 그것이 중생이고, 생각을 놓아가면서 단순하게 살면 그것이 바로 수행인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것도 물론 좋습니다. 해 보는데까지 해 보세요. 다만 정 못하겠다 한다면 왜 새벽만을 고집해요. 낮에 하면 되고, 저녁때도 하면 됩니다. 새벽이라는 어떤 때에 어떤 실체적인 '수행 잘 하는 때'라는 고정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을 닦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수행과의 투쟁에서 승자가 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세요.


어디에서 보니 '남에게서 보는 것은 내안에도 있다'는 말이 있데요. 모든 경계가 나의 과보로서 온것이라고 생각하면 '내 업의 나툼'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만, 그런 경계를 내안에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잘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바깥 경계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이 내 안에 비춰져서 내 안에 비춰진 바깥 경계를 우리는 인식하거든요. 그러니 사실은 바깥 경계를 인식하는게 아니라 내 안에 비춰진 경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바깥 경계는 좋거나 나쁘거나 하지 않지만 우린 그 경계를 가지고 좋다고 나쁘다고 분별하잖아요. 그 자체가 바깥 경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내면에 비춰진 바깥 경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즉 그게 바로 내 내면을 보고 있는 것이란 뜻입니다.

외부경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면의 거름망, 내면의 색안경으로 걸러 왜곡해서 받아들인다는 말을 이해하시겠지요? 남이 한 하나의 행동을 가지고, 그게 좋으니 나쁘니 판단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무엇이 하는 것이지, 그 사람 자체나 행동 자체는 아무런 분별도 없어요. 그래서 동일한 어떤 사람의 행위가 어떤 사람에게는 호의적으로 다가오고, 어떤 이에게는 나쁜 행위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에게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했다면 우리는 키가 작다고 욕을 하는군! 괘씸한 녀석! 너는 나보다 더 못생겨놓고! 정말 내가 그렇게 못 생겼나? 아이 짜증나! 수술을 해 볼까! 저 녀석 손좀 봐 줄까 하면서 온갖 생각, 분별, 시비, 판단 등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것을 나쁘게 받아들이겠지만, 부처님께 누가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했다면 부처님은 그저 아주 단순한 하나의 말로써 키가 작으니 작다고 했구나, 저 사람 기준(색안경)으로 내가 못생겨 보였구나 하고 아주 단순하게 받아들이고는 그것으로 끝이란 말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어때요? 어떤 경계든 우리는 그 경계가 아닌 내 안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똑같은 경계를 부처님은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우리는 차별, 분별, 성냄 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이 미워요


[문]

결혼생활 십육 년째인데 아직도 남편과 티격태격합니다.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려 하는 이 마음을 도무지 놓을 길이 없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너무 한심하고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제가 남편에게 바라는 건 별 게 아닙니다. 그냥 햇살 좋은 날 봄볕도 같이 느끼고 싶고, 대청소도 같이 하고 싶고, 같이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싶은 거지요. 그런데 남편은 집보다는 밖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무조건 남편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조선시대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남편을 탓해야 하나요? 아니면 마음공부 재료로 삼아서 더욱 더 열심히 정진해야 하나요? 나름대로 생활 수행을 하고 있는데 아직 행복해지는 건 잘 모르겠네요.


[답]

수행자는 더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냥 놓아버리세요. 어찌 보면 수행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어려운 길, 더 힘겨운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근본에서는 그 길이 더 밝은 길이지만, 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안 보이는 어둠을 닦아야 하는 길이다 보니 그만큼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수행했는데 왜 행복이 찾아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바로 욕심인 줄 알고 그것 또한 놓아버려 보세요.

        수행하고 마음공부 하니까 오히려 더 힘이 들지만, 그 이면에 마음이 평온해 지는 면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 열심히 하려고 삼천 배를 해 보면 참 힘이 듭니다. 그런데 마음까지 괴롭던가요? 몸뚱이가 좀 힘들어 그렇지, 절 하면서 괴롭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와 같은 도리입니다. 삼천 배 할 때는 힘이 들고 어렵지만 삼천 배를 마치고 나면 몸뚱이 착심이 많이 떨어져 나가지 않던가요. 그 전에는 백팔 배만 하려고 해도 힘들었는데 삼천 배를 하고 나니까, 백팔 배 쯤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백팔 배 하기 싫은 업이 그만큼 떨어져서 이제 백팔 배 쯤은 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게 업장소멸이지 어디 엄청난 데서 업장소멸을 찾을 것도 없습니다.

        남편이 밖으로만 나돌지 말고 나와 함께 시간을 더 보내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마음은 그냥 내 마음일 뿐입니다. 내 마음이 만들어 놓고 나 스스로 걸려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우선 놓아보세요. 어떻게 그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느냐 하지 마시고 남편에게 바라는 마음들을 그냥 다 놓아보세요. 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자유로워집니다.

        남편을 통해서 행복해지려 하지 말고, 자식을 통해서 행복해지려 하지 말고, 그냥 나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도록 하세요. 본래 원만 구족한 존재인데 왜 혼자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없겠습니까. 조선시대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 가족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하는 남편,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이라고 느끼는 그 마음부터 우선 놓아 보십시오. 그러고 나면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을 바꾸려고 하는 내 마음도 함께 놓여지게 됩니다. 그렇게 놓고 나야 남편도 바뀔 수 있는 것이지, 내 안에서 남편이 내가 생각하는데로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고정 짓고 있으면 바꾸기 더 어려워집니다.

        내가 바뀌는 것이 가장 빨리 상대를 바꿀 수 있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고정관념이 이미 굳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정된 관념을 쉽게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바꾸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내 식대로 맞추려고 하면 나만 힘이 듭니다. 주말에도 놀아주지 않고 밖에만 나가려드는 남편에게 짜증부리고 화내던 마음을 돌이켜 이해하려고 애를 써보십시오. 대인관계가 좋은 남편이라고 한번 칭찬해보면 어떨까요.

        사실 모든 문제나 고통스런 상황은 결코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 내면의 어떤 문제가 남편의 반응이라는 방식으로 튀어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남편을 만난 것이 어떤 인연과 이유를 가지고 온 것인지, 그런 남편을 만남으로써 나의 어떤 부분이 정화되고 변화되어 가는지를 우리는 온전히 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경계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돕고 있으며, 지금 이 상황은 고통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요 마음공부의 열린 장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 남편이 따라 변하게 됩니다. 내가 평온해지면 오히려 남편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변하는 아내에게 발맞추어 남편도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변해야 남편이 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방하착 해보세요. 더욱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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