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달연 예쁠아 님이 제게 보시해 주신 작품입니다]

우리는 흔히 베풂과 나눔을 실천하면서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이렇게 베풀고 나눈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이를 다 구제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이 세상의 어느 한 귀퉁이
아주 작은 마을 고작 한두 개,
내지는 몇몇 사람에게 밥 몇 그릇 나누어 주거나,
교육을 뒷바침해 주거나,
아무리 도움을 준들 겨우 그 정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
실망하고 만다.

아무리 우리가, 내가 열심히 돕는다고 한들
그것은 너무나도 미약하여
이 세상을 밝히는데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 같아
좌절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내가 베푼 아주 작은 나눔의 행위가
그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아무리 작은 나눔과 베풂일지라도
이 전 우주법계를 감동시키고,
한 줄기 커다란 빛과 사랑으로써
우주법계에 기록되고 공명하여
더 많은 자비와 나눔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퍼져나갈 수도 있다.

그 어떤 작고 보잘것 없는 보시일지라도
그것은 우주법계를 변화시킨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고도 부드럽게
이 세상을 바꾸어 내는 무한한 권능을 담고서 말이다.

왜 그럴까?
내가 한 것은 고작
제3세계 어린 아이 한 명을 도운 것 뿐인데,
네팔이나 미얀마의 학교를 위해
고작 1만원을 베푼 것 뿐인데,
법보시 서적 고작 몇몇 권을 베풀었을 뿐인데,
그것이 어떻게 이 우주법계를
강력하게 자비의 빛으로 물들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물질의 차원이 아닌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질적 차원에서 내가 베푼 것은
고작 몇 만원이고,
한 두 명을 도운 것 뿐이고,
자원봉사를 며칠 한 것 뿐이지만,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어떨까?

우리는 한 사람을 도울 때
뿌듯한 행복감과
도와줄 수 있었다는 기쁨과
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느낌,
나의 작은 보시가 누군가를 배부르게 했다는 풍요의 느낌 등
아름답고도 풍요로운 행복한 느낌과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도울 때 중요한 것은
사실 물질적인 나눔에 있다기 보다는
도울 때의 그 행복한 느낌, 풍요로운 느낌,
상대방을 도울 수 있었다는 자신에 대한 대견하고도 뿌듯한 느낌,
누군가를 내가 돕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다는 귀한 감정
바로 그 느낌과 감정에 있다.

우주 법계가 원하는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풍요와 행복과 나눔의 정신이 깃든
그 마음인 것이다!

우주법계는 그 물질적 보시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보시한 마음,
베풂의 그 풍요의 정신,
나눌 수 있다는 그 넉넉한 마음을 받는 것이다.

우주법계는 그 풍요와 나눔과 보시의 마음을 받아들여
다시금 이 우주법계 곳곳으로 공명시키고
더 많이 나누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나간 보시의 마음, 나눔의 마음은
우주법계라는 무한한 정보장, 불성의 장을 거쳐
이 우주법계 끝까지, 세계 곳곳에까지,
저 아프리카의 굶주린 모든 어린 아이들의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인구의 정신 깊은 곳에까지
그 마음을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누군가가 보시를 행할 때,
사실 그 마음은
이 우주 전체에까지 퍼져나가
온 우주에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전 세계 모든 인구의, 유정 무정의 전체 생명에게
그 마음은 비국소적으로 전달이 되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의 정보장으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행한 보시의 순수하고도 귀한 마음은
온 우주의 모든 세포, 공간, 존재 전체에
정보로써 입력을 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법계는
우리의 보시 액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시할 때의 그 마음을 기억하여
그 마음의 정보를
온 우주 끝까지 비국지적인 정보장으로써
펼쳐 내는 몫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 한 사람의 보시는
우주적인 것이다.

당신 한 사람이
오늘 행한 아무리 작은 액수의 나눔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작을 수가 없다.
그것은 결코 잊혀질 수 없다.
그것은 곧장 이 우주 끝까지 전달되어
온 우주로 공명이 되고,
모든 생명에게 공명이 되어 공동의 자산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없이 고무적인 것은,
바로 그 보시의 마음들이 모이고 또 모이게 되었을 때
이 우주법계는 단순한 수치적인 것을 넘어서서
여러분이 보낸 보시의 마음과 느낌과 감정들을
그대로 우주 곳곳으로 반사해 낸다는 데 있다.

우주는 우리의 보시의 마음을 받아서
고스란히 이 우주로 그 마음을 반사하고 반영하여
더 많은 행복과 나눔과 보시의 정신이
이 우주 곳곳에 뿌리내려지도록 도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보시의 액수가 아니다.
우리가 보시할 때 느낄 수 있는 그 느낌, 감정,
고양된 기분, 풍요롭고도 뿌듯한 그 마음,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특히 가르침을 보시하고, 법문을 들려주고,
지혜의 말씀을 나눔으로써
상대방을 영적인 진보와
수행의 성숙으로 이끄는 토대를 베풀어 주었다면
그것은 사소한 물질적 베풂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영겁을 이끄는 정신적인 완성의 토대가 될 것이 아닌가.

사실이 이러할진데,
어찌 가진 것이 별로 없다고
보시하고 나누며 베풀지 않을 것인가.

별로 없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나누는 순간의,
베푸는 바로 그 순간의 고양된 느낌,
거기에 있는 것이다.

보시는 또 다른 보시를 불러오고,
보시는 또 다른 풍요로움을 불러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당장에
이 우주를 위해
내가 행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보시와 나눔과 사랑을 베풀라.

힘겨워하는 이웃에게,
친구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그것은 결코 그 친구와 나 사이의
개별적인 관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적인 하나의 사건이다.
내가 그 친구에게 행한 그 따뜻한 사랑의 마음은
우주 전체에 따뜻함과 사랑을 가져다주고
공명해주고 반사해 주는 역동적인 자비의 힘이 될 것이다.

나아가 내가 행하는 하루 삶의 모든 순간들이
조건 없는 사랑, 무주상의 보시가 될 수 있도록,
이 세상을 밝힌다는 고귀한 발원의 행위가 될 수 있도록,
단 하나의 행위와 말과 생각에서도
보시와 나눔을 실천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질문]

 이틀전 새벽예불을 보고 절문을 나서는데 
낯익은 분이 맨발에  주저앉아 절망을 남편에게 마구 쏫아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산길을 돌아 내려오며 만감이교차  올 것이 와나보구나 하는 직감이었습니다
이분들을 두번 보았습니다 .
한번은 절 문전을 기웃대며 바라보기만 다가가서 법당을 들어가 보시라니까  쓸쓸한 웃음만...
두번째는 남편께서  언제 들어가도 좋으냐고 물어오더군요.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 들어가시라고.....
땅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는 모습,남편이 어찌 해야 할찌 기로에 서있는 모습 에 
점점 죽음의 늪에서 포기 하는 상태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절을 가면  무언가 위안을 받기에  그럼에도 절 문턱을 넘지 못하는 애처로움,,,,

그분들의 모습에   나는 살아있음에  감사. 건강함에 감사.
나의기도가 탐진치 삼독에 물들지 않기를 발원했습니다
그 부부들에게 부처님의 자비 함께하길  이틀내내 마음이 쓰였습니다
오늘 새벽예불을 보고 산 모퉁이를 내려오는데 만났습니다
차 앉에 기대어 축 늘어져있는 상태로 컵라면을 들고
한젓가락 입에 넣는 힘없는 애처로운 모습 살기위해  먹어야 한다는 그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없이 눈물이 나도 모르고 흘렀습니다.
과감히 도와드리고 싶다고 전화번호를 받아냈습니다

내일은 그분을 만나  병마와 싸우는 부인을 힘이 되어주고자 방문을 하려고 합니다
언제 까지일지 모르지만 그 분이  가는길에  한 번이라도 
법당의 부처님을 뵙게 해 주고 싶습니다
스님 , 망설임 없는 결정에 다소 긴장이 됩니다
어떤 자세로 대하여야  하며 혹여   저로 인해 상처않받고
마음편히 가슴에 담았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갈수있게 할 수있을까요?


[답변]

예... 아름다운 마음을 내어 주셨네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은 어렵고 힘겨운 분들을 만났을 때,

눈물이 나오고, 함께 가슴 아프고,

그럴 때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첫마음은 누구나

'돕고싶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그 투명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 일어남을

외면하지 말고 저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법우님, 아주 잘 하셨어요.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돕고싶은 마음이 일어나다가도,

그 다음에 연이어 일어나는

아상에서 기인하는 생각, 판단, 분별, 과거를 개입시키기 때문에

얼른 저질러 돕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법우님처럼 그렇게 탁 저질러 돕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지만,

그 뒤에 우리 마음은

또 다시 아상에 기인한 생각, 분별들이

끊임없이 솟구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부터가 제대로 된 생활 속의 수행을

시도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순간을 맞는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그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생활 선원이요, 선방이 아닐까 싶습니다.

 

잘 한 일일까?

너무 성급한 일은 아니었을까?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 도움을 순수하게 여기지 않으면 어쩌지?

오히려 저들에게 상처를 주면 어쩌지?

언제까지 도울 수 있을까?

끊임없이 도움을 주지 못할 바에는 도움을 주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

 

하면서 끊임없이 분별이 올라올 것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 분별들을 잘 지켜보면서,

놓아가는 것이야말로

생활 속의 수행이고 명상이며 선인 것입니다.

 

그런 분별들은 잘 지켜보고,

탁 내려놓으세요.

내려 놓는 것이 잘 안 되면,

내려놓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아, 이런 마음이, 이런 생각이 또 일어나는구나'

하고 가만히 내버려 두고 지켜보기만 하시기 바랍니다.

 

내일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말을 꺼낼까,

무엇부터 시작할까,

어떻게 구체적으로 도와주어야 할까,

어떤 말을 해야 상처받지 않을까

하고 많은 생각과 계획을 세울 필요 없이,

그저 텅 빈 마음으로

저질러 보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생각보다

우리의 텅 빈 마음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사랑과 자비의 근원적인 마음이

더 깊고 더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텅 빈 마음으로 저지르는 것이

온갖 생각으로 계획을 짜는 것 보다

더 지혜롭단 말입니다.

 

너무 고민하지 마시고,

턱 맡겨 버리세요.

생각도 놓아버리고

그렇게 올라오는 생각들도 가만히 지켜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대학을 다닐 때였습니다.

한번은
겨울에 기름값이 없어
추운 방에서 잠바 입고 이불쓰고 산 적이 있었습니다.

형님같은 스님이 계셨답니다.
집에 놀러 오셨다 가셨는데
기름값을 하라고 메모만 남겨두고는
한 30만원을 놓고 가시는 겁니다.

또 한번은
학비를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부르셔서는
학비로 쓰라고 또 돈을 주십니다.
받을 수 없다고 했더니
어차피 내 돈도 아니라며
그냥 인연따라 온 돈이니
필요한 사람에게 가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학생 때, 그 소중한 시간에
공부를 해야지
다른 거 해서 시간 버리지 말라시며 말입니다.

고마워 할 것도 없고,
부담 가질 것도 없다시며 말입니다.

또 하루는 방을 구하려고 다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절 앞에 방을 구해 놓았으니
빨리 이사오라고 그러십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많이 받고만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스님께서는
주고 받은 게 없으십니다.

그런 스님께서
제가 출가할 적에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입으시던 옷들 물려주시면서
입가에 미소가 가득이셨습니다.

제게는 친형보다 더한 스님이십니다.

연말이 되니
또 생각이 납니다.








'산방한담 산사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자 되세요  (0) 2009.12.20
관음사 지난 1년의 기록  (0) 2009.12.18
이런 스님, 어때요?  (0) 2009.12.18
욕심이란? 행복이란?  (0) 2009.12.18
대인관계의 핵심, 드러냄  (0) 2009.12.14
내 안의 창의성을 찾으라  (0) 2009.12.14


제 24, 복지무비분
복과 지혜를 비교할 수 없다


福智無比分 第二十四
須菩提 若三千大千世界中 所有諸須彌山王 如是等七寶聚 有人持用布施 若人 以此般若波羅蜜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他人說 於前福德 百分 不及一 百千萬億分 乃至算數譬喩 所不能及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서 제일 큰 산인 수미산왕만한 칠보들을 가지고 널리 보시한다 하더라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이나 이 경의 네 글귀로 된 한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에 비하여 앞의 복덕은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의 일 또는 그 어떤 산술적 비교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복지무비란 복과 지혜를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복과 지혜는 함께 닦아가야 할 중요한 수행의 요소지만 세속적인 복을 짓는 일을 출세간의 지혜를 닦는 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의미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서 제일 큰 산인 수미산왕만한 칠보들을 가지고 널리 보시한다 하더라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이나 이 경의 네 글귀로 된 한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에 비하여 앞의 복덕은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의 일 또는 그 어떤 산술적 비교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네 글귀로 된 한 게송이란 금강경의 사구게를 말할 수도 있겠고 나아가 부처님 진리 말씀 가운데 진실로 어느 한 구절 만이라도 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것이 다 다른 듯 보이고, 경전도 수없이 많으며, 교리도 수없이 많고, 수행법도 복잡 다단하게 느껴지며, 스님들의 설법을 듣고 수많은 절에 다녀 보더라도 처음에는 다 다른 얘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어렵고 복잡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다 보니 불교를 배우려면 공부할 것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방편이 많은 것이지 그 근본은 복잡하지가 않다. 그 근본은 하나다. 그래서 불교 공부를 하다보면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어렵고 복잡해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정리도 안 되고 하다가 어느 순간 그 근본을 비춰보게 되면 일순간 그 모든 복잡하던 것들이 하나로 정리가 되고 귀일이 된다. 그 본질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구게라는 것의 상징적인 의미도 바로 그 근본, 본질을 꿰뚫고 있는 부처님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사구게, 즉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이 담긴 사구게를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 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사구게를 받아서 그 말만을 읽고 외우고 남에게 전달해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이해도 없이 깨달음도 없이 공허한 말만 골백번을 외우면서 남에게 전달해 준다면 그것이 어찌 큰 공덕이 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사구게를 받아 지닌다는 뜻은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사구게의 진리를 온전히 내 깊은 정신 안에서 깨달아 환히 체득이 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야 단순히 받는 것이 아닌 받아 내 존재 안에 지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온 존재로써 받아 지녀 깨달아 알고 입으로는 늘 읽고 외우며 남에게 그 깊은 의미를 온전히 전달해 줄 수 있다면 그 공덕이야말로 온 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공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내 존재 안에서 깊은 깨달음으로 받아 지닐 수 있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 온전히 전해 줄 수 있다. 내 스스로 사구게의 깊은 이해와 깨달음이 없다면 어찌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수 있겠는가. 이렇듯 내 스스로 깊이 깨닫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사구게의 본질적인 진리를 깨닫게 해 줄 수 있다면 이 공덕이야말로 한량 없이 크다. 크고 작은 분별을 넘어서서 대 평등으로 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삼천대천세계에서 가장 큰 산인 산중의 왕, 수미산왕 만큼 큰 칠보를 가지고 널리 보시한들, 그런 물질적인 보시가 어찌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사구게 법의 보시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 세계 1등 가는 기업 회장이 수천억의 물질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물질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시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이 얼마나 큰 보시이겠는가. 그로인해 수많은 사람들은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며, 물질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큰 공덕이란 말인가. 그러한 보시의 공덕으로 그 사람은 앞으로 있을 수많은 윤회의 기간 동안 끊임없이 부유하게 태어날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과보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유위의 공덕은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물질적으로 부유하면 그만큼 가난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삶의 의미들을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면 그만큼 스스로 우쭐해지거나 교만해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계속해서 대 그룹의 회장으로 윤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고통을 모두 소멸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많은 부자들을 보라. 그들이 돈이 많고 가진 것이 많을 지언정 가진 물질의 양만큼 마음도 풍요로운가. 오히려 물질이 많아지면 그 물질에 휘둘리는 일이 많아지고 되려 소유당하는 측면이 많아진다. 그 재산을 계속 유지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 재산에 이끌리면서 일평생을 재산을 지키는데 에너지를 써야 할 것인가. 가까운 우리의 재벌들을 보더라도 그들의 삶이 행복과 평화와 여유와 고요함이라는 본질적인 삶의 미덕과 그리 가까워 보이지 않는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수행을 한다거나, 기도를 한다거나, 홀로 고요한 시간을 가진다거나,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다거나, 집착과 욕망을 지켜보고 비운다거나 하는 그런 본질적인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을 것이다. 그 시간을 가진 재산을 지키는데 다 소비해야 할 지 모른다.

설령 백 번 양보 해 그렇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스스로 윤리와 정신을 잘 지켜나간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나고 죽고 병드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부자라도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니 어떠한가. 물질적인 부유함, 물질적인 보시의 과보는 이렇듯 유위의 복에 불과한 것이다. 물질적인 보시의 공덕이 우리를 생사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한다. 참다운 내면의 깨어있는 정신을 세워주지는 못한다. 물질적인 보시의 과보는 물질적인 풍요일 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앞서 말했듯이 물질적인 과보는 오히려 우리에게 정신의 풍요를 앗아가게 하는 빌미를 제공할지언정 물질적인 풍요가 정신적인 풍요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어떠한가. 아무리 칠보로써 삼천대천세계의 가장 큰 산인 수미산왕만큼을 보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깨달음으로 이끌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혜가 구족되어 있는 사구게를 온전히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연설해 주는 그 공덕은 나와 남을 깨달음으로 이끌고, 완전한 내적인 평화로 이끌어 줄 수 있다. 그러한 사구게의 깨달음은 물질적인 풍요보다도 더 큰 정신적인 풍요를 가져다 준다. 사구게의 깨달음과 정신적인 풍요는 곧 내 것과 네 것이라는 분별을 없애주기 때문에 ‘내 것’이 많아지는 물질적인 풍요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 삼천대천세계가 전부 나와 둘이 아니요, 전부 내 것일 수 있는 무한한 절대 풍요를 가져다 준다. 그 사람에게 물질적인 많고 적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고 죽는 것이며, 내 것을 늘리는 것이며, 세속의 그 모든 욕망과 집착 그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니 어찌 물질적인 보시를 사구게를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연설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법상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도솔, 중에서... (예스24, 50%할인 특가중, 4,750원)






  1. 임현철 2009.10.08 09:21

    깃발마저 다르게 느껴집니다.

    • 법상 2009.10.08 15:25

      예...
      그 곳의 풍경이
      그러합니다.
      사진을 보니 또 다시 떠나고 싶어지네요...




제 19, 법계통화분
법계를 모두 교화하다


法界通化分 第十九
須菩提 於意云何 若有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以是因緣 得福多不 如是 世尊 此人 以是因緣 得福 甚多 須菩提 若福德 有實 如來不說 得福德多 以福德 無故 如來說 得福德多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많은 복을 얻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아주 많은 복을 얻을 것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복덕을 많이 얻는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므로 여래가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법계통화란 법계를 모두 교화한다는 의미이다. 보통 법계를 다 교화하고자 하면 수많은 재물이 있어야 할 것 같고, 법계 즉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칠보가 있어야 그것을 널리 보시함으로써 법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것이 중생의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재물이 있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널리 베풀고자 하는 자비의 마음을 내었더라도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명절 때나 되어 불우이웃들에게 돈이나 물질적인 것들을 준비해 베풀어 주는 것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곤 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고, 언론에도 공개해야 하고,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고자 애를 쓴다. 물론 그러한 것 또한 유위의 복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진정 법계를 교화할 수 있는 무위의 공덕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똑같이 칠보로써 보시를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상을 여읜 무위의 보시가 될 수 있는가에 있다. 아상을 가지고 보시를 하면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워 보시하더라도 유위복은 될 수 있을 지언정 무위의 복은 되지 못하지만, 상을 여읜 무위의 보시를 한다면 쌀 한 톨을 가지고도 법계를 전부 교화하고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참으로 법계를 모두 교화하고자 한다면 무위의 보시, 상을 여읜 무위의 행이 되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많은 복을 얻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아주 많은 복을 얻을 것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복덕을 많이 얻는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므로 여래가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많은 복을 얻겠는가 하는 부처님의 질문에 수보리는 그렇다고 답변한다. 사람들이 자신이 번 월급을 가지고도 남을 위해 다만 얼마씩이라도 보시를 한다면 그것이 큰 공덕이 될 것인데, 하물며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공덕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얼마 전에 한 거사님께서 당신은 매월 월급을 받아서 매달 정기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쓰신다고 하면서 그렇게 매달 보시를 하기 전보다 이렇게 매달 보시를 하고 나니 그렇게 뿌듯하고 기쁘다고 하셨다. 액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듯 보시하는 마음 그 자체가 순수하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가. 자신의 재산 늘리기에만 여념이 없지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려는 마음을 낼 수 조차 없을 만큼 자신의 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에 비한다면 이 얼마나 밝은 일이고 복덕이 되는 일인가. 아마도 그 사람은 큰 복덕을 받을 것이다. 베푼 것은 분명히 법계에 저축이 되었다가 내게로 되돌아 오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게나마 매달 베풀면서도 우리 마음은 얼마나 부자가 된 듯 기쁜가. 풍요로운가.

그러나 베푼 것에 대해 내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면서 상을 낸다면 그 때는 그 공덕은 입을 벌려 얘기하면 할수록 사라지고 만다. 완전한 무위로써, 그 어떤 상도 내지 않는 무주상으로 보시를 했다면 그 작은 돈이 법계에 고스란히 저축도 되고 이자까지 저축이 될 것이지만 입을 벌려 이야기 함으로써 벌써 그 복은 유위로 전락하고 만다. 어쨌든 그렇게라도 보시하지 않은 것 보다는 보시하는 것이 큰 복덕이 된다. 그러니 다만 얼마씩 보시를 하는것도 이렇게 큰 복덕이 될진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얼마나 큰 복덕이 되겠는가.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 모든 굶주린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리고도 남을 칠보로써 보시를 한다면 이 어찌 작은 복덕이라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세계에서는 이 순간에도 하루에 3만 5천 명의 어린 아이들이 기아로 죽어간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질병으로 기아로 죽어가고 있으며, 죽기 직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삼천대천세계 전체를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그 모든 생명을 다 살리고 먹이고도 남을 것이 아닌가. 이 어찌 작은 복덕이라 하겠는가. 수보리는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매우 많은 복을 얻을 것이라고 답변하고 있다.

부처님의 답변도 그러하다. 그 인연으로 매우 많은 복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은 그렇게 답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복덕이란 것이 본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많은 복덕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말해 복덕이란 복덕이 아니며 다만 그 이름이 복덕일 따름이란 말이다. 즉 복덕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로써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따라 꿈처럼 환영처럼 신기루처럼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꿈속에서야 복덕을 많이 짓고 받는 것이 있겠지만 그것이 다 꿈일 뿐이지 꿈을 깨고 보면 복덕이라는 것도 짓고 받는 다는 것도 모두 텅 빈 것이 아니겠는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복덕이 얼마나 많은 것인가. 그러나 그 복덕을 진실로 있는 것이라고 여겨 그 복덕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은 참된 복덕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결코 많은 복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면 수보리도 여래도 그 복덕을 많이 얻는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므로 여래는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내가 보시했다’는 상이 있다면, 그러한 유위의 보시, 유주상의 보시는 결코 많은 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복덕이 진실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참으로 많은 복을 얻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많은 복을 지었다’라는 상에 빠져 있거나, ‘내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웠다’는 상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결코 많은 복이 아니다. 유위의 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운 그 복이 무위가 되었을 때는 그야말로 법계를 다 먹이고도 남으며, 법계를 다 교화하고도 남는 복이 된다. 그랬을 때 그 복은 한량이 없다. 매우 많은 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듯 많은 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 이유는 그 복이 진실로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복이 함이 없는 복이며, 무위의 복이고, 그 양을 셀 수 없기 때문에 많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많은 것은 ‘얼마만큼’ 많다고 표현될 수 없다. 얼마만큼 많다고 했을 때는 벌써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이 가정되어 있는 상태다. 그러니 정말 많은 것은 표현될 수 없다. 정말 많은 것은 어떤 틀이 없다. 어떤 틀을 정해 놓는 것은 유위요, 틀 없이 자유로운 것이 무위다. 그래서 정말 많은 복덕이 되기 위해서는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라야 한다. 어떤 틀도 없는 것이라야 한다.

텅 빈 허공은 허공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지 허공의 실체는 찾아볼 수 없다. 허공은 허공이 아니기 때문에 허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공을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허공이라는 것이 실제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어떤 실체를 찾아볼 수 있고 눈으로 그 크기나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을 크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허공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허공을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복덕도 이와 같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실로 복덕이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복덕이라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많은지 적은지를 판가름해 볼 수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많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복덕을 많이 얻는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므로 여래가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즉 유위의 복덕은, 아상에 갇힌 복덕은, 아무리 많다 해도 그것은 유위로써 많을 뿐이다. 즉 더 큰 복덕 아래에서는 작은 복덕일 뿐이다. 그러나 무위의 복덕, 아상을 완전히 소멸한 복덕은 그 크기를 젤 수 없기 때문에 참으로 클 수 있는 것이다. 유위의 복덕으로는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하더라도 많고 적음을 나누어 놓은 가운데 그 중 많은 쪽을 택하는 그런 상대적인 많음이지만, 무위의 복덕은 많고 적음도 사라진, 복덕이 있고 없음도 사라진 절대적인 많음일 수 있는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