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15분 지경공덕분 강의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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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과 마음공부

금강경 15분 지경공덕분 강의

목탁 소리 2009. 9. 2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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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지경공덕분
경을 지니는 공덕


持經功德分 第十五
須菩提 若有善男子 善女人 初日分 以恒河沙等身 布施 中日分 復以恒河沙等身 布施 後日分 亦以恒 河沙等身 布施 如是無量 百千萬億劫 以身布施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勝彼 何況書寫 受持讀誦 爲人解說 須菩提 以要言之 是經 有不可思議 不可稱量 無邊功德 如來 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 若有人 能受持讀誦 廣爲人說 如來 悉知 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不可量 不可稱 無有邊 不可思議功德 如是人等 卽爲荷擔 如來 阿뇩多羅三먁三菩提 何以故 須菩提 若樂小法者 着 我見 人見 衆生見 壽者見 卽於此經 不能聽受讀誦 爲人解說 須菩提 在在處處 若有此經 一切世間 天人 阿修羅 所應供養 當知 此處 卽爲是塔 皆應恭敬 作禮圍요 以諸華香 而散其處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에 또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백천만억 겁 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아니하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수승할진대, 하물며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느냐.
수보리야,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경에는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니,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며,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수지독송하여 널리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니, 모두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과 같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리니 마땅히 알라. 이 곳은 곧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이 분에서는 경을 베껴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연설해 주는 데 대한 공덕을 설하고 있다. 경의 말씀을 아무리 설명해 주고 설해 주었더라도 훗날 경을 공부하는 수행자가 경전을 참되게 수지독송하지 못한다면 그 경전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경전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이 있는 경인가를 거듭 설명하시면서 진리의 길을 걷는 수행자들에게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해 줄 것을 요청하고 계신 것이다.

이 분에서 말씀하고 계신 금강경 수행법은 첫째 서사(書寫)이고, 둘째 수지독송(受持讀誦)이며 셋째 위인해설(爲人解說)이다. 다시 말해 첫째는 사경이며, 둘째는 독송이고, 셋째는 설법이요 법보시인 것이다. 이 세 가지 금강경 수행을 통해 금강경의 깊은 의미를 더욱 깨닫게 되고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글로 베껴 씀으로써 하나 하나의 의미를 더욱 면밀히 공부하며 공경하게 되고, 입으로 독송함으로써 잊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며, 법을 전하는 설법과 법보시를 통해 진리가 널리 일체 중생에게 회향될 수 있도록 하는 수행이다.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에 또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백천만억 겁 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아니하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수승할진대,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 수행자가 있어 수도 없는 몸으로써 나고 죽고를 반복하며 백천만 억 겁을 윤회하면서 끊임없이 보시하기를 매일같이 한다 하더라도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 복이 더욱 수승하다. 하물며 이 경전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법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는가.
항하사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써 아침과 낮 또 저녁으로 보시하기를 백천만억 겁 동안 하더라도, 아니 그 이상의 엄청난 보시를 행하더라도 자신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유위(有爲)의 공덕이 될 뿐이다. 즉 ‘내가 했다’는 상이 남아 있는 이상 그 어떤 보시를 행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어리석은 중생의 유위복일 뿐이다.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누구에게 보시했다는 그러한 일체의 상을 다 놓아버리지 않는 이상 아무리 셀 수 없는 무량한 보시를 했더라도 그것은 깨달은 자가 숨 한 번 쉬는 공덕에 미치지 못한다. 일체의 상을 여의고 본래 성품을 깨닫게 된다면 그 자체가 무량한 복덕이고 공덕이 된다. 일체의 상을 여의게 되면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법계가 그대로 내가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베풀 내가 없으며 베풀어 줄 대상도 없고 베풀 것도 없다. 베풀 주체인 ‘나’도, 베풀어 줄 대상인 ‘상대’도, 또한 베풀어 줄 ‘것’도 전부 공(空)했으며, 전부가 그대로 나와 둘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전체가 둘이 아닌 하나로써 그대로 나이고 그대로 우주인데, 주고받을 일이 무엇인가. 보시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공덕이란 말 또한 텅 비어 사라지고 만다.

그랬을 때, 본래 성품을 깨닫게 되었을 때, 존재 자체가 그대로 공덕이 되고, 보시가 되며, 지혜가 된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언설로도, 그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텅 빈 공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할진데 어찌 물질적인 보시로써 상을 타파한 깨달음의 세계와 견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언설로써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만큼 보시를 한다고 표현할지라도 그것은 유위복 밖에 되지 못할 뿐이다.

유위복은 아무리 많더라도 그 양이 정해져 있을 뿐이지만, 무위복은 그 양이 없다. 그 양이 전체이기 때문에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복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체의 상을 타파한 공덕이며,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그러니 금강경을 올바로 수지하는 공덕은 도무지 그 양을 셀 수 없는 것이다. 금강경에 담긴 진리의 크기를 어찌 유위의 양으로써 셀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의 가르침을 서사하고 수지독송하며 위인해설하는 공덕은 도무지 셀 수 없는 것이다. 몸으로써 백천만억 겁을 보시하는 것은 아무리 하더라도 유위의 공덕에 머물 뿐이지만,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공덕은 무위의 공덕이기 때문이다. 유위의 공덕을 아무리 많이 쌓더라도 그 결과 육도 윤회 가운데 천상세계를 갈 수는 있겠지만, 육도 윤회 그 자체를 떠날 수는 없다. 그러나 금강경을 깨닫는 공부를 무위라고 하는 이유는 이 공부로써 윤회의 수레바퀴 자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천만 억겁을 몸으로 보시하더라도 그 결과는 고작 육도 가운데 천상세계에 조금 더 오래 머무는 것이지만,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공덕은 육도 윤회 자체를 벗어나 대 해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느냐.

그러면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공덕을 얻고자 한다면 어떻게 금강경을 배우고 수행해야 하는가.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달아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대 해탈을 얻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을 통해 이를 수 있겠는가. 금강경에서는 서사와 수지독송 그리고 위인해설이라는 세 가지 수행법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금강경을 공부해 오고 있지만 여전히 머리로써는 언뜻 이해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아직 내 안에서 금강경이 춤을 추고 흘러들어오고 흘러나오지 못할 것이다. 아직은 내가 금강경 자체가 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금강경의 가르침이 내 삶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할 것이다. 아상을 타파하고, 일체의 상을 타파한다는 것이 말로써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얼마나 어려운 실천인가.

그래서 이 경에서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우리 삶 속에서 끊임없이 체험되어지도록 하고 깨닫도록 하기 위해 세 가지 실천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 가지 실천 수행법을 하나 하나 알아보자.

첫째, 서사(書寫)라는 것은 베껴 쓴다는 말로 다시 말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경(寫經)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경전의 가르침을 하나 하나 베껴 쓴다는 것은 그만큼 그 가르침에 집중하고 몰두할 수 있는 방법이다. 보통 사람들은 경전을 보더라도 소설책을 읽듯이 그저 읽어 내려가곤 한다. 그러나 경전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다. 경전은 단순히 읽어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하나가 되는 작업이다.
경전의 가르침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온 마음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 생각이나 판단, 혹은 이전에 배워 온 것들로써 경전을 해석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저 있는 그대로 하나도 남김없이 베껴야 하는 것이다. 책을 베낀다는 것은 똑같이 다시 쓴다는 말이다. 그처럼 우리가 경전을 볼 때도 마음에 똑같이 베껴야 한다. 내 안의 생각이나 판단, 관념들로써 걸러 들어서도 안 되고, 내가 원하는 부분만을 가려 읽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듣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내 생각이며 편견들을 경전에 비춰 보다 견고히 하는 아견을 증장시키는 일 밖에 되지 못한다.

경전을 볼 때는 반드시 사경을 해야 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들을 때도 사경을 해야 한다. 사경이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베끼는 작업이다. 의심하지 말고, 해석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 다만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베껴야 한다. 그래서 그 가르침이 그대로 내가 되도록 해야 한다. 내식대로 가르침을 취사선택해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 글자 하나 빼놓지 말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경 수행을 하는 이유다.
다만 글로써 베끼고 쓰는 것만이 사경인 것은 아니다. 마음 안에 베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 견해를 다 놓아버리고, 맑고 텅 비게 한 다음 아무런 시비 분별이나 판단 없이 다만 경전을 내 안에 베껴 새기라. 경전을 올바로 베껴 사경할 때 그 사경은 그 어떤 고정된 견해가 아니다. 그대로 베꼈을 때 자유롭다. 내 견해로써 색안경으로 투사한 것을 베꼈을 때는 내 견해 속에 스스로 빠지게 되지만, 완전히 베끼고 사경했을 때 그 가르침은 물처럼 유연하며 허공처럼 활짝 열려있는,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대 자유의 가르침으로 물결친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는 사경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처님께서 몸소 행하셨던 사경을 설해 주고 계신다.

“선남자여, 항상 부처님을 본받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바 세계에 오시기까지 법신(法身)인 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정진하여 물러나지 않으시고 수없이 많은 몸과 목숨을 보시하고,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사경하기를 수미산만큼 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사경을 위해 이렇게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왕의 자리나 궁전, 정원 등의 일체 소유와 갖가지 어려운 고행이 무슨 장애가 될 수 있었겠느냐.”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사경하기를 수미산만큼 하셨으며, 그만큼 법을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사경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다. 목숨은 유위이며 다만 인연따라 오고 가는 것일 뿐이지만, 부처님의 법을 지니고 사경하는 공덕은 무위이며 일체 윤회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수지독송(受持讀誦)을 말씀하셨다. 수지독송은 말 그대로 잘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는 말이다. 서사하고 사경함으로써 내 안에 법이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잘 받아지닌 것을 독송함으로써 항상 잊지 않아야 한다. 신구의 세 가지로써 업을 짓고 사는 우리들은 몸과 말과 생각을 통해 이 세상을 만들어 간다. 수행 또한 이 세 가지를 방편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몸으로써 서사하며 마음으로써 수지하며 말로써 독송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듯 몸과 말과 뜻으로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맑게 정화되고 진리로써 하나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을 수지하고 독송하는 공덕은 유위가 아닌 무위이다. 그렇다고 수지하지 않고 독송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유위의 공덕에 머물고 만다. 즉, 내 안에 그 참 뜻을 올바로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나날 동안 금강경을 독송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흡사 이해하지도 못하는 책을 입으로만 외워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것은 참된 수지독송이 아니다. 그래서 독송에는 꼭 수지라는 말이 함께 따른다. 마음으로 온전히 그 뜻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된 앎과 이해, 즉 경전에 대한 밝은 지혜 없이 입으로만 독송한다 한들 그것이 어찌 무위의 공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금강경의 수지독송 수행법 때문에 오래도록 불가에서는 금강경 독송을 주요한 수행법으로 알고 실천해 왔다. 매 예불과 기도 때마다 1독, 3독, 7독, 혹은 21독에서 108독씩 늘 독송하며 정진해 왔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도록 금강경 독송 수행이 내려져 오다 보니, 자칫 금강경 수행이 독송 그 자체에 그 어떤 공덕이 있고 영험이 있는 것인 줄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금강경의 뜻을 전혀 모르더라도 매일 3독, 7독을 하면 그 자체에 엄청난 공덕이 쌓인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뜻을 모르고서라도 마음을 맑게 비우고 또한 밝게 비추면서 금강경을 독송하게 된다면 지관(止觀)수행의 공덕이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수지독송이란 금강경의 참 뜻을 올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해 독송 수행을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혹 금강경 독송만 매일 하면 무조건 업장이 소멸된다거나, 밝아진다거나 하고 금강경 독송 그 자체에 그 어떤 상을 가져다 붙이고 있지는 않은가 비추어 볼 일이다. 그것은 금강경에 또 다른 상을 부여하는 일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금강경의 가르침에 또 다른 상을 가져다 붙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로 위인해설(爲人解說)의 수행법이다. 이것은 서사와 수지독송으로 우리 안에 금강경이 물결치고 꽃피우는 것을 일체 모든 중생들을 위해 회향(回向)하도록 이끄는 수행방법이다. 진리가 우리 안에 꽃피어날 때 저절로 우리 안에는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비의 동체대비심이 함께 꽃피어 나게 된다. 지혜는 곧 자비와 한 몸이기 때문이다. 금강경 수행을 통해 일체의 상이 타파되면,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이 사라지고, 일체는 모두가 ‘전체로써의 하나’가 된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내가 배고플 때만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데, 전체가 그대로 내 몸이 되다 보니 그 어떤 중생이 배고플 때 그것이 그대로 나의 일이 되며, 일체 중생이 어리석을 때 그것이 그대로 나의 어리석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이 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체대비심이란 말 그대로 동체, 즉 같은 몸이라는 자각에서 나오는 대자비의 마음이다. 동체대비심은 일체의 상이 타파되는 금강경의 실천에서 나온다.

완전히 금강경을 깨닫게 된다면 물론 위인해설이라는 수행법을 따로 만들어 둘 필요도 없다. 저절로 동체대비가 성숙해 지면 남을 위해 연설하고자 하는 마음은 저절로 따른다. 완전히 깨닫고 난 뒤에 남을 위해 설법해 주면 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분별일 뿐이다. 완전히 깨닫고 난 뒤에는 그런 생각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직 서사와 수지독송이 완전해 지지 않은 중생들에게는 위인해설로써 동체대비심을 기르는 연습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때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자가 바로 나의 위인해설의 대상이다. 일체 중생에게 법을 설해주겠다거나, 법보시를 하겠다거나 하는 생각도 다 부질없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다만 지금 이 자리에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가 바로 내 전법(傳法)의 대상이다. 유위의 세상에서는 유위의 공덕이 뒤따른다. 남에게 설법을 많이 해 주는 공덕을 짓는다면 설사 그 사람이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일지라도 유위의 공덕은 뒤따른다. 위인해설과 법보시, 전법의 공덕은 대선지식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는 공덕이 뒤따른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법을 전하라. 법보시의 공덕은 스승을 얻는 공덕을 얻고 나아가 깨달음의 공덕이 된다. 저 많은 수행자들이 스승이 없어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라. 인류의 수많은 수행자들의 공통된 소망은 바로 참스승을 찾는 일이었다. 참스승을 바로 찾게 되면 애써 돌아가지 않고도 바로 성품을 볼 수 있지만, 스승 없이 깨달음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법보시로써 스승이 되어줄 때 그 유위의 공덕이 무르익는 어느날 저 인도의 석가모니와 같은 부처님을 나의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열매가 열릴 것이다.

어쩌면 앞서 금강경 1분에서 금강경의 설법은 이미 끝마쳐졌다. 또한 구구절절한 설명 또한 14분까지 오면서 이미 다 설해 마쳤다. 지금부터의 금강경 강의는 앞서 했던 말씀에 대한 보충설명 정도이거나 부처님의 자비심에 의한 되풀이 되는 법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까지 공부해 온 독자 수행자들에게 금강경의 가르침은 저 깊은 심연에서의 어떤 나직한 떨림 혹은 아직 활찍 피지 않은 봉우리로써 꽃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우리가 우리 가슴 속에 몽우리져 있다. 물론 그것은 금강경을 공부하기 전에도 그랬고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그랬으며, 우리 뿐 아니라 온 우주 삼라만상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가 다 그러하다. 그러나 금강경을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 꽃봉우리는 더욱 선연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에서는 이 중요한 지금의 시점에서 금강경을 우리 안에서 완전히 꽃피우도록 할 이상의 세 가지 수행법을 제시해 주고 계신 것이다. 이제 앞으로 남은 금강경의 가르침을 주시하면서 한편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 가르침이 우리 안에서 고동칠 수 있도록 이 세 가지 수행법을 실천하는 일이 남아 있다.


수보리야,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경에는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니,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며,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다.

이 경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헤아리거나 생각으로 따져볼 수 없는 가르침이다. 이 경전을 머리로써 이해하고 생각하며 분석함으로써 깨닫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머리로써는 도무지 담을 수 없다. 머리로써 다 이해했다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이해했다는 생각에 불과하다. 그 이해는 생각의 틀을 넘어 서지 못한다. 또한 이 가르침의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아상 타파의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인지, 대 해탈의 깨달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헤아리려 하지 말라. 그 헤아림은 절대 내 경험과 생각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든 따지려 들거나 연구하고 분석하고 생각하여 정리하려는 습관이다. 그런 과학적인 연구 분석을 통해 무엇이든지 다 체계화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어떤 거사님께서 말씀하시길 불교가 상당히 과학적인 듯 하여 10년을 넘게 생각해 보고 연구해 보았는데 도무지 확연해 지질 않는다고 답답해 하셨다. 도무지 알 수 없을 뿐 확연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신경질적으로 말씀하시면서 도대체 해탈이 무엇이고, 불성이 무엇인지, 공이 무엇인지, 아상타파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가르쳐 달라는 말만 되풀이 하셨다. 10년 동안 도무지 모르겠고 답답해서 유명한 스님들은 다 찾아가 물어보고 했지만 머릿속에서 확실하게 정리시켜 줄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생각과 정리, 분석과 연구로써는 언제까지고 그 답을 알아낼 수 없으니 ‘지금 거사님께서 도무지 모르겠고 답답한’ 그 속으로 들어가서 ‘답답해 미치겠는’ 그것과 하나 되시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도무지 모르겠는 그래서 막막하여 오리무중인 그것이 바로 화두다. 그 화두를 따지거나 분석하는 것으로 풀고자 한다면 앞으로도 10년이 아닌 100년을 두고도 그 답은 얻을 수 없겠지만, ‘오직 모르는’ 그 속으로 들어가 ‘모르기만 할 뿐’ 다른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모르기만 할 때 그 때 완전히 알게 되는 수가 있을 것이니 그것이 화두인 것이다. 수행이 뒷받침되지 않고 머리로써만 헤아리려 하고 생각하려 한다면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이렇듯 이 경에는 생각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므로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에게, 또 최상승을 발한 이에게 이 경을 설하신 것이다. ‘대승을 발한 이’는 사사로운 아상에 갇혀 ‘나’라는 틀 속에서 이기심으로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아닌 진정 일체 중생을 위한 동체대비의 마음을 발한 이를 말하며, ‘최상승을 발한 이’는 소소하게 공덕을 키우겠다거나 복을 많이 짓고 착한 일을 많이 하겠다는 등의 이유로 수행하는 사람이 아닌 걸림없는 대자유와 대해탈의 열반을 얻고자 발심한 이를 말한다.

대승을 발한다는 것과 최상승을 발한다는 것은 수행자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발심의 요소가 된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첫째, 대승을 발심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보통 수행자라면 누구나 깨달음을 추구하게 마련인데, 그것이 자칫 이기적인 마음에서, 아상에 갇혀 있는 마음에서 발심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즉, ‘내가 깨닫겠다’ ‘내가 깨달아 부처가 되겠다’ ‘내가 깨달아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겠다’는 아상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마음은 어찌보면 아주 미세하게 일어나는 아상이기 때문에 자칫 놓치기 쉽고, 스스로 ‘나는 일체 중생을 위해 깨닫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상이 아니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상이 있는 중생인 이상 ‘내가 깨닫는다’고 하는 상은 언제까지고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그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아상이 없다면 발심할 필요가 없다. 아상이 없다면 이미 깨달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러한 아상을 끊임없이 놓치지 않고 주시할 수 있어야 하며, 원(願)을 세울 때 자칫 아상에 물들지 않을 수 있도록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위한 동체대비심을 바탕으로 하는 대승의 원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예민하게 돌이켜 비춰보라. ‘깨닫겠다’는 원 아래에는 ‘내가’라고 하는 아상과 이기가 바탕이 되어 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그 아상을 비추어 보고 놓아버림으로써 일체 중생과 일체 만 생명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이야말로 동체대비의 대승의 원을 발하는 것이다.

둘째로, 최상승을 발한다는 말은, 자칫 수행자가 복이나 짓고 착한 일이나 함으로써 선한 곳에 태어나길 바라기만 해서는 안 되며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대 자유, 대 해탈을 성취하고자 하는 원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사람들의 발심이 이처럼 투철한 최상승의 발심이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원칙적으로, 또 표면적으로는 최상승의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발심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선을 행하고 복을 지음으로써 천상에 나겠다는 이유로 수행을 하는 이들도 많다. 다시 말해 수행을 하는 이유가 내 몸 편하고, 내 마음 즐거우며, 좋은 곳에 나고, 좋은 인연 만나며, 다만 이 생이나 다음 생에서 행복하고 편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복적으로 기도하고, 유위의 복만을 짓고자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절에 다니는 신도님들 가운데 최상승의 원을 발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일반적으로는 보다 부자되길 바라고, 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길 바라며, 보다 안정적인 월급과 노후를 바라고, 적당히 복도 짓고 수행도 해서 편안하게 살길 바라며, 가족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거나 하는 등의 지극히 세속적이고 작은 안락에만 만족하여 수행하는 이가 많다. 대 해탈을 위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최상승의 발심하였는가 스스로 돌이켜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수지독송하여 널리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니, 모두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과 같다.

이상에서와 같은 금강경 설법을 듣고 능히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본다. 여래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 안에 깊은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본래의 성품이며 참마음이다. 우리가 마음 내어 발심했다면 그 순간 이미 여래의 마음에도 전해지게 마련이다.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본다.
또한 이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이란 바로 무위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다. 무위의 공덕을 말로써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기에 이렇게 긴 수식으로 방편을 써서 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이다. 즉, 이처럼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며 전법하는 이야말로 여래의 깨달음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여래의 깨달음이란 누구나 항상 지니고 있다. 우리 깊은 마음 자리에는 누구라도 여래의 깨달음을 간직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깨달아 있다. 다만 미혹할 뿐이다. 다만 모를 뿐이다. 미혹하여 스스로 착각하고 있다. 미혹 즉, 어리석음이 우리를 스스로 아상이라는 감옥에 가둔다. 그렇게 스스로 만든 아상이라는 감옥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감옥은 누가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누가 가둬 놓은 것도 아니다. 스스로 실체 없는 감옥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감옥에 가둬 놓았으며 그로인해 스스로 아파하고 고통당할 뿐인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그 사실을 일깨워 주고 계신 것이다. 스스로 만든 상이기 때문에 스스로 그 상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법을 설해주고 계신다. 스스로 그 상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수행법을 알려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수행법대로 수행하는 이가 바로 여래의 깨달음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미 깨달아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수행법을 알려주셨고, 그 수행법대로 실천하는 자야말로 여래의 깨달음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짊어지고 있다면 다시 찾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금강경을 수행하는 이는 이미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다시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깨달아 있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소한 법을 즐기며 따르지 말라. 작은 법에 머물러 기뻐함으로써 대승의 원을 발하지 못하거나, 소소한 선과 복을 따르는 법에 집착함으로써 최상승의 원을 발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참으로 금강경을 알아듣고 독송하며 전법하는 자라면 대승의 원을 발해야 하며, 최상승의 원을 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란 앞서도 설명했듯이 전부 ‘아견’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아견에 대한 다른 표현이고 서술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나라는 견해’에 집착하는 사람은 나를 즐겁게 해 주는 법을 즐긴다. 다시말해, 아견을 강화시키는 법, 나를 내세울 수 있는 법, 소승의 원과 선과 복을 짓는 소소한 법을 즐기게 된다. 대승과 최상승이 아닌 법이 바로 소소한 법이다. 그런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곧 ‘나라는 견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코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야,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리니 마땅히 알라. 이 곳은 곧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할 것이다. 이 경이 있는 곳은 곧 진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진리의 향기가 그윽하게 피어오를 것이다. 진리가 있는 곳에는 늘 공양과 공경, 찬탄과 예배가 있다. 인간이 삼보에 예배하고 공양 공경하듯 일체 세간의 모든 존재들 또한 응당 공양 공경하며 찬탄 찬양하게 될 것이다. 마땅히 이 곳은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진리는 항상 청정한 수행자로 장엄된다. 진리가 있는 곳은 늘 청정한 수행자의 공양과 공경 그리고 찬탄과 예배가 항상한다. 내 안에 진리가 살아 숨쉬게 하라. 이 경전을 서사하고 수지독송하며 위타연설하게 되면 곧 내 안에 이 경전이 꽃을 피운다. 또한 그곳은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공경 공양하며 에워써고 돌면서 꽃과 향을 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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