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 ‘경계’가 무엇인지를 묻는 이들이 더러 있다. 스님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늘 ‘경계에 끄달리지 말라’는 말을 듣는데, 그 경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궁금해한다.
이 경계가 바로 육근의 감각대상인 육경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근 즉,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우리의 감각기능들이 각각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을 대상으로 감각활동을 하는데, 각각의 감각기능들은 그 대상을 감지하면서 그 경계에 끄달리게 되는 것이다.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보기 싫은 것, 보고 싶은 것 등을 나누어 놓고, 보고 싶은 것이나 보기 좋은 것은 더 많이 보려고 애쓰고, 보기 싫은 것은 고개를 돌리거나 보지 않으려고 도망치기도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마음이 외부의 대상에 끄달려 가는 것이다.
귀에 들리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칭찬은 듣고 싶은데 비난을 듣게 되면 마음이 괴롭다. 외부의 소리 경계에 끄달려 마음이 휘둘리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 보고, 몸으로 감촉 느끼는 모든 것에서 외부의 대상에 끄달리고, 휘둘리게 된다.
사실 우리에게 감지되는 모든 대상, 즉 여섯가지 경계는 그 자체로는 중립적이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내 욕망, 탐욕, 바람, 의도 등이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분별하고, 나쁜 것이라고 분별할 뿐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비를 맞을 때 우리 몸의 감각기능은 그 감촉을 느끼며 싫어하거나 찝찝하게 느끼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바람 부는 날씨를 좋아하거나, 비 맞으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청국장의 맛과 향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처음 경험해 본 외국인들이라면 도저히 맡기 힘든 냄새거나 맛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육근에 감지되는 모든 대상 경계들은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분별도 없는 중립이지만, 우리가 나름대로의 욕망과 분별심으로 인해 그것이 좋으니 싫으니 하며 마음이 끄달리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외부의 어떤 경계로 인해 괴롭다고 할 때 사실은 외부 경계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여섯 경계를 실체화하여 분별심을 일으킴으로써 일어난 것일 뿐이다. 즉 모든 괴로움은 내가 만든 것이다. 그러니 경계에 휘둘리는 것 또한 내 스스로 만든 것이니, 결국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것 또한 내 마음에 달린 일이다.
외부의 여섯 가지 경계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여여한 중립적 경계일 뿐임을 기억하라. 그 중립적인 경계에 내 마음이 하나하나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바로 이렇듯 육근이 육경을 대하면서 일으키는 분별심을 육식이라고 한다. 식, 즉 알음알이, 분별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바로 이 분별심, 즉 육식이 모든 문제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외부의 그 어떤 역경계가 있더라도, 사실은 외부에서 온 경계가 아니라, 내 안의 마음 즉 육식이라는 분별심이 만들어낸 허상의 경계인 것이다. 모든 것은 이처럼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를 유식에서는 만법유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경계에 끄달리지 말라’고 늘 설한다. 외부에 실체적인 순역의 경계가 있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만법의 주인이 될 수 있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평일 오전 7:50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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