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체개고, 즉 인간이 괴로운 이유는 나라는 오온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의 괴로움이 결국에는 ‘나’라는 아집(我執), 오온의 집착에서 생겨난다. 내가 늙지 않고 싶은 것에 집착하고, 병들고 싶지 않은 건강한 몸에 집착하고, 죽고 싶지 않은데 집착하며, 사랑하는 이와 늘 함께 하고자 하는데 집착하고, 미워하는 이와는 멀어져야 한다는 마음에 집착하고,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야 한다는 집착을 가지고, 결과적으로 ‘나’라는 오온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바로 집착에서 온다. 일체개고라는 현실의 통찰은 바로 모든 인간이 집착하고 있다는 전제 속에서 진리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나라는 것에 집착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집착이 남아 있는 동안은 누구나 ‘일체개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체개고라는 괴로움의 현실을 넘어 고가 타파된 영원한 즐거움에 이르려면 어떻게야 하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바로 집착을 놓아버리면 된다. 붙잡고, 집착해서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음을 안다면 그렇게 집착하고 붙잡고 있는 것들을 놓아버리면 모든 문제는 종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스승, 역대의 조사 스님들께서는 한결같이 ‘놓아버려라’, ‘비우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무집착’, ‘방하착(放下着)’을 역설했다.
‘붙잡아서 괴롭다면 놓아버려라’ 이 얼마나 단순하고도 명쾌한 가르침인가. 놓아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면 문제는 끝났는가. 모든 괴로움을 없앨 수 있는 분명한 가르침이 주어졌으니 이제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집착을 놓아버려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집착을 놓아버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방하착하라, 집착을 놓아라, 아상을 놓아라, 아집을 버려라, 욕심을 버려라, 마음을 비워라, 이거야 누구든 다 아는 사실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도대체 그 어린아이도 다 아는 이 진리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그러면 이제 이 중요한 실천적인 문제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집착을 비우라, 놓으라고 하는데, 그 집착을 비우고 놓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아주 기본적으로, 집착을 놓아버리려면 먼저 내가 집착하고 있던 바로 그 집착의 대상이 ‘그다지 집착할 만 한 것이 아닌 것’이 되면 가능해 질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집착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집착할 만 한 것’, ‘집착할 만큼 좋은 것’,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어느 바보가 집착할만한 가치도 없는 것에 집착하겠는가. 즉 집착할 만큼 좋은 것이고, 집착했을 때 내게 무언가를 가져다주는 것이며, 집착할 만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에 그동안 내가 집착하던 것들이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증명된다면, 즉 그다지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아마도 그동안의 집착을 버릴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집착하면 무언가가 나올 줄 알고, 집착하면 엄청난 무언가가 있을 줄 알고, 집착하면 그로인해 나에게 아주 좋은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이 집착할 만큼 매력적인 것이라거나, 집착할 만큼 그렇게 항상하는 것이라거나, 집착할 만큼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장에 그 집착을 거두어 들일 수 있고, 그 집착을 버릴 수 있을 것이란 말이다. 안 그런가. 집착할 아무 이유도, 매력도, 가치도 없는 것에 어느 바보가 집착을 한단 말인가.
그러면 어디 한 번 생각해 보자. 현재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말로 과연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일까? 내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사람에 대한 집착, 사랑에 대한 집착, 물질에 대한 집착, 생각에 대한 집착, 종교에 대한 집착, 나에 대한 집착, 생명에 대한 집착, 돈과 명예, 권력, 지위 등에 대한 집착 등 아주 다양하다. 내 생각에 그런 것들이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것에 그렇게 집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집착의 대상들이 사실은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유해 보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의 특징을 한번 살펴보자. 이상에서 언급했던 집착의 대상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여기에서 다시 삼법인 강의의 첫 시간으로 돌아간다. 삼법인이야말로 근본불교교리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니 다시한번 간략히 짚어보자.
먼저 가장 큰 첫 번째 특징은 ‘그 모든 것들은 변한다’는 것이다. 제행무상이라는 것이다. 앞의 강설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랑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며, 돈도 명예도 권력도 변하고, 생각, 종교, 사상, 재산 등 이 모든 것들이 다 변한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들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언제까지고 우리가 꽉 붙잡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잠시 내게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언젠가는 분명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분명히, 반드시, 절대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사라지지 않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이것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집착의 대상이 언젠가는 소멸되어 없어진다는 말이다. 집착이란 언제까지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그 모든 집착하는 것들은 언제까지고 내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 때가 되면 내 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내 곁에서 벗어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집착의 특성이니까.
여기에서 바로 아주 중요한 삶의 비밀스런 본질이 드러난다. 우리가 집착하는 모든 것은 변하며(제행무상), 그렇기에 우리가 무언가를 집착한다는 것은 곧 괴로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일체개고)이다. 집착은 반드시 괴로움을 몰고 온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진리이다.
사람들은 많은 돈을 꿈꾸지만, 돈이란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일 뿐이다. 지위와 명예와 권력을 꿈꾸지만 언젠가 그것들은 내 품에서 사라져 간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과도 언젠가는 영원한 이별을 고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이 영원히 내 곁에 있어주길 바란다. 잠시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갈 것이라는 것을 매 순간 잊어버리곤 한다. 만약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그래서 잠시 인연 따라 그것을 쓰기는 할지언정 거기에 마음이 얽매여 집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아주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들에는 아주 중요한 또 하나의 특성이 있다. 그것은 집착하고 있던 대상들이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점이다. 제법무아라는 점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높은 명예나 지위에 집착하고 있다면 내가 그 지위에 오르는 순간, 우리는 나와 그 지위를 동일시하곤 한다. 나의 정체성이 바로 그 지위가 된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 지위라는 정체성이 나를 높여준다고, 나에게 많은 것을 안겨준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 다시말해 아상(我相)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지독한 아집(我執)이다.
거기에 집착하고, 그 집착하는 것을 얻었을 때 우리는 그 집착의 대상과 나를 동일시하고, 그 동일시가 나를 어떤 존재로써 정체성을 심어주며, 그것이야말로 나의 어떤 실체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나 자신의 어떤 실체성’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진짜로 있다’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거기에 나라는 어떤 실체적인 것은 없다. 나라는 것은 무아(無我)이다. 그것이 나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나’라고 착각한다. 예를 들어 내가 사장이나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 때 우리 안에는 ‘사장’이요, ‘국회의원’이라는 자기정체성이 생겨나고, 나와 ‘사장’을 동일시하며, 나의 실체성이 ‘사장’ 혹은 ‘국회의원’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내가 어떤 그럴싸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며, 내가 어떤 위치에 오른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된다. 그러나 사장이라는, 국회의원이라는, 선생님이라는, 성직자라는, 부자라는 그 이름에 어떤 실체성은 없다. 그것은 다만 이름일 뿐이고,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그저 그렇게 이름붙이기로 약속했을 뿐인 것이다. 그렇게 약속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성직자라고 하더라도 성직자라는 이름 속에 성스러움이나, 신과의 연결성이나, 깨달음 등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참된 성직자는 스스로 성직자라는 사실을 잊는다. 참된 성직이라는 것은 그 성직자라는 이름 속에, 수행자라는 이름 속에 그 어떤 실체적인 것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라는 업, 행위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행위가 바르지 않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승복을 입고 있고, 사제복을 입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알맹이는 성스럽지 못하다. 그리고 신이나 붓다는 껍데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알맹이를 본다.
다시말해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의 두 번째 특성은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고정된 것이어야 하고, 실체적인 것이어야 하며, 그로인해 우리에게 실질적인 어떤 것을 안겨주어야 한다. 고정된 실체가 없는 대상이라면 그야말로 아지랑이같고, 환영 같으며, 신기루 같아서 겉만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인데 거기에 집착할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가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에 어떤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가 집착하는 그 모든 대상들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실체적인 것으로써 항상하지 않다. 그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며, 그 어떤 실체도 없이 다만 인연 따라 잠시 그렇게 보였을 뿐인 것이다.
인연 따라 사장도 되었다가, 인연 따라 국회의원도 되었다가, 상황 따라 아버지도 되고, 아들도 되고, 이웃사촌도 되고, 끊임없이 역할을 바꾸면서 변해갈 뿐, 어떤 한 가지 이름으로 어떤 한 가지 직업이나 모습으로 딱 정해져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실체화시키기 좋아하는 종교나 문화에서는 예를 들어 성직자가 되는 순간 그 사람에게는 절대불변의 그 어떤 실체적인 성직자로써의 무언가가 부여된다고 믿곤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 어떤것도 실체화시키지 않는다. 모든 것은 제법무아다.
스님도 수행자의 길을 걷다가 환속하여 재가자가 된다면 그 사람은 재가자가 되는 것이다. 한번 스님은 영원한 스님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도, 어떤 직위도, 어떤 것들도 고정불변한 실체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번째의 사실, 즉 제법무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가 집착할만한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 실체적이라야 집착을 할 것인데, 꿈같고, 환영 같고, 아지랑이 같고, 신기루 같다면 누가 거기에 목숨 걸고 집착을 하려 하겠는가.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지키려고 애써왔고, 가지려고 애써왔으며, 목숨 걸고 지켜왔던 그 모든 집착의 대상들은 이러한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라는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삼법인의 가르침에서 보면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인 모든 것들은 일체개고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며, 고정된 실체도 없이 다만 인연 딸 잠시 꿈처럼, 환영처럼 나왔을 뿐이라면 거기에 집착할 아무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상과 무아인 대상에 대해 집착을 함으로써 고(苦), 괴로움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법인이라는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러한 삼법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가 집착해야 할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 즉, 삼법인이기 때문에,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이기 때문에 집착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무상과 무아를 사유함으로써 내가 지금까지 집착해 왔던 바로 그 대상이 사실은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님이 증명된다면,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님이 증명된다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집착은 놓여질 것이다.
내가 그동안 집착하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삶 속에서 살펴보라. 그리고 낱낱이 그것의 무상성과 무아성을 사유해 보라. 무상과 무아를 사유하게 되면 저절로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이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것이 사실은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었음이 증명되면 저절로 그동안 붙잡고 있었던 것들을 놓아버릴 수 있게 된다. 그동안의 집착과 아집과 욕망들을 비워버리게 된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바로 놓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 삶을 놓고 우리는 사유와 관찰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문사수(聞思修) 해야 한다. 들었으면 그것을 사유하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 내가 만드는 삶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때 그 관찰의 결과 우리는 무상과 무아를 깨닫게 된다. 마음관찰은 이상에서 설명한 삼법인의 가르침을 그저 머릿속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것을 넘어서서 온 존재로 체험하도록 이끌어 주고, 온 존재로 깨닫도록 이끌어 주는 수행법이다. 이러한 바른 관찰과 수행을 통해 무상과 무아를 바로 보고 깨닫게 되고 그것은 곧 우리를 방하착으로 이끌며 방하착은 곧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또 묻는다. 왜 놓아야 하는지는 잘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놓는 방법, 비우는 방법 좀 알려달라고 말이다. 놓아버리고 싶은데 어떻게 놓아버려야 하느냐고 말이다. 집착을 놓을 때는 어떻게 놓는가? 그것은 마치 무언가를 결심하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내일부터 아침에 운동을 해야겠다고 신년을 맞이하여 결심을 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 결심이 굳지 않은 사람이라면 하루 이틀 정도 실천하다가도 작심삼일이라고 몇 일 안가 금방 포기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결심이 굳은 사람이라면 한두달이 아니라, 일년이라도 아니 평생이라도 그 결심이 섬과 동시에 바로 실천이 될 것이다. 그러면 결심을 굳게 하는데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그것은 필요성을 절감하는 것이다. 운동의 필요성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절감했을 때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사유를 통해, 마음관찰과 집중의 수행을 통해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을 때 방하착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고, 곧바로 놓을 수 있는 의지력과 실천력이 생겨난다. 그 때는 이것 저것 따질 것도 없이 그냥 당연해서 하는 것이다.
이처럼 결심하는데 어떤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결심을 하게 된 동기나 사유, 경험과 관찰이 필요한 것처럼 방하착하고, 집착을 놓아버리는데도 놓아버리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놓아버려야만 하는 이유, 사유, 관찰이 필요한 것이다. 집착을 왜 놓아버려야 하는가 하는 이유, 집착의 특성과 속성이 무엇인가하는 사유, 도대체 내가 집착하는 이것은 무엇인가하는 바른 관찰 등이 우리를 곧바로 ‘놓아버림’으로 이끄는 것이다. 억지로 놓는 것은 놓는 것이 아니다. 바른 이해와 바른 사유와 바른 관찰을 통한 바른 깨달음만이 바른 놓음으로 이끄는 것이다.
가만히 사유해 보라. 방하착을 화두로 삼고, 왜 집착을 버려야 하는지, 집착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집착하는 그 대상이 과연 집착할 만한 것인지, 집착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집착의 대상의 특성이 무엇인지, 그 대상이 무상, 무아의 특성이 있기는 한 것인지를 깊이 깊이 사유해 보라. 그러한 사유를 통해 저절로 방하착이 체험되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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