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애별리고(愛別離苦)
앞의 네 가지 생노병사의 괴로움이 몸의 괴로움이라면 애별리고와 원증회고, 구부득고는 정신의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애별리고는 좋아하는 것과 떨어져야 하는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물 등 자신을 즐겁고 안락하게 해 주며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여러 가지 조건이나 상황, 사물이나 사람들과의 헤어짐 혹은 이별에서 오는 고통을 말한다.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싶고, 좋은 사람과는 늘 함께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곧 애욕과 집착이 생기고, 애욕과 집착은 우리를 얽어맨다. 물론 언제까지고 애착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제행무상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이치에 따르면 그 어떤 것도 언제까지고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물질도, 사람도 언젠가는 떠나가게 마련이다. 한 번 만난 것과는 반드시 이별을 고하는 날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서는 그것이 괴롭다. 집착이 있으니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다. 좋아하고 사랑하며 애착하는 것과 헤어져야 하는데서 오는 괴로움, 이 괴로움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애착이 있는 곳에 반드시 애별리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로 인해 자살까지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이에게 애별리고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성 뿐 아니라, 부모, 자식, 형제, 친구들과의 이별 또한 우리를 괴로움으로 몰고 간다. 자식을 잃은 부모님의 고통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이상의 고통이다. 그 뿐 아니라, 정치인들의 명예와 권력에 대한 집착과 손에 움켜쥔 권력에서 멀어질 때의 괴로움, 자신의 직장이나 직업 혹은 일터에서 어쩔 수 없이 퇴직하거나 물러나야 하는데서 오는 괴로움, 좋아하던 사랑하던 애착하던 모든 것들과의 이별에서 오는 괴로움은 결코 노병사의 괴로움보다 하찮은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또한 애착을 버리고 무집착을 실천한다면 애별리고는 더 이상 고가 아니다.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사랑하되 거기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다면, 응무소주 이생기심,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 수 있다면 애별리고는 없을 것이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의 입장에서 애별리고는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며 우리를 괴롭힌다.
현대적인 의미의 애별리고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자. 현대의 개발과 발전의 이기,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주는 것은 편리함이다. 산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예전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해졌다. 우리를 편리하게 해 주는 기계나 기기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몸은 더욱 할 일이 줄어들게 되었다. 우리 두 발로 걸어야 할 것을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 등의 수송기관들이 대신 해 주고, 우리가 직접 해야 할 청소나 세탁 등 또한 청소기나 세탁기 등이 알아서 다 해 준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욕구는 더욱 편리한 것을 추구하고, 인간의 편리함을 도와주는 온갖 기기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와 애착이 넘쳐난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더 편리한 삶을 영유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욕구는 산업이 발전하고 더 많은 편리한 기계들이 개발됨과 동시에 더욱 커져만 간다. 그러나 한없는 욕구에 비해 지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모든 인구가 모든 편리한 것들을 다 쓰고 살지는 못하기 때문에 소유욕을 충족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괴로움은 더욱 늘어난다.
또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 산업사회의 이기들은 언제까지도 지속가능하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지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런 편리한 것들과의 이별을 고해야 한다. 당장 지구의 석유와 석탄의 매장량만 소멸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이기의 상당수와는 이별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미래의 시대에는 더욱 더 편리한 문명의 이기들과 멀어져야 할 것이고, 그동안 어렵지 않게 누려오던 수많은 것들과도 헤어질 날이 빨라질 것이다. 맑은 공기와도 이별해야 하고, 맑은 물, 자연과도 이별을 고해야 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동안의 산업과 도시의 발달은 자연을 급속도로 파괴시켰고 그로인해 인간이 접촉할 수 있는 야생의 자연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변화와 민감하게 교감하며 내면의 고요함과 영적인 성숙을 고양시켜왔다. 인간은 땅에서 멀어질수록 병원과 가까워진다는 말이 있듯이 자연 그대로의 환경은 그대로 인간의 몸과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숭고한 귀의(歸依)의 대상이었다.
애써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스코트 니어링의 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야생의 자연은 그대로 인간의 평화와 행복의 밑거름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 주위에서는 흙을 밟기도 어려워졌고, 야생의 자연을 만나기도 힘들어 졌다. 자연을 만나려면 주말이나 휴가를 기다렸다가 번잡한 도심을 피해 몇 시간이나 되는 차량정체를 인내심으로 기다리고 나서야 겨우 만날 수 있게 되어 버렸다. 이처럼 오늘날 환경 오염은 자연으로부터 우리를 격리시켜 놓고 있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흙을 밟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며, 맑은 계곡 · 맑은 하천 · 맑은 강물에 발을 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이와같이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와 가까운, 우리가 원하는, 우리가 좋아하는, 우리를 편리하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던 많은 것들과 이별을 고해야 한다. 인간의 욕망이 줄어들지 않는 이상, 자연환경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는 이상 애별리고는 점점 더 우리를 고통 속으로 몰고 갈 것이다.
6) 원증회고(怨憎會苦)
원증회고는 애별리고와 반대되는 괴로움으로 싫어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괴로움을 말한다.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하는 것,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란 얼마나 큰 괴로움인가. 싫은 것, 나쁜 것, 보고 싶지 않은 것, 더럽고 추한 것, 하기 싫은 것, 춥고 더운 것 등의 온갖 싫어하는 것과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정신이 느끼는 가장 큰 괴로움일 것이다.
군생활이나 직장생활을 예로 들어 보자. 군대에서 정말 싫고 미운 선임병과의 생활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괴로움으로 몰아넣고 있는가. 직장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밉고 증오스러운 직장상사일지라도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함께 생활해야 하고, 잘 보이려 애써야 하고, 심지어 집에 있는 처자식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고개 숙이고 때로는 아부도 떨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고통을 넘어 자괴감까지 생겨난다. 때로는 결혼생활이 지옥이 될 수도 있다.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남편에게 고통당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식 때문에, 혹은 용기가 없어서, 혹은 그런 삶에 이미 익숙해짐으로써 그 죽을 것 같은 고통의 결혼생활을 끝끝내 죽을 때까지 이어가는 가족들도 있다. 심지어 남편을 악마처럼 느끼며, 아내를 소름끼치는 존재로 생각하면서도 그런 삶을 기어이 살아내야 하는 괴로움도 있다.
싫어하는 사람 뿐 아니라, 싫어하는 직장생활, 싫어하는 직업, 싫어하는 공부, 싫어하는 상황과 인연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도 있다.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인도, 아프리카, 북한 등의 제3세계 국가에서는 전쟁과 기아와 굶주림으로 인해 하루에도 3만 5천명 가량의 5살 미만 어린아이들이 죽어간다고 한다. 끝없이 전쟁의 고통과 함께 해야 하고, 하루하루 먹고 살 끼니 걱정에 시달려야 하며, 전염병과 각종 질병의 고통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고, 자연환경적으로도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저주받은 땅에서 아무리 싫어도 버텨내야 하고, 아무리 괴로워도 살아내야 하는 그런 이들의 원증회고는 그야말로 죽음과 다름없는 고통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환경생태적인 위기 속에서 원증회고는 한층 가속화하고 있다. 각종의 오염된 환경과 함께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해야 하는 괴로움, 그리고 그러한 환경적 괴로움은 급기야 환경적 재앙으로까지 오늘날 전 세계를 공포에 빠뜨리고 있다. 오염된 물, 오염된 공기, 오염된 땅, 오염된 음식, 오염된 문화, 오염된 몸 등 온갖 오염된 것들이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산업사회의 현실이다. 오염된 환경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오염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오늘날의 환경오염은 도시나, 선진국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에 이 지구의 어느 곳으로 피해 이사를 간다고 하더라도 환경오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오염은 전세계적인 기상이변을 속출하게 함으로써 세계인들에게 언제라도 죽을 수 있음을 하루가 다르게 증명해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현대의 환경오염을 넘어 환경 재앙의 시대를 살면서 오염이라는 문제, 기상이변이라는 문제는 아무리 싫어서 멀리 떨어지고 싶다고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괴로움에 봉착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환경위기 시대의 대표적인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상에서처럼 원증회고란 우리 삶에서 다양한 방향으로 나타나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어쩌면 일상적인 삶에서 가장 표면으로 드러나는 대표적인 괴로움의 형태가 바로 원증회고일 것이다.
7) 구부득고(求不得苦)
구부득고는 구하고자 하지만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다.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으면 그것에 만족하기 보다는 또 다른 바라는 바를 만듦으로써 만족보다는 욕구를 선택한다. 좋아하는 사람, 물건, 재산, 명예, 권력, 지위, 출세, 행복, 건강 등 나의 아상을 확인시켜주고 달콤하며 편안한 모든 것들을 얻고자 하고 바라지만 마음대로 구할 수 없는데서 괴로움은 시작된다. 그야말로 끊임없는 인간 욕구를 다 채울 수 없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사람들의 욕망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구하며 얻고자 한다. 한 가지 욕망이 충족되면 거기에 대한 만족은 잠시 뿐이고 또 다른 새로운 욕망이 새로운 것을 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욕망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다가, 결국 단 한 번도 얻고자 하지 않았던 죽음의 순간이 찾아온다. 죽기 직전까지 욕망 추구의 삶은 계속된다.
이 세상은 사람이 얻고 싶다고 다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저마다의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은 끝도 없는데, 이 세상은 한정되어 있으니 어찌 구하고자 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끝까지 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어찌 되었든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쓴다. 그 모든 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상(我相)에서 온다. 아상과 아집이 있는 이상, 인간의 욕망 추구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가 있고, ‘내 것’이라는 아집이 있는 이상 ‘내 것’을 늘려 나가려는 욕망은 멈출 수 없다. 그러나 ‘내 것’을 늘려나가려는 끝없는 욕망이 있는 이상 구부득의 괴로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진리의 모습이다.
우리의 얻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를 보라. 인간은 건강한 삶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건강하지 못한 생활습관과 식습관에 길들여져 있다. 건강한 몸을 이루고자 하면서 입맛에만 길들여진 잘못된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다. 튼튼한 몸을 꿈꾸면서 몸을 움직이기 싫어 운동도 노동도 포기하고 만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서도 정작 자기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맑고 청량한 공기와 자연환경을 얻고자 하면서 동시에 물질적인 풍요와 개발과 발전에서 오는 문명의 이기를 포기하지 못한다.
숲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산을 깎아 아파트를 짓는 것에 쉽게 동의한다. 지역경제를 살리고, 농촌을 살려야 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대형할인매장이 들어오는 것을 한단계 높아진 문화생활이라고 열광한다. 서로 상반된 두 가지를 동시에 얻고자 하는 어리석은 욕망의 실체를 보라.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들인가. 인간은 두 가지 모두를 얻고자 하지만 현실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런 모순을 알면서도 결코 그 두 가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구부득고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인간의 구부득고는 이처럼 더욱 커지고 있다. 옛날 같으면 그저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되어도 행복이라 느꼈지만, 이제는 기본적인 입고, 먹고, 자는 것만 해결되는 것을 가지고 행복이라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기본적으로 차도 있어야 하고, 노후자금도 모아 놓아야 하고, 대학도 나와야 하고, 컴퓨터, TV, 오디오 등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생활필수품이 수도 없이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산업의 발전은 수많은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양산해 내었고, 그로인해 인간의 욕망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고 있다.
옛 사람들의 소박하고 조화로운 삶의 관점에서는 얻고자 하지만 얻지 못하는데서 오는 구부득고가 적었으나, 오늘날과 같은 개발과 발전의 시대에는 얻고자 하는 것의 물량이 너무 많다보니 그것을 얻지 못하는데서 오는 구부득고의 괴로움도 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업의 발전과 개발이 가속도를 낼수록 인간의 구부득고라는 괴로움의 크기도 정비례 하며 커져갈 것이다.
구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괴로움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현재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과 자족을 가지지 않는 이상 구부득고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구한다는 것, 얻고자 한다는 것은 곧 지금은 부족하다는 결핍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고통일 수밖에 없다. 물질을 얻고자 하면 물질로 인해 고통 받고, 사랑을 얻고자 하면 사랑으로 인해 고통 받으며, 심지어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깨달음으로 인해 고통 받는다. 무엇이든 얻고자 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가져온다.
사실은 지금 이 자리야말로,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지금 내가 가진 것 그대로, 지금 이 상황 이 소유 그대로야말로 최고의 순간이며, 최선의 선택이고, 법계라는 진리의 부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최상의 순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상 구부득고는 언제까지고 나를 괴롭힐 것이다.
8) 오음성고(五陰盛苦)
경전에서는 인간의 괴로움을 사고팔고라고 하여 여덟 가지로 나누어 놓고 있으나, 생노병사 네 가지와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라는 앞의 7가지 괴로움을 요약하여 종합하면 결국 오음성고라는 한 가지로 귀결된다고 『증일아함경』「사제품」에서는 말하고 있다. 앞의 생노병사는 육체적인 괴로움이며, 애별리고·원증회고·구부득고는 정신적인 괴로움인 반면에 오음성고는 육체적·정신적인 괴로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먼저 오음이 무엇인지를 간략히 살펴보자. 좀 더 자세한 설명은 뒷 장에서 있을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간략히 그 의미만을 살펴보고 넘어가자. 오음은 오온(五蘊)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색), 정신적(수상행식) 요소, 혹은 이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를 의미한다. 오음성고는 ‘오온이 치성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으로, 오온의 각각의 요소들에 집착하는데서 오는 괴로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괴로움이 생긴다는 말은 곧 다섯 가지 요소 가운데 한 가지가 괴롭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다섯 요소를 살펴보는 작업은 고를 소멸하는 작은 실마리를 제시해 줄 것이다.
우선 첫째 색(色)이란 빛깔과 모양을 가지고 있는 물질을 말한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육신을 말한다. 이 육신, 몸은 항상 하지 않으며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몸에 집착하면 곧 괴로울 수밖에 없다.
둘째로 수(受)는 인간의 정신작용 가운데 ‘느낌’이나 ‘감정’을 말한다. 느낌이나 감정 또한 인연 따라, 상황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며 실체가 없다. 그렇기에 느낌이나 감정에 집착하는 것 또한 결국 괴로움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좋은 느낌’이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좋은 느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사실 인간의 욕심과 탐욕은 ‘좋은 느낌’이 계속되기를 바라는데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싫은 느낌’이 오는 것을 싫어하고 멀어지려 애쓰는데도 멀어지지 않는데서 진심, 성냄이 일어나는 것이다.
셋째로 상(想)은 인간의 정신작용 가운데 개념, 표상작용 내지는 사유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이해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가치관이나 고정된 관념, 생각, 개념, 분별 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관념, 개념, 표상작용 또한 항상 하지 않으며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해갈 뿐이다. 가치관도 끊임없이 변하고, 세계관도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어떤 하나의 관념이나 개념에 얽매여 집착하게 되면 그로인해 괴롭다.
넷째로 행(行)은 욕구, 의지작용이다. 행은 본래 ‘형성하는 힘’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써 인간이 업(業)을 짓게 되는 것도 이 행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의지나 욕구 또한 항상 하지 않으며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이에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이다.
다섯째로 식(識)은 분별, 인식 작용을 말한다. 우리에게 대상들이 어떤 존재라고 인식되는 것은 바로 이 식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나와 내 밖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인식하며, 이런 인식이 있기 때문에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식 작용이 치성하게 되면 나와 세계를 항상 하거나 고정되게 있다고 착각함으로써 나와 세계에 집착하게 만들고 결국 괴로움을 몰고 오는 것이다. 즉 본래 나라는 존재는 실체가 없어 무아이며, 이 세계는 텅 빈 공일 뿐이지만 바로 이 식에 의해 분별인식 됨에 따라 나와 세계가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오온이란 나와 세상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인 다섯 가지 요소로의 분류법이며, 이 다섯 가지 요소는 제각기 항상 하지 않으며,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를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인 치성하는 오온에 집착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오음성고란 나를 이루는 요소인 오온(오음)에 집착하는데서 오는 괴로움이란 의미로, 다시 말하면 얻지만 얻은 것이 쉽게 무너지는데서 오는 괴로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중아함경』「분별성제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자들이여, 오음성고를 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른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그 자체는 이미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오음성고를 설하는 것이다.”즉, 오온(五蘊) 그 자체가 곧 괴로움이란 의미다. 자기 존재로 취해진 색·수·상·행·식이 각각 괴로움이라는 것으로, 이는 다시 말하면 자기 존재가 곧 괴로움이라는 의미이다.
경전에서는 자기 존재인 오온이 괴로움인 이유를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잡아함경』 1권에서는 “색은 항상 하지 않는다[無常]. 항상 하지 않는 것은 곧 괴로움이요[苦], 괴로움은 곧 ‘나’가 아니며[無我],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한 바른 관찰이라 한다. 이와 같이 수·상·행·식 또한 항상 하지 않는다. 항상 하지 않는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한 바른 관찰이라 한다.”고 말함으로써 오온은 항상 하지 않아 무상이며, 무상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무아라고 설하고 있다. 즉 오온은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인 오온이 제각기 괴로움인 이유는 그것이 항상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인 오온은 어느 것 하나 고정되거나 영원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에 결국 ‘나’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써 괴로움인 것이다. 쉽게 말해 나라는 존재는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다섯 가지의 하나하나가 낱낱이 항상 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없어 괴로운 것이라면 결국 그 다섯 가지의 집합체인 ‘나’라는 존재, 즉 오온 또한 결국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대소승을 막론하고 ‘나’라는 것은 무상하고 무아인 것이기에 집착하지 말도록 이끌고 있다. ‘나’, ‘내 것’에 집착하는 것은 괴로움이며, 그것은 바른 관찰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나’에 집착하며, ‘내 것’이라는 소유에 집착하고, 나아가 ‘내가 옳다’고 하는 생각이나 가치관에 집착한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모든 괴로움은 결국 ‘나’라는 오온에 집착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생노병사의 괴로움도 결국은 ‘나’라는 존재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애별리고와 원증회고, 구부득고 또한 ‘나’라는 존재가 좋은 것을 만나고 싶고, 나쁜 것에서 멀어지고 싶으며, 원하는 바를 얻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이 모든 앞의 7가지 괴로움은 결국 ‘나’라고 하는 치성하는 오온(五蘊)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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