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열반을 일깨우라 - 삼법인 강의(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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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열반을 일깨우라 - 삼법인 강의(15)

목탁 소리 2014. 3. 11. 18:04

 

 

 

열반적정의 의미

 

 열반적정은 열반이 적정하다는 뜻으로, 열반은 적정과 동의어다. 열반은 니르바나(Nirvana)라는 말을 음역(音譯)한 것으로 타오르던 불길을 ‘확 불어서 꺼뜨린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 중생들에게는 끊임없이 내면에 탐진치 삼독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탐욕의 불길이 끊이지 않고 활활 타오르고 있으며, 조금만 참지 못할 일이 생겨도 성냄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며, 그 근본에는 어리석음이라는 무지의 불길이 불같이 타오르고 있다. 우리 인생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이 불길은 끊임없이 타오를 지언정 단 한 순간도 꺼지지 않고 있다. 이 탐진치 삼독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일시에 ‘확 불어서 꺼뜨린 상태’가 바로 열반적정의 상태다.

 

연기법과 무상과 무아를 깨달아 모든 탐욕이 사라지고, 성냄이 사라지고, 어리석음이 사라진다면 그 상태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 곳에는 지고의 안온과 평화와 고요가 저절로 피어난다. 다툼이 없는 완전한 무쟁(無爭), 분별이 없는 완전한 고요, 나뉨이 없는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될 것이다. 이처럼 아무런 괴로움도 없고, 투쟁도 없고, 분별도 없는 완전한 고요의 상태, 이것을 ‘적정(寂靜)’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열반적정의 상태다.

 

 지금까지 배운 가르침을 바탕으로 조금 더 열반적정이 과연 어떤 상태인지를 유추해보자. 열반적정은 무상의 이치를 깨달아 그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이다. 세상 모든 것은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는 것이 없으며 끊임없이 변한다는 이치를 알기에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붙잡지 않고, 어디에도 머물러 안주하지 않는다. 변화에 몸을 맡기고 다만 함께 따라 흐를 뿐이다. 그렇기에 항상 생기롭고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할 줄 알며,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다. 그 때 그 때 상황 따라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 일으킨 어떤 마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걸리지 않는다.


 또한 무아의 이치를 깨달아 ‘나다’하는 아상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이다. 나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생사에 걸림이 없고, 높고 낮은 직책이나 명예에 걸림이 없으며, 남들의 칭찬과 비난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칭찬받을 나도 없고 비난 받을 나도 없는데 남들의 말에 휘둘릴 것이 무엇인가. 내가 잘 되고자 남들을 짓밟는 것도 관심 밖이다. 나라는 아상이 없기에 나와 상대가 둘로 나뉘지 않는 자비로움이 움튼다. ‘내 것’이라는 내 소유에 대한 집착도 없다. 모든 소유물도 실체가 없으며, 그 소유물을 소유하는 주체인 나 또한 텅 비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축적하지 않고, 벌려고 애쓰지 않으며,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산다. 미래를 계획하거나 미래를 위해 자금을 모으는 일 따위는 완전히 관심 사항이 아니다. 다만 순간 순간을 100% 누리고 만끽하며 살 뿐이다. 또한 내 생각이나 내 견해에 대한 고집도 없이 세상 모든 견해에 활짝 열려있다. 모든 종교, 모든 사상,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을 편견 없이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그 어떤 다툼도 없고 성냄도 없다.


 또한 연기법의 이치를 완전히 깨달아 인연 따라 펼쳐지는, 내 삶에 주어진 모든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이, 사건이 모두 인연 따라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임을 안다. 그 어떤 문제가 오더라도 거부하지 않고 인연에 순응하며 받아들인다. 또한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에 나라는 존재가 있기 위해서는 온 우주의 도움이 있음을 안다. 내 이웃과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 또한 나를 살아있게 하기 위해 조화로운 도움을 주었음을 알기에 모든 존재를 향한 자비로운 감사와 찬탄이 매 순간 이어진다. 또한 연기되어진 모든 존재들과 조화로운 공존의 삶을 살아나가고 나아가 나와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동체(同體)와 불이(不二)의 자각을 통한 자비와 사랑이 꽃피어난다. 매 순간 동체대비의 사랑으로 모든 이들에게 평등한 나눔과 보시를 베푼다는 상 없이 베푼다.

 


‘비움’으로 내 안의 열반을 일깨우라
    - 열반적정의 생활실천(1)

 

 현실세계는 여전히 괴롭다. 일체개고다. 그러나 이상세계는 모습은 열반적정이다.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 열반은 너무나도 멀다. 열반은 다른 고차원적인 사람들 얘기고, 치열하게 정진하는 스님들 이야기며,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뜬구름 잡는 것이 되어 버린다. 실제로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포기하고 있는가. ‘적당히 복이나 짓고, 기도나 해야지 내가 어떻게 깨달음을 얻겠어? 열반이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고 나에게는 너무 멀어’ 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그러한가. 열반이 그렇게 우리와는 먼 어떤 이상향이기만 한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해야만 하는 그런 특별한 근기의 수행자에게만 열려 있는 좁은 문이기만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고맙게도 그렇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고 보니 구제해야 할 중생이 없다고 하셨다. 이미 우리 모두는 깨달아 있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완전하며, 세상도 완전하다. 이미 우리는 부처요, 열반의 숲을 거닐고 있다. 이미 우리는 완전한 생명을 부여받았고, 완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누구도 완전한 평화, 완전한 고요, 완전한 행복을 부여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수행을 해서 깨닫고 난 다음 얘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린 누구나 완전한 부처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도대체 이해되지 않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손사레를 칠지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불행하고 괴롭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 이미 깨달아 있다고, 이미 열반적정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한단 말인가. 이제 그 의문을 차근 차근 풀어보자.


 열반이란 쉬운 말로 표현하면 ‘완전한 행복’ 정도로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런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행복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돈이 많고,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높은 지위에, 수많은 온갖 소유물들이 넘쳐나는 그 상태를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아무 일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는 충분한 재산이 있는 상태를 행복 혹은 열반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세계 제일가는 부자일지라도, 세계 제일의 권력자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행복한가, 그 사람은 열반이라는 큰 고요의 적정 속에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산 속에서 하루 한 끼를 연명하는 수행자에게서 적정을 볼 수도 있고,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끼니 걱정 없이 농사짓고 사는 농부 가족의 단란함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 즉, 행복이란 외부적인 조건이나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똑같이 연봉 3000만원을 받는 근로자일지라도 어떤 사람은 그 속에서 행복을 누리고, 어떤 사람은 그 속에서 불행을 느낀다.


 선방이나 수련원에서 정진하는 수행자에게 선방은 적정과 고요를 가져다 주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그러나 수행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 끌려가듯 선방에 들어가 앉았다고 생각해 보라. 차라리 중노동을 할 지언정 하루 종일 한 두끼밖에 안 먹으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만 있으라는 것이 바로 생지옥이 아니고 무엇이랴. 같은 조건에서도 어떤 사람은 행복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불행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어떤 특정한 조건이나 상황 속에 있는 것이 아님이 보다 분명해졌다.


 그러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것은 어디에도 있다.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있다. 그렇기에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깨달음을 얻은 이는 지고의 안온과 평화를 느끼지만 그렇지 못한 이는 아무리 좋은 조건 속에서도 불행과 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 속에 행복과 적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행복이 깃들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어디에도 행복은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불성은 어디에도 있으며, 다만 우리가 발견하지 못할 뿐이라고 하셨다. 열반, 적정, 행복, 평화는 이미 주어져 있다. 모든 상황 속에, 모든 조건 속에,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완전한 행복은 갖추어져 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깨달을 것인가에 있다. 행복을 누리지 못하던 마음 상태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음 상태로 바꾸느냐에 있다. 열반적정이라는 완전한 행복을 보지 못하도록 막는 내 마음의 어떤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지금 이 자리에서 열반적정을 경험하고 누리며 만끽할 수 있다.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고 만끽해야 하는 것이다. 저 멀리 있는 깨달음을, 행복을 얻고자 애쓰고 노력하면서 추구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열반을 누리고 만끽하면 된다.


 그러면 이제 어느 정도 준비 작업이 마무리 되었다. 열반은 어디에도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라는 대 전제를 깔아 놓자. 이 열반의 특성은 비움, 텅 빔, 공성(空性)이다. 앞에서 열반은 무상과 무아와 연기를 깨닫는 지혜라고 했다.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고 실체가 없으며 다만 인연 따라 잠시 꿈처럼, 환영처럼, 신기루처럼 오고 갈 뿐이라는 뜻이다. 그 말은 다시말해 이 세상에는 실체적인 그 어떤 것도 없으며, 텅 비어 있고, 공(空)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본래 텅 비어 있다. 본질에서 본다면, 진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텅 비어 있다. 지혜의 관점, 부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텅 비어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우리 중생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어 있지 않다. 나도 있고, 남도 있고, 물질도 있고, 소유도 있으며, 모든 것이 우리 눈에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래는 텅 비어 있던 세상이 우리 중생의 눈에는 왜곡되어 실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서 모든 문제는 시작된다. 실체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거기에 집착을 하고 탐욕을 부리며, 계산하고 따져서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를 생각하고, 이기심을 충족시켜 나가며, 소유와 지식을 늘려 나가고 있는가.

 

실체하는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온갖 지식과 욕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배우고 또 배워서 남들보다 앞서가야 한다고 말하고, 더 많이 배워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앞서갈 수 있다고 말하며, 무엇보다도 성공해야 한다는 강한 집념과 용기를 가지고 남들보다 앞서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남들을 짓밟고 일어나는 것이 곧 성공이며, 남들과 함께 가는 것보다는 남들을 앞서가기 위한 온갖 지식들로 무장하도록 쇠뇌당하고 있다. 전혀 그것이 잘못된 쇠뇌인지도 모르면서. 이처럼 지식과 욕심을 찬양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사실 본 바탕의 진리에는 비어있음과 공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진리에 이를 수 있는지 답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 자신을 끊임없이 비워야 한다. 공에 가깝도록 비우고 또 비우는 작업을 해야 한다. 비웠을 때 열반이 가까워진다. 비웠을 때 내면 깊은 곳의 무한한 지혜의 가르침이 들려온다. 마음을 공의 상태로 돌려 놓았을 때 내면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불성(佛性)이 깨어난다. 삶을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면의 부처님의 가르침들이 비로소 들려오기 시작한다.


 사실 내 안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진리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내가 곧 부처이기 때문에, 사실은 지금 이 순간이 열반의 자리이기 때문에, 언제나 진리는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다. 다만 우리가 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그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그것은 우리 안에 꽉 들어 찬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이 온갖 욕심과 집착과 성냄과 무지와 생각과 번뇌와 아상과 이기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저 내면 깊은 곳에서 부처님의 맑은 음성이 들려오지만 그 위에는 더 많은 쓰레기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채워져 있으면서 소리치고 아우성치기 때문에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진리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 내면의 불성을 일깨울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열반적정이 우리 삶에서 드러나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가. 비워야 한다. 내 안에 꽉 차 있는 온갖 것들을 비워내야 한다. 말끔히 청소해야 한다. 정화해야 한다. 집착과 번뇌와 욕심과 아상들을 모조리 치워 버려야 한다. 모두 비워내서 맑은 공(空)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내면 깊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비로소 불성이 깨어나고, 열반과 적정의 소식이 내면의 뜨락에 가득 찰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디를 가든, 어떤 삶을 살든, 돈이 많든 적든, 어떤 조건 속에서도 항상 행복할 것이다. 항상 평안과 고요가 깃들게 된다.

 

 


붓다 수업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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