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두려움vs자비의 깨달음, 무엇으로 살 것인가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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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생활수행

죄의 두려움vs자비의 깨달음, 무엇으로 살 것인가

목탁 소리 2013. 2. 20. 08:50

지옥이 있다고 믿는 자는

죽어서 지옥에 간다.

지옥이 진짜로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믿는 바대로 가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 내기 전까지

지옥은 없다.

지옥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든 의식의 감옥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을 지언정,

우주는, 신이나 부처는

오직 용서해 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자비로 품어주며,

분별 없이 지켜볼 뿐

지옥을 만들고 거기에 쳐 넣지는 않는다.

 

무한한 자비의 부처님께서,

한없는 사랑의 하느님께서,

어찌 어머님도 하지 않는 일을

그 자식에게 하겠는가!

 

스스로 죄의식에 사로잡혀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들어갈 뿐이지.

 

죄의 과보를

반드시 기계론적으로

나쁘게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업보는 그런 것이 아니다.

업보의 '보(報)'는 '다르게 익어간다'는 뜻이다.

지은 업에 따라 무조건적인 과보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삶과 신구의 세 가지 행에 따라,

사람에 따라

그 과보는 다르게 익고, 다르게 받는 것이다.

 

똑같이 죄를 지었을지라도,

어떤 이는 그 죗값을 톡톡히 치러야 하겠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죄의식을 내려 놓고,

참회하고, 정화하여,

새로운 삶을 산다면

과보가 다르게 익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죄의 과보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형벌일 뿐,

신이 부여한 것이 아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스스로 깊은 내면에서는 그 죄의 과보를 바란다.

죄의 과보를 받아,

형벌을 받아야만 할 것 같이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죄와 벌, 지옥은 스스로 지은 것이기에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하면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인가?

죄를 짓고도,

죄의식을 가지지 않고,

스스로를 매번 용서하고,

또 다시 죄를 계속 지어도 된단 말인가?

 

그렇다면 죄를 안 짓고

깨끗하게 살면서

힘들게 사는 사람이 억울하지 않은가?

 

나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

스스로 죄의식도 없이,

아무런 과보도 없이 살아간다면,

나는 너무 억울한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물론 자연스러운 인과응보의 법칙은 있다.

선을 지으면 선의 과보를 받고,

악을 지으면 악의 과보를 받는다.

그것은 자연 법칙이다.

 

그러나 이 자연법칙을 거슬러

삶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며,

정화시켜 나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인 것이다.

 

악을 짓고 나서가 중요한 것이다.

악을 짓고 그냥 있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악의 과보가 올 것이다.

 

그러나 악을 지었지만,

스스로 참회하고

죄의식에서 놓여나며

매 순간

새롭게 깨어나

지혜롭고도 자비로운 삶을 실천한다면

그 악의 과보는 다르게 익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었는데,

그 사람이 스스로 참회하고

죄의식에서 놓여나며

새롭게 깨어나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고 살지만,

내 마음은 복수심에 불타거나,

도저히 그 '녀석'을 용서할 수 없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내 문제'일 뿐이다.

 

그것은 상대와 나와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내 안에서 풀어야 할

내 문제인 것이다.

 

똑같이 피해를 입었어도

빨리 놓아버리고,

복수심이나 증오심을 내려 놓은 채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이 말이 이해가 되는가?

모든 것은 사실 자기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타인이 나에게 피해를 입혔거나,

괴롭혔을지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이 변하기만을 바라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예를 든다면,

상대방이 나를 괴롭히거나,

돈을 빼았았다고 할지라도,

사실 그것은

전생부터의 그 사람과의 인연에 의해

그 사람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내가 전생에 상대를 괴롭혔기 때문에

업의 균형의 법칙에 따라

그 사람이 나를 괴롭혔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사람은 잘못이 없다.

그 사람이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내 마음에 잘못이 있는 것이다.

 

보통 죄를 지은 사람은

스스로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한 번 더럽혀진 몸

계속 더 나쁜 짓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더 많은 죄를 짓기 쉽다.

한 번 버린 몸

갈 때 까지 가 보자 하는 마음이다.

 

만약에 우리가 그 사람을 계속 증오하며,

절대 용서해 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그런 잘못을 더욱 더 저지를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고,

증오심을 내려놓기 시작한다면,

나아가 그를 측은하게 여기고,

연민과 자비로써 대한다면,

그를 참회와 용서로 이끌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럴 때

상대도 죄의식에서 놓여나고,

나 또한 증오심에서 놓여남으로써

서로가 지혜와 용서와 사랑이라는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가 나를 괴롭힌 상황을 통해서

그도 깨닫게 되고,

나도 깨닫게 되는,

이것이야말로

우주법계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삶이라는 인생수업에서

우리가 깨달아 가는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악을 지은 사람은

더욱 더 계속해서 악을 쌓아 가고,

악행을 당한 사람은

더욱 더 계속해서 증오심을 쌓아감으로써

그 '악행'이라는 두 사람 사이의

깨달음의 연극, 배움과 성숙의 가능성이라는 관문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바로 그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괴롭힘'과 '괴롭힘을 당함'이라는 상황은,

첫째는 인과응보 상에서

서로가 풀어야 할 하나의 과제이기도 하고,

둘째는 그 과제를 통해

당신을 깨달음으로, 지혜와 배움으로 이끌고자 하는

이 우주법계의 아름다운 수업방식인 것이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아무리 악행을 많이 지었더라도

그 악행에 사로잡혀 죄의식을 쌓아두면서

심지어 이 많은 악행으로 인해 지옥에 갈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스스로 악행, 지옥, 두려움이라는

부정적인 속박을 만들어 놓고,

신은 나를 미워할 것이고, 지옥에 빠뜨릴 것이며,

부처님은 인과응보로 나에게 악한 과보를 내릴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력으로써

자신을 괴롭히는 짓을 이제는 그만 둘 때가 되었다.

 

부처님은, 하느님은, 진리의 법계는

언제나 당신을 용서하고,

당신을 지혜와 자비라는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서만

그 모든 삶의 장치들을 마련해 두고 계실 뿐이다.

 

당신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이거나, 사람들일 뿐이지,

진리는 결정코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를,

나의 과거를,

온전히 용서해 주고,

상대방을 온전히 용서해 주라.

 

자신이 살아 온 인생을 돌이켜 볼 때,

그 누구도 미운 사람이 없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완전히 사랑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와 타인

모두에 대한 진정한 용서와 참회와 비움이 완성된다.

 

그 때 비로소

삶의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무한한 자비와 지혜를 배워나가는

아름다운 깨달음의 장이

당신 눈 앞에 눈부신 삶의 모습으로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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