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법회가 있어 마치고 오는 길에 문득 하늘을 보았다. 높디 높고 맑디 맑은 가을 하늘...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산을 바라보는데 울긋불긋 예쁜 단풍으로 온통 물들어 있는 모습이 내 마음을 더없이 설레게 한다. 난 왜 이리도 잘 설레는지... 가만히 평범한 하루를 보내다가도 문득 고개들어 주위를 좀 더 유심히 바라보게 되면 온통 셀레는 것, 행복한 것들이 내 마음 속으로 밀려든다. 늘상 주위야 보고 살지마는 나에게 ‘문득 고개 들어 주위를 바라본다’는 것은 보통 이래 저래 바쁜 생활과 일들 또 생각들 머릿 속을 꽉 채우고 있는 온갖 분별들이며 스케줄들을 어느 순간 문득 다 비워 버리고 좀 더 관심어린 시선으로, 좀 더 따뜻하고 텅 빈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보았을 때를 말하는 것. 누구든 마음 속에 찌든 때를 잠시라도 비워 놓고, 일들이며 스케줄들 번잡한 고민거리들을 텅 비워 버리고 잠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순간이 우리들 삶에 있어 최고의 휴식이 되지 않을까. 푸른 가을 하늘이며 온통 가을빛으로 물든 단풍산의 모습에 감동하고 있는데, 때맞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번 주말이 중부지방 단풍 절정으로... 설악산 천불동계곡의 막바지 단풍을 즐기러 몇 만의 인파가 몰려들고...’ 어쩌구 하는 소리가 마음에서 미세한 파장이기만 했던 ‘떠나자’는 마음을 불쑥 저지르게 만들었다. 그날 밤 길을 나섰다. 설악산 단풍이 절정이라고 하는데 지금 못 보면 또다시 일년을 기다려야 겠다는 생각이 지리산 다녀온 지 불과 2주도 안 되어서 또다시 길을 나서게 했다. 일요일 법회 마친 월요일이 쉬는 날이라 그렇지 않아도 양평에 용문사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러 내일 아침 다녀 올 참이었는데, 이렇게 계획을 바꿔 설악산으로 길을 바꾼 것이다. 용문사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보니 언제라도 마음만 내면 다녀올 수 있으니까. ... 근데 조금 전에 수녀님 글을 보니까 양평 용문사에 다녀오셨네요. 은행나무며 절 앞 찻집이며 대나무 죽통밥 얘기 들으니까 내 용문사 행 계획하고 코스까지 똑같데요. 하마터면 큰 일 날 뻔... (^^) 수녀님! 보내주신 보이차며 뽕잎차 이슬차 감사하게 잘 먹고 있습니다. 시간 되는 월요일에 한 번 오신다고 하시고는 소식 없으시더니 이렇게 단풍 구경 다니느라 바쁘셨구만요... ... 오색 온천 쪽에 도착하니 새벽 2시. 일요일 새벽 6시 38분에 아침 해가 솟았다고 하니까 지금쯤 천천히 걸어도 시간은 충분할 것 같다. 천천히 걸어 오르면서 오르는 내내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된다. 오색에 딱 도착해서 하늘을 보았더니 투명하고 선명한 별들이 바로 머리 위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어찌나 아름답고 선명하던지... 나는 밤 하늘 별 때문이라도 서울이나 경기도 쪽에서는 못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서울 하늘에서는 이런 선명하고 투명하며 반짝이는 별들을 보기는 어렵다. 지리산에서도 그랬고 또 이렇게 설악의 산 위로 펼쳐지는 이 아름다운 밤 하늘의 별들, 은하수, 별동별까지 내 가슴에 선선한 그리움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제 밤 공기는 서늘한 가을에서 싸늘한 겨울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올라가는 내내 달빛과 별빛들이 길안내를 해 주며 좋은 벗이 되 주었다. 6시 즈음에 대청봉에 올랐더니 평일인데도 많은 분들이 떠오르는 해를 보겠다고 북적인다. 그러고 보니 설악산 대청봉에서 일출을 본 것은 처음. 오늘 날씨가 많이 흐릴 거라고 했던 예보는 고맙게도 일출 바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전에 왔을 때는 하도 날씨도 흐리고 운해가 뒤덮여 있던 터라 대청봉에서 그렇게 선명하게 또 가까이 바다를 볼 수 있는지 몰랐었는데... 이제부터는 말을 좀 아껴야 겠다. 말로 아름다운 감탄사를 내뱉으면 내 안에서는 늘 그렇듯 부족하고 아쉬우며 뭔가 모르게 조악한 표현력을 가지고 저 아름다움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산 아래 마을이며 굽이치는 태백산맥 그리고 시원스레 뻗어 있는 바닷가 해안선 또 저 머얼리 수평선까지... 그 꿈결같은 그림 위로 아침 태양이 떠오른다. 산 위에서 바닷가의 일출을 이렇게 눈 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이건 도무지 꿈이라고 표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몇 시간이고 앉아 있고 싶었지만 추운 날씨도 그렇고 또 밤을 지새우며 올라왔더니 잠깐 아침 해를 기다리는 시간에 쪼그리고 앉아 깜빡 잠 들었던 여운이 발길을 아래로 저 천불동 계곡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중청산장에서 간단하게 사 온 김밥으로 아침을 먹고 천 분의 부처님 모습처럼 장엄하고 아름답다는 천불동 계곡으로 발길을 돌린다. 대청봉 쪽에는 이미 단풍은 다 끝이 났고, 나무들도 앙상한 가지만을 남겨두었고, 얼마 전에 첫눈이 내렸다고 하니 날씨도 이미 겨울의 문턱에 불쑥 와 있지만 천불동 계곡으로 내려가면서는 시간을 거슬러 겨울에서 가을로 발길을 옮기게 된다. 참 그런 곳도 있네. 참 이 땅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설악산에 오를 적에는 백담사에서 봉정암으로 올랐었지 천불동 계곡은 처음이라 그간 말로만 들었던 그 화려한 미사어구의 칭찬이 결코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음이 지금 내 눈으로 증명되고 있다. 하기야 지난 번 설악엘 왔었을 때도 단풍 철에 오려고 일부러 천불동 계곡을 아껴두고는 비켜갔었다. 그러고 보면 난 아름다운 곳을 조금 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싶은 마음에 당장에라도 갈 수 있지만 그냥 가지 않고 그렇게 기다리며 아껴두는 곳이 더러 있다. 좀 전에 말했던 용문사의 은행나무도 봄 여름 겨울 보다는 노랗게 물든 가을 은행나무를 보려고 가까이 두고도 여지껏 한 번도 찾아가 보지를 않았고, 단풍과 함께 가을을 더욱 기다리게 해 주는 또다른 설레임의 대상 억새. 통도사 우현스님께서 보내주신 한 마디... ‘가을 사자평의 억새는 죽음입니다.’라는 다소 격하지만(^^) 팍팍 가슴에 와 닿는 그 한 마디에 한반도 최대의 억새군락지라는 사자평 고원의 억새도 내가 가을에 꼭 한번 찾으려 아껴두었던 곳 중에 하나다. 아직 가 보지는 못 했지만 또 어쩌면 이 가을이 지날 때 까지 아니 이번 단풍이 다 떨어지기 전까지 찾아가 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더없이 푸르르다. 내년에 그도 아니면 후년에라도 가 볼 수 있으니까. 언젠가 가 볼 수 있을 날을 생각하며 그리움이라는 또다른 행복을 마음 속에 품을 수 있기 때문. 천불동 계곡 곳곳에 빨갛고 노란 가을이 아름답게 물들어 있다. 이 가을... 난 또 하나 삶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람은 죽는 순간 돈이나 명예 사람 혹은 살면서 이루어 놓은 업적... 뭐 그런 것들을 떠올리지 않고 삶에서의 그 어떤 감동의 순간 순간들, 그 어떤 장면을 떠올린다고 한다. 내 삶에 떠오를 장면은 어떤 그림일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자연을 딱 마주하면서 앞뒤가 다 끊기도록 아늑해 지면서 압도되는 그 경이로움과 하나되는 순간들 바로 그런 장면들, 그런 그림들이 아닌가 싶다. 그런 장면들을 딱 마주하게 되면 순간 일체의 분별이 딱 끊어지게 되고 모든 생각들이 활동을 멈추며 오직 그 대상과 하나되어 온전한 집중을 이루는 대자연 법계 삼매에 들게 된다. 그 순간이 바로 멈춤의 순간, 집중의 순간, 사마타(Samatha), 지(止)의 순간이 되는 것. 걷다 서다 멈추다 앉았다 가는 듯 서고, 서는 듯 걸으며 천불동의 사마타에서 깨어난 시간이 5시 가까이가 되었으니 정말 오랜 시간 천천히 걸어 내려 왔다. 양양을 지나 주문진 쪽에 바닷 바람을 쐬며 저녁 공양 맛있게 하고 목욕탕에 들러 씻고 잠시 눈도 붙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절에 돌아오니 ... 노곤하지만 꿈결같은 하루가 스치운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