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누군가에게는 그러지 않겠느냐마는 왠지 모를 아련하고 알싸한 낭만과 설레임이란 단어가 가슴 속을 포근하게 감싸는 곳... 제주... ‘제주도 푸른밤’이라는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지는... 이 노래를 들으며 두 눈을 감고 있자니 얼마전 다녀왔던 제주도의 그 바다며 한라산에서 내려다 보이던 그 제주의 풍경이 그대로 그려진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버리고 제주도 푸른밤 그별아래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기 우린 싫어요 신문에 TV에 월급봉투에... 정말로 그대가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른 밤 하늘 아래로 떠나요 둘이서 힘들게 별로 없어요... 그동안 우리는 오랫동안 지쳤잖아요.” 이 노랫말 가사처럼 온전히 저 바다며 산이며 대자연을 느껴볼 수 있도록 모든 것 훌훌버리고 마음을 맑게 비워두고 갈매기의 자유로움을 그리워하며 떠나고 싶은 곳... 제주도... 참 오랜만에 또다시 찾아간 섬, 몇 년 전 찾았을 때와는 또다른, 아니 아주 전혀 다른 아름답고 신비롭고 평화로운 황홀경에 도취될 만큼 아늑한 제주의 모습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고 내 가슴을 넘실거리며 뛰게 하고 있다. 제주 공항에 내려 몇 일간 묵을 곳인 성 이시돌 목장으로 가면서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초원이며 저 푸른 들 너머로 펼쳐진 바닷가 풍경까지... 많은 대중 도반님들과 함께 간 탓에 호올로 오랜 시간 그 길을 걷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버스 안에서 불쑥 올라온 한생각. 꼭 훗날 홀로 아니면 마음 맞는 좋은 도반 몇몇이서라도 꼭 다시 이 곳을 찾아 이 길을 하루가 되었든 이틀이 되었든 차분히 걸어보겠노라고... 그런 생각이 일어났을 때 마침 옆 자리에 법기스님이 보인다. “법기스님 우리 담에 제주도 한 번 더 오지요. 그 때는 걸어서 제주를 한 바퀴 돌고 또 하루는 한라산도 오르고 그러면 좋겠네요.” 흔쾌히 그러기로 마음을 모았다. 법우님들 뜻 맞는 분 계시면 언제 한번 함께 가시지요.(^^) 이런 아름다운 초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냥 가슴이 탁 멎는 것이 아무런 생각도 관념도 끼어들 틈이 없어지고, 오직 그 아늑함과 하나되어 내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거기에는 내가 없다. 감탄하는 나도 없고 감탄되어지는 대상도 없고 그냥 아무것도 붙지 않고 오직 ‘그냥’ 시공이 딱 끊어져 온연한 무심(無心)으로 느낄 뿐. 그런 마음 없는 마음으로 몇 시간이고 거닐고 앉고 눕고 그런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움을 뒤로 하며 숙소로 돌아와 첫날을 잘 보내고, 둘째날 한라산을 오르기로 했다. 성판악휴게소 쪽으로 올라서 한라산 백록감에서 점심을 먹고 관음사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보통 많은 사람들이 찾는 코스라고 귀뜸해 주는 말을 들은 터라 아침부터 성판악 휴게소로 오르는 차에 올랐다. 한라산은 중간에 산장에서 일박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그런지 보통 하루 코스로만 입산이 허용된다. 그러다 보니 총 오르고 내리는 시간을 감안해서 10시 이전에 매표소를 통과해야만 한다. 아래에서는 날씨가 많이 무덥고 조용하더니만 버스가 산허리를 오르자 울울창창 덮인 숲 사이로 흐린 하늘이 보이면서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처음엔 시원한, 그리고 조금 더 있자니 거칠고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한라의 조금은 거친 모습을 보여주는 듯. 매표소 통과 시간이 10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걸어오르자니 한라산의 입산을 반겨주기라도 하는 듯 어린 노루 한 마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까지 마중을 나왔다. 한라산에서 한 때 멸종 위기에 놓여있었지만 착한 사람들의 보호와 노력으로 이제는 한라산을 대표하는 야생동물이 되었으며, 또 노루의 서식이야 말로 한라산이 자연이 살아 숨쉬는 생명의 원천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한라산을 소개하는 무슨 책자에서 보고 ‘한라산에 가면 노루를 볼 수 있을까’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쉽게 만나게 될 줄이야. 한라산은 육지의 여느 산과는 다르게 다소 이국적이기도 하고 그 풍겨오는 향취가 또다른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한라산을 오를 때는 등산화를 꼭 신으면 좋겠다. 그냥 흙을 밟으면 운동화도 좋겠는데 산이 온통 현무암으로 되어 있다 보니 오르는 내내 현무암 돌덩이를 밟아야 한다. 게다가 습한 곳은 많아 미끄럽고... 한라산을 얕보고 오랜 운동화를 신고 온 것이 오르고 내리는 내내 발바닥 지압을 화끈하게 해 주었다. 오르다가 만난 기억에 남는 분... 연세도 제법 되신 할머님이신데, 게다가 다리를 다치셔서 목발을 짚으시며 산을 오르시는데 “아이고 할머님 목발짚으시며 힘들지 않으세요” 하고 여쭈었더니 그냥 웃으시며 “괜찮아요 괜찮아” 하신다. “사진 한 장 찍어 드릴께요.” 했더니 “허허... 노인네를 뭘 사진을 찍어요... 예쁘지도 않은디...” ‘세상에서 제일 예쁘십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입가에서 맴돌다 만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할머님 그 말씀 들으셨으면 참 흐뭇하셨을텐데... 걷는 내내 발아래를 내려다보며 한라산의 또다른 아름다움을 보았다. 현무암과 그 사이를 뚫고 피어오른 아기자기한 야생풀들 그 모습이 소박하지만 참 좋다. 한 3시간 여를 오르며 처음 2시간 30분 정도는 약간의 경사만 있을 뿐 비교적 뒷산을 오르는 것처럼 사뿐사뿐 걸을 수 있는데 뒤에 30분 정도는 백록담까지 올라가느라 가파른 산길을 힘겹게 올라야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백록담을 눈앞에 두고 펼쳐지는 푸른 초원과 현무암 바윗돌들의 풍경이 다리 아픈 것도 잊게 할 만큼 신비롭고도 이국적이며 가슴 탁 트이게 펼쳐진다. 백록담에 올라 서니 제주도가 한 눈에 다 들어오고 제주 시내의 풍경들이며 곳곳의 절경들 또 그 너머에 넘실거리며 누워 있는 푸른 바다까지... 불어오는 바람에 가슴 속까지 맑게 씻기는 듯 하다. 산 중턱에서 만나 엎치락 뒤치락 기분 좋은 인사를 하며 함께 올라오셨던 몇몇 분들께서 절경에 감탄사를 연발하시면서 한라산 정상이 이렇게 맑고 창창하기는 참 어렵다고 하신다. 어떤 제주도 분께서는 시내에서 한라산 정상을 바라보면 거의 항상 정상 부분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날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않고 있다. 말로만 듣던 백록담의 운치도 색다르고, 바다로 둘러쌓여 있는 섬이라 더 그런지 바다향 묻어나는 바람이 더없이 생기롭다. 누구나 할것없이 바로 이 곳 정상이 모든 입산도반들의 점심 장소.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모여 앉아 즐거운 웃음 꽃피우며 이 좋은 공기 마시고, 이 좋은 바람 쐬며 저 드넓은 바다와 섬과 산을 벗삼아 먹는 맛있는 점심공양. 때때로 홀로 오르신 분들은 저 산아래를 호올로 굽어 보며 김밥 하나 입에 넣고 바람 한 자락 맞으며 저 머얼리 바닷가와 섬풍경을 내려다 보며 외로운 생각에 잠겨 있는 듯... 저홀로 산에 오르시는 분들을 뵈면 그 사람 안에서 고향을 느끼고, 또 청아한 숲향을 느끼게 된다. 그 고독이 또 그 홀로됨이 그렇게 고맙고 또 아름다울 수 없다. 누군가와 함께 산에 오르면 산의 힘으로 인해 함께 한 그 사람들을 조금 더 아름답게 품어줄 수 있고, 조금 더 가까워 지며 정겨운 마음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홀로 산에 오르면 조금 더 나 자신과 가까워지고 조금 더 나 자신을 아름답게 품어줄 수 있게 된다. 어떤 꼬마 아이가 산 정상에 올라 느낌을 이야기 하라고 했더니 산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산 밑에 있을 때는 그렇게 크고 웅장해 보이더니 여기에서 내려다 보니 콩알만한 것이 그냥 ‘내가 대장이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런 것 같다. 산 위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 보면 우리가 그렇게 마음 상해 했고, 가슴 아파 했고, 그렇게 엄청난 에너지와 열정과 욕심을 퍼 부었던 그 모든 일들이 작고 소소한 얘기 거리에 불과해지기도 하고, 그렇게 조급해 하고, 소심해 했던 내 마음도 이 산과 함께 무한히 넓어지고 한없이 푸르러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아래 세상 속의 소소한 일꺼리나 번잡함 속에서 벗어나 좀 더 넓고 훤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산처럼 온갖 비바람에도 휘둘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변화에 그대로 온몸을 내맡기듯 그렇게 온전히 내맡긴 채 자유롭게 살아간다. 그러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그냥 걷기만 하는 것. 그랬을 때 우린 그 순간에 있는 것이다. 온전하게 무심으로 몸도 마음도 현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산을 오르는 이유는 정상에 도착함이 아니라 바로 다음 발을 내딛는데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바로 그 때 고요가 찾아온다. 한 발 한 발 대자연과 함께 거닐 때 바로 그 때 들뜬다거나 감각적이지는 않지만 아주 예민해지지 않으면 좀처럼 느끼지 못할지 모를 아주 작고 차분한 내적인 고요가 우리 안에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산이 주는 고요와 내적인 침묵의 자리를 조금이나마 느껴보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나홀로 산행이 조금 더 좋을 듯 싶다. 그렇다고 함께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함께 하는 것은 함께 하는대로 공존과 화합 그리고 사랑과 맑고 청정한 정이 오고가는 장이 되기도 한다. 바로 나의 이번 제주도 그리고 한라산 산행이 그러하다. 사실 누군가와 함께 산행을 하는 것이 정말 오랜만의 일이라 처음에 조금은 낯설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진 감도 있었지만 금새 도반님들과 함께 걸을 수 있었다. 백록담에서 점심 공양을 맛있게 하고 둘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관음사 쪽으로 내려오는데, 몇 걸음 안 가 구상나무 숲이 웅장하게 배웅을 하고 섯다. 태백산에서 보았던 큰 키에 우람한 체격을 가진 그런 웅장한 주목 군락지와는 대조적이기도 하지만, 얕은 키에 아기자기한 소박함이 또다른 구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는 숲. 구상나무 숲길을 한 10분 느린 걸음으로 걷다 서다 느끼다 보니 저쪽 백록담 아래로 병풍처럼 펼쳐지는 산세가 정말이지 이래서 한라산 한라산 하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함께 성판악으로 올라와 백록담에서 공양을 하고 주차해 놓은 차 때문에 다시 성판악으로 내려가시던 분들은 진짜 한라산을 못 보고 내려가시는구나 싶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또 하나 관음사 계곡 쪽으로 내려오면서 올라올 때 모두들 하나같이 ‘이 정도면 동네 뒷산 수준이다’ 하고 얕보았었는데, 내려가는 길이 얼마나 험준하고 기세등등하던지 한라산을 얕잡아볼 수 없게 만드는 코스라고 할까. 관음사 코스는 성판악 코스보다도 1km 정도 더 짧은 코스인데도 불구하고 올라가는 시간이 약 40여 분 더 걸리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지리산의 화엄사코스나 설악산의 오색 코스보다 오히려 더 험하고 지루한 코스인 듯. 내려가는 길에 시원한 계곡물에 발도 담그고, 물을 많이 안 가져가서 점심 먹을 때 목말랐던 갈증을 시원스레 달래주기도 했다. 산에 오를 때부터 내내 우리와 함께 했던 유난히 눈에 띄는 야생화 하나, 산 수 국 김용택 시인의 산수국꽃이란 시처럼, 나비같이 건드리면 소리없이 날아갈 것 같은 꽃이파리 이쁘디 이쁜 산수국꽃... [아, 찬물이 맑게 갠 옹달샘 위에 산수국꽃 몇송이가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나비같이 금방 건드리면 소리없이 날아갈 것 같은 꽃이파리가 이쁘디이쁜 산수국꽃 몇송이가 거기 피어 있었습니다.] 어제 체육대회 때 한바탕 축구며 족구를 한다고 무리를 좀 했던 탓고 있겠고, 마침 간만에 뛰다가 허벅지를 다쳐 절룩거리는 다리를 가지고 8시간 이상의 긴 산길을 다니다 보니 무리가 있었는지 관음사에 거의 다 내려올 때가 되니 통증이 더 심해진다. 관음사로 하산하여 숙소로 돌아가 몸도 좀 씻고 잠시 쉬었더니 따르릉 전화가 온다. 마침 내일 돌아갈 생각을 하니 그냥 잠자리에 들기가 좀 뭣했던 차에 이 마음 헤아리고 이심전심 전화가 울렸는가. 법화스님, 법기스님 심심하다고... 아니 심심하기 보다는 뭔가 내일이 돌아가는 날인데 내 마음처럼이나 가슴팍이 휑했나 보다. 예전에 인연이 되었던 비구니 스님께 빌렸다는 소형차를 타고 의기투합 달려간 곳 중문단지 쪽의 바닷가 모래사장. 그러고 보니 제주까지 와서 바닷가 구경이 처음이라니... 덕분에 바닷바람 한참을 쐬면서 노래도 부르고 두런 두런 얘기도 나누고... 제주의 마지막밤은 그렇게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