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 8:00 화엄사 각황전 아래... 새벽에 구례구역에 도착하여 아침공양을 하고 있는데 주인 아주머님께서 오늘 아침이 가장 추운 날이라고, 첫 서리가 왔고, 노고단에는 첫 얼음까지 얼었노라고 말씀해 주셨었다. 그렇지만 지금, 새벽 추위는 이 지리산 하늘 위로 따스한 햇살을 받아 다 녹아내렸다. 화엄사 경내, 조금 전 산위로 햇살이 떠오르고 화엄사 도량을 맑게 비추고 있다. 여유 있게 산을 마주하려고 긴 일정을 잡았더니 마음부터가 아침 바람을 타고 편안하게 산들거린다. 저 화엄사 돌담 아래 피어난 이름모를 눈부신 꽃송이 처럼... 산을 오르고 내리는 데 목적이 있다 보면 빨리 올라야 하고, 또 오르면 내려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다만 이 순간 걸을 뿐이고, 그대로 느낄 뿐이면 걸으면서도 이미 정상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정상이 무슨 소용인가. 이렇게 숨을 쉬며 걷는 순간 이미 산은 내게로 와 숨결을 나누고 있으며 이미 목적을 이루었고, 끊임없이 순간 순간 이루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 아침. 아침햇살이 따스하다. 화엄사 고즈넉한 풍경하며 나른한 아침 햇살이 이 산사를 꿈결처럼 수놓고 있다. 고개 들어 저 멀리 산꼭대기를 바라본다. 아. 설레이는 아침 나는 지금 지리산의 아침을 온몸으로 마주하고 있다. 지리산과 함께 여기에 한 자리 하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출발. 첫째날, 14:50 노고단을 앞두고... 화엄사 계곡을 따라 한 시간 남짓 걷다보면 연기암이 나온다. 연기암은 여느 산사와 다르게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이 단청을 하지 않은 말끔한 법당들이다. 연기암 도량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오랜 법당 나무기둥에 기대어 명상을 하는 듯, 잠깐 낮잠에 빠져 있는 듯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행자님을 모습을 보았다. 초발심 지리산 행자님의 여유로운 모습이 내 발길을 더 평온하게 한다. 바쁠 것도 없이 쉬엄쉬엄 걷고 또 걷는다. 이따금 내려오는 이들과 마주치면서 도착하려면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지를 묻고 싶은 이 마음을 바라보고는 피식 웃어 버렸다. 도착 예정시간을 묻는다는 것은 벌써 우리 마음이 정상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 순간 나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다. 그 때 걷는 것은 괴로운 일이 되고, 오직 도착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으로 추락하고 만다. 오직 정상에 도착하는 것만이 목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냥 이렇게 걷는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코가 땅에 닿을 것처럼 가파르다고 해서 코재라고 한다더니 이놈의 코재는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진다. 3박 5일. 산에서의 길다면 긴 일정이라 이것 저것 두루 챙기고 출발했더니 이만 저만 무거운 게 아니다. 이 무거운 녀석을 짊어지고 코재를 오른다. 무겁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이 뻐근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맑고 향기로울 수가 없다. 몸이 힘들다고 마음이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닌 것이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힘들고, 몸이 편하면 마음도 편해야 할 터인데, 사람의 몸과 마음이란 그렇게 딱 정해진 것이 아니다. 몸이 힘들어도 마음은 이처럼 행복할 수 있고, 몸이 아무리 편안해도 마음은 한없이 불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몸이 조금 힘들더라도 몸을 탓하고 주변 상황을 탓할 것은 못된다. 오직 모든 문제는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군인들 행군할 적에 이런 곳을 오르라고 하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힘든 곳을 신나게 오르지 않나. 하기야 나도 지리산 지리산 하면서 몇 달 전부터 가슴설레며 기대하고 있었으니 이까짓 몸 힘든 것 쯤이야 정말 별 볼 일 없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지도에서는 분명 3~4시간이면 오른다고 쓰여있는데 이 4시간 짜리 계곡을 나는 아침 8시부터 쉬엄 쉬엄 계속 걷고 있으니 벌써 6시간이 넘었지만 아직 하늘은 보이지 않고, 정상에서는 벌써 단풍이 활짝 익어 떨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감안할 때, 주위에 조금씩 단풍이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많이 올라왔겠다고 생각만 할 뿐이다. 오르는 동안 내려오는 사람들만 몇몇을 보았을 뿐 오르는 사람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덕분에 나홀로 속 뜰을 걷는 호젓한 시간이 되었지만, 노고단에 올라 그 속 사정을 알고 보니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다. 화엄사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오르다가 숨이 턱턱 막힐 즈음 갑자기 너르고 잘 뚫린 도로가 나타나고 그 도로는 관관객들로 꾀나 붐비고 있다. 이 즈음 되니 이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저 아래에서부터 한 발 두 발 걸어 온 내 입장에서야 조금 허무한 웃음을 쏟아내지 않을 수 없다. 누가 해 놓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이야 노고단까지 도로를 포장해 놓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차를 타고 지리산을 오른다고 한다. 노고단까지 오르는 일이 가장 힘들다 보니 도로를 놓았겠지, 도로를 놓으면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오리라는 생각에 이런 산에 대한 만행을 저질러 놓았을 것이지만, 이건 참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 좁고 야만적이다. 사람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니 이런 문제가 생긴다. 산이야 사람들이 오르라고 있는 것이고, 아무리 산이 아름다운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냐고 산을 뚫은 사람들은 반문한다고 한다. 우리 사람들이 크게 반성하고 또 크게 되짚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사람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사람을 포함한 대자연의 사고방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람 중심으로 한다면이야, -사실은 그렇게 하더라도 조금 넓게 본다면 그러지 못하겠지만,- 행여 그렇게 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대자연, 이 우주 법계를 중심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모른다. 저 지리산을 두 동강 내버린 도로 때문에 이 백두대간 지리산이 시름시름 앓고 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단은 편리하고 쉬워서 좋은 점도 있다고 하겠지만, 산, 그 품에 안기려는 사람이 차를 타고 오른다는게 내 생각에서는 어째 좀 어색하다. 조금 힘들고 시간은 들겠지만 이 두 다리로 딱 버티면서 한 발 한 발 올랐을 때와 쉽게 차를 타고 정상에 올랐을 때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산은 결코 같을 수 없다. 도저히 같은 정상에 올랐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차를 타고 오르는 사람들에게 지리산을 바로 보여줄 수 없을 것 같다. 산에 오르며 잠깐 잠깐 기가 달려 쉴 때에는 나무를 꼭 껴안고 몇 분쯤 서서 쉬니까 참 좋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에서 왜 어느 인디언은 살다가 기가 달리면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 나무를 꼭 껴안으면서 나무의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끌어안고 있으면 난 포근함을 느낀다. 어릴 적 어머님 품에서나 느껴보았음직한 그런 포근함을 이 울울창창한 산속 한 그루 외로운 나무 곁에서 느끼는 것이다. 나무를 안아 본 사람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리라. 내가 나무를 안고 있을 때 나무는 아마도 한없는 행복감에 젖어들 것이다. [식물의 정신세계]에서는 식물도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슬퍼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쁘다는 말을 들은 난초는 더욱 아름답게 자라고, 볼품없다는 말을 들은 장미는 자학 끝에 시들어 버리며, 떡갈나무는 나무꾼이 다가가면 부들부들 떨고, 홍당무는 토끼가 나타나면 사색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끌어안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나 자연에게 있어서나 얼마나 포근하고 따뜻한 일인가. 내가 산에 안기고 산은 또 내게 안기고 그랬을 때 우린 비로소 서로 서로 본래 자리로 돌아가려는 숭고한 귀의(歸依)의 의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리라. 이렇게 한 발 한 발 가을을 향해 걷고 있다 보니 시간의 흐름이 보인다. 아래쪽에는 푸르른 나무들이 울창하더니 얼마를 걷다보니 색색의 단풍들이 흐드러지고, 저기 노고단 위쪽엔 벌써 낙엽을 밟아야 할 만큼 늦가을이 와 있겠다. 내일 아침 일어나면 서리에 얼음도 얼겠지. 한발 한발 늦가을 아니 초겨울로 또 한 발 걸음을 옮기자. 첫째날, 노고단 대피소 별빛아래... 천천히 놀며 놀며 걸어왔다고 하더라도 노고단 대피소까지 와 보니 이제 겨우 15:40분. 산에서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저녁밥을 먹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더 나아가기도 애매한 시간이다. 여장을 풀기로 하고, 우선 노고단 대피소 예약을 하고는 노고단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노고단 이곳 저곳 아름다운 풍경에 눈을 씻고 나니 안경을 써도 잘 보이지 않던 머언 풍경까지 시원해 지는 듯 하다. 6시가 넘어 밥을 해 컵라면과 김치로 저녁을 간단히 때우고는 간단히 씻고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아무래도 이대로는 잠이 들 수 없어 밖으로 나갔다. 대피소 위쪽, 천왕봉으로 향하는 돌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낮에 하늘이 유난히 파랗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밤이 되니 별빛들이 너무나도 빼곡히 하늘을 수놓고 있다. 양주 신산리의 하늘도 서울에 비하면 제법 별빛 감상하기 좋은 터였는데 이 곳에 와서 보니 총총 박혀있는 모습이 말문을 막히게 한다. 거기에 이 밤 정취와 딱 어울릴 법한 초생달까지... 이 밤! 초생달, 별, 나무, 산... 그리고 그들과 하나로 어우러진 나, 내가 여기 있다. 별을 바라보듯 내가 나를 바라보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부터 와서 이렇게 이 시공을 차지하고 있는가. 내가 가야할 곳은 어디쯤인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아니, 내가 굳이 무엇일 필요는 없다. 타성에 젖은 그간의 내 모습, 틀잡아진, 규정된 내 모습을 가만히 본다. 남들이 불러주는 수많은 이름들... 그 속에 내 이름은 없다. 이 밤. 침묵으로 본다. 나는 누구인가. 둘째날, 09:40 노루목에서... 새벽. 사람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일어나 아침을 해 먹고 노고단대피소 출발. 새벽 산길... 나무들 사이로 비춰오는 새벽 햇살이 나른한 듯, 신선한 듯 꿈같은 숨결로 나를 비춰준다. 내리쬐는 햇살을 벗삼아 좌우 길옆에 우뚝 서 있는 나무와 풀들 도반삼아 마음도 나누고 대화도 하면서 걷는다. 지리산의 새벽길은 여느 길 같지 않게 새롭고 뿌듯하다. 쉬엄 쉬엄 한 두어시간 걷다보니 노루목. 저기 노고단까지, 걸어온 길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바위 위에 앉아 1시간 여를 보내고 있다. 아래 사진... 저 쪽으로 보이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노고단이다. 그 아래가 돼지령, 임걸령... 뭐 대충 지도상으로 보았을 때 이러지 않을까... 지리산의 정상의 가을은 여느 곳 보다 더 일찍온다. 아래에서 출발할 때는 단풍 구경이 쉽지 않았는데 하루만에 단풍을 만난 것. 한 시간 사이에 족히 100여 분은 지나치신 듯. 이 곳은 반야봉과 천왕봉으로 나뉘어지는 갈림길이다. 한 반수 정도 되는 분들은 누가 가져가든 말든 이 휑한 곳에 배낭을 내려 놓고 반야봉을 오른다. 하기야 이 산에서 저 무거운 배낭을 누가 가져 가겠는가. 여기에서 보니 형형색색의 나무들이 모두들 제각기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있다. 여기 저홀로 피어오른 나무들은 이렇듯 모두가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과연 나는 어떠한 ‘나의 모습’으로 피어올랐을까! 지금까지 누구 누구처럼 되려고, 어떤 사람이 되려고, 누가 되고,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살아왔는지. 나의 모습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나 또한 저 고목처럼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내 자리에 우뚝 설 수 있는가. 누구도 아니고, 틀잡힌 무엇도 아니고, 직업이 무엇도 아니고, 어떤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끊임없이 새롭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며, 낡은 것으로부터, 온갖 소유며 관념들로부터 떨치고 일어서야 하리라. 날마다 버리고 떠날 수 있기를... 매 순간 순간 출가의 나날일 수 있기를... 내 삶의 진정한 출가는 과연 어느 때인가. 출가란 온갖 소유와 관념들을 온전히 버리고, 완전히 떠나는 일이다. 완전한 버림, 마음을 돌이켜 회심 출가하는 일이 내 삶에 과연 있기나 했는가. 회심, 참된 출가, 내 삶의 새로운 출가를 그리워하며... 둘째날 17:17 벽소령 대피소에서... 지리산의 아름다움이 가슴팍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안겨온 하루. 그야말로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청명한 가을 하늘이다. 벽소령은 이미 산그림자 이불을 덮었고, 지금 이 자리는 벽소령을 옆으로 끼고 아직 햇님이 산위쪽에서 나를 비추고 있는 양지. 가을 산들바람, 아니 초겨울을 재촉하는 시린 산바람이 산을 스치고 나무를 스치면서 이내 내 몸을 스치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산냄새 그윽한 저물녘. 이제 잠시 후면 햇님도 저 산뒤로 자취를 감출 것이지만 내 가슴에 이 청청한 순간이 사진 찍히듯 팍 내리꽃힌 듯하다. 좀전부터 전엔 없던 검은 까마귀들이 까~악 까~악 노래를 부른다. 남들은 이 날씨에 까마귀까지 스산하다고 말하지만, 까마귀는 그냥 한 마리 새일 뿐, 그냥 까마귀일 뿐. 까마귀는 스산함을 바라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한 마리 존재로 남아 있고 싶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남들 눈에 어찌 보이건 아무런 상관없이 ‘자신’으로서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 다만 사람들이 이런 저런 분별을 일으켜 가만히 있는 까마귀에게 온갖 전설을 만들어 내고, 온갖 소문들을 입히는 것이겠지... 나도 저 까마귀처럼, 남들이 어찌 생각하든, 그들의 분별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한 ‘나 자신’이 되고 싶다. 이 가을. 지리산에 해가 진다. 울긋불긋 가을 단풍 위로 산그림자 가만히 내려온다. 내 가슴위로, 내 존재 위로 외로움 하나, 우뚝 선 성성한 외로움 하나 차분히 내려온다. 혼자있음은 값싼 외로움이 아닌 우뚝 섬이다. 외로움은 가슴 시린 값싸고 휑한 감정이 아닌 나 자신과의 온전한 마주섬이다. 온전한 나 자신과 당당히 마주할 수 있는 깨어있음의 신호. 이러한 시간이 내 속 뜰을 맑게 비워준다. 자연 속에서, 산! 그 안에서 난 어머님 태속에서와 같은 근원적인 포근함에 안긴다. 아! 드디어 해가... 해가... 저 멀리 산봉우리 뒤로 고개를 떨군다.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모두들 선량해진다. 산에서 만난 사람치고 따스하고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없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은 산과 함께 어깨동무 할 때, 어우러질 때, 본래의 선함으로 돌아가는 것일지 모른다. 도심의 콘크리트 석회 건물 속에서는 마음도 차가와지고 딱딱하며 모질어 지다가도 이렇듯 대자연의 속에 안겨 있을 때는 마음도 자연처럼 온연해 지고 청청해 지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힘이고 산의 힘이다.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는 건 나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이다. 돌아가 의지함 이것이 바로 귀의(歸依)의 한 모습일 수 있다. 자연은 집착함이 없고, 얽매임이 없으며 걸림이 없고 그 근원인 대지의, 우주의 숨결에 모든 것들 내맡기며 순응한다. 비바람 속에도 당당히 버티며 살던 나무도 시간이 흘러 인연의 때가 오면 이윽고 넘어지고 쓰러져 간다. 우뚝 서 있지만 우뚝 섬을 고집하지 않고 다시금 산의 숨결로 되돌아 가게 마련. 유독 우리 사람들만 순응하지 못한다. 물처럼 바람처럼 저 산처럼, 나무처럼 대지의 숨결 속으로 그 품 속으로 돌아가 안기려고 하지 않고 고집을 피고 산다.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찬 오만을 안고... 이런 오만이야 말로 얼마나 전도된 망상인가. 자연을 정복하겠다고 하면 자연도 더 이상 우리 인간의 욕구에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연이 그런 사람을 도리어 정복하려 할 것이다. 그런 날이 오고 있는 것 같아 내 마음도 함께 앓아 간다. 산 너머로 해가 지고 아쉬운 여운을 아름다운 노을로 수놓으며 달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루 해는 어김없이 지고 만다. 그래. 나도 때가 되면 아무 말 없이 가야지. 너처럼 내 인생에도 황혼의 때가 올 때 아무런 미련 없이, 훌쩍 떠나야 하리라. 그 때가 언제일지... 당장 이 다음 순간이 된다 할지라도... 아무런 미련 없이 훌훌 털어 버리고 자유롭게 가야 하리라.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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