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스님의 파상론(破相論)을 보면 관심 수행에 대한 소중한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결심했다면 그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다른 모든 수행법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다른 일체 모든 수행법을 포함하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수행방법은 다름 아닌 마음을 지켜보는 일이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관하는 것이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며, 무심(無心)에 이르는 길이고, 집착을 놓는 일, 방하착의 길이며, 나아가 본성을 살피는 길인 것입니다. 제자는 다시 묻습니다. "그러나 삼계와 육도는 무한히 넓습니다. 고작 마음을 지켜보는 일을 가지고 어떻게 이 끝없는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삼계의 업도 오직 마음에서 나온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으면 그것은 삼계를 초월한 것이다." 삼계와 육도의 모든 업 또한 결국 우리의 마음으로 지은 것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으면 곧장 삼계를 초월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다는 말은 '마음을 비운' 자리, 무심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삼계 육도를 다 청정하게 가꾸려 애쓸 필요가 없으며, 수미산 보다 높은 업장을 다 녹이려 애쓰거나 그 무거운 업장을 탓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관함으로써 지극한 침묵, 무심을 이루게 되면 본래 아무 일도 있지 않았던 본래의 자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은 또 이야기 합니다. "그대가 닦는 수행이 그대의 마음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그대는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모든 불국토 또한 청정하다." 지켜보는 깨어있음의 수행은 그대로 우리의 마음과 하나가 됩니다. 깨어있지 못할 때 마음은 있지만, 온전히 깨어있는 순간 마음은 사라집니다. 그대로 무심(無心)입니다. 온전히 깨어있는 바로 그 순간이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이지 다른 곳에서 깨달음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마음을 잘 지켜봄으로써 깨어있을 수 있다면, 깨어있음으로 무심을 이룰 수 있다면, 모든 불국토가 그대로 청정해 질 것입니다. 깨어있는 순간이 그대로 부처요, 불국토라는 말이지요. 파상론의 본문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관심수행의 법문을 청해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수행을 성취하자면 여섯가지 도적을 쫓아 버려야 하는데, 눈의 도둑을 쫓아 버리자면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들리는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며,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하고,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맛에 탐미하지 않으며, 법다운 말만을 해야 하고,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고, 마음의 도적을 조절하자면 무지를 극복하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 여섯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들어오는 그 각각의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이 가장 큰 도둑이며, 도적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향기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며, 마음으로 분별하는 등 이 모든 우리 몸의 기관들은 바깥의 대상들 즉 육경, 색성향미촉법을 끊임없이 얻어 가지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 시도 평화로울 날이 없이 대상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물질(色)을 탐하고, 귀로 좋은 말(聲) 듣기를 원하며, 코로 좋은 향기(香) 맡기를 바라고, 혀로 맛(味)에 탐닉하고, 몸으로 좋은 감촉(觸)을 탐하며, 마음으로 온갖 분별을 일으켜 생각(法)을 지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여섯의 도둑 때문에 우리는 늘 고요하지 못하고 탐내며 성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여섯 기관으로 좋은 것을 탐내다가(貪心) 얻지 못하였을 때 화(嗔心)를 낸단 말입니다. 이처럼 여섯 기관의 도적에 휘둘려 여섯 대상이 텅 비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는 그 마음이 바로 어리석음(癡心)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이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항복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육근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들을 잘 관하여 들고 나는 그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육경이라는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눈의 도둑을 몰아내려면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에 좋고 나쁜 분별을 짓고 좋으면 애착하여 붙잡으려 하고, 싫으면 증오하여 버리려고 애를 쓰니 색이라는 경계에 휘둘려 마음을 번뇌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귀로 들려오는 그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아서 칭찬이든 비난이든 그 어떤 좋고 나쁜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합니다. 칭찬에 집착하여 자꾸 듣고자 애쓰지도 말고 칭찬을 들었다고 쉬 들뜰 것도 없으며, 비난을 들었다고 번뇌에 휩싸여 내 중심을 잃고 헤매어 서도 안 된 다는 말입니다.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향기에 분별하면 곧장 눈귀코와 몸뜻도 함께 분별을 일으켜 온갖 집착을 만들어 냅니다.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먼저, 맛에 탐미하여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야 합니다. 맛에 탐함이 많으면 때를 구분하지 못하여 시도 때도 없이 먹게 되고, 그리하여 그 탐심이 뱃속을 채우게 되어 몸을 어지럽히고 그로인해 정신이 혼미해져 마음에도 헤를 입힙니다. 또한 입을 잘 관하여 법다운 말만을 해야지 생각난다고 다 입 밖으로 내 놓게 되면 사람이 실없어 지고 공허해 집니다. 늘 입을 잘 다스려 침묵을 지킬 일이고 말을 할 때라면 몇 번이고 관하여 법다운 말을 어렵게 꺼낼 일입니다.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합니다. 자칫 감촉에 집착을 하게 되면 음탕한 행과 삿된 행으로 온갖 신업을 짓게 됩니다. 몸의 행동을 늘 잘 관하여 어떤 행동에도 감촉의 욕망에 휘둘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도적을 잘 조절하자면 수행을 통해 어리석은 마음을 잘 극복하고, 관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늘 경계따라 올라오는 마음을 잘 관하여 그 마음이 신구의(身口意)로 어떻게 퍼져 나가는 지 잘 살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여섯가지 도적을 잘 경계하여 이 도적들이 우리를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이 여섯가지 기관을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의 외곽이 튼튼하고 병사들이 두 눈 뜨고 깨어 있게 되면 함부로 도적들이 성을 뛰어 넘을 수 없지만, 병사들이 잠 자느라 깨어있지 못하게 되면 쉽사리 도적이 성을 침범하듯, 우리 몸의 여섯 기관을 잘 관하여 깨어있는 마음으로 지켜봄으로써 여섯가지 대상이 여섯 기관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는 여섯 도적을 항복 받기 위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거두어 내면을 관찰하고 밖의 대상의 일을 밝게 깨달아 잘 관조할 수 있다면 탐진치 삼독심을 완전히 끊을 수 있고, 밖에서 들어오는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막을 수 있다. 그러면 많은 공덕과 갖가지 장엄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요. 진리에 이르는 많은 길을 낱낱이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머지 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 여섯 도적을 잘 관조함으로써 삼독심을 끊고 온갖 공덕을 성취하며 머지 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수행의 관건은 바로 이 여섯 감각기관인 여섯 개의 문을 잘 관조함으로써 여섯 도둑들이 들어오는 것을 잘 막아내는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파상론의 말미로 갈수록 달마스님은 더욱 간절한 법문으로 우리를 일깨웁니다. "부처는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깨어있음이 그대로 부처인 것입니다. 그러니 순간 순간 깨어있음을 통해 우리는 부처를 만나는 것입니다. 천지가 요동을 치는 엄청난 부처를 찾고자 애쓰지만 않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아주 쉽고도 은은하고 평화롭게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열반의 영원한 기쁨은 마음이 쉬는 데서 나온다... 세상을 지켜보는 것이나, 거룩함을 지켜보는 것,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보다도 빠르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진정한 문은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음을 지켜보는 일이 마음을 쉬는 일입니다. 애쓰려는 마음,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마음을 모두 쉬고 묵묵히 지켜봄으로써 열반의 영원한 기쁨은 나옵니다. 또한 세상을 지켜보고 마음의 거룩한 본성을 지켜보는 수행은 눈 깜짝할 사이보다도 빠르다고 합니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지금 바로 그대에게 깨달음은 한없는 평화로움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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