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일체동관분
일체를 하나로 보라
一切同觀分 第十八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肉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天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恒河 所有沙數 佛世界 如是 寧爲多不 甚多 世尊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肉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天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慧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法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佛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불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에 대해 여래가 말한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항하의 모래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하나의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고, 그 모든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부처님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를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체동관(一切同觀)이란 삼라만상 일체 모든 것을 둘로 나누지 않고 한성품으로 관찰하여 본다는 뜻이다. 그렇게 차별하여 나누지 않고 한성품으로, 한바탕으로 보는 눈이 바로 부처님의 오안(五眼)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오안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을, 또 중생들의 마음을 차별하여 나누어 보지 않고 한바탕, 한생명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오안으로 일체를 동관하여 알 수 있는 이유는, 항하의 모래알 수만큼의 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며, 즉 그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라는 삼세의 어떤 마음도 고정된 실체가 없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처님은 오안의 눈으로 일체를 동관함으로써 모든 중생의 마음을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肉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육안이 있습니다.”
육안이란 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눈을 말한다. 육신의 눈으로는 과거나 미래의 것도 보지 못하고, 공간적으로 다른 장소의 것 또한 보지 못하며, 눈을 가리기만 해도 보지 못한다. 육신의 눈으로는 다만 빛의 도움을 통해 내 눈 앞 사물의 모양과 색깔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들 평범한 중생이 가지고 있는 눈은 오안 가운데 바로 첫 번째 눈인 이 육안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한다. 여기에서 모든 갈등과 시비와 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생겨나곤 한다. 그러나 여래에게는 이 육안 뿐 아니라 천안, 혜안, 법안, 불안 등의 또 다른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여기에서는 오안 가운데 첫 번째인 육안을 모든 중생들처럼 부처님 또한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天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천안이 있습니다.”
두 번째 눈, 천안에서부터는 평범한 인간계의 사람이나 축생들이 가지지 않고 있는 눈이다. 천안은 말 그대로 하늘의 눈, 천상세계 신들의 눈으로 인간의 육안을 넘어 시공을 초월하는 눈의 기능이 있다. 천상 신들은 육신이 없기 때문에 육신에 걸리지 않는다. 육신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막힘이 없다. 그러니 천안이란 공간에 걸림이 없는 눈이며, 이 곳에서 어느 곳이든 볼 수 있는 눈을 말한다. 또한 천상 신들은 그 종류에 따라 인간계의 몇 백년이 그 하늘의 하루인 경우가 있는 것 처럼 시간적으로도 인간계에서와 같은 틀에 갇혀 있지 않다. 그렇기에 천안은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어 과거와 미래에 있을 생사의 모양을 미리 알 수 있는 눈이기도 하다.
[지도론]에서는 ‘천안으로 보면 땅에서부터 하지(下地)의 육도와 중생 제물(諸物)을 본다. 가까운 것이나 먼 것이나 큰 것이나 작은 것 등 모든 사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이 천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수행(修)에 따라 얻어지는 것으로 인간계에 태어나 선정을 닦고 수행을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천안이 있고, 다른 하나는 과보(報)에 따라 얻어지는 것으로 색계의 하늘에 태어나 스스로 천안을 얻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慧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法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법안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혜안으로 말 그대로 지혜의 눈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지혜’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혜안은 지혜의 눈이고, 법안은 법의 눈이며, 불안은 부처님의 눈이라고 한다면 간단하게 끝나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도무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일체 모든 존재의 본바탕에 있는 본질, 불성, 참성품을 깨달아 아는 지혜로, 삼독심 등 일체 모든 번뇌가 사라져 근본불교에서 말했던 무상, 무아, 고, 중도, 연기의 이치를 밝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 눈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같은 근본불교 아라한들이 지니고 있는 눈이다.
성문은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음성을 듣고 수행하는 수행자를 뜻하며, 스스로 깨닫기 보다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야 비로소 수행할 수 있는 제자를 말한다. 이에 비해 연각은 독각(獨覺)이라고도 하며, 성문과는 달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를 말한다. 이 두 수행자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서 대승불교에서 강조되고 있는 보살은 자리이타의 정신으로 자신의 깨달음 보다 중생구제에 더 큰 원력을 세움으로써 원력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성불도 뒤로 미룰 정도의 굳은 서원을 가진 수행자를 말한다.
혜안은 바로 성문과 연각 수행자, 즉 자신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이들의 지혜의 눈을 말하고, 법안은 보살 수행자, 즉 자신의 깨달음 보다는 중생구제에 원력을 세운 이들의 눈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그동안 성문과 연각 등 혜안을 구족한 아라한을 소승이라고 폄하하면서 법안을 구족한 대승의 보살승을 완전한 이상적 수행자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사상이 나와 너를 나누지 않고, 생사와 열반을 나누지 않으며, 중생과 부처를 차별하여 나누지 않는 가르침을 볼 때 자신의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른 아라한을 소승이라고 폄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아라한의 입장에서는 나의 깨달음이 곧 온 우주 법계의 깨달음과 둘이 아니다. 나라는 한 생명은 곧 온 우주 법계의 전체 생명과 둘이 아니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며[一卽一切多卽一], 한 티끌 속에서도 시방세계를 담을 수 있다[一微塵中含十方]고 한 법성게(法性偈)의 게송을 생각해 보라. 한 사람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한 사람의 소승이 자신만의 깨달음을 위해 수행한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 법계의 깨달음이며, 전체 생명이 함께 깨달은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혜안을 구족한 아라한은 자신의 깨달음을 통해 모든 생명의 모든 중생의 깨달음을 실현해 보인 사람이다. 아라한의 지혜인 혜안을 통해 일체 모든 생명과 존재를 깨닫게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육조스님도 금강경 해설에서 ‘반야바라밀의 진리가 능히 삼세의 일체법을 낸다고 여기는 것을 혜안이라 한다’고 했다. 즉 하나의 진리가 삼세의 일체법을 내기 때문에 애써 삼세 일체법을 다 깨닫겠다고 나설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진리 그 하나를 깨닫게 되면 일체 모든 법을 깨닫겠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혜안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혜안이란, 지혜의 눈으로써, 진리의 세계에서 모든 중생들이 결국 하나임을 보는 것이며, 무분별의 세계에서 모든 분별상들을 하나로 회통하는 것이고, 하나가 곧 전체임을 깨닫는 것이며[一卽一切], 이치가 곧 현상계와 둘이 아니게 걸림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理事無碍法界], 공의 세계에서 색이 하나임[空不異色]을 일체동관하는 눈인 것이다.
반대로 법안을 구족한 대자대비의 보살은 일체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을 통해 자신 또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이다. 일체 모든 중생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곧 내가 깨닫지 못한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일체 모든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신도 완전한 깨달음의 향기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즉 보살은 법안을 통해 일체 모든 존재의 깨달음이 곧 나의 깨달음임을 실천하는 수행자인 것이다. 육조스님의 해설에 보면 ‘일체 불법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여기는 것을 법안이라고 한다’고 했다. 즉 일체 불법은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들 내면에 본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보살은 그 모든 중생들의 본래 갖추어진 불법을 일깨워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대자대비의 법안을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법안은, 자비의 눈으로써,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에서 곧 진리를 보는 것이며, 분별상의 세계에서 무분별의 진리를 보는 것이고, 전체가 곧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며[多卽一], 현상계와 현상계가 둘이 아니게 걸림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事事無碍法界], 색의 세계에서 공이 하나임[色不異空]을 일체동관하는 눈인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佛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불안이 있습니다.”
불안은 말 그대로 부처님의 눈이다. 부처님의 눈은 소승에도 대승에도 치우침이 없으며, 하나에도 전체에도 치우치지 않고, 부처에도 중생에도, 아라한과 보살에도, 생사에도 열반에도, 색에도 공에도 치우침이 없는 완전한 무차별, 무분별의 눈이다.
불안은 모든 중생들 개개인 속에서도 깨달음을 보며 깨달음 속에서 다시 중생들의 삶을 본다. 그렇기에 깨달아 부처가 되어도 구제할 중생이 없고, 중생을 다 구제하면서도 하나도 구제하는 바가 없다. 차별상 속에 무차별이 있고, 또한 무차별 속에 차별로써 무한히 나툴 수 있다. 전체가 곧 하나이며 하나가 다시 전체를 품고, 현상계와 진리계라는 나뉨을 뛰어넘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이 색과 다르지 않고,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임을 동관한다. 일체 모든 나뉨들을 거두어들여 동관하는 눈이 바로 일체동관의 부처님의 눈, 불안인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에 대해 여래가 말한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항하의 모래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하나의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고, 그 모든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부처님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를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항하의 모래의 비유는 법계의 세계가 한량없이 많으며, 그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그 많은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로 드신 것이다.
여래는 모든 국토의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다 안다.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그 모든 중생들과 그 많은 중생들의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부처에서 나왔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부처와 마음과 중생 이 셋은 다르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 그 나온 곳이 서로 다르지 않다. 일체를 한성품으로, 한바탕으로 관해 본다는 것, 일체동관한다는 것이 바로 그 의미다. 일체가 둘로 셋으로 천으로 만으로 갖가지로 나누어 볼 수 없으며, 돌이켜 관해보면 한성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한량없이 많고, 그 많은 사람들이 쓰고 사는 마음 또한 팔만사천을 넘을 것이지만 그 모든 마음, 그 모든 중생은 모두 한바탕에서 나왔다. 나뭇가지며 잎사귀들은 한없이 많고 다양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다 뿌리가 근원이 되어 나왔듯이, 이 세상의 모든 중생과 중생의 마음 또한 나온 곳은 하나다. 그 하나를 이름하여 부처라고도 하고, 불성, 신성, 하늘, 주인공, 일심, 본래면목, 어머니 대지, 도, 깨달음 이라고도 하는 것일 뿐, 그러나 어느 하나를 고정지어 이름을 명명해주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는 그 모든 곳은 하나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중생들의 마음이야 얼마나 많고 다양하고 복잡하며 상황따라 경계따라 인연따라 끊임없이 오고 가는가. 그러나 그 모든 마음이 저마다 실체가 있어서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인연이 오느냐에 따라 그 인연에 응하여 한 마음이 일어나고, 하나의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며, 또한 그 인연이 다함에 따라 자연스레 그 마음은 소멸되는 것이다. 육신도, 마음도, 생각도, 번뇌도, 업(業)도 모두 인연따라 잠시 왔다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는 것일 뿐이다. 그 어떤 것에도 고정된 실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듯 실체가 없이 인연따라 오고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인 것이다. 마음이라고 명명한 이름이 있을 뿐이지 마음의 실체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일체 모든 마음도, 물질도, 업도 수도 없이 내고 들이지만 그것을 내고 들이는 본 바탕은 허공과도 같은 한성품이요, 여래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여래가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모를 수 있겠는가.
바다가 물결을 모를 수는 없다. 물결은 제각기 인연따라 다 다르지만 결국 물결 또한 바다의 한 모습일 뿐인 것과 같다. 물결은 수도 없이 많은 인연을 만나 수도 없이 다양한 물결의 모습을 만들어내지만 그 물결의 바탕은 바다이지 별도로 물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별도로 물결의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물결의 성품은 바다일 뿐이다. 물결은 실체가 아니다. 다만 물결이라 이름 지었을 뿐, 그 근본은 바다다. 그러니 어찌 바다가 물결을 알지 못하겠는가.
그 까닭은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이라고 했다. 마음은 그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모두가 꿈과 같고 환영과 같으며 그림자와 같고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그 까닭은 바로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과거의 마음을 쓰면서 살아온 적이 없고, 또한 미래의 마음을 쓰면서 살아 온 적도 없다. 오직 우리가 쓸 수 있는 마음은 순간 순간이었을 뿐이다. 즉 과거라고 생각하고 미래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만이 있을 뿐이지 실제로 과거나 미래의 마음은 본 적도 직접 써본 적도 없다. 과거에 쓴 마음도 사실 그 때는 그 순간이었지 결코 그것이 과거의 마음이 아니었다. 과거나 미래라고 하는 것이 본래 없다. 다만 우리가 과거다, 미래다, 현재다 하고 이름지어 놓았을 뿐이지 우리는 늘 순간을 살고 있었을 뿐이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시간이 흐른다는 개념을 만들어 놓고는 우리 스스로 그 개념에 얽매여 과거 때문에 걸려서 괴로워하고 미래 때문에 걸려서 괴로워할 뿐인 것이지 본디 시간이란 개념 또한 텅 비어 공할 뿐이다. 오직 순간 순간 즉(卽)한 상황만이 있을 뿐 우리에게 시간은 없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그건 그냥 지어놓은 이름일 뿐이다.
과거라고 애써 이름지어 놓았지만 그 실체가 있는가. 과거를 살아 본 적이 있는가. 과거는 지나가지 않았다. 과거가 내 앞에 지나갔던 그 때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우리가 과거를 살아와 지금이라는 현재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순간 순간을 살아왔을 뿐 과거를 살아온 적은 없다. 과거는 텅 비었다. 실체가 없다. 백 번 양보 해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과거는 지나갔다. 과거의 마음은 이미 사라졌다.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마음을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는 없다. 과거라는 개념 자체가 말 그대로 개념이고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과거의 마음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말장난일 뿐이다.
미래 또한 실체가 없다. 미래라는 이름이 있을 뿐. 도대체 그 누가 미래를 본 적이 있단 말인가. 미래에 가 본 적도 미래를 살아 본 적도 없다. 백 번 양보해 아마도 언젠가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고 한들 그것은 언젠가 있을 예정일 뿐 현존인 것은 아니다. 예정이라는 것은 꿈이라는 말이고 환영이라는 말이며 물거품이란 말과 무엇이 다른가.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오지 않은 것이다. 실존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미래가 오는 순간은 이미 그것은 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내일이 있을 지 없을 지 그걸 어찌 알겠는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나를 살게 한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이었지 결코 과거도 미래도 아니었다. 그렇듯 미래라는 것이 텅 빈 환상일 뿐인데, 어디에서 미래의 마음을 찾을 것인가. 미래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이렇듯 과거도 미래도 텅 빈 비실체적 관념일 뿐, 다만 이름일 뿐이다. 그러니 과거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없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 우리는 과거나 미래를 살 수 없고 오직 순간의 현재를 살 뿐이니 현재의 마음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현재의 마음이 무엇인가. 현재의 마음은 순간 순간 인연따라 상황따라 조건따라 찰나로 생했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찰나로 멸하는 것일 뿐이다. 마음이 저 혼자 실체가 있어 만들고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현재라는 찰나 또한 마음은 없다. 본 바탕은 오직 무심(無心)이다. 본래 아무것도 없는 바탕에 인연의 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치면 인연에 따라 마음이 잠시 움직일 뿐이다.
자 이 사람의 일상을 보라. 아침에 동이 틈과 동시에 자연스레 일어나 자연스럽게 씻고 밥 먹고 출근을 한다. 그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해가 뜨니 내 눈도 떠졌고 눈이 떠지니 일어나 씻었으며 배가 출출하니 밥을 먹었을 뿐이다. 그건 애써 억지로 마음을 찍어 눌러 한 행위가 아니다. 다만 무심에서 무위(無爲)로 한 것일 뿐이다. 자연의 이치대로, 자연스럽게 함이 없이 한 것이다. 그런데 출근을 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차를 몰고 출근을 하는데 앞에 차가 끼어드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안에서 화가 치민다. 불같이 마음이 일기 시작한다. 화나는 마음으로 욕도 하고 싸움도 건다. 분한 마음을 잡을 수 없다. 출근해서도 마찬가지다. 쌓인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괴로운 마음이 생겨난다. 그로인해 하루 종일 기분이 상하고 답답하다.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진다. 그러다가 또다시 직장 상사에게 칭찬을 받고 일에 대한 포상을 받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진심은 사라지고 즐거운 마음이 생겨난다. 진심은 더 이상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리고 이제 남은 마음은 행복감이다. 그러다가 또 다른 상황을 만나면 그 상황에 따라 괴롭고 즐겁고, 외롭고 들뜨고, 수도 없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우리 마음이 이와 같다. 일상에서는 다만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일반적일 때, 별 일이 없을 때 우리 마음은 없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본래 마음이고 본성이다. 본래 우리의 최초는 텅 빈 무심이었고 무위였으며 무작(無作)이고 무주(無住)였다. 그러나 조건이 생겨날 때 자연스럽게 우리 마음도 함께 일어난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독자적이지 않고 조건적이다. 평상심은 조건과 상황을 만나면 그 상황에 따라 온갖 마음을 만들어 낸다.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조건이고 상황이다. 마음 안에서 스스로 온갖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조건과 상황에 따라 잠깐 그 상황에 맞는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다. 그렇듯 마음엔 실체가 없다. 현재에 일어나는 이 마음조차 고정된 실체가 없는 상황과 조건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 상황이 지나고 나면 그 마음도 사라지고, 다음 상황이 올 때 또 다른 마음이 생겨난다. 그렇게 조건에 따라,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디에서 현재의 마음을 찾겠는가. 그 마음은 실체가 아니다. 환영처럼, 꿈처럼, 물거품처럼 파도쳤다가 사라져갈 뿐인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마음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 과거의 마음에도 현재의 마음에도 미래의 마음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 마음이 없는데 어디에 집착할 것인가. 집착할 주체도 없고 집착의 대상도 없다. 일으킬 마음도 없고 집착할 마음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일으켜 마음에 집착한다. 그러니 우리가 괴롭다, 혹은 즐겁다, 외롭다, 슬프다 하는 그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또한 그런 마음에 스스로 얽매여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모습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과거에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지금까지 붙잡고서는 그 과거의 마음에 얽매이고 집착하며 괴로워하는 일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먼저 분별하고 계획하고 상상하고 추측하면서 거기에 울고 웃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또한 현재에 주변 상황에 따라 실체없이 찰나생 찰나멸하는 마음에 휘둘리는 것은 또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이 모두가 마음 없음, 무심의 도리를 어기는 데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 모두가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는 금강경의 이치에 어두운 데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공연히 마음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공연히 스스로 그 마음에 빠지고 집착하며, 또한 공연히 그 마음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다가 그 마음이 다하면 아쉬워하고 서글퍼하는 이런 어리석고도 공허한 일들이 우리 삶에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아니 일어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그러니 우리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금강경에서는 바로 그 점을 올바로 볼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마음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은 다 개시허망일 뿐이며, 마음 그 자체도 없다. 오직 무심만이 이 허공같은 세상에서 환히 빛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마음 없음. 무심의 이 도리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무심하게 모든 일을 다 하면서도 무심하여 걸림 없을 수 있어야 한다. 본래 없던 마음을 애써 만들어내어 그 만들어 낸 것에 한껏 휘둘리다가 수행을 통해 그 마음을 없애고 비워야 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무심이었음을 보면 된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닦을 것이 없다고 했다. 본래불이라고 했다. 깨닫고자 하거든 공연히 수행하고 마음을 닦고자 할 것이 아니라 본래 마음 없는 도리를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까닭은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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