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의 문제, 생명이 먼저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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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관찰 감성일기

현대 사회의 문제, 생명이 먼저다

목탁 소리 2009. 8. 26.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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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긴 해도 벌써 아랫지방에서는
씨앗을 뿌리고 있을 것 같다.
한 2-3주만 지나면 이 곳에서도
씨앗을 뿌리고 한 해의 농사일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지난 가을부터 겨우내 조금 조금씩
일구어 놓은 도무지 밭 같지 않은 야생의 밭이
이제 새봄을 기다리고
새로운 생명의 움틈을 기다리고 있다.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에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밭을 찾는다.
물론 말이 밭이고, 내 생각에서나 밭이지
다른 사람들은 아마 아무도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것이다.
남들 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그냥 야생의 땅일 뿐일테니까.

칡이 크고 작은 나무들을 타고 올라가서
오랜 세월 그 아래 나무들을 다 죽여 놓았고
작년 처음 이 도량에 왔을 때는
이미 칡들의 세상이 되어 있던 곳이니까.
나 또한 그 때는 이 곳을 밭으로 쓸 생각을
도무지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저 내가 겨우내 행한 일이라고는
칡 줄기들을 좀 잘라내주고
그 아래에서 햇볕한 번 못 보고 그냥 죽어버린
툭 치면 뿌리쪽 줄기가 그냥 픽 쓰러지는
썩은 나무들을 치워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아래 땅은 참 기름지고 푹신푹신하다.
모르긴 해도 이 곳에 씨앗을 뿌리고
온갖 채소며 먹을거리를 심고 나면
아무런 거름 없이도 충분히 잘 자랄 것 같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솟아오를 칡넝굴이며
온갖 야생의 풀들을 어느정도 뽑아줘야 하는 힘은 들겠지만.
그런데 풀을 뽑는 일도 될 수 있다면
너무 고생스레 하지 않을 생각이다.

풀도 제 생명이 있는데
함께 살아야 하고 공생해야지
채소도 함께 경쟁하며 건강해 질 테니까.

너무 키가 자라 채소를 완전히 덮을 정도거나
채소가 햇볕을 못 받을 정도까지 그냥 놔두면 안되겠지만
어느정도는 함께 살아가도록 해 둘 참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잡초에게 양분을 다 빼앗겨서
채소는 잘 자라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욕심부려 밭을 일굴 생각은 아니니까 괜찮다.

사실은 하나의 연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아니 연구라고 하기 보다는 관찰을 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관찰
또 농사짓는 일에 대한 관찰
식물과 생물 그리고 대자연의 모든 생명에 대한 관찰
그러한 관찰을 통해
어떻게 하면 좀 더 법신 부처님의 숨결인
대자연에 가까이 다가가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자연을 헤치지 않으면서도 우리 인간이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 작은 관찰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지금 전지구적으로 현행되고 있는 농사라는 것은
이미 농사로써의 의미를 잃었다고 본다.
농사는 생명을 가꾸는 일이고,
참된 삶의 본질로 다가서는 일이며,
우리의 본래자리로 되돌아가는 숭고한 수행의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의 농사라는 것은
생명을 죽이고, 자연을 파괴하며,
더불어 인간의 몸과 마음까지도 함께 파괴하고 있고,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양을 생산해 내야 하는
인간 욕심의 극도한 결과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현대 농사의 문제는 너무나도 많다 보니
다 열거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우리가 꼭 알고 넘어가야 하는 점이 몇 가지 있다.

물론 이 말은 농사 뿐 아니라
현대인들의 개발논리며 경제논리,
산업화 과학화 기계화 정보화 등등을 비롯하여
현대인들의 의식주에 관련된 그 모든 삶의 실상에 대한
전반적이고, 거시적인 문제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농사문제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지금의 나와는 너무 동떨어진 문제라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이것은 나와 너무나도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올바로 온전히 알게 되면
내 삶이 조화롭고 평화롭게 변화할 것이고,
내 주위의 대자연과의 영적인 내밀한 교감을 나눌 수 있게 되며,
내 몸과 마음도 자연의 그것처럼이나 진리와 하나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는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농사나
의식주의 생활을 비롯한 모든 경제활동들이
자연환경의 엄청난 파괴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회가 발전을 하고, 개발을 하고,
도시화 과학화 기계화 세계화 등의 모토에서 빚어진
엄청난 개발이념들과
그러한 개발로 인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편리함들은
그 이면에 우리 삶의 터전이자 우리 생명의 터전이고
모든 생명의 근원자리인 불성이자 법신인
대자연의 파괴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개발로 인해 편리를 누리는 만큼
대자연은 파괴로 인해 죽어가고 있다.

우리가 보다 많은 먹거리를 생산해 내려고,
또 보다 적은 노동력을 소비하기 위해
농약이며 비료 제초제를 뿌리고 있을 때,
우리 생명의 터전인 땅은 몸살을 앓고 있다.

인간의 욕심은
그대로 자연을 죽이고 있으며
자연이 죽게 되면
머지 않아 우리 인간 또한 함께 죽고 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간들은
그 욕심의 달콤한 유혹에서 도무지 벗어나려고 하지를 않는다.

도시를 만들어 빌딩을 세우고,
온갖 편리한 시설물들이 늘어갈 때,
이 지구상의 또다른 곳에서는
산이 파헤쳐지고, 나무가 잘려나가고
이 산하대지 법계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편리를 희생양으로
대자연은 모조리 몰살될 위기에 처해있다.
그리고 그 위기는 다름아닌 바로 우리들의 위기인 것이다.

요즘 들어 사회적으로 환경 환경 하는 말이 유명해진 이유도
바로 이러한 자각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환경을 파괴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라는 것을 어리석은 이들은 여전히 모르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벌써 2,500여 년 전부터
온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들이
인간에서부터 하찮은 미물이며 식물 동물 할 것 없이
모두가 동등한 불성을 지니고 있고
모두가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였음을 외치고 계셨지만,
아직까지도 그 외침은 철저히 현대인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이러한 요즘의 농사나 요즘의 개발 논리는
불을 보듯 뻔한 결과를 준비하고 있다.
분명 이렇게 나가다가는
개발로 인해 이 지구가 완전히 폐허가 될 것은 뻔하다.

자연의 파괴에 기초한 인간의 편리와 행복은
언제까지도 유지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흡사
대자연 법신이신 부처님을 죽여
내가 편리하게 살아보겠다고 하는 생각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한 재앙은 벌써 눈에 보이고 있다.
오존층이 파괴되고,
지구온난화로 남극 북극의 빙하고 녹아내리고 있고,
해수면이 상승하여 얼마 안 가 유럽의 많은 나라는
바다 속으로 잠길 것이란 예고도 있으며,
인간의 파괴로 인해 자연이 몸살을 앓고 있는 징조는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각종의 기상이변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전 세계가 과거에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이상한파, 폭설, 폭우, 최악의 태풍, 기록적인 더위와 기록적인 추위 등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중이며,
벌써 92년도에 [월드워치]라는 환경감시기구에서는
‘지구의 온실효과 저지에 나서기 위한 최후의 시간은 이미 지났으며,
다음 세기에는 광범위한 생태계 파괴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라고 경고하고 있다.

기상이변이며 지구온난화는 그대로 농사에 영향을 주어
먹을거리의 생산에 재앙적인 규모로 큰 차질을 가져올 것이며,
삼림 황폐화, 사막화, 물부족 현상이며, 자연생태계의 파괴등의
그 밖에도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아니 벌써부터 그런 재앙은 여러 곳에서 심각하게 감지되고 있다.

지구의 허파인 삼림이 80년도 10년 간
전체의 8%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는 1초에 축구장 1~2개의 넓이가 사라지는 것이고,
1년에 남한 면적의 숲이 사라진다는 계산이 된다고 한다.
80년대에 그러하였으니 지금 이 시간은 몇 배 이상이 될 것이다.

개발과 발전으로 인해 온갖 환경오염이 일어나고 있고,
온갖 환경병들이 우리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광우병의 소나 조류독감이나 사스도 마찬가지고
요즘 아이들 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유행하는 아토피도
그 증세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과거에는 있지도 않았던
온갖 기이한 질병이 발생하고 있고,
환경호르몬으로 인해 생물들은 암수의 성 구분조차 불분명해 지고 있으며,
하루에도 몇 백종 가량의 생물이 멸종되고 있고,
도시인들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크고 작은 환경으로 인한 건강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한 것들은 너무 많아서
도무지 하나 하나 열거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
얼마 못 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이라는 것은
다 파괴될 것이고, 재앙이 오게 될 것임은 너무나도 자명한 현실이다.

그런데도 왜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인가.
왜 방관만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가장 중요시 해야 하는 것은
언젠가 다 파괴되고 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고 누릴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농사를 지을 때도
농사짓는 일이 환경 파괴에 기초하여
언젠가는 재앙을 불러 올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유지하면서
언제까지고 지속 가능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환경과 대자연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발논리로 무조건 발전시키고 개발시키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개발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고 있는가의 여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그렇지 않은 개발이라면,
환경 파괴를 기초로 하는 개발이라면,
대자연 법신 부처님의 몸을 파헤치고 하는 개발이라면,
차라리 우리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

옛날로 돌아가는 것,
조금 불편한 삶을 감내하는 것은
곧죽어도 싫다고 하고,
이제와서 어떻게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냐고 탓하기 전에
우리 앞에 뻔하게 펼쳐질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앞으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사람답게 사느냐,
얼마나 개발을 시켜 편리하게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생존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얼마나 더 편리하게 잘 살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살 수가 있기는 한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인 것이다.

이제 우리 인간은
대자연의 주변인이 아닌, 대자연의 군림자가 아닌
바로 대자연 그 자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 모든 인간은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동등하게 모든 식물이며 대자연의 모든 요소들도
똑같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
온 우주법계의 모든 존재는 불성의 나툼이라는 점에서
어느 하나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자연은 그대로 불성의 나툼이기에
진리의 모습 그대로를 삶 속에서 보여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진리답게 사는 모습이
바로 대자연의 운행인 것이다.

풀 한포기며, 나무 한 그루,
산과 계곡, 바다와 강,
바람과 구름, 햇빛과 흙과 하늘과 별
숲 속을 떠도는 모든 동물, 모든 생명들
이러한 대자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흐름에 맞춰
아무런 욕심도 없이 그저 조화롭게 살아갈 뿐이다.
진리답게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이
대자연의 운행에 거스르며
부처님의 숨결인 대자연을 파괴하고 산다.
불성의 씨앗을 다 죽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만이 업을 짓는다.
육도 윤회 중에서 인간세계가 업을 짓는 세계고,
나머지 세계인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천상에서는
그대로 업을 받으며 대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때인 것이다.

대자연의 순리에 따르니
따로 업을 지을 것이 없는 것이다.
대자연이 그러하고,
온갖 꽃들이며 풀과 나무, 구름과 하늘, 태양과 바다,
우리가 흔히 짐승만도 못한 인간 운운하던
그 짐승들조차 실은 대자연의 운행을 따르고 진리답게 살고 있다.

깨달음을 얻고 싶고,
부처님을 닮고 싶다면 대자연을 닮으면 된다.
다자연을 가까이 하고,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며 살고,
자연 속에서 우리도 부처님의 삶의 모습을 배워야 한다.

가장 수행자 다운 것은
가장 대자연 다운 것이다.

어린 아이의 천진함과
큰스님들의 천진함은 그대로 자연을 닮는 법이다.
닮는다기 보다는 자연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때
그 깨달음이란 것은
‘나’라는 상을 깨고,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이 사라지며
내가 곧 우주가 되고 대자연이 되는
그 숭고한 ‘하나’의 깨우침의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진리를 실천하고,
수행자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대자연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봄이 와서 꽃이 피면
내 마음에서 새봄의 꽃이 피어야 하고,
한여름 녹음이 우거지면
함께 내 속 뜰도 푸르러 져야 하며,
가을 단풍이 산천을 수놓을 때
내 마음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하고,
겨울이 되어 모든 낙옆을 떨구고 침묵을 할 때면
내 마음도 내적인 침묵의 수련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수행자의 삶이다.
자연을 닮은 수행자,
한 송이 꽃을 닮고, 한 그루 나무를 닮고,
저 고고한 산을 닮으며, 광활한 바다를 닮는 것이
모든 수행자의 나아갈 길이 아닐까.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는데 다시 정리하자면,
농업이며 인간 의식주의 경제활동의 모든 기초는
첫째, 지속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것만이
우리 뿐 아니라 우리 후세들에게까지,
또 우리의 몸과 마음에 이르기까지
온전한 삶의 양분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이다.

대자연 환경의 파괴에 기초한 개발이 아닌
어느것도 파괴하지 않는
그래서 땅을 살리고, 환경을 살리며, 생명을 살리는
지속가능한 농사, 지속가능한 의식주, 지속가능한 경제활동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 그러한 삶을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점이기도 하면서,
이 문제 때문에 농사 문제를 비롯한 수많은 경제활동들이
근원적인 파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지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먹을거리를 만드는 사람(생산자)과
먹거리를 사 먹는 사람(소비자) 사이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좀 단순한 듯 싶지만
이 단순한 문제로 인해 수많은 문제가 벌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모든 경제규모가 커지고,
거대한 자본가 기업가들이 이 세상의 경제를 쥐고 휘두르면서
엄청난 자본 권력으로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으며,
요즘 유행하는 세계화라는 정말 없어져야 할 말들이
활개를 치게 되는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가 너무 멀다.
거리가 멀면 멀수록 ‘먹을거리(생산품)’는 더욱 포장이 되고,
저장이 되고, 운반이 되고, 선전이 되고, 광고가 되며,
방부제가 투입되고, 가공되어지는데 필요한 돈이 늘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감자를 심은 농부와
감자를 사 먹는 사람이 있을 때
생산자와 소비자가 가까우면
별다른 지출이나 돈 쓸 일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쓸데없는 낭비가 없어지게 된다.

그런데 미국에서 생산한 감자를
한국에까지 수입하여 팔아 먹기 위해서는
수많은 중간과정에서의 쓸데없는 부수적인 것들이 추가되는 것이다.
감자를 수송하는데 드는 비용,
오래 보관하기 위해 방부제 같은 것들을 투여해야 하고,
포장하거나 광고해야 하고,
그냥 감자만 으론 잘 안 팔리니
페스트푸드점의 감자나, 과자 등의 새로운 먹거리로
몇 단계의 가공을 거쳐야 하는 등 수많은 부수비용이 들어간다.

가공을 많이 하게 되면
단가가 100원이었던 감자는
새로운 상품이 되어 1,000원도 넘게 팔려나간다.
그러나 그 감자 본연의 영양이나 생명력은
이미 다 죽어 있고,
설탕이나 온갖 조미료 등으로 입맛에만 맞추어
비싼 가격으로 팔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래된 미래’를 쓴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이번에 한국에 와서 사상강연을 하였는데,
특별히 이 점을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글에 의하면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수퍼마켓에서 지불하는 식품값의 5퍼센트 만이 식품 그 자체 값이고,
나머지 95퍼센트가 부수적인 돈으로 나간다고 한다.

감자 하나를 그냥 사면 500원이라면
가공하고 운반하여 상품을 만들어 팔면 9500을 받고 판다는 말이다.
바로 이 95%에 해당되는 것이
요즘의 산업사회, 개발과 발전, 과학의 발달이 가져온
눈부신 변화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눈부신 변화라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철저한 환경파괴와 자연파괴를 가져온다.

예전 같으면 500원짜리를
500원 어치 영양가 그대로 싱싱하게 그냥 500원에 살 수 있었는데,
이제는 500원짜리를
가공하는 기술, 운반하는 수송비, 포장하고 광고하는 비용 등으로
돈을 더 붙이고,
거기에 영양가과 신선도 등은 완전히 바닥이 나 버린 것을
9,500원에 사 먹으며 행복해 한고,
개발이 가져온 이익에 흐뭇해 하고 있다는 말이다.

참 말도 안 되는 계산이 아닐 수 없다.
도무지 이제와서는 대책이 안 선다.
모든 사람들이 개발주의자가 되어 버렸고,
그러한 개발의 달콤한 이익에 이미 맛을 들여 버렸으며,
그나마 개발이 덜 된 나라, 그래서 행복한 나라조차
죄다 개발을 해야 한다고 강제로 파괴를 일삼고 있으니
이제 머지 않아 이 지구의 미래, 인류의 미래는 뻔해 보인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에서 보면
티베트의 라다크라는 작은 나라에서
서양문물이 들어야 개발이 되기 이전과 개발 된 뒤에
얼마나 많은 것이 바뀌었고,
얼마나 많은 행복을 빼앗겨 버렸는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가져다 주었는지를
너무나도 실감나게 현실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 한 가지 더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이러한 어리석은 일들은 세계화라는 허울좋은 말의 결과이며,
대량생산 대량수송 대량소비 등 ‘대량’적으로 만들어 내는
대기업이나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큰나라에서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는 점이다.

500원짜리를 500원에 사 먹기 위해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가까이 있어야 한다.
신토불이라는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내 몸이 태어난 곳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들어낸
가장 가까운 음식을 먹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자연환경의 파괴도 없어지고,
먹을거리며 생산품의 생명력도 더욱 왕성할 뿐 아니라,
보다 욕심을 줄일 수 있고,
소박하고 살뜰하며 정직한 농부며 사람들이
모두 함께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터전이 된다.

또한 그렇게 되면
지금같은 거대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거대 기업은 나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자가 되는데
소농들이나 소규모 생산자며 사업자들은
날이 갈수록 가난해 지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 또한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벌써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가면
벌써 수많은 부수적인 돈이 붙고,
생산물을 돈을 가진 거대기업들이
요란하고 거창한 과학기술, 식품기술로 몇 단계씩 가공하면
거기에 엄청난 쓸데없는 돈이 붙게 된다는 것이다.
쓸데없고 필요없는 재화가 낭비 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었을 때,
그런 거대한 생산과 소비의 체계가 만들어졌을 때는
거대 기업들만 살아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 놓고 국가에서는
국가 경제의 튼튼한 바탕이 되고,
나라 전체의 재정 규모가 커지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이러한 거대 기업의 수출 등을 장려할뿐더러 도와주고 있다.

정부에서야 어떤 한 사람이 집권하고 있을 때
전체 경제규모가 커지고,
수출이 커지고
그러면 자연스레 경제대통령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대통령 잘 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당연하겠지...

이 모든 것이 대량생산, 대량소비...
등등 ‘대량’이 만들어 낸 욕망의 결과인 것이다.
‘대량’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이다.

대량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소비도 대량으로 시켜야 하고
지역사회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낸 것을 다 소비할 수 없으니까
다른 나라에까지 수출해야 하고,
더 잘 팔리게 하기 위해 광고하고, 포장하고, 가공하고
온갖 쓸데없는 비용이 지출되는 것이란 말이다.

단순한 예로 농산물의 대량생산의 폐해를 살펴보자.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심 때문에 농사도 대량으로 짓게 된다.
농사를 대량으로 지어야 돈을 많이 버니까,
한 가지 작물을 대량으로 심게 되었고,
한 가지 작물만 대량으로 심으니까 그 작물을 좋아하는 곤충들이 많이 모이고,
그러다 보니 그 곤충을 죽이려고 농약도 쓰고 그러는 것 아닌가.

농토에 여러 가지 자신이 먹을만큼의 작물을
다양하게 심어 놓으면
다양한 작물이 있다 보니
다양한 해충과 익충들이 함께 모여들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태계의 균형이 잡혀
조금 해충의 피해를 입는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선에서 균형이 잡히게 마련이다.

또한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니
직접 손으로 풀을 뽑을 수 없게 되어
손쉬운 방법으로 제초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량생산의 주 목적이
많이 생산하는 것이다 보니 비료를 많이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대량으로 생산되니까
그 지역에서 다 소비할 수 없고,
-물론 다른 지역에 내다 팔기 위해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지만-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켜야 하고,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냉장고 같은 기계를 필요로 하고,
또 많이 팔아야 하다보니 광고도 포장도 해야 되며,
너무 많은 것이 다 소비가 어려운데다
사람들 입맛에 달고 유혹하기 쉬운 방법을 동원하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가공한 제품을 만들게도 되는 것이다.

이렇게 대량생산의 폐해는 심각하다.
아마도 모든 문제가 ‘대량’에서 시작되는게 아닌가 한다.

그러면 이상에서 말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이젠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참 어려운 대답이 아닐 수 없다.
정말이지 엄청난 속도로 빨리 달려오는 기관차를
눈앞에 보이는 탈선에서 구한다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은 대답이다.
또한 혼자만 바꾼다고 다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국가를 짊어지는 사람들이나
국가의 경제를 짊어지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온전히 깨달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실의 어리석은 달콤한 임시 행복은
그들에게 가장 행복한 꿀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지역 더 개발시켜 달라고 국회의원을 뽑고 대통령을 뽑지,
개발논리를 이제 좀 버리고
환경을 지켜나가며, 지속가능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뽑지 않았다는 점도 큰 문제다.

다시말해 세상이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모든 이들이
개발 논리의 달콤한 유혹에 모두 빠져들어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과학의 발달이 가져온
전문화 되고, 심화된 분별 지식의 찬양을 이제 버리고,
거시적이며, 전체적인 안목으로
온 우주 법계를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주 작은 하나의 해답을 내려본다면,
우리 모든 개개인이 지혜로워져야 하겠고,
지금 우리에게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볼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작은 공동체들을 이루면 좋겠고,
그 작은 공동체 속에서 자연을 오염시키지 않고,
환경을 파괴시키지 않으며
지속가능한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다면 좋겠다.

또한 그 안에서
최대한의 자급자족을 하고 살 수 있다면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간격이 없어질 거고,
그러면 쓸데없이 낭비되는 재화를 줄일 수 있으며
보다 소박하고 단순하며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 이 시점에서는
엄청난 규모로 성장해 버려
성장논리, 개발논리를 바꾸기 힘들고,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를 세울 수 없으며,
나라를 바꾸고, 세계를 바꾸기가 많이 어려워 졌다.

그렇다고 전혀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갑자기 정부를 바꾸고,
거대 기업들을 바꾸기 어렵다 보니,
우리가 사는 곳에서
나 스스로가, 또 우리 스스로가
작은 공동체, 작은 경제활동, 작은 욕망을 통해
그러한 삶이 얼마나 조화롭고 평화로우며
온전한 삶의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대자연 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우리 마음의 농사도 함께 지으며
세계로 세계로 대량적으로 뻗어나갈 것이 아니라
안으로 안으로 가꾸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것이 어렵다면
당장에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스스로 작은 농토라도 일구는 것이 아닐까.
요즘은 주말농장이라는 것이 많이 생겨나
스스로 안전한 먹거리를 만들어 먹는 분위기가 한창이다.

스스로 농토를 가꾸는 일을 통해
환경파괴를 스스로 막고, 좀 더 지속가능한 먹거리를 생산할 수 있고,
내 스스로가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되는 길
그래서 그 간격이 ‘0’으로 하는 일이 중요할 것 같다.

내 스스로, 혹은 그것이 어렵다면
지역적인 작은 공동체 같은 곳에서라도
될 수 있다면 최대한 욕심을 줄이고, 자급자족할 수 있을 때,
그런 참된 농부들, 참된 공동체들이 많아질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좀 더 조화롭고 평화로운 부처님의 땅이 되지 않을까.

나부터, 개개인부터, 참된 농사꾼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생명을 가꾸고, 마음을 가꾸며
대자연의 순리와 하나되어 물 흐르듯 자연스레 삶을 흘러가는
그런 자연을 닮은 수행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너무 말이 많고 거창해 졌다.
무언가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세상이 너무 많이 복잡해 지고,
현재의 문제가 너무 많이 얽혀 있다보니
그 문제를 몇 글자로써 풀어낸다는 것도 많이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세상을 바꾸려 하고,
내 바깥을 바꾸려 하기 보다는,
그러한 문제를 자각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먼저 바뀌고,
내가 먼저 대자연과 교감을 이루며,
내가 먼저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아야 하겠다는 그냥 그런 말이다.

내가 먼저 변해야
세상이 따라 변하는 거니까.

내가 변하고
내 가족이 변하고
내 주위의 사람들이 변하고
우리 공동체가 변했을 때
우리 사회가 함께 변할 수 있고
이 나라가 이 세상이 변하는 거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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