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울산바위에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인연따라 어떨 때는 화가 나기도 하고
또 인연이 다하고 나면 화가 사라지기도 하며,
또 상황 따라 어떤 때는 불같은 욕심이 치솟기도 하고
질투심, 고민, 집착, 증오, 사랑 등 수많은 감정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하기야 우리의 인생이란 것이 이런 감정적 기복의 연장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마음은 혼자서 독자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절대 저홀로 일어나는 법은 없다.
그럴만한 인연, 상황이 생겨야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평소 가깝던 친구가 별일 아닌 것으로 갑자기 욕을 한다면
그런 상황에 따라 마음에서는 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같이 욕도 하고, 때로는 주먹질까지 하게도 된다.
그렇게 같이 붙잡고 화를 내고 싸우고 나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 때부터 그 친구와의 관계는 불편해지고, 괴롭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친구가 그 때는 좋지 않은 일이 있어
나도 모르게 그랬다며 사과를 요청하게 되면 또 다시 마음은 금새 풀어진다.

이처럼 인연따라 우리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진다.
때로는 이렇게 작은 화가 일어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도저히 억누르기 어려울 만큼 큰 화가 생기기도 하고,
삶에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경계로 끝간데 없이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상황이, 이런 인연이
우리 삶 속에서는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경계가 생겨나기 때문에
우리 삶도 끊임없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 경계에 휘둘려 마음이 괴로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일생일대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처럼 인연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어떻게 잘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명상이라는 것, 수행이라는 것도
이처럼 인연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어떻게 잘 다스릴 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그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가.
친구가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욕을 해서 화가 났다고 생각해 보자.
혹은 직장 상사가 '그것도 못해?' 하며 사람들 앞에서 화를 냈다고 생각해 보자.
조금 예민하게 그 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화를 살펴보자.

친구가 욕을 하는 순간, 직장 상사가 '그것도 못해'하며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주는 순간,
그 마음을 조금 깊이 있게 지켜보자.
그 순간 욕을 얻어 먹는 순간은 어떤가.
그 순간에 내가 있는가?
그 순간에 욕을 얻어 먹는 내가 있는가?

조금 깊이 지켜보라.
욕을 얻어 먹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없다.
오직 그 순간에는 '화'만 존재한다.
아주 맹목적이고, 본능적으로 당장에 생각할 것도 없이 '화'가 올라온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법이라는 이치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인연이 생기면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뒤따른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욕을 하는데도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아무리 성숙하고, 젊잖으며, 수행력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대뜸 욕을 얻어먹고도 당장에 화가 올라오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몽둥이로 한 대 얻어 맞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부분이 아픈 것하고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프다.
마찬가지로 욕을 얻어 먹으면 자연스럽게 화가 올라온다.

그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때려서 아픈 것이나, 욕을 얻어 먹고 화가 나는 것이나
그것은 이 세상의 이치, 인연법의 이치에 따른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걸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그것을 가지고 '나는 왜 이렇게 화를 잘 내지?'하고 괴로워 할 것도 없다.

이처럼 인연이 서로 화합하여 접촉하는 순간에는
'나'라는 관념이 사라지고,
아니 '나'라는 관념이 생길 것도 없이
저절로 '화'라는 것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지금 여기까지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는가?
오히려 욕을 얻어 먹고도 화가 안 일어나거나,
때리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인 것이지,
욕을 얻어 먹고 화가 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반증이다.

그것은 자연의 변화라는 흐름에 따라
구름이 생겼다가 소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연따라 수증기가 구름이 되었닥가 다시 비가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 오면 숲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수확을 하며 열매를 맺었다가 단풍으로 떨어지고,
겨울이 되면 앙상한 가지가 남게 되는
이 자연스러운 자연의 변화와 무엇이 다른가.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우리 인간에게도 자연의 변화와 같은
자연스러운 변화가 끊임없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다음의 순간부터 생기기 시작한다.
욕을 얻어 먹는 순간 화가 났다면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인데 그것을 가지고 시비할 것이 무엇인가.
전혀 거기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결과에 시비를 건다.
즉, 그 순간에 아상을 개입시킨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화'만 있었지 거기에 '나'는 없었다.
그저 '화'가 났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화에 '나'를 개입시키기 시작한다.
그저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 '화'를 자기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나는 화가 났다' '나는 너 때문에 화가났다'
'너가 나를 화나게해?' '너가 나에게 욕을 해'하고
거기에 '나'를 개입시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때부터 그 '화'는 객관적이고 자연스런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는 것이 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연이어 그 '화'에
'내 생각'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감히 너가 나에게 욕을 해?'
'화 내는 것은 나쁜 것이니 화를 참아야 해'
'저 사람이 내게 화를 내니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저 친구가 나를 우습게 생각하고 무시하고 있구나'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 생각들은 아주 미세하고 순식간에 지나가는 생각일 지 모른다.
그러나 그 생각들의 이면에는 분명 '나'라는 아상이 개입되어 있다.

이제 그 '화'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 '화'는 '내 화'가 되어버렸다.
'욕을 얻어 먹은 나',
'화를 내면 안 되는 나',
'무시당하는 나'
그렇게 수많은 '나'가 생겨나게 된다.

이제 조금 전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버렸다.
조금 전 상황,
즉 '나'가 개입되기 이전,
오직 '화'라는 것만이 있던 상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나'가 개입되면서 그것은 '괴로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그 화로 인해 괴롭고 답답하다.

만약 처음 '화'가 일어날 때
그 때 '나'를 개입시키지 않고
다만 '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내버려 두고 다만 바라보기만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화는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났기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 두면 스스로 타오를 만큼 타올랐다가
인연이 다하면 저절로 소멸될 것이다.

마치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구름이 일어났다가
저절로 구름이 짙어져 먹구름으로 변했다가
인연이 다하면 저절로 비로 내려 대지를 적시는 것과 같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다.
우리 몸 또한 자연이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를 따른다.
그저 내버려두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꽃이 피었다가 사라지듯이 스스로 소멸되었을 것이다.

'화'를 '내 것'으로 붙잡지 말라.
거기에 '나'를 개입시키는 순간,
온갖 '내 생각' '내 분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들 것이다.
연이어 불같은 감정이 생겨나고,
불같은 말을 내뱉으며, 몸 또한 불같은 행동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욕을 얻어 먹으므로써 자연스럽게 화가 일어났다면
다만 내버려두고 지켜보기만 하라.
마치 내 일이 아닌 것 처럼,
그저 영화나 드라마를 보듯 그냥 순수하게 지켜보기만 하라.

거기에 해석이나 판단, 분석, 생각, 아상을 개입시키지 말라.
상대방의 행동에 그 어떤 판단이나 해석을 갖다 붙이지 말고,
내 화에 그 어떤 도덕적 판단이나, 분별, 구분을 가져오지 말라.

'나'와 '화'를 구분하지 말라.
관찰자와 관찰되어지는 대상을 나누지 말라.
다만 바라보는 것, 그것이 되라.
'화'가 났다면 그저 '화' 그것이 되는 것이다.
'나'와 '화'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순간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 그 화는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무아, 즉 '나는 없다'는 것이다.
단지 인연따라 '화'가 났을 뿐이지 거기에 '나'는 없다.
그저 '화'가 있을 뿐이다.
거기에 화난 나는 없다.

내 스스로 '내가 화났다'라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바로 그것이 없는 나를 실체적인 있는 나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나를 실체화하게 되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니 문제가 커지고 만다.

화는 중립이다.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실은 '화나는 상황'이 있을 뿐이지 '화'는 없다.

괴로움도 중립이다.
사실은 괴로움이라는 것도 이름붙인 것에 불과하지
그것도 괴로운 상황일 뿐이다.
다만 '괴로운 상황'이 있을 뿐, '괴로움'은 없다.
마찬가지로 '괴로운 상황'이 있을 뿐이지
'괴로운 나'는 없다.

괴로움이라는 것도, 괴로운 나라는 것도,
화라는 것도, 화를 내는 나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실체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해석을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니 '나'를 개입시키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놓아두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관(觀) 수행이라는 것이
무아(無我)에 이르는 근본불교의 수행이며,
아상(我相)을 타파하는 금강반야경의 수행이고,
연기 법칙을 깨닫는 수행인 것이다.

다만 '화'가 일어난
그 연기적 인과성, 즉 연기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뿐,
거기에 그 어떤 판단이나 해석을 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랬을 때 그 '화'에 '나'를 개입시키지 않으며,
'나'와 '화'를 나누지 않으며,
자아라는 관념을 실체화하지 않고,
'나'라는 상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인연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명상의 길이다.







[사진 : 해인사]

노여움은
사나운 불보다도 더 무섭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 자신을 잘 지켜서
노여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공덕을 파괴하는 도둑은
노여움보다 더한 것이 없다.

[유교경]



공덕을 파괴하는 도둑은 성냄보다 더한 것이 없다.
성냄이야말로 그동안 지어왔던
모든 공덕을 파괴하는 가장 큰 독이다.

화를 많이 내는 이유는 아집(我執) 때문이다.
그 중에도 ‘내 생각이 옳다’는
자기 생각에 대한 고집이 큰 사람일수록
화의 불길을 피할 수는 없다.

내 견해가 옳다는 고집이 크다보니
다른 사람의 견해는 그르다고 생각하게 되고,
‘너는 틀렸고 나는 옳다’는 생각 때문에
절대 내 생각을 굽히지 않고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성냄과 화와 싸움이 생겨난다.
자기 생각에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타인은 또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주장하니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옳다는 고집을 놓아버리고,
옳고 그르다는 분별을 놓아버리는 것만이
올라오는 불같은 화를 잠재울 수 있다.

이처럼 ‘내가 옳다’는 아상을 버리는 것,
그것이 화에게서 나를 잘 지키는 첫 번째 방법이다.

두 번째로 상황 따라 올라오는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화나는 순간, 성냄이 일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말고
잘 관(觀)하는 길이다.

화가 날 때
화가 난다는 것을
객관이 되어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올라오는 화를 관찰하면 화는 사라진다.
아니 도대체 화를 찾으려 해도
어디쯤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화와 나 사이의 거리를 띄우고,
멀리 떨어져서 나와는 상관없는 것을 지켜본다는 마음으로
노여움이 올라오는 순간을 지켜보라.

이처럼 아집을 놓아버리고,
마음을 관하는 것만이
자기 자신을 잘 지켜서
불같은 노여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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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법주사]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이
갖가지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이 된다.
온갖 것에 대해 취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훗날 마음이 편안하여 마침내 근심이 없어진다.

[화엄경]

자기 마음에 드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탐심을 끊어버리기 위함이다.

자기 마음에 거슬리는 것에
성내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진심을 없애기 위함이다.

어리석은 말에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치심을 끊기 위함이다.

수행은 집착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지혜의 연마이다.

[잡아함경]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독이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이다.

이는 모두 ‘나’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것이니,
내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탐욕을 끊는 공부이고,
내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성냄을 끊는 공부이며,
실체적인 어떤 ‘나’가 있다는 생각을 비우는 것이
어리석음을 끊는 공부가 되는 것이다.

이같은 탐진치(貪瞋痴)의 뿌리는
한마디로 아상(我相), 아집(我執)에 있다.
‘나’라는 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내 것이다’라는 소유욕이 일어나고,
나의 소유물이 없으면 곧 나도 없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처럼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집착과 소유욕을 버리는 것이
탐심의 뿌리를 뽑는 첫 번째 수행이다.

두 번째로 ‘내가 옳다’는 생각에 집착하므로
내 생각과 어긋나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화를 내게 된다.

내가 옳다는 것은 너는 틀리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모든 다툼과 성냄의 씨앗이다.
사실 그 어떤 생각도 전적으로 옳거나 그를 수 없다.
다만 서로 다를 뿐이지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주는 것
이것이 진심의 뿌리를 뽑는 두 번째 수행이다.

그리고 셋째로 이 모든 뿌리에 있는 생각인
‘내가 있다’고 하는 착각이 바로 어리석음 곧 치심이다.
나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생겨난 비실체적이고 연기적인 존재임을 바로 알고
나에게 집착하지 않는 것이
치심의 뿌리를 뽑는 세 번째 수행이다.

수행이란 이렇듯
‘나’에 집착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지혜를 연마하여
탐진치 삼독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려 하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을 놓아버려야만 사라지나니
이것은 변치 않는 영원한 진리이다.



이 게송에 얽힌 질기고 질긴 인과의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 당시 사위성에 두 아내가 한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실 때문에 둘째 아내를 들여놓고도 둘째 아내가 임신을 하자 질투가 일어 온갖 방법으로 몰래 아이를 낙태시켰다. 두 번째 아이까지 낙태를 하고 세 번째 아이의 출산까지 실패를 하면서 둘째 부인은 첫째 부인이 지금까지 자신의 아이를 죽인 것을 알고 증오와 원한을 품었지만 복수하지 못하고 아기와 함께 결국 죽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남편은 분노하여 첫 번째 아내를 구타했고, 결국 첫 번째 아내도 죽고 말았다.

이 두 여인은 다음 생에 원한을 버리지 못한 채 다시 태어났는데, 첫째 부인은 암탉이 되고, 둘째 부인은 고양이가 되었다. 암탉이 알을 낳을 때마다 고양이가 와서 먹어 버리더니 결국은 암탉까지 죽여 버렸다.

원한을 품고 죽은 암탉은 표범이 되었고, 고양이는 죽어 암사슴으로 윤회했다. 이번에는 표범이 세 번이나 암사슴의 새끼를 잡아먹었다.

또 다시 원한을 품은 이들은 죽어 암사슴은 여자 귀신으로 표범은 사위성의 여자 아이로 태어났고, 여자 귀신은 여자아이가 성장해 출산을 할 때 또 다시 아들을 죽였다. 마찬가지로 둘째까지 죽고 세 번째 아이를 출산했을 때 여자는 귀신을 피해 아이를 안고 도망쳐 부처님에게로 갔다.

부처님께서는 여인과 따라 온 귀신에게 그들의 과거 전생의 얽히고설킨 원한의 이야기를 해 주심으로써 이 두 중생에게 서로의 증오와 원망을 놓아버릴 수 있도록 이 게송을 설하셨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려 하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을 놓아버려야만 사라지나니 이것은 변치 않는 영원한 진리이다.”

한 번 일으킨 원한의 마음이 어떻게 몇 생을 이어가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돌며 얽히고설켜 서로에게 아픔과 괴로움을 주는지를 위의 이야기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돌고 도는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끈질긴 인과의 현장을 볼 때 원한의 마음, 증오와 미움의 마음이 얼마나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지, 그것도 어느 한 생, 어느 한 순간만 괴롭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음 생까지 이어져 원망의 마음을 완전히 비우기 전까지 계속되는 것을 볼 때, 내 안에 숨겨져 있는 원망과 미움과 증오를 어떻게 해야 할지 충분히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릿속에서의 깨달음일 뿐, 현실 속에서 원망과 증오는 좀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이상과 같은 억겁의 돌고 도는 죽고 죽이는, 괴롭히고 괴롭히는 연극 같은 일들이 바로 지금 우리들의 삶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저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원망과 미움과 증오의 인연들이 내 삶에는 부지기수로 퍼져 있어서 언제고 시절인연이 무르익으면 그 결과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지금 나의 삶을 돌이켜 보라. 내가 원망하는 사람, 나를 원망하는 사람, 내가 증오하고 미워하는 사람, 나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인가. 아직도 그를 생각하면 화가 나고 복수하고 싶고 심지어 죽이고 싶은 사람은 없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위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읽어보라. 저 이야기가 바로 그 사람과 나와의 인연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버리지 않는 이상, 그 사람과 나와의 인연은 언제까지고 다음 생 그 다음 생까지 이어지며 계속되고야 말 것이다. 증오스럽고 원망스러운 원수일수록 반드시 다음 생에 또 만나게 되어 있다. 원한과 증오의 마음을 놓아버리지 않는 이상 그 사람과의 만남은 계속될 것이다. 미워하는 사람을 한 번 만나기도 너무 힘겨운데, 다음 생 그 다음 생까지 계속해서 만나게 된다면 이 얼마나 지옥 같은 일인가. 그 지옥 같은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은 마음 속에서 원망과 증오를 놓아버리는 용서 밖에 없다.

내 안에 미운 마음, 증오스러운 마음, 복수심, 질투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과의 인연은 족쇄가 되어 나를 영겁토록 짓누를 것이다. 방법은 내 안에서 원망을 놓아버리고, 증오를 놓아버리는 일 밖에 없다. 내 안에서 참으로 용서해 주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얼마 전 TV에서 마음에 관한 특별기획으로 나온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프로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인 유영철을 처음에는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진심으로 용서하고 연민하게 되자 마음도 후련해졌다는 인터뷰 내용이 많은 이들의 가슴에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용서란 이와 같은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 묻어두고 있으면 그것은 내 안에서 병이 되고, 정신 질환이 되고, 또한 다음 생의 악업이 되고야 만다. 다음 생까지 갈 것도 없이 현대의학에서도 화를 자주 내면 혈압이 상승하고 혈관벽이 손상되며 심장질환을 일으키고 나아가 발암확률을 상승시킨다고 한다. 그러니 화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원한, 분노, 증오, 미움의 모든 뿌리를 놓아버림으로써만 사라지나니 이것이야말로 변치않는 영원한 진리이다. 원망을 원망으로, 증오를 증오로,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으려 하면 그것은 또 다른 원망과 증오와 폭력을 부를 뿐이다.

달라이라마는 자신의 나라와 땅을 정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까지 한 중국을 마음 안에서 진정으로 용서하고 미워하지 않음으로써 노벨평화상을 탓을 뿐 아니라 전 세계 평화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고 있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이가 있다면, 어쩌면 내가 전생에 그를 너무나도 괴롭혔기 때문일 수 있다. 지금 나에게 원망스럽고 증오스런 대상이 있다면, 어쩌면 전생에 내가 그를 원망하고 증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나를 욕하거나, 나에게 굴욕을 준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내가 전생에 한 것을 고스란히 갚기 위해 그가 나에게 똑같은 일을 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고통과 증오와 폭력과 원한은 내 안에서 용서하고 놓아버리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내 안에 증오를, 원망을, 미움을 그대로 가지고 갈 것인가, 아니면 이번 생에 그 모든 악업의 족쇄를 모두 끊고 맑고 청정해진 업으로 남은 생을 자유롭게 살아갈 것인가.




3.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미움이 가라앉지 않는다.

4.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놓아버리면
마침내 미움이 가라앉게 된다.



지난 삶을 돌이켜 보라. 내가 원망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며, 내가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나를 욕하고, 나에게 폭력을 가하며, 나를 굴복시키고 비참하게 만들며, 내 것을 빼앗아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힘겨운,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쾅거리며 증오가 불길처럼 불타오르는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내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과연 얼마인가.

만약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증오와 미움과 원망의 대상이 있다면 내 마음 수행의 첫 번째 과제는 바로 그를 용서하는 것이다. 진심(嗔心)을 버리지 못하면 더 이상 수행은 무르익지 않는다. 『출요경』에서는 ‘탐진치의 치열한 번뇌 중에 성냄의 번뇌가 가장 심하니 성냄의 불길은 욕계로부터 초선의 하늘세계까지 태운다’고 하였다.

우리가 원망과 증오의 대상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상대를 위한 배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원망하고 증오하는 동안에 우리 안에는 미움과 증오의 씨앗이 싹트게 된다. 그것은 상대를 괴롭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괴롭힌다.

상대를 미워한다고 하지만 그 미워하는 마음은 누구 마음인가. 그것은 상대가 아닌 내 마음이다. 우리가 상대를 미워할 때 우리 마음 안에는 ‘미움’이라는 씨앗이 싹을 틔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미움과 증오의 씨앗이 내 안에 퍼지고 싹트게 되면 내 마음은 온통 증오로 물든다. 그런 사람은 세상을 볼 때 증오와 미움이라는 필터로 세상을 걸러서 보게 된다. 그 사람에게 세상의 모든 일들은 부정적이고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다. 내 안에 심겨진 씨앗이 사랑과 자비가 아닌 미움과 증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밉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조금 밉상스런 행동을 했을 때 지혜롭고 자비로운 사람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만 미움과 증오를 붙잡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행동을 보고 온갖 화와 성냄과 미움과 욱 하는 마음이 더욱 크게 올라올 수밖에 없다.

나라는 존재 안에 미움과 증오가 남아 있는 이상 우리가 만나게 될 현실은 증오스럽고 미울 수밖에 없다. 반면에 마음 안에 미움과 증오를 다 놓아버리고 용서함으로써 찌꺼기가 없는 이라면 설사 세상의 부정적이고 잘못된 모습을 보더라도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외부적인 그 어떤 경계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이 고요하면 세상이 고요하다. 마음에 증오가 넘치면 세상 모든 것이 증오의 대상으로 보이고,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면 세상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다.

또한 우리의 마음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처럼 비슷한 것을 끌어당기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미움과 증오를 품고 있으면 미움과 증오스런 일들을 끌어당기고 사랑과 자비를 품고 있으면 사랑스럽고 자비로운 일들이 찾아오게 된다.

증오를 버리지 못한 이에게는 계속해서 화나는 일, 증오스러운 일들이 깃들게 마련이다. 마음에서 증오를 담고 있으며, 마음에서 증오를 버리지 못하니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이 되어 세상을 만든다.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는 첫 번째 게송의 가르침에 따라 괴로운 일들이 그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용서하라. 진정한 승리자는 적을 이긴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증오와 미움을 이겨낸 사람이다.

그렇다고 미움과 증오를 억지로 가라앉히려고 해서 되지는 않는다. 그 미움의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과거의 원인이 되는 기억들 이를테면 ‘욕하고 때렸으며 굴복시키고 빼앗았다’는 그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는 원망의 씨앗을 쉴 수 있어야 한다.

미움을 일으킨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고 얽매여 있는 한 그 원망스런 마음을 비우기는 어렵다. 우리가 미움과 원망, 증오의 마음을 느낄 때는 그럴 만한 과거의 기억과 그에 대한 집착이 반드시 따르게 마련이다. 과거에 얽매이는 집착심을 놓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까지 증오와 원망을 그대로 가져와 현재에 투사하는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대상은 ‘미운 사람’ ‘좋은 사람’이 아닌 그저 지금 이 순간 전혀 새로운 ‘사람’일 뿐이다. 이전의 기억과 과거에 얽매이는 마음으로, 미움과 증오의 대상으로 상대를 보지 말라.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내 것을 빼앗았다.” 라고 할 만한 ‘그’가 내 안에 단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도록 모든 이를 용서하라. 과거의 그 어떤 사람들을 순간 떠올릴지라도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을 수 있도록 모든 이를 용서하라. 바로 그 때부터 나의 삶은 원망과 미움과 증오에서 벗어나 전혀 새롭고 빛나는 삶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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