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중점적으로 법을 설해 주셨던 가르침이
무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무아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우리가 삶을 살면서 나라는 존재는
이 몸에 한정된 존재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이 마음, 이 생각에 한정된 것으로
보통 우리는 착각을 하면서 이 세상을 삽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 능력을 한정 짓고 있어요.
나는 요 정도의 능력있는 사람이다. 내 능력은 이 정도고 나는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고
이 정도의 부와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상대방은 어떻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산단 말이죠. 그래서 누구나 자기 자신을 이렇게 한정 짓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데 무아에서 본다면 본래 나라는 자아에 실체가 없다는 겁니다.
'이 정도가 나야, 뭐 이정도를 갖춘 사람이 나야, 이 몸뚱아리가 나야, 내 IQ, EQ 이런 것들이 나야' 라고
생각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실체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 대승불교에 오면 '야, 그렇다면 무아가 아닌데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떤 용어로 해줘야 좋지 않을까? 그래야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해서
방편으로 대아다, 참나다, 본래면목이다 뭐 이런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 말은 뭐냐하면, 대아라는게 뭐냐하면 이 몸에 갇혀있는 이 소아적인 나라는 것을 넘어서는
무한히 확장된 나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주법계와 둘이 아닌 그야말로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그런 나의 무한한 어떤 가능성, 부처가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이런 것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2,500년 전에 부처님이 그런 가능성이 있었으니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겠지 이렇게만 생각하고 살 것인가?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죠.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무아를 실천하고, 내가 어떻게 나라는
어떤 협소한, 축소된 소아적인 나라는 것에서 놓여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이러한 몇가지 과학에서 설명을 잠깐 먼저 드리면 세계적인 정신의학자라고 하는
스텐리블록이라는 박사는 나를 넓히면 넓힐 수록 고통이 저절로 줄어드는 현상을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두통이 왔어요. 그래서 머리가 아프다. 그런 두통이 있는 사람에게
두통을 가만히 관찰하라고 한 다음에 '지금 네 머리가 요만한 머리가 아니라
1미터로 확장됐다고 상상을 해봐라.' 그렇게 상상을 시키는 거에요.
그랬더니 조금 더 두통이 감소해요. ' 네 머리가 이제는 이 법당만큼 커졌다고 상상을 해봐라.'
그 다음에 이 학교만큼 커졌다고 상상을 해보고 이제 점점 더 이 머리를 커졌다라고,
확장되었다고 상상을 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상상을 한 것 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두통이 사라진다라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서 발견하게 됐다라는 겁니다.
즉 내 뇌는 내 머리는 여기에 한정되었다라고 생각할 때는 여기가 아팠는데
'나는 여기에 한정된 존재가 아니야. 나는 무한히 확장되는 존재야'라고 생각을 바꿨을 뿐인데
그 두뇌가 사라지게 되었다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러시아 심리학자 블라디미르 라이코프라는 박사는
렘브란트라는 유럽의 유명한 미술가가 있는데요.
어떤 사람에게 최면을 건 다음에 이 사람은 그림을 전혀 못 그리는 사람이죠.
이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서 나는 렘블란트라고 상상을 하도록 시켰더니
그 사람이 렘브란트 뺨치는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죠.
즉 우리는 그런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보통 생각을 하고 삽니다.
어쨋든 최면을 걸었든 아니면 상상을 했든 '나는 그러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고
일반적으로 사는데 이렇게 최면을 걸었더니
그 사람이 내 몸에선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놀라운 그림을 그렸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내 몸과 마음에 제한되는 의식과 마음을,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산다고 여기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어떠한 알 수 없는 더 큰 힘과 가능성과 능력과 지혜를
우리는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이렇게 비좁은 나에 갇혀있다라는 것만 확장해 버리면, 내려놓아 버리면
또 다른 가능성이 나에게 올 수도 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라이코프 효과라고 해서 이미 자신이 오래 전에 죽은 천재라고 상상을 하면,
상상을 했을 뿐인데 그 천재가 가지고 있던 천재적인 능력이 나에게도 온다고 그럽니다.
라이코프효과라고 그러는데 예를 들어 대학생들이 시험보기 전에
나는 대학교수다 이렇게 상상만 해도 성적이 오른다는 거죠.
또 어떤 대학교에서는 동양인 서양인이 함께 수업을 받고 있는데
그 교수님이 시험보기 전에 오늘 볼 이 시험은 전통적으로는 동양사람들이 성적을 월등하게 잘 받는다.
서양인들에 비해서. 이렇게 얘기하고 시험을 봤더니 실제 아무 연관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동양인 학생들이 훨씬 더 좋은 성적을 받았다라는 것.
내가 그렇다라고 상상을 했을 뿐인데 그것이 내 삶에 현실로 드러난다.
마음 하나 바꿨을 뿐인데 생각과 상상을 하나 조금 바꿨을 뿐인데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무얼 의미하냐하면 우리가 나라는 개념에, 나라는 어떤 몸과 마음이라는 것에
나를 제한하고 한정해 놓았을 때는 그 정도 밖에 능력을 발휘할 수 없지만
그 나라는 틀을 깨고 티워버렸을 때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이
나에게 드러날 수가 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무아라는 그 자체는 '내가 없다' 이렇게만 우리가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나라는 것에 가두지 않았을 때 나를 활짝 열었을 때,
사실은 자신의 능력이라는 것도 자기 규정입니다.
자기 스스로 내 능력을 규정시키는 대로 규정되는 거에요.
모든 건 삼귀유심이고 만법유식이라고 모든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는 것처럼
내 마음에서 내 능력이 어떻다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삶을 살 수 있을 뿐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나는 이러한 가능성에 도전하지 않을 거야.
나는 요 정도 밖에 안되니까 요 정도만 하면 돼.'라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를 그 정도의 경험에 경험치로만 가두는 것이지요.
그렇게 가두게되면 우리는 그런 사람밖에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나라는 존재를 가슴을 활짝 열어서 우주법계 전체에 있는
대아라고하는 불성이라고 하는 것과 내가 둘이 아니게 바뀔 수 있느냐.
즉, 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가 있느냐 하는게 중요한 관건이겠죠?
나를 가두지 않고 나를 확장하고 활짝 열어놓는 방법. 몇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는데요.
첫 번째가 우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연과 교감하는 삶을 사는 겁니다.
즉 우리는 평소에 일상적일 때는 자연이 변화되는 모습을 잘 가슴에 못 담고 살아요.
왜냐하면 할 일이 많고 바쁘고 정신없고 하니까 온갖 내 눈앞에 꽃 한송이가
아름다운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리고,
감동하지 못 할 만큼 가슴을 열지 못하는 거지요.
가슴이 열려있으면 보일 텐데 보질 못하고 사는 겁니다.
법당 앞에 저 꽃잔디가 작년에 비해 올해 더 많이 퍼져서 자라고 있더라구요.
또 이 숲이 지난 달과 지금은 놀랍게 다름니다.
지금의 산을 보면 완전 초록도 아닌 아주 연초록의, 어떤 초록의 생명들이 막 올라와서
그 어릴 때보다도 아주 그 산의 빛깔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특히 아침 나절이나 저녁 나절에 그 산을 숲을 바라보면요.
정말 놀랍다고 밖에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햇볕에 아주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어떤 놀라운 빛깔들을 가슴 속에 담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자연을 가슴에 담기 시작할 때 우리 가슴이 무한히 확장되는 것을 느낍니다.
여러분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일하다가 직장상사 밑에 사람, 또 아파트 안에서 갖혀 있을 때는
자식들에게 화도 많이 내고 직장 사람들에게도 막 짜증도 내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산에 가서 등산하는 사람들이 막 짜증내는 거 쉽게 보셨습니까?
잘 짜증 안내죠? 등산하는 사람들은 그냥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한단 말이죠.
특히나 저 지리산을 가면 더 그래요. 왜냐하면 거기는 2박3일, 3박 4일 종주를 하다보니까
아예 세속의 생각을 탁 내려놓고 난 어차피 2,3일 동안 산에 있을 거야.
탁 내려놓고 있다보니까 가슴이 열립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면 가슴이 열려 있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너도 나도, 너다 나다라는 분별이 사라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친구같이 반갑게 느껴지고 그냥 인사하고 싶고 누가 시켜서 그러지 않아도
아마 여기서는 시켜도 잘 안 나올 거예요.
그런데 자연에 가면 굳이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가슴이 열린다.
우리가 가슴이 닫히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하면 나라는 거에 축소가 되면
우리는 항상 가슴이 열렸다 닫혔다 하지 않습니까?
가슴이 딱 닫힐 때는 부하직원이나, 자식 중에 누가 막 떠들고 말을 할 때 그
것조차 듣기 싫어가지고 좀 조용히 못하냐고 소리지르고
자식들에게도 소리 지르고 그렇지만 가슴이 확 열려서 뭔가 기쁨에 넘치고 이럴 때는
그 어떤 소란을 피워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이 열린단 말이죠.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미국에서 어떤 초등학교가 그 주 전체에서 성적이 꼴지였는데
불과 한 일년만에 그 주 전체에서 일등이 되었고 학생들의 성적이 평균 점수가 20% 이상 상승을 했다.
그래 이것이 뭔가 싶어서 조사를 했더니 다른 거는 하나 바뀐게 없어서
도저히 성적이 올라가는 개연성이 없더라는 겁니다.
자세히 알고 봤더니 한가지 바뀐게 있더라는 겁니다. 그게 뭔가 봤더니
그전에 있던, 이사하기 전에 있던 학교에 있을 때는 성적이 안나왔다가 이사하고 성적이 잘나왔는데
다른 점이 뭔가 봤더니 이사하기 전에 학교는 창문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조그만 창문만 있더랍니다. 그런데 이사 간 학교는 넓은 창문으로 바깥의 자연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학교더랍니다.
그런데다가 이사하기 전에는 그 조그만 창문에 빛이 들어오니까
그것도 커튼을 치고 불을 켜고 수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창문을 활짝 열고 수업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아이들이 창밖으로 드넓은 자연을
보다 많이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 시험 결과를 가지고 설마 그거 가지고 성적이 그렇게 좋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래서 캐나다에 있는 엘버타 교육청에서 5개 학교에서 똑같은 실험을 했다 그래요.
그런데 동일한 결과가 나왔을 뿐 아니라 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답니다.
성적만 좋아진 게 아니라 아이들의 키도 더 커지고요.
충치 발생율도 그렇지 않은 학교에 비해서 더 줄었다는 겁니다.
아까 얘기한 학교가 캘리포니아 포커스라는 초등학교라 그러구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고등학생들도 과연 가능한가 해서
백한개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했는데 같은 결과을 얻었으면서
그 결론에 이렇게 나와 있다 그럽니다.
아이들이 창밖으로 바라봤을 때 창밖에 식물들이 나무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리고 자주자주 내다보면 내다볼수록,
그리고 창문이 크면 클수록 대학 진학율도 높아지고, 그뿐 아니라 아이들 성격도 좋아지고
건강도 더 좋아지고 더 드넓은 아이로 성장을 하더라는 겁니다.
그것이 자연의 어떤 작은 부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우리가 미쳐 느끼지 못 할지라도 자연을 자주자주 많이 바라보게 되었을 때
내 가슴은 더욱 더 넓어지고 작은 것에 집중하는,
작은 것에도 가슴을 여는 그런 것들이 연습이 되는 것이죠.
서울에서 보니까 어느 아파트가 한강이 내려다보이면 한강을 조망하는데 1억이 더 비싸고
같은 아파트라도 또 이쪽에서 남산이 보이면 또 1억이 올라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아파트 하나를 구한다 할지라도 그야말로 창이 있고 숲이 보이고,
자연이 보이고, 드넓은 이런 곳에서, 드넓은 것을 굽어 볼 수 있을 때
그럴 때 아이들도 더, 뭐랄까 의식도 확장이 되고 가슴이 더 넓게 바뀌고
집안에서 싸움도 좀 덜 일어나고 이러지 않을까?
제가 옛날부터 이런 얘기를 했었을 텐데 내가 이 걸 보고
'아, 내가 이래서 이런 느낌이 들었나' 하는 느낌이 드는데요.
저는 어릴 적 부터 항상 자연을 너무 좋아하던 것이 이제 언덕위를 좋아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언덕을 좋아해서 높은 곳에 올라가서 굽어 보는 것을 좋아하고
지리산에 가면 한상 그 윗자락에 올라가면 항상 그 자리에 자릴 펴고 앉아서
하염없이 바라보고, 뭐가 있어도 창문이 넓은 곳을 좋아하고
우리 보살님들하고 밥을 먹으러 가도 될 수 있으면 창 넓은 대로 가자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왠지 모르게 뭔가 그런게 좋은데 그런 것들이 우리 누구나 근원에서는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자연을 바라보고 그런 것 만으로도 우리의 어떤 영감이 깨어나고
나에게 도저히 없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창의성 이런 것들이 속속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칸트도 보면 매일 한 3시 반쯤 되면 항상 어김없이 산책을 했다 그러고요.
그 산책을 하지 않으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고 그럽니다.
루소나 에머슨이나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도 항상 산책 속에서 창의성이나 영감 같은 것을 얻었다.
그래서 산책을 할 때마다 메모지를 들고 다녔다 그러지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을 제한시켜 놓았을 때 비좁은 공간에 제한시켜 놓았을 때
우리도 의식도 작은 사람이 되지만 넓은 것을 보았을 때 의식도 확장을 하는데요.
이런 비유를 들 수가 있습니다.
금붕어들을 작은 어항에 가두어 두면 덩치가 5센치 이상으로 잘 안 큰답니다.
그런데 이 금붕어들을 호수에다가 풀어 놓으면 덩치가 25센까지 커진답니다.
강에다가 탁 풀어놓지 않습니까? 그러면 길게는 1미터까지 크기도 한답니다.
이를테면 부모님들이 여행을 자식들을 보내거나, 외국 배낭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이
나도 모르게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거나 이런 것들도 하나의 이런 것일 겁니다.
내가 비좁은 곳에서 비좁은 것을 보기 보다는 보다 드넓은 자연을 보고
드넓은 세상을 보고 했을 때 뭔가 모를 어떤 나라는 것이 제한이 확장되는
그런 어떤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것처럼 내가 조금 더 자연과 가까이 하고 자연을 많이 바라보고 자연의 소리를 듣고 그랬을 때
내가 확장되고, 그런 것을 떠나서도 마음이 너무나도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또 하나, 두 번째로는 나를 열고 나를 확장하는 방법은 뭐냐하면
주변에 나눔과 베품, 사랑을 실천하는 겁니다.
왜 그렇겠어요? 내 것만 알고 남을 주지 않고 꽉 쥐려고 하는 마음 자체가
나를 내꺼 안에다가 한정하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나만 잘 먹고 잘 살자하는 마음 아니겠어요?
근데 내 것을 남들에게 나누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나를 확장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이렇게 비좁은 내가 아니다.
이 세상 전체와 내가 도움을 주는 모든 존재들과 나는 둘이 아니다.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비좁은 자기 틀에 갖혀있는 사람은 결코 나를 위해 나를 희생해서 도울 수 없습니다.
물질도 베풀 수 없고 마음도 베풀 수 없다. 사랑을 베푸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상
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것은 그야말로 내가 확장되는 것과 같다.
나라는 자아에 나를 가두지 않는 겁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보다 더 사랑해 주고 더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어 주었을 때
내가 확장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무한한 능력이 늘어날 수 밖에 없겠죠.
내 것만 알겠다고 가두는 사람은 더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풀고 나누는 사람은 점점 더 부자가 될 수 밖에 없겠죠.
왜냐하면 우주 법계가 그 사람은 나라는 틀에 갇힌 사람의 내 복만 받는 것이 아니라
우주 법계의 무량대복을 가져다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기 때문에.
또 세 번째는요. 조금 비슷한데 집착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집착이라는 것이 바로 아집이라고 해서 내 것을 가지겠다라는 집착아니겠어요?
내것을, 소유욕 같은 이런것들을 집착이라고 한단 말이죠.
집착하는 사람들은 곧 내 것만이 내꺼다라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나라는 틀 속에 나를 가두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더 많은 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집착을 하게 되면 무한한 어떤 가능성과 창의력 같은 것도 상실이 되어버립니다.
성적을 잘 받아야겠다라고 집착하는 사람은 성적을 더 잘 받을 수가 없게 되고
돈에 대한 집착을 과도하게 하는 사람은 돈을 더 많이 벌 수가 없게 되고,
사람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죠.
어떤 사람을 내가 반듯이 사귀어야 되겠다 .
이런 집착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집착의 크기는 상대방을 두렵게 만들거든요.
마음이 멀어지게 만들 수 밖에 없거든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좋은데, 나를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매력이 없어집니다.
물질도 다 마찬가지다. 이게 삶의 이치입니다.
모든게 내가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더 멀어지게 마련이다.
집착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그것이 나에게로 더 올 수 가 있다.
그 이유가 집착하게 됐을 때 나라는 소아적인 자기 개념의 틀속에 갇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집착을 내려 놓게 되었을 때 나라는 틀. 나다 너다 하는 틀이 놓여지고 그랬을 때
무한한 가능성이 나에게 파도쳐 들어오는 겁니다. 더욱 큰 것이 우리에게 들어오죠.
또 네 번째는요. 이 또한 아주 제가 꼭 드리고 싶은 중요한 얘기인데요
뭐냐하면 내가 세상을 살아간다. 내가 잘 살겠다. 내가 뭔가를 해내겠다.
이런 내가라는 마음을 탁 내려 놓는 겁니다.
그럼 내가라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어떻게 되느냐?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을 불성이라고도 하고 대아라고도하고,
참나라고도 하고, 본래면목 자성청정심이라고도 하고 무한한 이것이다라고도 할 수 있고
뭐라고 이름 할 수 없는 그 주인공 한 마음, 일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러나 그것은 실체인 것은 아닌, 아트만과 같은 어떤 실체적인 것을 얘기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부처가 부처가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우리가 부처가 될 수 있는 무한한 어떤 가능성에 그 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죠.
뭐 있다 그래도 어긋나고 없다 그래도 어긋나겠지만
그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자리가 있단 말입니다.
즉, 아까 우리는 나를 제한 했을 때는 요 정도 능력 밖에 없지만
나를 제한하는 마음을 놓아 버렸을 때 무한한 능력과 창의성과 직관과 영감이
끊임없이 파도쳐 들어오는 것처럼 그러한 나라는 존재에 갇혔을 때 필 수 있는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무한하게 확장할 수 있는 그 어떤 가능성이 나에게 있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 불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써 먹을수 있느냐 .
우리가 나로서 살지 않고 불성과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을 깨달아야지만,
그 자리에 탁 부합해야지만 그것을 써 먹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내 스스로 나라는 것을 내려 놓고 맡겨버리는 겁니다.
내 안에 있는 근원의 자리에 불성이든 한마음이든 주인공이든 그 자리에 내 맡기는 겁니다.
완전히 내 맡기고 사는 거에요. 내가 산다. 내가 잘나서 이렇게 돈을 벌었다.
그것도 아닙니다. 잘나도 내가 잘난게 아니고 못나도 내가 못난게 아니고
그냥 그 자리에서 하는 것이다.
난 이 생에 잠깐 이 껍데기 이 육신이라는 껍질을 백년도 안 되는 세월동안 잠깐 와서
이 생을 경험하고 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꿈을 꾸는 자에 불과한데 좋은 꿈을 꾼들 악몽을 꾼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 겠습니까?
좋은 꿈을 꾼다고 해서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을 해서도 안돼고
나쁜 꿈을 꿨다고 해서 내가 별볼일 없는 사람이구나하고 나약해져도 안된다.
좋은 우월감도 다 부처님께 내 맡기고 열등감도 부처님께 탁 내 맡기고 나는 그저 지금 이 순간순간
미래에 대한 걱정도 내 맡기고 그 어떤 고민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죠.
근심걱정 하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가 있기 때문에.
나라는 자아, 아상에 갇혀있기 때문에.
내가 있으면 거기서 두려움이 생기고 괴로움이 생긴다.
사실 나라는 존재가 할 수 있는게, 나라는 에고와 아상이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제한돼있죠.
뭐하나 제대로 아는게 사실은 잘 없습니다. 어떻게 분명히 아는 게 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우리는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처럼 어리석은 교만한 마음이 없죠,
불교에서는 하심하라고 하는 이유가 아는 게 없습니다. 사실은.
세계에 살아있는 3대 생불이라고 불렸던 달라이라마, 틱낫한, 우리나라의 숭산 큰 스님이 계시는데
숭산 큰 스님의 가르침은 오직 모를 뿐이라는 이 한 마디로 요약이 됩니다.
수행자들에게, 제자들에게 이 생을 사는 데 있어서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안다고 생각하면 어긋난다.
우리가 아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오늘 법회 끝나고 집에 갈 때 A라는 길로 가는 게 좋은지 B라는 길로 가는 게 좋은지
어디 들렸다 가는 게 좋은지 바로 집에 가는 게 좋은지를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알 수 없어요. 바로 A라는 길로 갔는데 그 길로 가다가
교통 사고가 날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뒤로 돌아가는 게
나은 거 일 수도 있는데 그 사실을 알 수 없죠. 그냥 맡기고 가는 것이지.
내가 계산해서 머리 굴려서 갈 필요가 없다.
맡기고 가면 우주 법계가 알아서 나를 이끌고 간단 말입니다.
어떤 큰 중요한 결정 앞에 놓여있습니다. 내가 사업을 확장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확장하는 게 좋은 지 안 하는 게 좋은 지 어찌 알겠습니까?
확장했다가 망할 수도 있고 안했다가 오히려 더 성공할 수도 있는데,
자식을 A라는 대학에 보내는 게 좋은지, B라는 대학에 보내는 것이 좋은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냐하면 저마다 자기의 다르마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삶의 길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A라는 길만이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고 B라는 길이 틀린 것도 아니고 저마다 자신의 삶이 오는 겁니다.
자신에게는 자기의 삶이 오는 거에요.
그래서 자기답게 사는 것이 이 삶의 목적입니다.
자기답게 살아야 되는데 어디 정확한 옳은 정답이 있겠습니까?
공무원이 옳다거나 대학교 졸업한 학생이 공무원 하는 게 옳다거나 아니면
사업을 시작하는 게 옳다거나 어떻게 양단의 결론을 내 줄 수가 있겠어요.
우리는 그 사소한 하나도 결론 내릴 수 없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모르는 존재입니다.
오직 모를 뿐의 존재들이다.
그런데 안다고 생각하고 교만심을 필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모른다. 오직 모를 뿐 하고 나는 모르니까
부처님께 나라는 작은 소아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니까 부처님께 내맡기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법화경에서 제법실상이라고 했단 말이죠.
지금 이 순간에 펼쳐지는 모든 법은 다 실상이다. 참된 모습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내맡기고 그저 우리는 그 순간순간 사는 겁니다. 즉 한 순간순간 사는 겁니다.
초사리도 그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사는 거에요.
내가 미래에 대한 걱정도 아상에서 오니까 내려 놓고 다 내맡기고 그냥 순간순간을 살면 됩니다.
배고플 때는 그냥 밥을 먹고 배 부르면 안먹고 맨날 하듯이 심심하다고 티비 켜고
스마트폰 보고 맨날 똑같은 삶만을 계속해서 반복할 것이 아니라
그냥 순간에 내가 어떤 것을 해야 될 것인지 내 근원에서, 내 마음에서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귀를 기울이면서 살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과거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겠죠.
저는 일년 후에 어떻게 좀 안 좋은 일이 있으니까, 일년 후에 내가 다른 안 좋은 곳으로 가게 됩니다.
아니면 일 년 후에 내가 퇴사를 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부터 고민, 걱정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준비는 해야 되겠죠 . 필요할 때 마음을 내가 의도적으고 써서
내가 이것을 이렇게 저렇게 해야겠다고 생각을 할 때는 생각을 가져다 쓰는 것이 잠깐 가져다 쓰는 겁니다.
그런데 일년 후에 있을 그 두려움 때문에 일년 내내 두려움에 떨 필요는 없습니다.
어찌 알겠어요. 우리는 일년 후에 '내가 이렇게 됩니다. 안 좋아집니다.'라고 생각 하지만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일년 후에 좋아질지 안 좋아질지는.
더 좋아질 수 도 있단 말이죠 . 모든 가능성은 언제나 놓여있습니다.
내가 제한하지 않는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내 앞에 있어요.
제한되고 고정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마음 안에서 나는 언제나 이 생에서 의식이 확장하겠다.
즉 삼귀의 부처라는 근원의 진리로 향해 가겠다.
즉, 점점 더 나는 깨달음을 얻어 가겠다라는 자기 중심만 있다면
깨달음으로 얻어가는 방식이 경험을 통해서 있지 않겠습니까?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깨달음 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한한 다양한 경험을 내가 막진 않겠다.
그 가능성을 열어두겠다. 내 앞에 있는 나라는 존재가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내 마음을 열어 두겠다라는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우주 법계에서
더 놀라운 일들을 나에게 맡길 수도 있습니다. 내 스스로 제한하지 않으면.
'나는 요 정도 밖에 진급을 못 할 사람이야.' 라고 스스로 제한하는 사람에게는 방법이 없죠.
그러나 더 많은 어떤 방식이든 좋다. 이게 진급의 방식도 좋고 다른 일을 하는 방식도 좋고 그 무엇도 좋다.
하다못해 보살님들이 '왜 제가 오십 육십 칠십이 되었는데
그때 새롭게 영어나 제2외국어나 이렇게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고 공부해보고 이것도 아름다운 방법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장군분이 전역하면서 중국어를 공부 시작했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제가 저 분이 전역하면서 저 나이에 중국어를 새로 시작한다는 게 조금 의하했는데
몇 년 있다가 뵈었는데 중국분하고 자유자재로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시간동안 나는 이 나이에 뭐했나하고
여러분 보시기에 우스울 그런 생각을 나도 하고 있었는데 저 분은 저 연세에 시작해서
똑같이 몇 년 지났는데 저렇게 놀랍게 하고 계시는구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되면 노화도 안온다고 하죠. 뇌가 녹슬지 않는다 그럽니다.
뇌가 녹슨다는 관념이 있을 뿐이지 실제 뇌는 죽을 때 까지 성장한다고 그럽니다.
요즘 뇌과학에서 발힌 것입니다. 내 스스로 나는 이제 성장이 멈춘다.
깨달음이 멈춘다라고 가둬놓지만 않으면
나는 이 정도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라고 가둬 놓지만 않으면 나는 늙었으니 어쩔 수 없다.
이런 생각으로 가둬놓지만 않으면 모든 것이 재생됩니다.
몸의 세포도, 뇌도. 칠십 팔십 되셔서도 히말라야 올라가는 분도 계십니다.
그 분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전 지구적으로 인류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의식에서
'한 백살 쯤 넘으면 누구나 죽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류의, 사람들의 나이도 그 정도로 제한 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깨게 되기 시작하면,
그 깨는 어떤 순간을 맞기 시작하면 전체적으로 이 인류가 갑자기 수명이 더 늘어날 수도 실제 있습니다.
어떤 큰 병이 있으신 분들, 예를 들어 불치병이라고 알려진 병이 있는데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놀라운 신물질이 개발했다라는 기사가 신문에 나기만 했을 뿐인데
전 세계적으로 그 병이, 실제 활용화 되지는 않았는데, 그 병이 기사만 났을 뿐인데
그 날짜부터 해서 전 세계적으로 그 병이 있는 사람들이 놀랍게 호전이 되기 시작했다라는 결과도 있습니다.
이것처럼 우리가 스스로 제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나라는 작은 소아 속에 갇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나를 확장할 때 나를 제한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 놓을 때 보다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보다 이웃 사람들과 나누고 베풀고 내 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소유욕에 사로 잡혀 있지 않고,
나를 내려 놓고 모든 것을 부처님께 탁 내맡기고 삶을 살 때 그래서 근심 걱정없이
모든지 부처님께서 이끌어 가는 데 무슨 걱정이냐 하고 탁 내맡기고 살 때
우리가 얼마나 무한하게 확장하겠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하는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이 바로 명상을 하고
좌선을 하고 참선을 하고 수행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수행하고 있는 그 순간 나라는 것을 잊게 된단 말이죠.
무아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라는 것을 탁 잊게 되는 순간을 직접 느끼고 체험하게 되면
그 순간에 나라는 것이 탁 내려놓아 진다.
전에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사격 선수들이 사격을 할 때 10점 만점에 탁 하고 꽂히는 순간에 보면
언제나 명준 직전에 예외없이 두뇌가 번쩍 하는 순간이 있었다는 겁니다.
즉, 주파수가 뇌의 주파수가 알파파로 순간 탁 변했을 때는 어김없이
10점 만점을 맞었다는 거에요.
그야말로 알파파라는 자체가 모든 잡념이나 이런 것들을 완전히 탁 순간 놓여진
깊은 명상의 상태, 무아의 샹태 그런 겁니다.
또 음악가가 됐든 의사가 됐든 경영자나 조종사가 됐든 자신이 할 수있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에는 언제나 마음이 턱 놓이는, 텅 비어버리는
나란 없다라는 잡념이 놓여지는 어떤 무아의 그런 순간을 탁 경험한다고 그래요.
노벨상 수상자의 90%는 꿈꾸는 상태였거나 혹은 명상하는 중에 놀라운 힌트와 영감을 얻어서
그 놀라운 노벨상이 될만한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생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생각을 넘어서는 무아에 접촉했을 때 얻게되는
더 놀라운 것이 있다라는 것이죠.
이와 같이 우리는 내가 내 스스로 한정하고 제한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는 무한한 나를 확장 할 수 있는, 나를 제한된 공간 속에 가두지 않을 수 있는
무한한 자원들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다.
그것을 어디에서는 내면에 있다, 불성은 내 안에 있다 이렇게 얘기 하기도 하고
어디에서는 우주 법계에 가득히 있는데, 우리 뇌는 안테나와 같아서
우주 법계에 있는 무한한 자원을 언제든지 수신해서 쓸 수 있다.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너와 내가 사실은 둘이 아닌 것이죠.
내 내면에 있다라는 거, 밖에 있다라는 게 둘이 아닌 얘깁니다.
자성불과 법신불은 둘이 아닌기 때문에. 안팎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내 안에 있다라는 것이고
우주 법계 전체에 편만해 있다라는 것이고
나라는 존재가 바로 깊은 어떤 명상의 상태로서 우주 전체에 편만해 있고
과학에서도 나라는 존재가 진동을 할 때 진동이 끝나는 골에서 마루로 바뀌는
그 순간의 지점에서는 모든 진동은 우주법계 전체에 편만하다라는 것을 발견했답니다.
내 몸도 마음도 한 생각 일으킬 때 미국에도 가 있을 수도 있고 안드로메다에도 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본래 편만한 존재라는 얘깁니다.
편만한 순간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홀로그램이라는, 과학자 들이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손톱의 때 속에 있는 진동을 읽을 수만 있다면
이것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편만하기 때문에 손톱 밑의 때 속에서 안드로메다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를 알 수 있고
2500년 전에, 3000년 전에, 수만 년 전에 지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 수 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해 편만한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일념즉시 무량겁이고 구세십세 호상즉이라고 하고
또 한 티끌 속에 전체를 머금었다고 하고 일즉일체 다즉일이라고 하는
법성게 가르침처럼 우리는 여기 안에 갇히는 이런 어떤 존재가 아니다라고
스스로 그렇게 굳게 믿고 있기만 해도 순간순간 그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하다못해 어떤 중요한 발표가 있다, 시험이 있다 할 때 그 직전에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부처님께 탁 내맡기고 '그냥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탁 내 맡겼을 때,
제가 이자리에 잠시 앉아서 좌선을 하고 이 자리를 올라오지 않습니까?
잠깐 앉아서 언제나처럼. 언젠가 부터 그런 습관이 생겼었는데 언제나처럼 잠시 앉아서
제 자신에게 그렇게 합니다. '저는 부처님 법을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 법을 저는 어떻게 전하는지도 알 수 없고 다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내 안에 있는 근원에서 알아서 법을 전하십시오.
저를 빌어서 알아서 우주법계의 진리가 흘러 나오도록 저 자신을 허용합니다.
저 자신을 활짝 열어 놓습니다.'
그리 됐을 때 설법을 하고 나서 내려 왔는데 어느 날은 내가 내 머리속에서는
그런 생각이 한 번도 힌트를 얻어 본 적이 없던 것들을 이야기하고 내려오는 그런 때를 발견하거든요.
그건 제 머리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머리속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무한한 차원의 어떤 것들과
우리는 언제나 접촉할 수 있고 이것이 뭐 대단한 사람들이나 그런 게 아니고
누구나 일상적으로 수행자로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을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습관, 삶의 방식, 나라는 존재,
여기에 가두어 두지 마시고 지금까지 가두어 놓았던 모든 것을 완전히 열어 놓고
나라는 존재를 활짝 열고 무한한 확장이 가능하게 나를 허용하시기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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