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의 본질에 대하여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자세히보기

스님법문 녹취읽기

불교 공부의 본질에 대하여

목탁 소리 2014. 11. 9. 15:10

 

 

 

..., , 희소식이 하나 있고 좋은 소식이 하나 있고, 나쁜 소식이 하나 있다면 뭐부터 들으시겠습니까? 좋은 거부터 들을까요? 나쁜 거부터 들을까요? 좋은 거부터 듣고 나면 그다음엔 나쁜 거 들어야 되니까 나쁜 거를 간단하게 먼저 말씀 드리고 좋은 거를 많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제가 느끼기에요,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은 불교역사가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불교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상가, 철학가, 수없이 많은 종교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또 지금까지 종교의 역사가 흘러갔어요. 그런데 애초에 가르침의 핵심, 순수한 가르침의 본질 그 자체, 그 자체로서 남았을 때 아름다웠던 가르침들이 역사를 수도 없이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우리가 앞으로 불교 역사를 공부하면서 깨닫게 되시겠지만,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너무나도 많이 왜곡됐습니다.

 

많이 왜곡되기도 하고, 너무 많이 보태지고, 우리 불교는 특히나 수도 없이 방편의 가르침이잖아요? 그런데 방편들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까 이제는 본질은 어디가고 방편이 정말 중요한 것인 것처럼, 그래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불교 그 자체에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환희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방편에 억매여서 방편에 집착해가지고 괴로워하는, 불교로 인해서 오히려 괴로워하거나, 종교로 인해서 오히려 괴로워하고, 종교가 이 세상에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이 세상을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고, 그런 어떤 방편에 너무 우리가 치우쳐있지 않았나? 그러다보니까 종교를 공부하면서도 항상 찜찜하고, 절에 안 나가면 왠지 안 될 거 같고, 아이가 고3인데 딴 사람들은 다 기도하는데 나는 가서 기도 안하면 왠지 좀 이게 큰일날거 같고, 뭔가 잘못하고 나서 부처님께 가서 참회하지 않으면 죄짓는 거 같고, 뭔가 많은 어떤 것들로 인해서 우리 마음이 무거운 마음들을 가지고 종교생활을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보고 나니까 아, 본질이 어떤 것이구나. 라는 것을 보고 나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이렇게 힘들여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이렇게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무한한 행복과 무한한 환희심을 가지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할 수 있는 것이 불교 가르침의 핵심이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좀 안 좋은 소식을 먼저 말씀드린다고 하는 것은 아마 이제 이 강의를 들으시고 불교 공부를 하시다보면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처음에 어떤 사람들은 좀 충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기분이 안 좋아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좀 공허해 질 수가 있습니다. 왜그런고 하니, 이를테면 이와 같습니다. 제가 불교를 공부를 하다보니까, 어릴 적에 저를 이끌어주셨던 은사스님을 만나 뵌 다음부터는 불교로 제가 이렇게 탁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는 뭘 하든지 잘 되는 거예요.

 

부처님 가르침만 하면 뭐, 불교공부만 하면 뭐, 뭐든지 잘 되는 겁니다. 무엇을 해도, 다 잘되고, 공부도 더 잘 되고, 그러다보니까 제가 어떤 마음이 있었냐 하면, “, 나는 부처님과 정말 큰 인연이 있고, 큰 어떤 공부연이 있고, 그래서 참 나는 딴사람들에 비해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우월하구나.” 이런 생각들을 가지게 되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나는 참 남들에 비해서 야, 정말 참 낫구나.” 이런 착각을 하게 됐었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착각을 하게 되면서 너무 행복한 거예요. 왜 행복하냐 하면 남들은 이렇게 노력해야지 갈 수 있다면 저는 요만큼 공부한 거 같은데 이미 이만큼 간 것처럼 느껴졌단 말이죠. 착각을 했단 말이죠. 남들 어렵게 가는데 나는 대게 쉽게 갔구나. , 정말 남들 말처럼 내가 아주 그 큰 인연이 있는 가보다. 이런 어떤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면서 아주 행복하게 살았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부처님께 기도하니까 안되는 게 없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니까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 부처님께 기도하니까 기도 한데로 되고, 그러니까 그걸 착각했던 거예요. , 부처님께 기도하니까 기도를 다 들어주고, 기도를 들어주고 부처님만 믿으니까 뭐든지 잘 되니까 이것이 불교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것이 불교가 아니구나. 그리고 넘어지는 일들이 생기더란 말이죠. 그때 넘어질 때마다 , 이건 뭐지? 나는 넘어지지 않아야 되는데 남들은 넘어지더라도 나는 남들 보다 더 우월하게 앞서가야 되는데, 내가 왜 넘어졌지? 내 인생에 넘어지는 건 안 되는 거야. 나는 부처님과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남들과 달라야 되는 거야.”라는 착각을 하면서 살았었던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을 온전히 다시금 돌이켜보고 났더니 그것은 그야말로 전혀 불교를 모르고 있었던, 정말 불교를 모르고 있었구나. 라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겁니다.

 

의외로 제가 이런 비유를 들어서 그런데, 여러분들 가운데에도 지금 삶을 사는데 있어서 제가 아마 좀 절망할 수도 있다라고 괴로울 수도 있다라고 말씀 드렸는데, 어떤 사람이 심각하게 절망하느냐 하면, 이런 사람입니다. 지금 까지 인생을 살면서 남들보다 잘했던 사람, 남들보다 공부도 잘했고, 남들보다 돈도 더 잘 벌었고, 남들에게 인정도 받았고, 남들에게 성격 좋다고 능력 있다고 인물 좋다고 자식 잘 키웠다고 많은 칭찬을 들어왔던 사람들일수록 이제 절망이 시작될 수가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런가 하니 지금까지 우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근원이 뭐냐 하면 아상이라고 해서 이게 나라고 착각을 하다보니까 나라는 걸 만들어 놓고, 여러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삶의 기쁨이 뭐냐 하면 아상이 확장이 될 때 기쁨을 느끼는 겁니다. 돈이 늘어나고 내 돈이 늘어나고, 내 명예가 늘어나고, 내 지위가 높아지고 내 것이 많아졌을 때 행복을 느끼는 거예요.

 

그리고 반대로 내 것이 축소됐을 때 남들에게 비난받고 돈도 없고, 사업도 망하고 이렇게 됐을 때 아상이 축소되니까 그땐 괴로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아상의 확장을 삶의 행복으로 여겨왔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이제 더 큰 행복을 위해서 잠시 절망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되는 시기가 찾아 올 거라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가 아상의 확장이 기쁨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아마 많은 분들이 나도 모르게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은연중에 그런 마음들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남들보다 뭔가를 잘하고 잘 됐을 때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기쁨에 도취되고, 그 기쁨을 남들보다 뭔가 잘한 게 있을 때 자꾸 남에게 얘기도 하고 싶고, 내 자랑도 하고 싶고, 남들 만나면 은근슬쩍 내 자랑 자꾸 하게 된단 말이죠. 그게 아상의 확장에서 오는 기쁨을 내가 기쁨에 빠져서 이 세상을 살아오고 있었구나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부처님 가르침은 아상이 꺾이는 공부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내가 기뻐해오던 삶의 방식, 아상이 확장되는 것이 기쁨이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그것은 언젠가는 꺾이죠. 지금은 어쩌면 안 꺾이신 분들도 있고, 서서히 꺾이는 분들도 계실 텐데, 우리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기력이 쇄함에 따라서, 정년퇴직이 따라옴에 따라서, 진급을 못함에 따라서, 다양한 이유로서, 특히나 나이를 든다는 것은 그만큼 아상이 이제 한창 때보다 못해진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언젠가 우리는 아상이 꺾이는 것은 예약되어 있습니다. 생로병사잖아요. 노병사라라는 것은 분명히 예야 되어 있는 거예요. 노병사가 오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러면 지금까지 아상을 확장하는 것만이 기쁨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사람은 내 인생은 꺾이지 않겠지. 나는 죽어서 중환자실에 가지 않겠지. 병이 들어서. 나는 무너지지 않겠지.’ 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그때 가서 그것을 당하고 나서 괴로워할 것이냐?

 

아니면 지금 미리 이 아상이 꺾이는 공부가 무엇인지, 아상이 타파하는 공부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아상이 꺾이고 확장되는 거에 상관없이 아상이 늘어나느냐? 줄어드느냐에 상관없이 나는 정말 아름다운 삶을 휘청거리지 않는 삶을 살겠느냐? 이것을 먼저 결정짓고 나아가야지만 이 부처님 가르침은 제대로 공부하기가 쉬워집니다. 당장 이렇게 되요. 나는 남들보다 나은 사람인데, 부처님 가르침은 이 세상에는 나보다 잘난 사람도 없고, 나보다 못난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고 내가 전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거든요. 그 어떤 사람보다 나는 높지 않습니다. 위대하지 않아요. 그 어떤 사람보다 나는 못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아름다운 것인데, 우리들은 이것은 기분 나빠요. 마음에 안 드는 겁니다. 나는 남들보다 더 나아야 되니까. 그리고 더 나은 것을 향해서 지금까지 달려왔고 어지간히 성공했기 때문에 그것이 지금까지 삶에 배여 있는 겁니다.

   

40506070년 살아오신 삶속에서 이 아상의 확장이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 배여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딱 처음에 접하고 나며 충격을 받습니다. “내가 그렇게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여기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좋은 소식은 나라는 존재는, 나라는 존재는 남들보다 낫지 않은 존재이고, 못하지도 않은 존재이지만,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고, 나는 상상할 수 없는 힘과 지혜와 자비로움을 완전히 구족하고 있는, 내가 바로 이 우주의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안에 바로 부처가 있는, 무한한 어떤 존재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풀한 포기조차, 내가 그렇게 미워하던 그 녀석조차, 아주 수준 낮다고 깔보아 왔던 저 옆집 저 사람조차, 나는 불교 가르침을 열심히 공부해서 좀 지혜롭지만 저 사람은 불교도 모르고 참 어리석은데 저 사람조차 나보다 한 티끌만큼도 백짓장 한 장만큼도 못 나눈 게 사실은 근원에서는 없다는 거죠.

 

반대로 그 어떤 잘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보다 티끌하나도 더 잘난 것이 사실은 없습니다. 겉보기에, 겉모습 속에서 또 내 생각이 그렇다라고 생각하고 해석하므로서 내 스스로 그 속에 빠져가지고 살았을 뿐이었던 거죠. 이제 제가 여러분들에게 기쁜 소식을 말씀을 드리면요, 우리는 지금까지 불교를 어떻게 믿었냐하면요, 기독교 천주교 다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를 어떻게 믿었냐하면 구속되는 종교를 믿어왔습니다. 좀 종교가 이렇게 구속받아 온 게 많아요. 매일 기도 다니다가 100일기도 다니다가 100일 기도 하겠다고 딱 결정해놓고 한 50일 정도 했는데 나가기 싫단 말이에요. 그리고 한 2~3일 못나가고 딴 친구들은 다 나갔는데 나는 못나갔어요. 그럼 괜히 마음이 찜찜하고 괜히 부처님이 나를 벌 줄 거 같고, 이런 마음이 들 수도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내가 뭔가 잘못했을 때 부처님이 다 알고 계실 텐데. 부처님이 날 벌하지 않을까? 이런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분들도 계시고, 또 아마 여러분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아마 큰 잘못이라든가 결정적인 어떤 실수라든가 이런 걸 안 해본 사람은 아마 없을 수도 있어요. 많은 분들이 어떤 하나의 아픔 내지는 짐 내지는 죄의식, 그러니까 씻을 수 없을 거 같은 죄의식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그런 것도 있을 수 있어요. 제가 만약 어떤 젊은 보살님이었는데, 그분은 그 누구에게도 얘기를 못했데요. 그 얘기를 하시면서 막 우시면서 나는 천벌을 받을 거라고, 이게 항상 기쁘다가도 이런 생각만 하면 너무나도 그 괴롭다고. 내가 천벌을 받을 거 같아서 괴롭다.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무엇이냐고 여쭈어 봤더니, 그 분은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졌는데, 아이가 뱃속에서 많이 크고 있고 있었는데,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이걸 낙태수술을 하셨던 거예요.

 

그런데 본인은 그것이 아주 큰 어떤 인생에서 너무나도 큰 짐처럼 뭔가 하나가 꽉 내리누르는 것처럼 나를 계속 해서 옥죄어 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해도 내가 너무나도 행복한 순간에 행복하게 지내다가도 내가 이런 죄를 지어놓고 죄를 저질러 놓고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면 더 나쁜 놈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장병 아이는 군 생활 하는데 얼굴 인상이 어둡습니다. “왜 그렇게 어둡니?” 물어봤더니, 자기가 옆에서 돌봐드렸어야 되는데, 아버지를 돌봐드렸어야 되는데 돌봐드리지 못하고 있었고, 또 내가 내 좋다고 원하는 걸 하러 나갔다가 아버지가 내가 돌보지 못해서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거를 본거죠. 군에 입대하자마자 돌아가신 거예요. 그러데 이 친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 하면 내가 군 생활을 행복하게 하면, 내가 기쁜 마음으로 웃으면서 군 생활을 하고 친구들하고 활짝 웃으면 아버지에게 더 큰 죄를 지을 거 같은 거예요.

 

내가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놨다고 여기는데, 나는 이렇게 기쁘게 웃고 있으면 아버지에게 큰 죄를 짓는 거 같고 천벌을 받을 거 같은 겁니다. 그래서 이 친구는 좀 좋은 일이 있어도 잠깐 웃다가 바로 인상이 어두워지고, 밝아지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 친구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네가 정말, 정말 잘못된 착각을 하고 있었구나. 아버지가 너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그것 자체는 너무나도 큰 착각입니다. 그거로 인해서 죄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나로 인해서 내가 결정했다고 할지라도 나로 인해서 이 아이가 낙태가 되었다는 생각은 죄의식을 가져 올 뿐입니다. 사실은 여러분들은 그 어떤 잘못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큰 남들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무죄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고 실수도 없습니다.

 

인생에는 실수라는 게 없고 죄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물론 방편으로 지옥도 얘기하고, 아귀 축생 다 얘기를 하죠.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방편일 뿐이고, 그것은 좀 있다 말씀 드리겠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 설하는 것이고,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 진리가 있어서 부처님이 계셔서 부처님이 내가 죄를 지었으니까 저 놈은 나쁜 놈이야. 너는 지옥에 가야 돼.” 하고 지옥에 보낸다고 생각해요. 진리가 나를 체벌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거예요. 이건 우리들의 엄청난 착각입니다. 내가 두려워하고 있으면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버지가 행복할까요? 그 아이 아버지가 행복할까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 내 아들이 그래도 내 생각하느라고 저렇게 우울하게 있구나.” 하고 기뻐하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죠.

 

이 마음의 에너지, 마음의 파장이 밝은 파장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그것이 아버지에게 돌아가신 아버지라 할지라도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연기법은 생사를 뛰어넘는 진리에요. 죽었다고 해서 그 사람과 연결 관계가 끊어지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과 우리는 언제나 연결되어 있어요. 그분이 심지어 다음 생에 또 다른 존재로 윤회했다 할지라도 지금 그 분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지금 그 분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축원해준다면 그분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언제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진대 내가 그런 생각을 못하고 더 우울해 하고 지낸다면 그것은 그분을 오히려 더 괴롭게 만드는 것 밖에 되지 못하는 거죠.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는 지금까지 죄를 지었을 때 이것을 벌을 받는다. 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린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의 짐이 있어요. 큰 짐 같은 게 하나 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자식 클 때 내가 이렇게 좀 해줬어야 되는데 그렇게 못해줘서 그게 하나의 짐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짐이 되기도 하고, 돌아가신 부모님께 좀 더 잘해드릴 걸 하는 게 짐이 되기도 하고, 큰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짐이 되기도 하고, 그런 짐을 누구나 안고 살고 있단 말이죠.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로 공부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은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참회, 이참회입니다. 사참회는 제가 이런 잘못을 했으니 부처님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고하는 것이 사참회라면, 이건 진정한 참회가 아닙니다. 진정한 참회는 이치적인 참회, 이 참회라고 해서 진참회입니다. 진참회는 어디서 나오냐 하면, 죄라는 것이 본래 없다라는 것을 자각하는 데서 온다. 천수경에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죄라는 것은 본래 자성이 없어서 마음 따라 일어난다.

 

내가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에게만 그 죄의식은 작동을 하는 겁니다. 즉 내가 나는 이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벌을 받을 거야. 이러한 벌을 받아야지 나는 마땅해.”라고 믿는 사람에게 내가 그 죄의식을 믿기 때문에 과보가 오는 겁니다. 악업의 과보가 오는 겁니다. 악업의 과보를 반드시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요, 숙명론을 거부하는 종교죠. 부처님께서 외도들이 육사외도라고 얘기할 때 그 중에 하나가 숙명론이었어요. 그 숙명론은 이 불교의 인연법과 뭐가 다르냐하면 숙명론은요, 죄를 지었으면 숙명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절대적으로 죄를 받아야지만 됩니다. 죄를 받지 않으면 끝나지를 않는 것이 숙명론이에요. 불교는 기계론적인 인과론, 기계론적인 숙명론이 아닙니다. 죄를 지었으면 반드시 지옥가야 된다. 이건 불교가 아니에요.

 

우리는 자유의지로서 부처님께서 소금물에 비유를 드셨죠? 악업을 지었을 때 악업을 반드시 받아야 되는 건 아니다. 컵에 있는 소금물을 먹어야 된다면, 이 소금물이 죄업이라고 한다면 소금물을 이대로 다 먹으면 너무 짜게 먹어야 되겠죠? 먹긴 먹어야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짜게 먹을 필요는 없다. 그릇을 키우게 됐을 때 큰 이 원통 버전만한 큰 그릇에다가 그 소금을 그대로 넣고 물을 잔뜩 채워가지고 목마를 때마다 물을 마시면 결국에는 소금물은 다 먹을 수 있겠지만 목마를 때 마시니까 기쁘게 소금물을 먹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업을 지었을 때 무조건 죄악으로서만 과보를 받을 필요는 없다. 평범하게 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기쁘게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게 기계론적인 운명론 숙명론과 불교의 연기법이 다른 점입니다. 그럼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종결짓고 넘어가야 된단 말입니다.

 

불교를 공부하겠다. 나는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겠다.’라고 생각한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내가 짊어지고 어떤 무거운 짐들, 죄의식, 내가 과거에 그때 이렇게 했어야 되는데. 그때 그놈을 만나지 말았어야 내 인생 폈을 텐데. 이 남편이 바뀌어야 되는데.” 이런 후회, 과거에 대한 모든 후회, 내가 잘못 선택했었다라고 생각했던 모든 오해들. 이런 것들을 내려놓는 작업부터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의 지난 과거는 단 한순간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단 한순간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 진리에서는. 부처님은 여러분들이 죄를 지은 사람은 미워하고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은 좋아할까요? 좋아할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베푼다고 좋아하고 나쁜 짓을 한다고 싫어하고 이런 분이 아닙니다. 그걸 넘어선 분이에요. 부처님은 분별이 없단 말입니다. 완전한 무분별이에요. 이 사람이 죄인이든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상관하지 않고 어떻게 할까요? 무한한 자비심으로 품어줄 뿐입니다. 언제나 용서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요. 부처님께는. 용서할 게 없으니까. 내가 용서할만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누구도 죄라는 게 없으니까. 우리는 내가 내 안에서 개념으로 만들어 놨던 죄의식에 내 스스로 사로잡혀 있었던 겁니다. 누가 여러분들을 비난하고 욕을 합니다. 손가락질 하고. 그랬을 때 여러분들이 상처받는단 말이에요. 그거는 그 사람 욕한 사람 잘못일까요? 그건 결코 욕한 사람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냥 자기 업 따라 욕을 했을 뿐인 거예요. 그 사람 눈에는 이러이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나쁜 놈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그냥 욕했을 뿐이에요. 그 사람 잘못이 없습니다. 전적인 책임은 내가져야 되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그 사람이 욕을 했는데, 이걸 내가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이걸 실체화해서 맞아 맞아. 그 사람이 저보고 넌 이것 밖에 못하는 놈이냐?” 욕을 했어요.

 

그랬을 때 그 말을 내가 받아들여서 맞아, 맞아. 나는 이런 욕을 받아도 싸. 맞아. 저 사람 말도 일리가 있어. 나는 진짜 좀 나쁜 놈이긴 해. 내 이런 과보를 좀 받아야 돼.” 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만큼, 스스로 그게 맞다고 동의하는 만큼만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니까 아플지 말지는 그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내가 결정합니다. 예를 들어 지나가던 약간 정신 나간 미친 사람이 있어요. 아무나 보고 욕하는 미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를 보고 욕을 했어요. 여러분 기분 나쁘겠습니까? 기분 안 나쁘죠. 욕을 했는데도 기분이 안 나빠요. 우리는. 내가 안 받아들였으니까. 그런데 욕을 들었을 때 기분 나쁜 건 왜 그렇겠습니까? 그 사람이 욕해서 기분 나쁜 게 아닙니다. 내가 그것이 옳다고 동의했기 때문에. 오케이. 나는 그 욕에 휘둘리겠다. 라고 동의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우리는 괴로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괴로움은 이와 같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내 스스로 껴안았기 때문에 오는 것이지. 내 스스로 마음으로 껴안았던, 아니면 업 때문에 그것을 껴안게 되었다면, 내가 그 원인제공을 했기 때문에 그 결과를 받는 것이지 그 사람은 연극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제가 우린 아무런 잘못이 없고, 죄가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면 의문이 듭니다. 아니 그러면 나쁜 짓해도 되는 거냐? 나쁜 짓 한 사람들, 그 사람들을 미워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건 실질적인 나쁜 짓을 한 사람 아니냐? 라고 생각이 됩니다. 법화경에 보면 제법실상이라고 해서 제법_이건 뭐냐 하면요. 일체 모든 존재와 일체 모든 존재가 벌이는 모든 사건들. 존재와 존재가 벌이는 모든 행위, 이 모든 것은 허상이 아니라 실상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참되다.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소리입니다. 제법은 그대로 실상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일을 하던, 그것은 다 아름다운 일이다. 진리의 몫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얘기는 아마 어쩌면 아마 못 들어보셨을 수도 있고, 아마 엄청난 어쩌면 마음속에 거부감도 느끼는 분들도 계실 수 있어요. 혹은 너무나도 자유로워지는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은 내가 저 놈은 실체적인 나쁜 놈이야.”라고 생각해서 그 사람한테 내가 당한 게 있는데 그놈이 죄가 없단 말이야? 그럼 괴롭겠죠. 내가 어떤 죄를 지은 게 있는데, 이 얘기를 듣고 ~ 내가 여기에 이 죄의식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었겠구나. 나는 이제 자유로워질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면 자유로워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엄청난 자유로움의 사상을 왜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옆으로 제쳐놓고 방편의 가르침들만 죽자사자 잘못하면 절에 가서 3천배를 해야지만 참회가 되는 거야. 돈을 많이 벌어서 내가 부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면 안 돼. 무소유가 좋은 거야.” 왜 이런 것만을 지금까지 공부해 왔습니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은 모두가 실상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요 얘기부터 먼저 드릴게요. .. 여러분들은 아까 신에 대해서 물어보셨는데 경전에 그렇게 나옵니다. 옛날에 우리는 본래, 이 우주라는 것이 처음에 생성된 게 어떻게 생성됐냐하면 텅 빈, 그러니까 불교에서 공이라고 말하는 텅 빈 공 그 자체였습니다. 이 우주법계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 그 자체였어요. 그러나 그 공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무한 공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으로 넘실거리는, 모든 가능성이 그 안에 다 포함되어있는, 공이지만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는 그러한 공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 거기서 한 생각 홀연히 일어나면서 어떤 존재계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천상세계에 높은 천상세계 욕계색계무색계에 올라갈수록, 천상세계의 영적 정신적인 어떤 수준이 높아진다고 쳤을 때에, 저 높은 천상세계에 있다가 내려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은 천상세계에서 내려온 존재라는 얘기가 경전에 나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천상세계의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간만이 전부다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편협한 생각이죠. 인간계는 여기가 있잖아요. 인간계는 아주 제한적인 공간입니다. 아주 독특한 존재들이 살아가는 곳이 인간계에요. 사실은 우리 본 바탕은 인간계가 아니라 인간계는 잠깐 놀러 온 겁니다. 놀러 왔다기 보다는 잠깐 깨달으러 온 겁니다. 여러분들은 천상세계에서 복락을 누리고 있던 존재였던 거죠. 그런 어떤 존재들이 천상세계에서는 무한한 행복만 있잖아요. 무한한 행복만 있으니까 깨달음을 얻을 필요가 없어요. 항상 기쁘니까. 무한한 즐거움만을 느끼다가 그 천상세계 속에서도 , 이러한 무한한 행복과 복락을 누리고 있지만, 이것이 다 일까?”

 

여러분 아무리 기쁜 것도 계속 누리면 어때요? 지루해집니다. 아무리 좋은 즐거움도 계속 누리면 지루해지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이것이 다인가? 아니지 않을까? 뭔가 삶에 또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을 의문을 삶에 어떤 의문을 품든 어떤 존재들이 폭 넓게 보다보니까 넓혀보는 거예요. 의식이 넓어지게 되면 이제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 이 세계가 다가 아니구나.” 그러고 알고 봤더니 인간계라는 아주 독특한 세계가 있다는 걸 보는 겁니다. 인간계가 부처님께서 인신난득이라고 하고, 맹구우목이라고 하듯이 인간 몸 받기가 어렵다. 저 태평양 한가운데에 요만한 조만한 판자가 하나 있는데 거기 구멍이 하나 뚫려있어요. 그런데 저기 밑에 심연에 있던 거북이가 그냥 별 생각 없이 이렇게 올라와가지고 태평양 한가운데 요만큼 떠 있는 판자에 그냥 숨 쉬러 올라갔는데 동그라미에 목이 콱 걸릴 확률.

 

그 확률로 여러분이 인간계에 태어난 거예요. 여러분들이 공무원 되려면 요즘에 200:1이니, 이거는 경쟁도 아니 겁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인간의 몸을 받아서 태어났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경쟁률을 뚫고 이 자리에 와 앉아계신 거예요. 왜 그런 경쟁률을 뚫고 내가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겠다고 자원을 했을까요? 이 지구라는 별은 독특한 곳인 겁니다. 부처님께서 뭐라고 그러셨냐하면 나머지 오도는 주로 업을 받는 곳이다. 천상은 그냥 복락을 받는 것 밖에 안합니다. 지옥은 악업을 받는 것 밖에 안합니다. 업을 받는 곳인데 인간계만이 복을 지을 수 있고, 수행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유일한 곳이다. 아주 획기적인 공부의 진화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성숙, 깨달음이 놀랍게 빠르게 일어나는, 진도가 빠르게 일어나는 곳이 유일하게 인간계라는 말이죠.

 

부처님도 인간의 몸을 받아서 깨달았고, 많은 존재들이 인간의 몸을 받아서 깨닫는단 말이죠. 인간으로 있을 때 놀라운 어떤 정신적인 깨달음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천상세계는 욕계, 제일 높은 천상세계만 해도 인간의 1660년이 그 천상세계의 하루에요. 그런데 왜 천상세계에서 봤을 때 인간계에 가서 100년을 살다 와도 욕계 6천 타화자재천에서 봤을 때는 한 1시간도 안 되는 시간, 30분 잠깐 갔다 오는 시간 밖에 안 되는 겁니다. 경전에 그런 게 나와요. 천상세계 두 부부가 꽃을 따고 있다가 그 아내가 잠깐 사라졌다가 나타났어요. 그런데 아내가 하는 얘기가 내가 인간 몸 받아 태어났다가 내가 몇 10년을 살다가 자식도 셋씩이나 낳다가 한참 살다가 죽어가지고 온 건데, 이렇게 왔다.” 그 남편이 좀 전에 갔다 왔잖아?” “그럼 그 시간동안 나는 몇십평생을 살다왔다.”

 

그 남편이 질문을 합니다. “, 인간들은 어떻게 살든가? 인간이라는 별은 이 천상세계완 달라서 깨달음이 놀랍게 빠른 곳이라던데, 복도 짓고 수행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던데, 인간들은 정말 수행을 열심히 하고 복을 정말 지으면서 평생 서로 복을 지으려고 서로 남들 도와주려고 애쓰며 살겠어요? 서로 수행하려고 마음 공부하려고 기를 쓰면서 살겠습니다.” 얘기했더니 아내가 하는 말이 말도 마라. 이 인간들은 자기가 왜 인간으로 태어났는지 조차 깜빡 잊고 정말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더라. 복과 지혜를 증장하기는커녕, 돈 벌기 바쁘고, 남들 짓밟고 올라서기 바쁘고, 명예와 권력이 평생 갈 줄 알고, 좋은 집, 좋은 차 사는 게 자기를 늘려가는 줄 착각하면서 100년 밖에 안되는 게 엄청난 세월인걸로, 착각하고 살더라. 이게 욕계육천이 그렇다는 겁니다.

 

색계와 무색계로 넘어가면 인간계의 겁이 거기서의 하루에요. . 겁은 뭐냐 하면 서울만 한 바윗덩어리가 있는데 천사가 천년에 한 번씩 내려와서 이 바윗덩어리를 옷으로 한번 스치고 올라가는데 이 바윗덩어리가 다 닳아 없어지는 기간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기간을 보내고 가봐야 찰나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상세계의 신들이 인간계가 힘든 곳인지 알지만, 자원해 내려가겠습니까? 안가겠습니까? 가죠. 너무나도 많은 천상세계의 신들이 인간계로 오고 싶어 한다. 부처님이 오죽했으면 맹구우목이라고 했겠어요. 인간 몸 받아 태어나기 어렵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인간계는 고해라고 그랬습니다. 고해. 고통의 바다다. 무슨 얘기냐 하면 깨달음은 일어나기 위해서는 천상세계 같은 곳에서는 깨달음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고통이 없기 때문에. 지옥세계는 너무 심한 고통만 있기 때문에 깨달음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오도가 다 마찬가지에요.

 

유일하게 짐승 축생계는 어리석기 때문에 깨달음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계는요, 적절한 고통이 주어지는 유일한 세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정신적인 수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정신적인 각성의 수준에 따라, 깨달음의 차원의 수준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 최적의 적합한 괴로움의 재료를 보내주는 곳이 바로 지구별입니다. 그래서 고해라고 하는 이유가 고통을 통해서 깨달아가는 동네가 바로 이 지구별인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인간으로 태어난 목적이 뭐냐 하면 고통을 통해서 성장하고 깨닫기 위해서 인간계에 태어나신 거예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착각하고 살은 겁니다. 행복하게만 살고 싶었잖아요. 복 받고 살고 싶기만 했잖아요. 남들한테 베풀어주기보다는 남들을 어떻게 좀 등쳐먹고 내가 좀 더 돈 많이 벌까? 이 생각하기 쉽잖아요. 남들한테 얻어먹으면 기쁘고, 사주면 좀 싫잖아요.

 

좀 냉철하게 얘기를 하면요, 남들한테 얻어먹고 덕 보는 거 있잖아요. 남들한테 얻어먹고 덕보는 거, 이거는 아주 충격적인 일일 수가 있어요. 아주 안 좋은 일 중에 하나죠. 아주 안 좋은 일 중에 하나죠. 이치를 안다면. 아주 좋은 상황은 베푸는, 왜 베풀어야 되느냐 하면 여러분에게는 무한한 자원이 있습니다. 베풀 수 있는 것은 무한하게 넘쳐납니다. 이 우주법계에 전체가 바로 내거기 때문에 베푸는 사람은 이 우주법계 전체를 내거로 쓸 수 있는 사람인데, 베풀지 않으면 갇혀있는 사람이에요. 자기라는 속에 갇히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린 착각하면서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왔던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사시면서 즐거움도 있고 괴로움도 있었을 겁니다. 즐거움도 격고, 괴로움도 겪고 죄도 짓고 선행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요, 죄도 짓고 선행도 지으셨을 텐데, 죄를 지으신 게 있다면 그 모든 것은 가볍게 내려 놓으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괴로운 일을 당한 게 있으셨다면 아니면 지금 앞으로 괴로운 일이 있으면 어쩌지 하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면 , 내가 이러다 진급 못하면 어쩌지?” “내가 이러다 남들에게 인정 못 받으면 어쩌지?” “내가 나중에 노후가 위태해지면 어쩌지?” “우리 집값이 떨어져서 내가 벌어놓은 돈 다 탕진하면 어쩌지?” 이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들, “내가 몸에 병이 나면 어쩌지?” 고가 올 거에 대한, 괴로움이 언젠간 올 거 같은 이런 불안감, 이거 이제 과감하게 정리하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요, 진리의 차원에서 여러분들은 죽고 나서 죽음에 대해서도 늙고 병들고는 상관없고,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워 할 것이 하나 없단 말이죠. 하나 없습니다. 여러분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이 대부분 뭐라고 그럽니까? 지금은요, 서양이나 유렵에서 이런데서 보면요,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옛날에는 좀 이상한 사람들이 한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닙니다.

 

아주 유명한 대학교 나온 그 관련된 유능한 어떤 교수, 학자 이런 분들이 임사체험을 하고 나서 놀랍게 그것을 논문으로 남기고 이것은 내가 여태까지 착각했었다. 이것은 정말 진실이다.” 너무나도 이제는 과학적으로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들이 부처님 경전에만 있는 게 아니라,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제가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앞으로 과학에서 어떻게 얘기하는지도 말씀 드리겠지만, 놀라울 정도로 시대가 바뀌고 있는 상황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강력하게 전해지고 있는 시기에요. 지금이. 죽음에 대해서 결코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이고, 무한한 지구의 평화, 지구의 행복감 속에 다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단 자살을 한다거나 이러면 왜 안 될까요?

 

내 의지로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죽기 직전의 의식. 여러분 윤회하는 것의 가장 큰 비중이 한평생 어떻게 살았느냐의 업도 중요한데요, 바로 그 다음 생을 결정하는 것, 한평생을 가지고 왔던 업들은 그 다음 생, 그 다음 생, 두고두고 놔뒀다가 그 과보를 받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생이 결정하는 상당한, 예를 들면 70~ 80% 정도가 되는, 바로 다음 생이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인은 죽기 직전의 의식입니다. 죽기 직전의 위식. 어떤 스님은 불교에서 수행하는 이유는 죽기 직전에 깨어있기 위함이다라는 경우도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죽기 직전에 자살을 한다는 거는 내가 내 스스로를 너무나도 어둡고 암울하고 암담하게 여겨서 죽이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 의식 그대로가 그 의식과 맞는 파장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안 된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대부분의 경우는 이런 어떤 경우를 빼고는 대부분의 경우는 어떤 죽음을 당해도 우리들은 생각하기를 살아있으면 성공하는 것이고, 죽음은 실패한 거로 착각 합니다.

 

30대 밖에 안 된 젊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우린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그거는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그 사람의 어떤 영혼의 선택이었던 겁니다. 그 사람의 인연에서는 그 사람의 공부에서는 그것이 가장 최선이었기 때문에 그 일이 그 사람한테 벌어졌던 겁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 10생을 매년 100살씩 10번 사는 게 낫겠어요? 아니면 한 70살씩 한 열댓번 사는 게 낫겠어요? 아니면 한번은 80살도 살고, 한번은 100살도 살고, 한번은 30살도 살고, 이런 게 낫겠어요? 그건 취향에 따르죠. 그죠? 어느 게 좋고 어느 게 나쁜 게 아닙니다. 좋고 나쁜 상황이 아니에요. 죽는다 하는 것도. 우리는 생사의 사고방식에 갇혀있기 때문에. 생사가 실제 있다고 생각하니까, 생사가 성공과 실패인 걸로 착각하는 겁니다. 그건 결코 성공과 실패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그 어떤 괴로움도, 앞으로 올지 모르는 그 어떤 괴로움이라도 결코 여러분들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오는 거예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오느냐하면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 나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만 옵니다. 나에게 나를 돕기 위한 자비심으로 인해서 오는 것이고요,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한, 즉 지혜를 나에게 전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옵니다. 자비와 지혜를 전해주기 위한 목적. 이것 때문에만 오는 겁니다. 우리 삶이 벌어지는 이유는. 내 인생에 병이 오는 목적은 어떤 사람이 앞만 보고 달리고, 열심히 일만 하고 이러던 사람이 갑자기 병이 나서 쓰러져 있으면서 깨닫는 거죠.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 내가 여태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게 다가 아니구나.” 그래서 이제 그 큰 병을 앓고 일어난 사람은 자기 몸도 더 돌보고요, 안 좋은 음식도 안 먹고요, 운동도 더 하고요, 가족과 더 따뜻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자식과 대화도 더 많아지고, 그렇게 됩니다.

 

너무 어떤 회사에서 승승장구만 하는 사람은 분명히 교만해 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승승장구를 하다가 주춤 거리고 무너지기도 하고, 또 이게 잘 올라가다가 말고 또 다시 욕도 얻어먹고, 좌절도 당해보고 이러던 사람들은 삶을 대게 겸손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삶을 바라보는 안목이 상당히 넓어지게 됩니다. 많은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넒은 가슴이 생겨요. 그런데 앞만 성장만 성장만 하고 좋은 일만 계속 생기던 사람은 이게 최악의 상황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최악의 상황은요, 계속해서 좋은 일만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이게 왜 최악의 상황이겠어요? 그럴 거 같았으면 여러분이 천상세계에 그냥 있으면 되지 왜 왔겠어요? 인간계에. 인간계에 온 목적이 고해라는, 나에게 적합한 고를 통해서 성장하기 위해서 왔는데, 그 고가 내 인생에 오지 않는다면 아무 삶의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생각해 왔던 고에 대한 관점, 이거 완전히 뒤바꿔야 됩니다. 우린 착각하고 살아왔던 겁니다. 고가 왔을 때 가슴 열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되요. 수용할 수 있어야 되요. 그런데 수용함과 동시에, 허용함과 동시에 이게, 여러분들의 의식수준이라는 게 뭐냐 하면요, 공부를 하면 지혜가 증장이 되는데, 지혜가 증장한다는 게 뭘 의미하냐하면요, 허용하는 범위가 넓어지는 겁니다. 수용하는 것이 넓어지고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마음이 꽉 닫혀가지고 요만큼만 받아들였는데, 공부를 하게 되면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생겨요. 마음이 열려있기 때문에. 여러분 마음이 요만큼 좁아졌을 때는 어때요? 자식들이 엄마엄마 이렇게 해줘요. 저렇게 해줘요. 뭐라고 뭐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게 대게 듣기 싫잖아요.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들어가.” 이러고 욕을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날이 기분이 너무 좋은 날이에요. 기분이 너무 좋아가지고 마음이 활짝 열려있어요. 애들이 하기 싫은 거 하게 해 달라 해도 그래. 해라.” 이러고. 게임 한다 그래도 그래그래. 뭐 게임도 해라. 할 수도 있지.” 이거 다 허용해 준단 말이죠. 마음이 열리면 허용이 됩니다. 많은 것들이 허용이 돼서 그 속에 많은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해요. 그런데 우리는 의식이 제한되어 있단 말이죠. 여러분들 불교에서는 지혜가 중요하잖아요. 대학교수라고 지혜롭고 초등학교도 못나온 사람이라고 지혜롭지 않은 게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대학 교수라고 할지라도 보는 시야가 한정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어떤 견해가 되었든, 심지어 어떤 종교가 되었든, 어떤 도그마가 되었든 그 안에 딱 갇혀서 이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거 밖에 건 전부다 잘못된 거라고 탁 벽을 긋고 요만한 한 점, 그 안에서만 생각하는 사람.

 

그게 바로 의식이 제한되어있는 겁니다. 저 또한 부처님 가르침이 너무나도 위대하다는 것을 알지만, 옛날에는 불교만 공부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불교만 진리라는 생각이 아니라 불교는요, 제가 공부해보니까 그렇습니다. 불교는 광대무변한 전체의 진리를 의미한다면 히말라야 정상에 올라가는 데는 다양한 루트가 있지 않습니까? 다양한 길이 있지 않습니까? 그 다양한 돌아가는 길도 있을 수도 있고, 힘들지만 가파른 길도 있을 수 있고, 그건 취향의 차이인거에요. 다양한 종교 사상 철학,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 가까이 까지 갈 수가 있습니다. 분명히 가까이 까지 갈 수가 있어요. 그런 면에서 모든 종교를 허용하게 되는 겁니다. 저는 목사님 신부님 타종교 신자들을 미워하거나 이런 마음들이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고, TV옛날에 보면 뭐 이렇게 시상식 같은 거 할 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러면 옛날에는 얼굴을 붉혔으면, 지금은 그 분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거에요.

 

저분은 저분의 저 상황 속에서 저 아름다움, 그분의 입장에서는 그분의 상황 속에서는 최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분은. 그걸 우리가 미워할 필요는 없어요. 그걸 미워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한된 것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걸 못 받아들이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지혜가 열리기 시작하면 많은 것들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하고요, 부처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의 경전을 보면 요거 요거는 맞는 얘기인데, 이거는 조금 허황된 거 같다. 이런 생각들을 했었어요. 제가.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 보니까 경전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은 부분이 , 이게 허황됐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허황된 것이 아니었구나.” 예를 들면 천상세계에 관련된 이야기들이라든가, 우리가 아까 말씀 드렸던 이야기들, 천상세계의 신들에 대한 이야기들로부터 다양한 가르침들이 옛날에는 이건 아니야.” 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활짝 열린 가슴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주 단적인 예로 옛날 같으면 신도님들이 꿈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러면 아이고 그런 건 꿈일 뿐이니까 그려러니 해석하려고 하지도 말고 필요 없다.”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물론 그 말이 근원에선 맞습니다. 근원에선 맞는데, 또 다른 차원에서는 꿈이라는 것은 우리의, 티베트에서는 꿈을 점검 받으므로서 그 사람의 의식수준이 얼마만큼 공부가 되고 있는지를 스승에게 점검을 받고 있기도 하거든요. 그 꿈이라는 것이 어떤 수행의 과정에 포함되는 것이구나라는 것들을 알게 되니까 그것도 하나의 공부재료로 쓸 수가 있게 되고, 다양한 것들을 포용하면서도 근원을 놓치지 않게 된단 말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 본질을 이제 전도된 몽상으로서 이 역사가 만들어 왔던 지금의 와서는요, 불교 하면은 여러분들은 뭐를 불교가 생각하세요? 스님이 사시불공 하는 거, 이걸 불교라고 생각해요. 사시불경 열심히 해야지 이게 올바로 하는 거 같고 49재하고 천도재하고 뭐 한 시간씩 이것도 하고 저것도하고 해야지 이게 불교를 제대로 한다고 생각을 한단 말이죠.

 

그거는 역사에서 만든 부산물이죠. 부처님 가르침의 부산물일 뿐이죠. 지금 요즘에 많은 스님들은 아예 사시불공도 없애고, 천도재도 없애거나 아니면 심플하게 하거나 이러는 사찰들도 많이 생겨나고 있어요. 본질로 다가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제 다시. 역사에서 왜곡해 왔던, 방편을 너무 거추장스럽게 집착해 왔던 그런 것들을 놓아버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지금은 이제는, 이제 그런 시대로 이 시대 자체가 도립을 했어요. 지금의 시대는 놀랍게 본질이 중심이 되기 시작하는 시대이고, 이 세상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속도로 깨어나기 시작하는 시대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예언하셨던 것처럼. 그래서 지금의 시대에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공부고 수행이고, 우리가 지금 이 시기에 공부라고 수행을 하게 됐을 때는요, 이 우주적인 공명을 받게 됩니다.

 

어떤 양자물리학자는 그렇게 얘기를 해요. 지금 지구 전체적인, 지구 인류에 전체적인 파장, 헤르츠가 옛날보다 상당히 많이 빨라지면서 과학적으로 봤을 때 대게 놀라운 차원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그래요. 제가 상담을 하는 많은 신도님들 중에 스님들뿐 아니라 신도님들 중에도 상담을 하다보면 아주 재미난 일들을 봐요. 신도님들 당신은 뭔지 모르시면서 이렇게 당황해 하시는데, 뭐랄까 옛날 같았으면 그야말로 한 소식 했다고 할법한. 이런 공부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어떤 경험들을 많이 하는 분들이 많이들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게 본질이 중요해지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 흐름을 그 공명의 에너지, 공명의 파장을 우리도 함께 타고갈 수 있는 놀라운 시기에 우리가 접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결론을 좀 말씀을 드리면요, 여러분들은 단 한순간도 실수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과거는 완전히 옳았습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완전히 아름다웠습니다. 그것은 그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던 겁니다. 그것은 왜 일어났느냐? 나를 돕기 위해서. 나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일어났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성공적으로 착착 깨달아 오고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들 전생 그 전생이 뭐였는지 궁금하십니까? 그 수없이 많은 수억 겁의 전생의 총채, 총화가 지금 나의 모습인 겁니다. 지금 나의 모습으로 나는 지금 어떤 깨달음의 정점에 지금 놓여 있는 겁니다. 수없이 많은 윤회 속에서. 단 내 머릿속에서 지금까지는 그것은 아니라고 배워왔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한다. 염라대왕이 주고나면 심판을 한다. 지옥 보낼지 어디 보낼지 심판을 한다. 이렇게 배워왔잖아요. 심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우주에 심판하는 존재는 유일하게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단 심판하지 않으면 어쩝니까? 나쁜 짓을 해도 그 사람 벌 받지 않습니까?” 벌은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균형의 법칙에 따라서, 들어오고 나감의 법칙에 따라서, 균형의 법칙에 따른 인과응보는 받습니다. 내가 누굴 죽이면 누군가의 죽임을 당하죠. 내가 누군가를 죽였어요. 다음 생에 아프리카에 태어나서 한 살 두 살 밖에 안 됐는데 못 먹고 바로 그 자리에서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 생엔 또 그 업을 멸했으니까 또 다르게 태어날 수 있겠죠. 그럼 그 아프리카에서 한 살 두 살 돼서 죽었던 아이 같은 경우에, 우리가 무조건 이것은 좋고 나쁘고 이런 관점에서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더 깊은 차원에 그 아이만의 몫이 있었던 겁니다. 에를 들어 내가 누군가를 죽였어요. 내가 거기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있었다가 죽었습니다. 다음 생에 누군가가 나를 죽일 수 있어요. 그것은 자기가 끌어당긴 겁니다. 그 죽인 사람만 나쁜 놈이 아니에요.

 

내가 그것을 죄의식으로서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과보로서 이 과보를 받아야지만 이건 사라진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어떤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서 그러한 과보를 받았던 거죠.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절대적으로 욕을 했습니다. “저 나쁜 놈, 저 놈은 죽일 놈이다.”하고 욕을 했어요. 그런데 사실은 근원에서 보면 욕 얻어먹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무작위로 요즘에 보면 그런 거 있잖아요. 미국에서 보면 갑자기 따발총으로 죽이거나 뭐죠? 묻지 마 살인도 하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런 걸 보면서 여러분들은 두려움에 떨어요. 그러면서 집에 가다가 혹시 그런 게 나한테 있지 않을까? 걱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전혀 걱정 할 필요가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겉으로 봤을 땐 무작위라고 생각을 하지만, 이 세상에 이 우주에 무작위라는 건 없습니다. 정확한 인과응보, 인연 따라 그 일이 일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업으로 인해서 끌어당겼던, 아니면 내 한 생각으로 끌어당겼던, 내가 그것을 원했든, 그 죄의식을 붙잡고 있으므로서 그것이 이 죄의식의 에너지가 그것을 공명해서 끌어당겼던, 내 안에서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것이 일어나는 것이지,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그 과보를 반드시 받아야 되는 것만은 아니다. 딱 참회하고, 참회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놓고, 그 때부터 새롭게 살기 시작하면 됩니다. 보통 많은 사람은 죄를 지었을 때, “난 어차피 죄인이니까 앞으로 열심히 살아도 소용없어. 한번 배린 몸.” 그러면서 더 나쁜 짓을 더하거든요. 죄를 짓는다는 의식 속에서는 지옥 간다는 의식 속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참회하고 내려놓게 되면 모든 것은 제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다시 시작할 수가 있어요. 모든 사람은 늦은 순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의 과거의 그 어떤 많은 죄나 잘못이나 미래에 있을 그 어떤 일들,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의식을 바꿀 것이냐에 따라서 여러분들은 놀라운 삶으로 바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 부처님 가르침을 이제 다음 주도 공부를 하실 텐데 이 가르침은요, 이 놀라운 공부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들의 의식을 확장하고, 더 많은 것을 열므로서 여러분들은 다른 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주법계에서 언제나 지혜는 무한하게 공급되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매순간. 다만 내가 제한했기 때문에 그만큼만 오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함으로 통해서 이것을 점점 저절로 열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강의 끝날 때쯤 되면 내 마음이 많이 열려있구나.

 

내가 옛날 같으며 이렇게 생각했을 텐데.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수용할 수 있고, 허용할 수 있고, 괴로움이 오더라도 그것을 허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고통이 오더라도 그것을 허용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그 어떤 지혜가 증장 되는 그런 일들이 분명히 생겨날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부터 이제 공부를 하실 건데, 오늘부터 가셔서요, 제가 아까 말씀 드린 그것을 실천을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실천을 하시느냐하면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던 죄의식, 업장, 괴로움, 찜찜한 마음, 과거의 잘못됐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 이것을 내려놔야 된다 그랬잖아요. 어떻게 하면 내려놓고 참회할 수 있냐 하면 나 자신을 완전히 용서해 주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완전히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남들을 용서해주고, 남들을 사랑한다? 이거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나 자신을 용서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겠어요? 이것은 획기적인 수행입니다. 아주 획기적인 겁니다. 여러분들이 상상 한 것, 그 이상으로 획기적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을 무한정 용서해 줘야 된단 말이죠. 용서해도 이거는 도저히 용서 못 하겠는데 라는 게 없어야 됩니다. 그 어떤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 부처님은 언제나 용서했는데 내가 그걸 붙잡았기 때문에 거기에 스스로 사로잡히고 있었던 거거든요. 여기에 사로잡혀 있으면 평생 그 어둡고 탁한 에너지에 걸러서 모든 것이 바라보이시게 되요. 세상이 어둡고 탁한 것에 걸러서 색안경처럼 보게 되고, 내 안에 있는 것이 공명 되어서 우주에서 나에게 옵니다. 내 안에 어둡고 탁한 마음이 있으면 어둡고 탁한 일들이 자꾸 나에게 와요.

 

내가 누굴 미워하는 마음 있으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직장에서도 만나고, 여기가도 만나고 저기다도 만나요. 내가 원한심이 있으면 원한심을 느낄 만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내가 사랑의 마음이 마음속에 있으면, 이상하게 이 단체에 가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저 단체에 가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고 그렇습니다. 내 마음의 상태에 어떤 것이 있느냐에 따라서 내 바깥에 있는 세상은 내면이 그대로 투영된 거에 달리 합니다. 안팎은 없어요. 유식이라 그러잖아요. 오직 마음이다. 이 마음이 드러난 거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은 세상을 바꾸는 거, 나쁜 놈 성격을 바꾸는 거, 남편을 바꾸는 거, 자식을 바꾸는 거, 이거 다 아닙니다. 내 마음을 바꾸는 거예요. 내 마음만 바꾸면 그 바깥은 저절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을 바꾸는 첫 번째는 다음시간 오시기 전까지 나 자신을 완전히 용서해 주세요. 방법?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면, 단순합니다.

 

내 마음을 바라보면서 하루에 5분도 좋고 틈나는 데로도 좋습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허용해 주고, 또 내가 과거에 찜찜했던 모든 것을 허용해 주면서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그것은 다 온전한 것이었다. 그거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것을 이해한다. 다독거려주는. 어머니가 아무리 잘못을 한 자식이라도 안아주고 다독거려 주듯이 부처님은 언제나 여러분은 안아서 토닥여 줍니다. 여러분이 어디 가서 살인을 저지르고 왔어도 언제나 토닥여 주고 사랑해주는 분이 부처님이고 진리다. 그러니까 나 자신을 완전히 용서해주기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용서합니다. 용서합니다.” 하는 말을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하고, 숨을 내쉬면서 용서합니다.” 하셔도 좋고. 또 숨을 들이쉬면서 수용합니다.” 숨을 내쉬면서 용서합니다.”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수용과 목탁소리에 글이 나와 있을 텐데, 수용과 용서의 호흡관을 통해서 내 삶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수용하고 그것을 다 용서해 주십시오.

 

과거를 전부 다 통째로 수용하고 그것을 용서해 주세요. 그래서 용서합니다. 용서합니다.” 하는 말을 하루에 백번, 2백번, 3백번 좋으니까, 하루에 하여간 백번 이상씩. 수용와 용서의 호흡관을 꾸준히 하시고, 그 내용을 카페에서도 좋고 그냥 검색엔진 같은 데서도 수용과 용서의 호흡관치면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으니까 그걸 읽어보셔도 좋고요. 그래서 수용하고 용서하는 그런 걸 통해서 내 내면을 완전히 정화하는 그 작업을 다음시간까지 미션수행으로 드립니다. 아카데미하면서 한 번씩 미션수행을 드립니다. 그 주 한주동안 이제 숙제죠. 숙제. 숙제로 하고 실천해야 될 것들인데, 이번 주 어떤 미션은 수용과 용서의 호흡관이고, 숨을 들이쉬면서 수용합니다.” 하고 숨을 내쉬면서 용서합니다.” 해서 나 자신을 완전히 용서해 주는 것부터 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내 내면이 어느 정도 정화가 되었는지, 어느 정도 용서가 되었는지, 나 자신을 완전히 허용할 수 있는지,

 

어느 것이 내면이 되느냐하면 내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지면, 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워지면, 나의 과거가 완전히 받아들여지고 사랑스러워지고, 나의 미래에 대해서도 그 어떤 것이라도 와라. 내가 받아들여주겠다. 그것을 통해서 성장해 나가고 그것을 통해서 깨달아 나가 주겠다. 라고 수용이 되고, 용서가 된다면 여러분들은 큰 성공을 이룬 겁니다. 어쩌면 이번 생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놀라운 성공을, 언제나 성공이었지만, 더 큰 성공을 거둘 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목탁소리 지대방, 다음 카페에 가시면 거기 아카데미 게시판이 있고요, 거기 미션 수행방이라고 있습니다. 달마미션 수행방, 붓다미션 수행방인가요. 있습니다. 거기에 붓다 미션 수행을 하시고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수행 일기 같은 것들을 이렇게 좀 올려주시면 좋겠고요,

 

또 이렇게 강의 후기 같은 것도 거기에 좀 올려주시면 많은 분들이 보시고 공유하시고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또 많은 분들이 공부해 동참도 하시고 그 하나의 포교가 되고, 또 그런 것들이 아주 좋은 많은 도반들과 함께 가는 것이 될 거 같고요, 그렇게 해서 글을 올리고 하신 분들을 이렇게 가끔씩 뽑아가지고 선물도 드리고, 수료하는 날, 또 수료선물도 드리고, 뭐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강의만 한번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수행을 하고, 그 수행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수행하는지 점검하고, 많은 분들이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여기서 강의를 듣는 것도 좋았지만, 집에서 그 수행을 직접 실천해보고, 그리고 딴 분들이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가서 보고, 내 수행일기도 쓰고 하면서 더 큰 어떤 공부가 되었고, 더 큰 실천이 되었다. 그 실천에 따르지 않는 수행은 여기 1년을 공부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수용과 용서의 호흡관을 오늘 가셔서 열심히 해보시고, 다음 주에 목요일 날 새롭게 부처님 생애부터 공부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늦게까지 듣느라고 고생 많으셨구요, 아주 돌아가셔서 주무시고 여러분 자신을 완전히 용서해서 얼굴이 환하게 핀 모습을 다음 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