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연기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그 핵심을 보통 이야기할 때 '연기법'이라고도 이야기 하고,
또 뭐 중도 또는 공사상 혹은 또 이제 무아, 뭐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어떤 핵심들인데요.
이것을 좀 간단하게 좀 풀어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모든 것들,
또 귀로 들리고, 맛봐지고, 접촉하고, 생각의 대상들도 마찬가지고요.
일체 모든 '있다'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우리가 이렇게 감지할 수 있는 일체 모든 것들은
그것 자체로 만들어진 게 하나도 없다는 거죠.
그것 자체로써 어떤 주재자가 없고,
뭔가 어떤 실체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다만 인연 따라서 그렇게 잠깐 만들어졌을 뿐이라는 겁니다.
인연 따라 잠깐 그렇게 생겨났을 뿐이다.
본래 실체가 있는 어떤 알갱이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 흔적도 없이,
그러나 이 세상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은 다만 인연 따라 만들어졌을 뿐이다.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 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서, 기대어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독자적으로 혼자 딱 태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불'이라는 것이 없지만
성냥갑과 성냥이 있으면 이렇게 딱 켜준다 라는 인연에 따라서
없던 불이 갑자기 생겨난 것과 똑같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이렇게 태어났단 말이죠.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렇게 인연 따라 잠깐 만들어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겁니다.
태양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머릿속에...
햇살이 나를 따뜻하게 내리쬐는 상상을 한 번 해 보십시오.
제가 이렇게 말을 한 인연 따라 여러분 머릿속에서는 태양이 상상이 되고,
햇살이 내리쬐는 상상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을 뿐인 거죠.
인연 따라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바깥에 진짜 있는 걸까요?
내가 인지하지 않는 이상, 의식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간밤에 산에 뭐 큰눈이 오거나 해서 나무가 하나가 쓰러졌다, 그래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렸을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듣고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죠.
이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하고 의존해서,
인연들이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緣)들이 상호화합해서,
탁!, 이 '소리'라는 게 없는데,
짝~(손뼉을 치시며)이렇게 손바닥이 두 개가 짝~하고 부딪치니까
부딪친다는 인연 따라 소리라는 결과가 탁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이것이 인과법입니다.
'인(因)'을 맺어주면,
'과(果)'가, 결과라는 '과(果)', 소리가 들린다.
이와 같이 세상은 모두 만들어졌다.
'나'라고 해서 별게 없다는 말이죠. 나라고 해서...
내 몸뚱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란 어떤 주재자가 있어서
전생에서 '나'란 어떤 놈이 있었고,
이생으로 이렇게 옮겨왔고,
미래와 다음 생에는 또 다른 어떤 걸로 옮겨갈,
뭔가 옮겨갈 하나의 알갱이도 없단 말입니다.
하나의 실체도 없다.
다만 인연 따라 변화해갈 뿐인 것이지.
어떻게 인연을 맺느냐에 따라서 계속해서 바뀌고 변해가는 것뿐입니다.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불교의 어떤 업설이라고 하는 것도
완전히 정해진 실체를 이야기하지 않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뭐 '점을 보러 간다, 뭐 업장이 두터워서 그렇다.'
물론 그게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인과응보의 어떤 법칙에 의해서 그런 것들이 있긴 있지만,
그것은 계속해서 바뀌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정해진 업이라는 것은 없죠.
바뀌는 업이 있을 뿐이지. 변화하는 업이 있을 뿐이죠.
그러니까 ‘내 팔자가 이래서 난 이렇게밖에 못 산다.' 이건 다 거짓말입니다.
‘난 원래 명이 길어서 나는 오래 오래 산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얘기죠.
자기가 부주의하게 살면 아무리 명이 긴 사람일지라도
고속도로에서 그냥 뛰어내리거나 한다면 거기서 죽을 수밖에 없는 거겠죠.
몸을 함부로 굴리면 병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원래부터 정해져가지고 몸이 건강하게 타고나서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 거다.'
이런 건 없습니다.
부처님도 상한 음식을 드시면 배탈이 나는 분이란 말이죠.
이와 같이 인과응보의 어떤 인연법에 따라서, 연기법에 따라서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연해서 만들어진다, 기대어서 만들어진다.
홀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전부 다 모든 다른 것과 기대어서, 의존해서
그것이 있음으로 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세상 만물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실체라는 것은 없죠.
실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실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
그것이 딱 보면 진짜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잠시 잠깐 만들어진 허망한 허상에 불과한데,
꿈과 같은 것에 불과한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짜처럼 보이니까.
가짜처럼 보여야 되는데 이게 너무 생생하게 진짜같이 보인단 말이죠.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는 말은 벌써 공하다는 소리거든요.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 이 소리는 ‘텅 비었다, 무아다’ 이 소리예요.
그러니까 인연 따라 만들어진 텅 비어 있고,
무아인 이 대상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단 말이에요.
진짜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마음속에 이게 진짜라는 상을 짓는 겁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보인다는 상을 짓는 거예요.
이걸(컵을 가리키시며) 보고 ‘컵’이라고 우리가 상을 짓는 거예요.
이건 컵이다. ‘컵 뚜껑’이고, ‘컵’이다. 이렇게 상을 짓는단 말이에요.
다른 컵을 딱 보면, 다른 컵을 딱 보고서 예전에 컵을 봤던 기억을 더듬어서
'아, 이것을 컵이라고 내가 배웠지'
어린애가 태어나자마자는 아무런 상이 없죠.
'이 세상이 실체다, 허망하다 ' 뭐 이런 것도 없습니다.
'너다, 나다'라는 것도 없고,
'사람이다 짐승이다' 라는 것도 없고,
'내 편,네 편'도 없고. '엄마, 아빠' 구분도 없죠.
어린애기가 엄마인 줄 압니까?
직관으로 안다고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게 그냥 보이면 보인다는 걸로 알 뿐이지,
이게 엄마고 아빠고, 뭐 내 친척이고,
나랑 먼 사람이고. 나를 해치는 사람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갓난아기는 칼을 갖다 들이대도 생글생글 웃을 뿐이죠.
아무런 분별이 없단 말입니다.
아무런 차별이 없어요.
그냥 세상을 전체로 인식한단 말이죠.
그러다가 이제 '이거는 컵이다,
이러한 것은 사람이고, 이러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이러이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배워 익힌단 말이에요.
배워 익히면서 온갖 '상'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이걸(컵) 하나의 상으로 만들어서 ‘컵’이라고 상을 짓고,
모든 것을 상을 지어서 딱 기억을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이 기억하는 것 때문에 다 문제가 됩니다.
과거에 배운 것을 기억하다 보니까,
'상으로 맺어서 기억한다'라는 것은 뭐냐 하면,
명색으로 기억한다, 즉 이름을 부여해서 기억한다고 말이죠.
우리가 컴퓨터 파일에 입력을 하고, 그것을 저장하려고 할 때,
이름이 없으면 저장이 될 수가 없잖아요.
이름이 있어야지만 저장이 됩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상'으로 '상'을 지을 때는, 모양을 지을 때는
이름을 부여해서 모양을 짓습니다.
'책이다, 볼펜이다.' 이렇게 이름을 지어야
그게 이제 내 안에 딱 기억되기 쉽단 말이죠.
근데 이렇게 이름을 지어놓는다는 것은
이걸(볼펜) 하나의 어떤 특정한 대상으로 규정짓는다는 것을 의미해요.
‘볼펜이다’ 이러면 이건 볼펜을 봤고, 볼펜을 알기 때문에
볼펜이라고 이것을 이름을 딱 지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과 흡사한 어떤 규정을, 규준을 가진 것들 모두를
우리는 ‘볼펜이다’ 이렇게 이름한다 말이죠.
다음번에 뭔가 나타났을 때,
옛날에 내가 '볼펜'이라고 그랬던 것을 기억하고는
“그건 볼펜이야.”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죠.
어떤 사람을 난생 처음 본 사람인데,
“이 사람 느낌이 어떻습니까?” 물어보면 우리는 다 나름대로 판단해요.
‘아, 성격이 좀 드러워 보인다'. '이 사람 좀 사람 좋아 보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어디서 나온거냐 하면,
상을 짓지 않고 있었다면, 기억이 없었다면,
이름으로 정해놓은 상이 없었다면 그 사람을 그렇게 판단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옛날에 나를 차버린 첫 사랑과 닮았다.' 그럼 좀 재수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마음이 좋게 느껴지기도 하고, 이런 상을 내는 거죠.
'나한테 사기 쳤던 사람과 똑같다.' 그럼 아주 기분 나쁘게 느낄 수도 있고.
이것처럼 자동으로 우리 머릿속에서는
옛날에 우리가 배워오고 경험했던 것을 탁 돌이켜 가지고
현재를 그걸로 분별하고 해석해서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서 인식이 되다보니까
이 허망한 세상을, 인연 따라 만들어진 이 허망한 꿈과 같은 세상을
우리는 이름 짓고 상을 짓다보니까 이게 이제 진짜라고 믿기 시작하는 겁니다.
모양이 있는 것은 진짜라고 인식한단 말이죠.
진짜가 아닌데도 우리는 진짜라고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니까 이 '상' 속에서, 이 '상'을 짓는 속에서
온갖 문제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어떤 상이 만들어지냐 하면,
‘돈을 벌어야 된다.
어느 정도의 아파트는 살아야 된다.
차는 어느 정도로 굴려야 된다.
경제력은 이 정도는 가져야 된다.
내 자식은 어느 정도의 대학은 가야 된다.
이런 건 잘 생긴 사람이고, 이런 건 못 생긴 사람이다.
내가 늙어가면서 자꾸 쭈글쭈글해지면 안 된다.’
이런 온갖 생각들을 만들어 놓는 거예요.
어린 아이는 아무런 상이 없죠.
어린 아기들은 비싼 차, 안 비싼 차도 없고,
좋은 집 살 필요도 없고,
잘 생기고 못 생긴 사람의 기준도 없어요.
제 친구 중에 정말 잘 생긴 친구가 몇 있었는데,
같이 다니면 이 친구들 너무 잘 생겼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아주 꼬마 애기, 아주 어린애기가 식당에 갔는데 있더라고요.
저 중학교 땐가, 고등학교 땐가 그런데
제가 그때 무슨 일 때문에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교복이 양복처럼 넥타이가 탁 돼있지 않습니까?
제가 그 교복을 딱 입고 있었고, 정장처럼 교복을 딱 입고 있었어요.
그날 딴 친구들은 그냥 티셔츠 한 장 입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애기한테 한 친구가 대뜸
“형아 중에 누가 제일 잘 생겼어?” 이랬더니 대번에 저를 탁 찍더라고요.^^
그게 얘네들한테는 얼굴이 잘 생기고, 못 생긴 기준이 없는 겁니다.
그냥 양복 입고, 뭔가 이렇게 멀끔하게 차려 입으면 그냥 그게 잘나 보이는 거라.
특정한 상이, 대략적인 자신들의 어떤 얄팍한 상밖에 없으니까.
자기가 어떤 방식으로 상을 맺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게 달라지는 겁니다.
저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 가면 뚱뚱할수록 예쁘고 섹시하다고 느낀단 말이죠.
미얀마 어디 가니까 목이 길면 긴 여성일수록 예쁘고 섹시한 여성으로 느껴진단 말이죠.
어떤 사회에서, 어떤 곳에서 사느냐에 따라서 그 맺어진 상은 저마다 다른 겁니다.
옛날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대학 가야지만 좋고,
비싼 아파트에 살아야지만 좋다는 생각은 안하겠죠.
우리나라같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나
평수 넓은 아파트 사는 걸로 좋다고 생각하지,
땅 넓은 나라들에서는 아파트 산다는 것은 기형적인 것으로 좀 이해할 수도 있죠.
땅을 밟고 살아야 되는 걸로 이해할 수 있고.
옛날 인디언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침입해가지고 막 내쫓아낸 다음에
이 사람들은 그래도 집을 좀 주고서 살게 해줘야 되겠다 해가지고
원주민들한테 집을 하나씩 다 줬다는 거예요.
마당 있는 집을 하나씩 다 줬더니만, 원주민들이 전부 다
방에 들어가서 안 자고, 마당에 나와서 땅에서 자더라는 겁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집이라는 게 그냥 ‘흙’이 집인 거예요. 흙 위에서 자는 게...
그러니까 '상'에 따라서,
우리가 어떤 상을 머릿속에 딱! 짓고 있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대학교 어느 정도를 가야 된다’라는 상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보다 못 가면 괴롭고,
‘돈을 얼마큼 벌어야 된다’는 상이 있는 사람은 그것보다 못 하면 괴롭지 않습니까?
이처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괴로워하는 모든 것은 내가 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가짜로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근데 그 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공한 것이고,
인연 따라 잠시 만들어진 것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진짜가 아닌데, 그걸 진짜라고 탁 마음속에서 규정지은 거예요.
인연 따라 만들어진 연기적인 현실일 뿐인데,
인연가합의 꿈과 같은 현실일 뿐인데 이걸 ‘진짜다’라고 여기고,
진짜니까 거기서 '내가 훌륭하다'라고 생각하는 가치를
붙잡으려고 막 기를 쓰고 노력한단 말이죠.
그것이 거짓인 줄 모르고.
돈 많이 벌고,
맛있는 음식 먹고, 비싼 것 많이 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줄이고,
자연 그대로 사는 것을 최소화시키고 내가 원하는 대로만
여름에는 항상 에어컨을 틀고 살고, 겨울에는 항상 따뜻하게 살고,
설거지도 내가 하기 싫으니까 뭐 어디다 넣으면 바로 해 주는 게 있고,
청소도 그냥 알아서 해 주는 것도 있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편하면 좋다’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렇게 하다가, 그렇게 돈을 많이 벌어서 원하는 대로,
가정부도 쓰고, 나는 완전히 편하게만 살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마시고 이렇게만 살다가
그게 좋은 줄 알았는데 그렇게 살다가 빨리 죽는 경우도 많지 않겠습니까?
뭐가 옳은지 그른지를 모른 상태에서 그 상에 얽매여서,
그 상이라는 것이 진짜도 아닌데,
사실 이 세상에 ‘진짜, 가짜’가 없단 말이죠.
‘옳다, 그르다’는 게 없단 말입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상이 진짜 옳은지 그른 건지 우리는 알지도 못하고
‘옳다’라고 착각하면서 그걸 믿고서 그냥 사는 겁니다.
‘내 생각이 옳다’라는 착각 속에.
‘돈을 많이 벌여야 된다’라는 게 진실인지 아닌지 우린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좀 덜 버는 게 훨씬 아름다운 일일지도 모르는데,
그 사람은 남들처럼 해야지만 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죠.
체질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
그 사람의 업에 따라 다 다르지 않습니까?
저마다 옳고 그른 게 다른 거예요.
어떤 사람은 이게 옳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저게 옳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어떤 사람은 담배를 피워도 팔십, 구십까지 막 쌩쌩하게 사시는 분도 계시단 말이에요.
그것을 보고 ‘저 사람도 저런데 나도 괜찮겠지’하고 담배를 피우다가
폐나 간이 안 좋은 사람은 더 빨리 죽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옳다 그르다’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관념지은, 상으로 만들어낸 모든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우리는 단 하나도 알 수 없습니다.
본래 옳고 그른 게 정해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내 머리로, 내 상으로 ‘옳다, 그르다’라고 판단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절대선, 절대악’은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규정해 놓은 것뿐이지.
그래서 사실은요, 이 세상이라는 곳은
자기가 규정짓는 대로, 내가 규정한 방식대로,
저 마다 자기다운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뿐이지,
'진짜 옳게 산 사람이 누구이고, 그르게 산 사람이 누구냐?'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냥 저마다의 삶이 있을 뿐이지.
‘어느 것이 정답이다’ 이런 건 없단 말이죠.
자기다운 삶이 있을 뿐이죠.
근데 우리는 머릿속에 상으로 ‘이것은 옳고, 이것은 그르고,
이것은 정답이고, 이것은 틀린 것이고,
이런 삶을 살아야 하고, 이런 삶은 살면 안 되고’
이걸 너무 많이 정해놓고 내 스스로 만든 틀 속에
이것이 진짜인줄 알고 빠져가지고 내 스스로 괴로워하는 겁니다.
내가 머릿속에서 ‘우리 아들 이 정도 대학은 가야돼’ 해놓고
거기 못 갔다고 막 괴로워하고 울고불고, 인생 실패한 것처럼 여긴단 말이죠.
이거는 백퍼센트, 백퍼센트 내가 만든 거지, 누가 만든 게 아닙니다. 사회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남들이 뭐 손가락질 할까봐 괴롭다?'
이것은 다 내가 만든 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겪고 있는 괴로움은 딴 사람이 만든 게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겪는 괴로움은 남들이 만들어준 게 아니라
내가, 내가 기어이 붙잡아서 괴로움을 만든 거에 불과합니다.
그래 놓고 부처님께
‘내 괴로움을 없애 달라.'
'이 괴로움을 좀 가져가 주십시오.'
이 괴로움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겠습니까?’
남들한테 가서 아무리 털어놔본들 이 괴로움을 없앨 수가 있겠는가.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의 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 상이 거짓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언제까지고 우리는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겁니다.
무엇을 깨기 전까지는?
내가 만들어 놓은 내 머릿속에서의 허망한 상, 허망한 착각, 허망한 망상
이것을 깨기 전까지는 우리는 행복과는 요원하다.
이것만 없으면, 이 망상 덩어리만 없으면
우리는 이 자리에서 완전하단 말이죠.
이 자리에서 완전하다. 완전한 부처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하는
이 모든 경계가 그대로 부처님의 경계란 말이죠.
그대로 진리다. 진리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내가 중생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려면 열심히 노력하고,
닦고 닦아서 열심히 수행을 해서 부처가 돼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건 허망한 착각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부처인데,
망상을 가지고, 내 스스로 꿈과도 같은 허망한 착각을 가지고
‘내가 중생이다’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사는 것만이 올바로 사는 것이다' 라고 규정을 지어놓고,
그대로 살면 좋은 것이고, 그대로 못 살면 불행하다고 머릿속에서 해석해 놓고
내 스스로 벌주고, 내 스스로 칭찬하고,
내 스스로 잘했다라고 그러고 내 스스로 잘못했다 그러고,
벌도 내가 내리는 것, 내 스스로에게 내가 내리는 형벌입니다. 모든 벌은.
우주법계는 우리를 판단하지 않아요.
우주법계는 우리를 판단하거나 벌주거나
미워하거나 용서하거나 이럴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부처나 신은 그런 게 아니란 말이에요.
판단해 가지고 누구를 '옳다, 그르다' 재판해가지고 다음 생애에
지옥 보낼지 천당 보낼지를 결정짓는 그게 부처가 아니고 그게 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할 뿐입니다. 내가!
오~직 내가 할 뿐입니다.
망상으로 만든 게 나니까, 창조주가 나니까 그것을 깨어 없애는 것도 나죠.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열심히 닦아가지고 부처가 돼야 되는,
지금은 어리석은 중생이지만 언제가 부처가 돼야 되는 이런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완성된 존재이지.
이미 부처 그 자체이고, 더 이상 갈 게 없고,
닦아서 뭔가를 잡아야 될 게 없다는 말이에요.
허망한, 뭐 모양이 있는 것 같으면,
상이 있는 것 같으면 거짓으로 만들어 놓은 상이니까
상이 있는 것 같으면 그걸 열심히 노력해 얻을 수 있죠.
공부 잘하려면 노력해야지 공부 잘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돈을 벌려면 노력해야 돈을 벌 수 있잖아요.
상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노력해야지 그걸 얻을 수 있습니다.
가짜로 만든 거니까 가짜의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부처라는 것은,
도라는 것은,
깨달음이란 것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상도 있는 게 아니에요.
상이 있고, 어떤 물건 같은 것이면 잡으려고 노력해야 되지요.
근데 물건 같은 게 아니니까 잡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이미 구족되어 있는 거니까 뭔가를 노력해가지고 얻어야 될 게 아니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마조스님은
“도는 어떻게 닦는 것입니까.” 하고 한 스님이 물었는데, 이렇게 답합니다.
“도는 닦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닦아서 이룰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다시 무너지기 마련이니 이것은 성문의 도일 뿐이다.
그렇다고 닦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평범한 범부일 뿐이다.”
도는 닦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닦아서, 열심히, 열심히 닦아가지고 노력해서 이루어진 도라면
노력해서 얻는 것은 노력 안 하면 무너지는 겁니다. 그렇죠?
열심히 공부해 가지고 얻은 도는 공부 안 하면 사라진단 말이에요.
의사들도 들어보니까 의사가 됐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고 하대요.
훌륭한 의사가 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의학 이런 것들을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해야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이처럼 공부해서 얻어야 되는 거면 끝까지 공부를 해야 된단 말이에요.
안 하면 무너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 ‘깨달음’이란 것, ‘도’라는 것은 완성하고 뭐 자시고하는 게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해서 얻는 게 아닙니다.
노력해서, 닦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너지기 마련이죠.
근데 이 우주법계의 진리는 무너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노력해서 닦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이렇게 얘기한다고 닦지 않으면 그건 그냥 범부일 뿐이다.
‘닦지 않아도 안 된다. 닦아도 안 된다.’
이 말이 웃기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게 아주 진실한 말인 겁니다.
그래서 함이 없이 해야 한다.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되 내가 마음속에 정말
'내가 이 법을 알아야 되겠구나'
'이 진리를 알아야 되겠구나.' 이렇게 허망한...
여러분, 이제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왜 수행을 해야 하냐 하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너무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아... 참 정말 살면 살수록 억울하고,
정말 침통하고, 깝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날 넘어지는 데서 넘어지거든요.
넘어지지 않아도 되는데 넘어지고,
남들이 나한테 뭐라고 뭐라고 한 마디 나쁜 말을 했단 말이에요.
그 한 마디에 내가 걸릴 필요가 전~혀 없단 말이에요.
전혀 필요가 없는데,
왜? 그 사람이 부처도 아니고,
정말 모든 걸 완전히 아는 사람이라서
내가 정말 잘 알지도 못한 일을 딱! 결정해주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 말 한 마디가 나에게 그대로 와서 꽂혀야 되겠죠.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 자신도 자기 자신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더 중요한 것은 ‘옳고 그르고’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온다고 우리에게
“너 이것은 잘했고, 너 이것은 잘못했어.” 이런 말 하지 않습니다.
옳고 그른 게 없기 때문에.
남들의 말이 나를 규정지을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남들의 말에 휘둘릴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휘둘리며 살아왔잖아요.
억울하지 않습니까?
억울하면서, 너무 어이가 없으면서도
이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이렇게 휘둘린단 말이에요.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걸로 인해서 무너지고, 쓰러지고, 괴로워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 이제 담담해지면
또 이제 깨어난 것 같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 같고,
괴로워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그게 또 흔적이 없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 같고, 이러한 내 머릿속...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그 괴로움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냈다가 머릿속에서 없앴다가
‘잘 닦아서 없앴다’ 이렇게 착각하는 것 아니겠어요?
모든 게 그렇습니다.
자식이 대학교를 ‘서울대 갔으면 좋겠다’라고 집착을 딱 했는데, 서울대를 못 갔습니다.
그때는 막 괴로워 죽으려고 했다가 적당한 대학을 갔어요.
그럼 어쩔 수 없이 막 괴로워 괴로워 괴로워하다가,
몇 년을 괴로워하다가 이제는 포기해야 되겠구나 싶어서 마음속에 탁 내려놨습니다.
그러고 나서 뭐라고 그러냐 하면,
“야~ 내가 수행을 했더니 역시 마음이 닦이더라. 집착이 좀 내려놔집니다. 수행을 하니까.”
본인이 스스로 그렇게 대학을 거기를 가야 된다고 만들어놓고,
그게 또 어느 정도 담담해지니까
“아, 내가 수행을 해서 닦아가지고 그 마음을 내려놨습니다. 집착을 버렸습니다.”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죠.
이러한 허망한 착각만을 해왔고,
허망한 착각 속에서 괴로워해 왔고,
이 괴로움이 허상인줄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온 게 얼마나 억울해요.
얼마나 억울합니까!
더 억울한 것은 이런 삶을 앞으로 우리는 계속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이런 삶을 살아야 됩니다.
누가 욕하면 괴롭고,
남편이 돈 많이 갖다 주면 행복하고,
돈 없으면 괴롭고,
좋은 집에 못 살면 괴롭고,
성적이 나쁘면 괴롭고,
이 허망한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이 허망한 착각, 아무것도 아닌 꿈과도 같은 것에 일희일비하면서
앞으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살아야 됩니다.
얼마나 억울해요?
‘그런 삶을 난 살면 안 되겠구나. 내 이런 삶을 이제 청산하고 진짜 뭔가 딱 중심 잡힌 삶을 살자.’
그 마음을 내는 게 ‘발심’하는 겁니다.
내가 한 번 깨달아봐야 되겠구나.
내가 ‘도’가 무엇인지, ‘부처님 법’이 무엇인지를 내가 한 번 알아봐야 되겠구나.
이걸 알지 못하고서는 영원히 내가 이 억울하고, 깝깝하고
정말 내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 빠져서 또 괴로워하는 이런 허망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겠구나.
이런 삶이 뭐가 즐거운가.
이 사람이 한 마디 하면 거기에 막 크게 휘둘리고,
이게 뭐가 재밌는가.
이런 삶을 내가 정말 살아야 되겠나?
자식하고 만날 싸우기나 하고...
그 예쁜 아이하고 만날 치고 박고 싸운단 말이죠.
그런 삶을 살아야 되겠는가.
‘내가 한 번 도를 깨달아봐야겠구나.’
이런 마음을 딱 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게 이 마음이지, 사실은 다른 건 할 게 없습니다.
도를 닦을 필요는 없고,
‘한 번 내가 해봐야 되겠구나.’
이 마음을 내는 게 중요하단 말이에요.
다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마음으로.
이 마음을 내면 마음이 우주법계에 울리기 때문에, 전파가 되기 때문에
이 마음 하나가 우주 전체이니까.
그러니까 이 마음과 맞는 것들이
유유상종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됩니다.
법이 따라오게 되고,
스승을 만나게 되고,
도반을 만나게 되고,
나도 모르게 이 법과 자꾸 인연이 맺어진단 말이죠.
그러니까 억지로 인연이 맺어지지도 않았는데,
억지로 막 뭐 하려고 해도 오히려 집착이 돼서 깨달음이 더디어진다는 거죠.
마조스님은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떻게 도를 깨달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자성 본래 그대로 완전하다.
다만 선이니 악이니 하는데 막히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를 수행인이라 할 수 있다.”
자성 본래 그대로 완전한데,
'선이다 악이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이렇게 나누는 마음, 여기 막히기 때문에 우리가 수행을 못하는 것이죠.
이 나누는 마음만, 분별하는 마음만 놓아 버리면 그게 바로 수행입니다.
왜냐하면 분별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나와요?
이 상에서 나옵니다.
과거에 만들어 놓은 상과 지금 만들어 놓은 이 현실과
비교, 대조, 분별, 분석, 분별하는데서 괴로움이 생긴단 말이에요.
여러분들이 괴로운 건 뭐겠습니까?
대학교, 뭐 서울대 못 가서 괴롭다?
이것은 서울대 가는 사람과 비교하니까 괴로운 거잖아요.
돈을 못 버니까 괴롭다?
돈을 많이 번 사람과 비교하니까 괴로운 것이고,
칭찬 듣는 사람과 비교하니까 내가 괴로운 것이고,
건강한 사람과 비교하니까 내가 괴로운 것이고.
이 비교 분석하는 마음, 이 마음만 탁! 놓아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도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신심명(信心銘)에서도 그럽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
‘지극한 도는 어렵지가 않으니 다만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
간택을 꺼릴 뿐이다.
선택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래서 싫어하거나 좋아하지만 않으면 통연명백하겠다.
막힘없이 분명하고 밝아진다. ’이 소리입니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는 것만 가려서 분별하지만 않으면 통연명백해진다.
깨달음은 드러난다.
‘호리유차(豪釐有差)하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
털끝만큼이라도 차별이 있으면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진다.
둘로 나누기 시작하면,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너랑 나랑 분별하고, 따지고 이런 것만 나누기 시작하면
그냥 중생으로, 중생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이 ‘나누는 것’만 없으면 바로 부처가 된다.
부처 자리에 올라간다.
머리를 가지고 비교 · 분석, 분별하고,
나누고, 판단하고 이걸 지금까지 해왔는데,
그것 때문에 괴로운 줄 모르고,
내 스스로 괴로운 일 힘들여서 분별하고,
힘들여서 상을 만들어 놓고,
힘들여서 그 상 속에 빠지고, 힘들여서 그 상을 깨야 되고,
이런 허망한,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져서 사는 이런 삶을 정리해야 되는데,
이런 삶을 사는 게 힘든 게 아니고, 이건 이렇게 사람이 사는 게 힘든 거죠.
이걸 깨는 게 힘든 게 아니죠. 그냥 하던 것만 멈추면 되니까.
뭔가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하지만 않으면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하던 것을 그냥 멈춰서 하지 않으면 된다.
판단하고 분석하고, 분별하는 것,
망상부리는 것을 멈추기만 하면 되니까 얼마나 쉽습니까?
‘힘들여 하는 것을 힘들여 하지 마라’는 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가르침을 가지고
“불교는 너무 어려워요”라고 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우리는 하고 있단 말이죠.
중생이 만 가지 분별을 하면 법도 만 가지 법이 있습니다.
중생에 따라서 맞는 법을 설해줘야 되니까.
그러니까 법이 만 가지, 수 만 가지가 생긴 것이지,
중생이 복잡하게 꽈 놓고 꽈 놓고 꽈 놓으니까,
그걸 풀어 주고 풀어 주고 풀어주려니까
복잡하게 꽈진 사람에게 복잡하게 얘기해서 풀어줘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불교가 어렵다’ 이렇게 착각하는 것이지. 그냥 단순한 겁니다.
“도는 닦을 것이 없으니 다만 물들지만 말라.”
'물들지만 말라' 아까 말한 이 상을 혼자서 만들어 놓는 것, 그게 물드는 겁니다.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빠져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
“무엇이 물듦인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조작하여 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물듦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으로,
이게 좋다 나쁘다 판단하고 분별하는 마음으로 뭔가 조작해서 하려고 하는 것,
더 잘해보려고 하고, 더 어떻게 해 보려고 하고, 이렇게 해보려고 하는 것 그게 물듬이다.
“도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이 바로 도다.”
마조 어록에 나오는 얘기이죠.
"평상심이 바로 도다."
"평상심은 무엇인가?
인위적인 조작이 없고,
(인위적으로 우리가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조작하는 것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고, 붙잡거나 버리는 일이 없고,
(옳고 그름이 있고, 내 편 네 편이 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붙잡으려고 하고,
싫어하는 것은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없고)
끊어지거나 항상함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이 둘로 나뉘는 것만 탁!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평상심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평상심을 쓰지 않고 온갖 망상을 부리면서 막 만드는 ‘조작’에 마음을 쓰고 살잖아요.
유위법을 쓰고 산단 말이에요. 유위심으로...
근데 평상심이라는 것은 무위법입니다.
아무것도 조작하지 않는 것,
지금까지 조작하면서 살던 마음을 탁! 그치는 것.
조주 스님이 남천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심이 바로 도다.”
“어떻게 닦아갈 수 있습니까?”
“닦으려고 들면 벌써 어긋난다.”
닦으려고 들면 벌써 어긋난다.
“닦지 않고 어떻게 도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했더니,
“도는 알고 모르는 데 있지 않다.
안다고 하는 것도 허망한 알음알이일 뿐이고,
모른다고 하는 것은 캄캄한 무기(無記)일 뿐이다.
만약 의심하는 것 없이 도를 참으로 통달한다면
허공처럼 툭 트여 거칠 것 없이 되니 어찌 옳고 그름을 따질 것인가.”
억지로 뭔가 알아야 될 게 있고, 모르는 게 있고 이렇다면
알아야 될 것을 알려고 막 노력하는 짓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알고 모르는 데 있지 않다.
탁!(죽비를 탁 치시며), 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저를 지금 보지 않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보고 있단 말이죠.
이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이 그대로 '도'다.
이게 이해가 안 되죠?
보이고 들리는 게 어찌 모든 게 도입니까?
우리가 분별해서 걸러서 보니까
이게 도가 아닌 것처럼 보일 뿐이지,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면 그것 자체가 ‘도’다.
황벽스님이 배휴스님에게 말했습니다.
“부처님과 중생은 한 마음일 뿐이고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 마음은 본디 나거나 죽은 적이 없고, 푸르거나 누렇지도 않다.
정해진 틀이나 모양도 없고,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으며,
(이 우리가 불성이라고 하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자리가 이렇다는 거예요.)
새롭고 낡음을 따질 것도 없다. 길지도 짧지도 않고, 크지도 작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분량, 개념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넘어 있는 것이니
지금 여기 있는 바로 이것일 뿐이다.
이 자리는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곧 어긋나 버리니,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고 재볼 수도 없다.
지금 이 자리는 바로 이것일 뿐이다.”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고, 맛봐지고, 감촉 느껴지고 하는
모든 이 두두만물이 우리가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쓰고 살지 않음이 없는,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도 없는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불성’이라면 ‘불성’이라는 데 집착하고,
‘주인공’이러면 ‘주인공’이라는 데 집착을 하니까 뭐라고 딱! 말할 수가 없단 말이죠.
왜냐하면, 본래 금강경에서도 말했지만,
‘도’도 없고, ‘불성’도 없고, ‘진리’도 없고, 뭐 말할 것도 없는 것이죠.
뭔가 어떤 이름을 붙이려면
뭔가 이름이라는 구체적인 어떤 경험이나 경험된 거나
어떤 형상이나 물질이 있어야 그걸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까?
이름도 모양도 아무것도 없는 건데,
거기에 이름을 붙일 수가 있습니까?
그냥 ‘이것’이라고 어쩔 수 없이 할 뿐이지.
이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인형극을 할 때 보면요,
인형극을 할 때 이렇게 앞에 이렇게 무대가 있고,
그 위에서 사람이 이렇게 인형들을, 줄을 당기면서 인형들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면서 인형들 둘이서 사랑도 하고 이별도 하고,
밥도 먹고, 움직이기도 하고, 뛰어놀기도 하고 인형들이 마음껏 뛰어논단 말이죠.
그 인형이 우리라고 봤을 때, 이 중생이라고 봤을 때,
그 인형이 저 혼자 움직입니까?
인형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죠.
먹고, 자고, 말하고, 사랑도 하고 이별도 하고 이러고 있단 말이에요.
근데 인형 그것이 전부가 아니잖습니까?
인형이 실체입니까?
인형극 하는데 움직이고 있지만,
인형만 들여다보면 진짜같이 움직이니까 신기하게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애들이 신기해가지고 좋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것과 똑같아요.
그 인형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이게 진짜구나’ 이렇게 착각하는 거예요.
“인형 뒤에서 사람이 해주는 거야.” 해도 애들은 안 믿어요.
인형이 지금 진짜 움직이는지 안단 말이죠.
근데 어른들이 “야, 그거 쟤가 진짜 하는 게 아니라니까, 사람이 뒤에서 움직이는 거야.”
근데 얘들은 안 믿습니다. 끈도 잘 안 보이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들이
그 인형이, 이게(나) 인형일 뿐인데,
무아이고 인형일 뿐인데,
진짜라고 집착해가지고, 착각해가지고
인형극 속에서 헤어지니까 괴로워 죽으려고 하고,
인형극 속에서 옆에 있는 어떤 인형은 좋은 집에 살고,
나는 나쁜 집에 사니까 괴롭다고 생각한단 말이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달은 도인이
‘야, 이건 다 인형일 뿐이다. 이게 진짜가 아니다. 이 인형을 움직이는 뭔가가 따로 있다.’
그것이 따로 있단 말이죠.
그렇게 얘기해도 우리 중생들은 믿지 않습니다.
"여기 이렇게 (내가) 분명히 있는데, 이게 어찌 없습니까?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인형이 진짜가 아니라, 인형 뒤에 이걸 움직이는 다른 사람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이렇게 먹고, 마시고, 말하고, 행동하고 이러고 살고 있지만,
이 몸이 하는 게 아닙니다.
이 뇌가 하는 게 아닙니다.
뇌가 시켜서 몸이 하는 게 아닙니다.
몸도 내가 아니고, 뇌도 내가 아니고,
마음도 내가 아닙니다. 심장도 내가 아니고...
‘색수상행식이 다 공하다’ 이러잖아요.
‘오온개공’이라 이러지 않습니까?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가 공하다는 말이죠.
진짜 내가 아니다.
색도 몸도 공하고, ‘수상행식’이라는 느낌이나
생각이나 욕망이나 의식이나 이게 다 공하다. 진짜가 아니다.
우리의 의식을 ‘나’라고 생각하고 살았지 않습니까?
이 감정을, 이 생각을,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하고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그냥 이 인형극에 있는 인형일 뿐이라는 거죠.
인형을 움직이는 누군가가, 뭔가가 있단 말이죠.
그 뭔가가 누구입니까?
그 뭔가가 무엇입니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 라는 사실 자체는
움직이고 있는 뭔가가 있다는 게 아니겠어요?
움직이고 있는 뭔가가 있으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보고, 듣고, 맛보고, 이 설법을 듣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설법을 듣고 있는, 듣고 있는 그것은 이 몸뚱이가 아닙니다.
이 껍데기, 이 내가 아닙니다.
‘나’라는 건 무아죠. 실체가 아니에요.
이 내가 아닌, 나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닌 ‘이것’이 있단 말이죠.
이것일 뿐이다.
지금 여기 있는 바로 이것일 뿐이다.
다른 비유로 들면,
우리가 TV를 볼 때는 보면 TV 영상이 화려하게 나오지만,
TV 속에 온갖 사람도 있고, 드라마도 있고, 모든 것들이 TV속에 다 나오잖아요.
TV를 보면서 TV에 사로 잡혀서 보게 되면 TV드라마에서 나쁜 놈이 나타났는데,
막 진짜 나쁜 놈이라고 그러면서 막 욕을 하고....
그래서 실제 배우, 연기자를 만났는데,
이 연기자들이 그러데요. 나쁜 연기를 하는 사람인데
“길거리 다니다 보면 나를 보고 진짜 나쁜 놈인 줄 알고 진짜 욕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있으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연기일 뿐인데,
그런데 우리는 연기일 뿐인지 모르고
진짜인 줄 알고 그 연기자를 욕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TV에 보이는 그게 진짜가 아니죠.
어찌 보면 TV에 보이는 그것은 그냥 뭐랄까요,
이 허공에 지금 떠다니는 이 전자파, 이 전자파를
그냥 그림도 없고, 색도 없고,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는 이것을
그냥 딱 붙잡아다가 재생시키면 바로 TV에 그 모든 것이 나타나는 것 아니겠어요?
TV 화면에 드러나는 그 사람들 그게 진짜가 아니고,
화려한 영상이 진짜가 아니고,
뒤에 있는 전자파라는 것이 그것을 다 만들어 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등장하게 하는 것 아니겠어요?
꿈을 꿀 때, 꿈속에 나타나는 등장인물들이 진짜가 아니고,
꿈을 꾸는 자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꾸는 자가...
꿈속에서 '수행을 통해 가지고 꿈을 깨야지' 한들,
그 꿈속에서 행하는 일 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수행을 통해 뭔가 깨달아야 되겠다’ 이것은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말이죠.
'연극 속에서 연기하는 사람이 그렇게 연기한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그런 것밖에 아닌 것이죠.
우리가 눈을 보려면, 눈은 눈을 볼 수 없죠.
눈을 감고 있으면 눈이 보이는가요? 안 보입니다.
눈을 떠도 눈이 안 보입니다.
눈을 감아도 안 보이고 눈을 떠도 안 보입니다. 눈은...
어떻게 하면 눈을 볼 수 있을까요?
이것과 흡사합니다.
불성은, 불성은 언제나 작용하고 있어요.
눈은 언제나 보고 있지 않습니까?
눈은 모든 것을 보고 있잖아요? 언제나 보고 있잖아요.
근데 눈이 눈을 못 봐요.
우리가 ‘불성을 봐라.’ 하는 것은
눈이 눈을 보는 것과 똑같은 말이죠.
불성은 언제나 이렇게, 언제나 이렇게 드러나 있단 말이죠.
언제나 드러나 있습니다.
근데 불성을 우리는 볼 수가 없죠. 그죠?
눈이 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렇다면 눈이 눈을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요?
눈이 눈을 본다는 것은 뭔가 보는 순간에
‘어! 보는 뭔가가 있구나.’ 하는 것이 그냥 확인되는 것 아니겠어요?
보여지니까 '보는 작용을 하는 눈이라는 것이 있다.' 라는 것을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눈으로 바깥에 있는 사물, 대상만을 본단 말이에요.
이건 컵이고 뭐고,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바깥대상만을 보니까 정작 눈의 작용을 못 본단 말이죠.
눈이 있음을 확인하지 못한단 말이죠.
언제나 우리는 보고 있지만 눈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딱 보다 보니까,
‘아! 보여지는 대상이 있으려면 보는 뭔가가 있어야 되는 것이구나.’
‘아! 보는 작용, 그게 눈이라는 게 있는 것이구나.’ 라고 탁 알게 된단 말이죠.
그래서 “도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이러면 눈의 작용을, ‘눈이 본다’라는 작용을 보려면
뭐를 보여줘야지만 눈의 작용을 볼 수 있는 겁니까?
특별히 뜰 앞의 잣나무를 보여줘야지만
눈의 작용이 ‘본다’라는 작용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건가요?
아니죠. 뜰 앞의 잣나무를 보게 해줘도 괜찮고,
“마른 똥막대기다.” 똥막대기를 보게 해줘도 괜찮습니다.
“차나 한 잔 마셔라.” 차 한 잔 마시게 해줘도 괜찮단 말이죠.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는 육근의 모든 작용 속에 그것이 드러나 있으니까.
그러니까 한 대 딱 때려줘도 괜찮고,
할! 하고 소리를 쳐도 괜찮고,
선문답의, 그 모든 선문답 중에 어떤 방편을 써도 괜찮단 말이죠.
눈에 보이는 것을 뭘 봐도 보는 작용만 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근데 이렇게 보여주게 딱딱 짚어주면
그 보여주는 그 대상을 보고 ‘거기 뭔가 도가 있나?’ 하고,
“뜰 앞의 잣나무다” 이러면 뜰 앞의 잣나무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뜰 앞의 잣나무 속에 뭔가 도가 있구나, 숨겨져 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 버리면 이거는 어긋난다.
내가 보고, 듣고, 맛보는 그건 이 몸이 하는 게 아니다.
몸이 하는 게 아닌 건 분명합니다.
그것을 찾는 것, 그것이 불교인데,
그것을 찾는데 어떻게 찾느냐?
생각으로 찾으면 찾을 수가 없다.
생각을 딱 끊어진 자리에서
그 찾고자 하는 어떤 하나의 어떤 발심, 마음, 그 마음이 있어야 되고,
찾아야 되는데 궁금하긴 하지만 모르지 않습니까? 모르잖아요.
‘오직 모를 뿐’하는 ‘모르겠다’하는 화두가 들린단 말이죠.
그게 의심입니다. 화두고 공안(公案)이고 의정(疑情)이고.
그 모르는 것으로 똘똘 뭉쳐 있으면서 찾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매진될 때
그게 이제 화두가 타파되고, 한순간 확~ 그어서 확인하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죠.
이것이 선에서 말하는 ‘자기 성품을 본다’라는 어떤 방법이고, 하나의 구조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법정스님도 그러시잖아요.
“언제나 ‘나는 누구인가?’ 하고 늘 질문을 해라.”
늘 자기 자신이 뭘 하더라도 내가 누구인지,
이걸 누가 이렇게 이 몸을 이끌고 가는가?
이렇게 생각을 일으키는가?
이렇게 보고, 듣고, 맛보는가? 하는 것을 늘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러니 늘 뭔가 모르게 이걸 확연하게 알게 되기 전까지는
깝깝하고, 답답하고, 알아야 될 것 같고, 풀어야 될 것 같고,
이걸 내가 풀어야 되는데, ‘이생에는 풀어야 되겠다’ 하고
이런 마음을 간직하고 살으란 말이에요. 간직하고...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수행자입니다.
절 잘하고, 염불 잘하고, 기도 잘하는 게 수행자가 아닙니다.
이 의심이 없는 사람은 수행자가 아닙니다.
‘뭔가 내가 이걸 알아야 되겠구나.
이 허망한 망상에 쓸려 다니는 이런 착각 속에서 괴로움에,
가짜 괴로움에 빠져서 혼자 헐떡이는 이런 삶을 내가 정리하고 청산해야 되겠구나.’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수행자죠.
그렇게 마음을 딱!,
그 마음을 간절하게 가지고 다니다 보면
그게 이제 인연이 무르익는단 말이죠.
그래서 그 인연이 저절로 우리를 공부시켜줍니다.
그 발심이 저절로 공부시켜 준단 말이에요.
제가 가만히 되돌아온 삶을 보니까 그래요.
제가 막 어거지로 뭔가 하려고 했을 때 오히려 안 되는데,
그렇게 그냥 턱 내맡기고 ‘내가 공부하겠다’라는
어떤 간절한 발심만을 가져갈 때 저절로 우주법계가 공부시켜 줍니다.
서점에 가면 나에게 딱 맞는 책을 탁! 손에 쥐게 해주고,
TV를 딱 켜면 나에게 딱 필요한 법문이 나오게 되고,
불교TV, 불교방송을 딱 틀면 그게 나에게 딱 맞는 법문을 들려주고,
친구를 만나고 도반을 만나도 아주 그 적절한 도반을 만나게 돼서
혹은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내뱉은 한 마디 말이 나에게 큰 어떤 화두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저절로 우주법계가 스승을 가져다주고,
도반을 가져다주고, 공부할 거리를 가져다줍니다.
어느 순간 그냥 확 ~ 발심이 강해져서
‘내가 정말 공부하겠다.’라는 의지가 갑자기 막 불타오르는 때도 생긴단 말이죠.
그런 의심을 딱 품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탁!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이 공부에는 너무 집착하고 욕심 부릴 것도 없어요.
'이렇게 그냥 내가 꾸준히 공부해나가겠다,
내가 당장 내가 깨닫지 않더라도
이렇게 이 공부자세로, 수행자의 마음으로
내가 이걸 한 번 풀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살겠다.'
그게 수행자입니다.
그런 수행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주 중요하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화두이고,
그게 이 짜잘한 세상에서의, 세속에서의
어지간한 짜~잘한 문제들은 문제 같지도 않게 만들어 버려요.
이 큰~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이 짜잘한 게 고민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잠깐 잠깐 휩쓸릴 수는 있겠지만
그냥 다시 회복한단 말이에요,
돌아온단 말이죠. 복원력이 생긴단 말이에요.
'내가 '본분사(本分事)'가 뭔지를,
내가 본분사가 뭔지를 깨달아야 되는데,
이런 짜잘한, 허망한 생각이 만들어 놓은 착각에 빠져서
이렇게 끄달려 갈 필요가 없겠나, 있겠나?’
이런 마음이 들어서 바로 다시 내 본분으로 돌아온단 말이죠.
내 본분은 뭔가?
나를 찾는 게 내 본분이다.
이거는 불교가 아닙니다. 종교도 아니고,
당연한, 당연한 삶의 사명이고, 누구나 해야 되는 것이죠. 누구나!
이렇게 허망하게 괴롭게 사는 게 싫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되는 문제입니다.
네,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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