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를 해야 하는 이유
가장 먼저 귀의를 하고 난 뒤에 어떤 수행을 해야 할까? 본격적인 수행에 앞서 수행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어야 한다. 즉 혼탁하고 번뇌로 오염되어 있거나 과거의 죄업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이라면 아무리 수행을 하려고 해도 마음이 고요해 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참회를 통해 죄의식과 과거세의 업장을 소멸시키게 된다면 청정하고 깨끗해진 마음이 드러나기에 더욱 집중과 관찰이라는 수행에 들어가기가 쉬워질 것이다.
일제시대 수월스님은 견성의 방법을 묻는 용성스님께 “지난 세상 업장은 무겁고 선근은 약하니 견성하기가 어려우니 대비주를 외움으로써 먼저 업장을 소멸시키라”고 하셨다. 용성스님은 아홉달 동안 대비주를 십만번 외우고 났더니 모든 번뇌가 없어지고 마음이 환해졌고, 그런 뒤에 화두를 참구했더니 엿새만에 의문을 풀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수많은 큰스님들께서는 본격적인 수행에 앞서 수행에 장애가 되는 업장을 녹이고 번뇌를 조복받기 위해 다양한 방편수행으로 참회와 업장소멸의 시간을 가졌다.
참회란 지난 과거의 잘못과 죄업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반성하고 깨달음으로써 죄의 업장을 소멸하고, 번뇌를 소멸하여 마음을 청정히 하기 위한 기초 수행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수행을 하라고 하면 온갖 번뇌와 잡념, 망상 때문에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곤 한다. 그 수많은 망상과 번뇌가 일어나는 이유는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고 온갖 혼란스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지난 과거에 저지른 죄업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나 같이 악업을 많이 지은 사람도 수행해서 깨달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생기고, 때로는 악몽을 꾸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죄의식과 번뇌망상에 시달린다. 이 죄의식과 죄업을 참회하여 맑히지 않고 앉아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헛된 것이어서 시간만 낭비하기 쉽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사람은 먼저 참회기도, 참회수행을 닦아야 한다. 많은 스님님께서 절에 처음 나온 신도님들께 참회기도를 권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죄의 과보에 담긴 의미
그러면 참회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죄를 짓는 것과 참회하는 것 사이에 담긴 우주적인 원리를 먼저 살펴보자.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죗값을 치러야 할까? 부처님이나 혹은 진리는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실까 아니면 벌을 주실까? 사실 진리는, 부처님은 죄 지은 사람을 단죄하는 법칙을 만들지 않았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오로지 대자대비한 사랑으로 용서할 뿐이다.
그렇다면 인과응보는 뭐고, 잘못한 사람이 받는 과보는 뭐고, 천벌은 무엇이며, 지옥은 또 무엇일까? 부처님께서는 무한한 자비로써 늘 사랑하고 용서하는 분이라면 인과응보와 죄의 과보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통 사람들은 인과응보의 목적을 단죄 혹은 죄 지은 사람을 벌할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죄 지은 사람은 벌을 받고, 선을 행한 사람은 복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인과응보라는 균형의 법칙이다. 이를 자작자수(自作自受) 혹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인과응보를 받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목적은 단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인과응보가 일어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잘못했으니 당해도 싸다’거나, ‘죄를 지었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거나 하는 이유가 이니라, 죄를 지은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참회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인과응보가 일어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주법계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깨닫게 해 주고 싶기 때문에 그가 깨달을 때까지 그에 합당한 과보를 받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동체대비의 사랑이며, 부모님의 자식 사랑의 매와도 흡사한 방식이다.
결과적으로 벌을 받는 것은 똑같은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이것을 깨닫는 것은 삶의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한다면 죗값을 치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이 지혜와 자비라는 그 근원의 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즉 죄업을 지었을지라도 벌을 받기 전에 먼저 그 죄업에 대해 참회하고 깨닫게 된다면 그 죄의 과보를 기계적으로 받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교에서의 인과응보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기계적으로 무조건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깨달았느냐에 따라, 더 크게 혹은 더 작게 받게도 되고, 다른 방식으로 받음으로써, 받지 않는 효과를 얻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소금물의 비유도 이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릇에 소금(죄업)이 가득 담겨 있으면 어떻게든 그 소금물을 다 자신이 먹어야 한다. 그러나 그릇을 크게 키우게 되면 소금물을 계속 마시더라도 크게 짜지 않게 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릇을 키운다는 것이 바로 참회와 용서, 보시와 수행을 통해 복덕과 지혜를 증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그 어떤 죄업을 지었더라도 진정한 참회를 통해 업장소멸, 죄업의 소멸이 가능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자작자수로써 죄업은 받아야 하겠지만 참회를 통해 다르게 익어가게 함으로써 죄업이 소멸되는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참회로 죄가 소멸되는 원리
그렇다면 참회를 하면 과거의 죄업이 사라지는 것일까? 『천수경』에는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라고 함으로써 죄라는 것은 본래 자성이 없어 마음따라 일어난 것일 뿐이라고 한다. 죄의식이라는 마음이 멸하면 죄 또한 소멸한다. 죄와 죄의식이라는 마음 모두 공한 것임을 바로 깨닫는 것이야말로 참된 참회임을 설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금강경』에서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고 했듯이, 꿈과 같고 헛개비와 같으며 물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아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죄업 또한 고정된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죄업을 실체로 여기는 마음이 거짓으로 죄업을 꾸며내는 것일 뿐 실체적인 죄는 있지 않다. 사실 고정된 절대적인 선악이나 옭고 그른 것은 없다. 어떤 나라에서는 죄가 되는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오히려 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요, 전쟁터에서 여러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며, 전부를 죽이면 신이다’라고 한 말처럼 선악은 모두 상대적이기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
이처럼 선악이나 죄업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면, 우리 마음 속의 모든 죄의식은 실체이고 고정된 죄악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서 만들어낸 허망한 것일 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그 어떤 최악의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진실된 마음으로 참회를 한다면 죄의 업장이 소멸되고 참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설한다. 죄도 선도 모두가 마음에서 만들고 마음에서 소멸시키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허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제 『대보적경』에서는 “백천만겁 동안 오래 익힌 번뇌의 업이라도 일실(一實)로 관찰하면 곧 모두 소멸된다”고 했고, 『제법무행경』에서는 “만약 보살이 일체중생의 성품이 곧 열반의 성품임을 볼 수 있다면 모든 업장과 죄를 소멸시킬 수 있다”고 함으로써, 그 어떤 큰 죄업이라 할지라도 죄의 실체를 바로 관해 볼 수 있으면 죄업이 소멸된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천수경』에서는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라고 하여 “백겁이나 쌓아 온 온갖 죄업일지라도 한 생각에 단박에 녹아 없어지나니 마른 풀이 불에 타서 없어지듯이 남김 없이 사라져 자취가 없다”고 하였다.
구체적인 참회기도 방법
참회기도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 또한 정해진 수행법이 있지 않은 것은, 참된 참회란 어떤 방편을 통해서든 ‘죄무자성종심기’라는 죄의 실체 없음을 깨닫고, 과거에 지은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앞으로는 더 이상 짓지 않겠다는 분명한 자기 다짐을 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생각 돌이켜 진심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 한 마음으로 곧바로 참회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보통 불자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참회기도, 참회수행의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가장 대표적으로는 절 참회가 있다. 108배든, 300배든, 1000배든, 절 수행을 하면서 한 번씩 절을 할 때마다 ‘참회합니다’라고 외치면서 절을 할 수도 있고, 절 한 번 올릴 때마다 108참회문을 하나씩 읽으면서 참회하는 방법도 있다. 구체적인 죄업이 떠오르는 것은 절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참회를 하고, 구체적으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과거에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업을 진심으로 참회합니다’라는 마음으로 참회를 해도 좋다.
또한 절을 하면서 『천수경』에 나오는 십악참회를 하나 하나 외울 수도 있다. 절을 한 번 할 때마다 ‘살생으로 지은 죄업 금일참회 하옵니다’를 반복하면서 지난 과거생에 알게 모르게 지은 살생의 죄업을 참회하는 것이다. 혹은 구체적으로 과거에 짐승이나 작은 생명 등을 헤친 기억이 떠오른다면 그 떠오르는 죄업에 대고 ‘살생중죄 금일참회’라는 참회문을 독송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절을 하며 참회문을 독송하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죄의식이 올라오지 않고, 그 참회의 항목에 대해 더 이상 거리끼는 마음이 올라오지 않고 고요해지게 된다면, 그 다음의 항목인 ‘투도중죄 금일참회’로 넘어가는 식으로 참회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몸으로 짓는 세 가지(살생, 투도, 사음), 입으로 짓는 네 가지(망어, 악구, 양설, 기어), 뜻으로 지은 세 가지(탐애, 진에, 치암)의 죄업을 참회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염불 혹은 다라니 진언을 통한 참회로써, 불보살님의 명호를 외우거나, 참회진언을 외우거나, 대비주(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하면서 참회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좋은 참회기도가 된다. 염불이나 다라니, 진언을 외우면서 마음속으로 참회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염불이나 진언 독송, 혹은 절 수행 등을 참회기도에 접목시켜서 참회를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저 단순하고 정직하게 ‘참회합니다 용서합니다’, ‘수용합니다 용서합니다’ 혹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하세요. 진심으로 참회합니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염불하듯 반복하는 것도 구체적이고 좋은 참회기도가 될 수 있다. 하루에 100번이든, 300번 혹은 1,000번이든 기간이나 횟수 등을 정해 놓고 꾸준히 ‘참회합니다 용서합니다’라고 반복해서 염불하듯 참회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지은 죄업에 대해 참회문을 적어 읽으면서 참회하거나, 구체적으로 죄업을 설명하면서 부처님 전에 다시는 죄업을 짓지 않겠다는 다짐을 바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사리불회과경』에서는 “과거에 지은 악업을 어떻게 참회하여야 합니까?”하는 사리불의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항상 아침, 저녁, 인정, 밤중, 새벽에 씻고 양치질하고 의복을 정갈하게 하고 합장하여 시방에 예배하고, 어느 쪽을 향하던지 마땅히 허물을 뉘우쳐서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하라. ‘저희가 과거 무수한 겁으로부터 지은 과오를... 원컨대 시방 모든 부처님을 따라 자비를 구하고 참회하옵니다. 저희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또한 이 죄과의 재앙을 입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자비를 구하는 까닭은 부처님께서는 환히 보고 들으시오니 감히 부처님 앞에서 속이지 못하겠습니다. 저희들에게 있는 나쁜 허물을 감히 덮어서 감추지 못하오나, 앞으로는 감히 다시 나쁜 죄업을 범하지 않겠나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도 자신이 지은 잘못과 과오, 죄에 대해 ‘참회합니다’ ‘재앙을 입지 않게 하소서’ ‘다시는 범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직접적으로 고해 바침으로써 참회가 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 계신다.
나와 남에 대한 용서와 참회
보다 넓게 생각했을 때 참회는 용서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나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고 용서해 주는 것 뿐 아니라,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용서해 주는 의미를 내포한다.
먼저 나 자신의 과거 모든 잘못을 스스로 용서해 주는 것이야말로 참된 참회가 된다. 자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두려움과 죄의식에서 놓여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자신을 용서하고 참회하는 것은 곧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과거의 모든 죄의식과 티끌들을 비워내며 텅 빈 충만이라는 공과 하나되는 최고의 수행이 된다.
다음으로는 타인이 내게 행한 악행과 그로인해 내 마음 속에 미움과 증오, 원한이 남아 있다면, 바로 나를 괴롭힌 그 상대방을 용서해 줌으로써 내 마음 속에 응어리 져 있는 미움과 증오, 원한의 마음이 비워지고 내려놓아 지는 것이다. 사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과 같다. 미워하는 그 마음은 바로 내 마음이기 때문에 내 마음이 먼저 오염되기 때문이다. 홧병에 시달리던 사람이 용서함과 동시에 병이 낫기도 하지 않는가.
『중아함경』에서는 욕설을 한 비구가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였는데도 그 용서를 받아주지 않은 비구에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남이 참회하고 용서를 구함에도 받아주지 않는 어리석은 이여, 남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으로 긴긴 밤 속에서 항상 괴로움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이 나 자신을 온전히 용서하고 참회함으로써 내 마음 속에 있던 죄의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 과보를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등의 번뇌망상을 깨끗이 비워내고, 나아가 모든 타인을 용서해 줌으로써 내 마음 안에 쌓여 있던 상대방에 대한 온갖 증오와 미움, 원한의 마음을 맑끔히 비우고 청정히 함으로써 결국 우리의 내면이 청정해지는 것이다.
나 스스로를, 나의 과거를, 온전히 용서해 주고, 상대방을 온전히 용서해 주라. 자신이 살아 온 인생을 돌이켜 볼 때, 그 누구도 미운 사람이 없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완전히 사랑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와 타인 모두에 대한 진정한 용서와 참회와 비움이 완성된다. 그 때 비로소 삶의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무한한 자비와 지혜를 배워나가는 아름다운 깨달음의 장이 우리 눈 앞에 눈부신 삶의 모습으로 열릴 것이다.
참회기도는 짧게 끝내라
단, 참회기도를 하는데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참회기도는 너무 오래도록 끌면서 하지 말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을 보면 자신이 죄가 깊다고 여겨서인지, 몇 년 동안 계속해서, 혹은 평생을 참회기도만 하고 살겠노라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본래 우리 마음은 청정하기 때문에 죄의식이 있을지언정 실체적인 죄는 없다. 물론 죄를 지으면 그에 따른 과보를 받는다. 그러나 그 또한 기계적으로 A라는 죄에는 a라는 과보를 천편일률적으로 보내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얼마나 진심으로 참회를 하고 용서를 했느냐에 따라, 그 이후의 삶이 얼마나 수행과 복덕이 구족한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죄의 과보는 다르게 익어갈 수 있다. 업보라는 말에서 보(報)는 ‘다르게 익어간다’는 의미를 지닌다.
앞에서 ‘소금물의 비유’를 설명했듯이 이처럼 악업 또한 다르게 받을 수 있다. 다르게 좋은 방향으로 받으려면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용서하며, 보시와 수행을 통해 복덕과 지혜를 증장시켜야 한다.
또한 『금강삼매경』에서는 아난존자의 ‘무엇이 참회입니까’ 하는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진실관에 들면 모든 죄가 사라진다”고 설하고 계신다. 이를 원효스님은 『금강삼매경론』에서 “모든 죄업은 망상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모든 상을 파하면 진실관에 들고, 일체 망상경계를 여의게 되면 모든 죄는 일시에 사라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곧 죄의 근원이 본래 없다는 진실관에 들면 망상 따라 일어날 뿐인 죄의식을 일시에 소멸시킬 수 있다고 하는 『천수경』의 이참회와 뜻을 같이 한다.
결론적으로 죄의 본성이 본래 없으나, 우리가 망상으로 마음속에서 죄의식과 죄책감을 느낌으로써, ‘내가 이만한 죄를 지었으니 이에 합당한 과보를 받아야 해’라고 스스로 처벌과 징벌을 끌어당기기 때문에 그 마음에 의해 죄의 과보를 받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참회를 계속해서 오랫동안 하게 되면, 오히려 이러한 처벌과 징벌을 스스로 받아야 한다는 죄의식을 강화할 뿐이다. 계속해서 참회를 한다는 것은 곧 아직은 여전히 죄의 업보가 소멸되지 않았다고 하는 자기 죄의식을 강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참회를 할 때에도 ‘이미 참회가 되었다’, ‘부처님은 이미 나를 용서해 주셨다’는 마음으로 참회기도를 해야 한다. 사실 부처님은, 진리의 근원에서는 이미 용서를 끝냈기 때문이다. 아니 용서를 끝냈다기 보다, 그 누구도 처벌과 징벌을 줄 아무런 의도가 없다. 오직 끊임없이 자비로써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부처님과 우주법계의 진리는 단 한 번도 우리를 벌하거나 징벌할 마음이 없다. 모든 죄의 과보는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을 뿐이다. 이 모두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환상일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이미 참회가 끝났다고 여긴다면, 참회기도를 몇 년 씩이고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해야 할 아무 이유가 없다. 짧게는 7일이나, 3.7일(21일), 아무리 길어도 100일 기도 한 번 정도를 끝으로 ‘이미 용서가 되었으며, 참회는 이루어졌다’라고 굳게 믿고, 완전히 자기 자신을 용서해 줌으로써 참회기도를 끝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완전히 청정해진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과거의 모든 망상과 번뇌, 죄업과 원망, 원한 등을 다 놓아버린 채 그 텅 빈 마음으로 새로운 것들을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참회 이후에 담아내야 할 새로운 것이 바로 발원(發願)이다.
참회를 하고 나면 어느정도 수행을 시작할 수 있는 기본 준비가 거의 다 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남은 것이 있으니, 수행의 분명한 목표설정과 방향을 정해주는 원력을 세우는 발원인 것이다.
참회의 공덕
『업보차별경』에서는 “만일 어떤 사람이 무거운 죄를 지었더라도 짓고 나서 깊이 스스로 뉘우치고 참회하며 다시 짓지 않는다면 능히 그 근원적인 업을 없앨 수 있다”라고 함으로써 참회로써 죄업이 소멸될 수 있음을 설하고 있다. 또한 『사십이장경』에서는 “사람이 많은 허물이 있으면서도 뉘우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간다면 냇물이 바다로 들어가 점점 깊고 넓게 되듯 죄 또한 무겁게 쌓여 간다. 그러나 허물이 있을 때 스스로 그릇된 줄 알고 악을 고쳐 선을 행하면 죄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니, 병자가 땀을 내고 차차 회복되어 가는 것과 같다.”고 함으로써 허물이 있을 때 바로 뉘우치고 참회하며 그 악을 고치고 선을 행하면 죄가 소멸된다고 설하고 계신다.
『열반경』에서도 “악을 저질렀다면 바로 이를 고백하며, 뉘우치고, 부끄러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탁한 물도 마니주를 놓으면 그 힘으로 물이 곧 맑아지고, 안개나 구름도 걷히면 달이 곧 청명해 지듯이 악을 지었더라도 참회하면 이와 같이 사라진다. 비록 죄를 범한 것이 있더라도 참회하여 뉘우치면 깨끗해지게 마련이다”라고 함으로써 참회의 공덕을 설하고 있다.
『선가귀감』에서도 “죄가 있으면 바로 참회하고, 잘못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데에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된다면 그 죄업 또한 마음 따라 사라질 것이다”라고 했다.
이상에서와 같이 참회의 공덕은 무량하며, 그 어떤 최악의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마땅히 뉘우치고 참회한다면 그 모든 죄업은 사라지고, 그 청정해진 마음으로 수행해 나아간다면 마땅히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도 있음으로 앙굴리마라가 말해주고 있다. 앙굴리마라는 스승의 꾀임에 빠져 999명의 목숨을 죽였던 전무후무한 희대의 살인마였지만 지난 과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참회한 뒤 부처님께 귀의하여 다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출가 수행하여 결국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지었다 할지라도 불법문중에서는 죄의식에 사로잡힐 필요도, 그 죄업이 발목을 잡아 인생을 망칠 필요도 없다. 진실된 마음으로 참회만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죄업 또한 소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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