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수행법 특강] 1강 - 수행의 개관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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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생활수행

[기도수행법 특강] 1강 - 수행의 개관

목탁 소리 2014. 3. 5. 18:28

 

 

이번 달부터 12월까지

약 10회에 걸쳐

월간 봉은 판전에

'심출가, 생활수행'이라는 제목으로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기도 수행하는 방법에 대해 연재를 시작합니다.

 

목탁소리 지대방 카페에

함께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법우님들의 생활 속 기도수행에 작은 지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봉은판전의 지면이 좁은 관계로,

원래 적어 놓았던 글을 축약하여 제출하였으나,

목탁소리 지대방에는

본래 적어 놓았던 글 원문 전체를 게재하여

보다 알찬 지침이 될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법우님들의 일상 생활 속

기도수행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서원합니다.

 

 

 

 

봉은판전 특집 '심출가, 생활수행'

수행의 개관 - 수행은 무엇이고, 왜 하는가?

 

수행은 왜 하는가?

 

불자들이 타종교 신자와 다른 점이라면 무엇보다도 수행을 한다는 점일 것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수행을 하고 정진을 한다. 일상적으로도 우리는 도반들을 만날 때면 수행은 잘 되어가고 있는지, 어떤 수행을 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묻곤 한다. 그러나 정작 수행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나, 혹은 구체적인 수행방법에 대해서는 궁금한 것들이 많아 보인다.

수행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먼저 왜 수행을 해야 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설이 담겨 있는 아함경, 니까야 경전에서는 왜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까? 이것에 대한 아름다운 가르침이 바로 사성제에 담겨 있다.

우리는 왜 수행을 하는 것일까? 괴롭기 때문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생노병사의 사고와 원증회고, 애별리고, 구부득고, 오음성고를 포함한 팔고라고 하는 인생 근원의 괴로움이 있다는 것은 불자라면 가장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이다. 현실 삶을 보니까, 순간 순간의 즐거움과 기쁨 또한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삶 전체를 놓고 통찰해 보았더니 누구나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괴로움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성제다.

괴로운 것이 올바른 통찰이라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사성제에서는 멸성제를 통해 괴로움에서는 누구나 벗어날 수 있으며, 괴로움이 모두 소멸한 이상적인 멸성제, 즉 열반의 상태를 누구라도 얻을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로 그렇게 괴로움에서 벗어난 열반을 얻기 위한 실천의 방법을 설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도성제다. 도성제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현대화되어 정착된 용어로 설명하자면 수행인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붓다의 통찰

 

이상에서 설명한 바대로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아셨고, 괴로움에서 벗어난 열반의 길에 도달하셨으며, 괴로워하는 중생들이 부처님처럼 모두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실천 수행의 방법을 설해주셨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모든 고를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으실 수 있었던 구체적인 방법과 통찰을 설명해 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집성제다. 즉 집성제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괴로움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을 부처님께서는 십이연기로써 살피셨다. 즉 특정한 한두 가지의 원인이 괴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12가지 인연의 고리가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인연들이 화합함으로써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괴로움이라는 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그 어떤 실체적인 힘인 줄 알았는데, 연기적으로 살펴보았더니 다만 인연 따라 꿈처럼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괴로워하는 주체인 또한 연기적으로 살펴보니 다섯 가지 오온의 모임일 뿐이며, 그 오온의 요소들 또한 제각기 무아였다. 우리는 보통 괴롭다고 하면 내가 괴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괴로운 가 진짜가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괴롭다고 하는 감각이나 느낌 또한 사실은 인연 따라 생겨나는 상대적인 것일 뿐 실체가 아니다.

괴로움이 일어난 원인 또한 십이연기에 의하면 무명에 기인한다. 이 말은 진짜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잠시 어리석음에 가려 괴롭다고 착각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나에게 욕 하는 소리를 듣고 며칠 동안 괴로움에 빠져 있었는데, 나중에 자세히 알고 보았더니 그 때 그 욕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알았다고 해 보자. 그런데 이 사람은 나에게 한 말인 것으로 오해하고, 즉 분명히 지혜롭게 알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에 며칠 동안 공연한 괴로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올바로 알고 났더니 그것이 더 이상 괴로움이 아닌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실 우리가 괴롭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은 어리석음에서 기인한다. 모르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지 알고 나면 괴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 십이연기에서는 무명과 함께 대표적인 괴로움의 원인으로 집착과 애욕을 설하고 있다. 즉 어리석기 때문에 (육입)’대상(명색)’도 행위()도 의식()도 괴로운 대상과의 접촉도, 괴로운 느낌도, 애욕과 집착도 그 모든 것이 실체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다만 인연 따라 신기루처럼 잠시 잠깐 모였다 사라지는 것일 뿐인데, 무명에 가려있으므로 진짜인 것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어리석음 때문에 진짜로 오인하니 그 모든 것에 집착하게 된다. 가짜인 줄 알면 집착할 이유가 없지만, 진짜인 줄 알면 그것을 내 것으로 가지려고 집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집착이란 곧 과도하게 좋아하거나 과도하게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 즉 좋거나 싫은 쪽의 극단에 치우치게 되면 좋은 것은 가지려고 집착하고, 싫은 것은 거부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애욕()과 거부로 인해 만들어진 집착()은 곧 분별심과 판단을 생겨나게 함으로써 더욱 더 집착하게 만든다.

이렇게 무명과 집착으로 인해 우리는 그 모든 가짜들을 진짜인 것으로 오해하여 판단하고 분별하면서 또 붙잡아 집착함으로써 괴로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라는 존재와 내가 느끼는 괴롭다는 마음 또한 사실은 연기된 것이며, 고정된 실체가 아닌 무아이고 대승불교 용어로 설명한다면 공한 것이다. 그렇기에 집착할 것이 없고, 극단적으로 좋거나 나쁘다고 분별할 것이 없는 중도로써 보아야 한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정견)이 곧 치우침 없는 중도로 보는 것이고, 그렇게 분별 없이 보는 것이야말로 곧 자비행이다. 즉 자비심이란 좋아하는 것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좋고 싫은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대평등심으로 분별 없이 바라보는 데서 오는 무한한 사랑이다. 어느 한 쪽만을 좋아하는 것은 애욕이지 자비가 아니다. 참된 자비는 무분별의 관찰에서 온다.

그러면 이제 괴로움을 통해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의 핵심이 다 나왔다. 즉 연기, 무아, 중도, 자비, 정견, 정념(바른 관찰)이야말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 말을 조금 더 정리해 본다면,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연기와 무아, 중도, 자비를 깨달으셨다. 사성제의 도성제가 곧 중도와 팔정도, 사념처를 의미하는데서 보듯이, 연기와 무아와 자비는 곧 중도로 실천되어진다. 즉 우리가 수행이라고 알고 있는 도성제의 핵심은 곧 중도와 팔정도와 사념처를 말하는 것이다.

 

불교 수행법의 핵심

 

그러면 조금 더 쉽게 초기불교 수행법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중도와 팔정도, 사념처가 의미하는 실천적인 의미를 살펴보자. 중도는 양 극단에 치우침 없고 분별없는 행이다. 양 극단의 판단이나 분별들은 곧 집착을 가져오고, 실체화시킨다. 좋거나 싫은 사람이라는 극단적 판단이 심한 사람일수록 좋은 사람은 더 곁에 두려고 집착하고, 싫은 사람과는 더욱 멀어지려고 애를 쓰게 마련이다. 그렇게 집착하고 애쓴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을 실체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실체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아와 연기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은 곧 무분별과 무집착으로 이어진다. 참된 중도는 양 극단으로 몰아가거나 해석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처럼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팔정도의 핵심 수행법인 정념이고, 그러한 정념을 통해 바르게 보는 견해가 생기는 것을 정견이라고 한다. 정념을 보다 구체화시킨 수행법이 바로 사념처다. 정념, 즉 바르게 관찰하는데 있어서 네 가지 대상에 집중하여 바르게 관찰한다는 것이 사념처인 것이다.

조금 더 쉽게 단순화하면 중도, 팔정도, 사념처의 실천은 한 마디로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분별없는(중도) 관찰(사념처)’인 것이다. 도성제라고 알고 있는 중도, 팔정도, 사념처는 곧 분별없는 관찰이다. 결론적으로 수행이란 곧 분별없는 관찰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분별없이 관찰하라고 하면 잘 집중이 안 되고, 관찰이 안 된다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보다 쉽게 관찰을 이어가기 위해 네 가지 대상을 정해서 그 네 가지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하도록 사념처를 설해 주셨다. 의식을 몸에 모아 집중하여 몸을 관찰하고,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을 관찰하고, 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관찰하려면 어느 한 가지 대상에 집중을 해야 한다. 일상적일 때 우리는 끊임없는 생각과 분별과 비교, 판단들이 멈추지 않기 때문에 그 수많은 생각들을 멈추게 하기 위해 특정 대상에 집중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집중의 수행을 팔정도에서는 정정이라고 하며, ‘멈출 지()’자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바른 집중과 바른 관찰이야말로 모든 불교 수행의 핵 중의 핵이다. 이 두 가지의 중요성으로 인해 지관겸수, ‘정혜쌍수니 하는 말들이 나왔다.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곧 지관, 곧 정정과 정념을 말한다.

불교 수행법의 핵심인 지관(止觀)이 바로 멈추고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멈춘다는 것이 바로 분별을 멈추고 생각과 번뇌 망상을 멈추는 것이다. 즉 멈추고 관찰하는 지관 수행이 바로 분별없는 관찰을 말한다.

이처럼 불교 수행은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분별없이(中道) 관찰()하는 것을 통해 무아와 연기, 중도와 공, 자비를 깨닫는 구조를 가진다.

 

불교 수행의 공덕

 

불교 수행의 핵심인 중도와 팔정도를 실천하여 열반을 얻기 위해 구체적으로 닦아야 하는 수행법을 초기불교 경전인 대념처경에서는 사념처라고 설함으로써, 사념처야말로 중도와 팔정도라고 하는 불교수행의 가장 중요한 실천수행법임을 설파하고 있다.

대념처경에서는 비구들아, 모든 중생들의 청정을 위해,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해,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팔정도에 이르기 위해, 열반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유일한 수행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념처다.”라고 함으로써 사념처야말로 괴로움을 없애고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수행이라고 설하고 있다.

또한 같은 경에서 사념처는 일곱 가지 이익과 공덕을 가져온다고 설하고 있다. “첫째는 번뇌의 제거에서 오는 마음의 청정, 둘째는 슬픔과 근심의 극복, 셋째는 비탄의 극복, 넷째 육체적 고통의 극복, 다섯째 정신적 고뇌의 극복, 여섯째 네 가지 도과 성취, 일곱 번째로 열반의 성취라고 설하고 있듯이, 번뇌와 모든 고를 극복하여 결국 열반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많은 수행법이 나온 이유

 

이처럼 불교 수행은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분별없이 관찰하는 것을 통해 무아와 연기, 중도와 공, 자비를 깨닫는 구조를 가진다. 초기불교는 바로 그 특정한 대상을 신수심법이라는 사념처에 두었다. 그러나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그 집중하는 대상은 조금씩 달라진다. 크게 보면 신수심법 그대로지만 관찰의 집중 대상이 보다 구체화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수행이라고 알고 있는 그 모든 것들 즉 절, 염불, 간경, 진언 다라니, 호흡관, 위빠사나, 간화선, 묵조선 등 그 모든 수행법들 또한 사실은 분별없는 관찰의 대상에 따른 수행법이며, 중도와 팔정도, 사념처에 이르는 길이다.

그냥 관찰하라고 하면 도대체 어디를 관찰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카메라도 목표가 없으면 초점이 맞지 않고, 높이뛰기 선수도 목표가 없으면 제대로 넘지 못하는 것처럼, ‘분별없는 관찰또한 그 관찰할 목표와 대상이 분명하게 서 있으면 더욱 집중하기 쉽다.

예를 들어 염불수행은 그 관찰대상이 바로 염불이다. 불보살님의 명호를 외움으로써 염불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더욱 더 집중하고 관찰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염불을 하면서 그저 입으로만 불보살님의 명호를 외운다면 그것은 수행이라 할 수 없다. 염불을 하면서 그 염불하는 소리를 똑똑히 관찰하고,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지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염불하면서 온갖 생각과 판단, 분별들은 내려놓고 분별없이 염불하는 소리를 관찰하거나,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지를 관찰하는 것이 바로 참다운 염불수행이다. 염불을 통해 분별없이 관찰하는 도성제를 이루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절이나 간경, 진언, 다라니, 호흡관, 간화선 등도 근본에서는 마찬가지다. 절을 하면서 온갖 생각을 내려놓고 분별을 쉬고 절하는 몸의 동작에 집중하여 관찰하고, 간경이나 진언, 다라니를 외우면서 외우고 있는 것을 분별없이 관찰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념처 중 신념처에서 특히 강조하셨던 호흡관 또한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분별없이 관찰함으로써 지관이 더욱 깊어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수행 원리에 따라, 불교 역사 속에서 수많은 수행법들이 발전하며 꽃을 피웠지만 그 열매이자 결실로써 드러난 중국불교의 독특한 수행법이 있으니 바로 간화선이다. 간화선은 중국에서 대혜종고 선사를 통해 확립되었고, 한국불교에서 그 명맥을 잘 유지하고 있는 수행법이다. 이러한 간화선 또한 부처님의 수행법과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근본 원리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면서도 상근기의 수행자들을 위한 수행법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간화선에서 간()볼 간자로 이 또한 본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의 본성을 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려워하기에, 화두를 주고 그 화두를 의심함으로써 그 의심 자체를 보도록 하는 것이다. 화두를 통해 정정과 정념, 즉 지관의 수행이 이루어진다. ‘분별없는 관찰이 생겨나는 것이다.

 

생활수행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생활수행이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 생활 속에서 행하는 실천수행이다. 보통 사람들은 불교의 수행은 선방의 스님들이나 특별히 근기가 높은 이들만의 전유물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전혀 그렇지 않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행이란 고에서 벗어나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기 때문이다. 즉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괴로움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수행이 필요하다. 괴로움을 없애고 행복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생활수행이라고 이름 붙인데는 일상을 벗어나 한적한 선방 같은 곳에서 몇 시간씩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야만 수행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수행은 현장 속에서 더욱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이라는 생생한 현실 속에서 경계와 부딪칠 때 괴로워지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삶이 벌어지고 있는 공간이 곳 일상생활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특정한 안거 기간에만, 혹은 일주일에 절에 가 있는 동안에만, 혹은 하루 중 새벽에 일어나 예불하고 좌선하는 시간에만 수행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짧은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가장 평범하고도 우리의 삶이 벌어지는 대부분의 현장, 지금 여기라는 현실을 놓치는 것이 된다.

수행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직 수행은 지금 여기라는 생생한 현존의 문제다. 그것이 바로 수행이 진정으로 필요한 시공이다. 별도로 준비된 아란냐(고요한 수행처)나 선방, 혹은 특별한 시간에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매 순간의 지금 여기야말로 수행이 필요한 곳이다. 그렇기에 모든 수행은 곧 생활 수행아님이 없다. 선방이나 절에서 한 수행의 힘이 생활 속에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른 수행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생활 수행일까? 수행은 곧 분별없는 관찰이라고 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매 순간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교하며 무수히 복잡하게 돌아가는 분별을 멈추고 관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관찰한다는 것은 곧 지금 여기에 깨어있다는 말이고, 매 순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생각이나 분별을 한다는 것은 곧 마음이 과거나 미래로 달려간다는 것을 뜻한다. 생각은 언제나 과거나 미래와 연동된다.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라는 현재에 존재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야 하고,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 단 한 순간도 지금 이 순간속에 그저 존재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행위에서 존재로의 전환, 'doing'에서 'being'으로의 전환, 그것이 바로 수행이며, ‘분별없는 관찰이다.

분별하고’, 판단하고’, 하고’, 성취하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우리는 무언가를 하고있는 상태에 있다. 하고있는 상태는 과거나 미래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라는 현재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수행이란, ‘분별없는 관찰이란 곧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면서 과거나 미래를 기웃거리던 삶에서, 무언가 하기를 멈추고() 곧장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함으로써 지금 여기에 어떤 보배가 주어져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숲 길을 산책하면서 고요한 시간을 즐기는 것,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는 것,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감동하는 것, 어린 아이의 천진한 눈망울에 관심을 가지는 것 등과 같이 일상 생활 속에서 더 많이 행위하기 보다, 더 많이 느끼고 누리고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하나의 생활수행이다. 끊임없이 TV를 켜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시간 대신에 내 몸과 마음의 현재 상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것이다.

 

생활수행과 집중수행

 

이상에서와 같이 생활 수행의 핵심은 분별없는 관찰즉 지관에 있다. 편의상 이를 다시 집중수행과 생활수행으로 나눌 수 있다. 집중수행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정해두고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며, 생활수행은 말 그대로 매 순간, 삶의 현장 곳곳이 다시말해 지금 여기라는 모든 순간이 바로 수행의 순간임을 말하는 것이다.

집중수행은 선방이나 절에 가서 행하는 수행도 포함될 수 있고, 집에서 새벽이나 잠들기 전, 혹은 특정 시간을 정해 놓고 행할 수도 있다. 수행방법 또한 분별없는 관찰이 될 수 있는 모든 방편수행이 될 수 있다. 즉 매일 새벽 108배 절 수행과 금강경 독송 7독을 한다거나, 매일 잠들기 직전 1시간씩 좌선을 하는 것 또한 집중수행이다.

생활수행은 말 그대로 생활 속에서 언제나 늘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쉽게는 ‘2분명상이나 호흡관’, 혹은 사념처에서 말하는 몸의 관찰, 느낌 관찰, 생각 관찰 등도 될 수 있다.

이처럼 생활 속에서 심출가한 수행자라면, 매 순간 생활수행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그 뿐아니라 매일 특정한 시간을 정해 자기 나름의 수행법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생활수행의 종류

 

다음 달부터 본격적으로 심출가한 재가수행자들이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생활수행법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순서는 먼저 준비수행이라고 이름 붙인 귀의, 참회, 발원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수행법의 장에서는 먼저 초기불교의 수행법인 중도, 팔정도, 사념처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고, 이어서 대승불교의 수행법인 간경, 염불, 주력 다라니, , 간화선 등의 수행을 어떻게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닦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활 수행에 대한 결론으로써 보다 구체적인 생활 속 수행방법과 다양한 수행법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현대인들에게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수행법은 없는지, 불교의 수행법이 현대 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변화시키고 있는지 등에 대해 전체적으로 살펴보며 연재를 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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