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상태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무언가를 하고 있는 상태’다.
‘doing’ 의 상태다.
일을 하고 있거나, 밥을 먹고 있거나,
책을 보고 있거나, TV를 보고 있거나,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을 때는
‘무엇을 해야 하지?’, ‘이제 뭘 할까?’ 하고
‘할 것’을 찾기 시작한다.
심지어 남들이 보기에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조차
그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나고 있다.
정 할 것이 없을 때는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이다.
‘하고 있다’는 것은
움직이고 있는 것이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정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즉 행위할 때
우리는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 때 우리의 마음은
언제 그 목적지에 도착할지에 마음이 가 있거나,
빨리 도착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물색하며 마음을 쓰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그런 행위들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의식적, 의도적으로 행위하는 것이고,
둘째는 무의식적으로 행위하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목적을 정해 놓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다른 경우,
무의식적으로, 그저 습관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저 습관적으로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밥을 먹거나,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고, 담배를 입에 가져다 대거나,
어떤 사람의 특정한 말에 화를 내며 대응을 하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
의도를 했던, 하지 않았던
끊임없이 ‘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하는’ 상태,
즉 ‘doing’의 상태는 어떤 특성을 가질까?
의도적으로 하는 상태
먼저 의도적으로 하는 상태를 보자.
우리는 끊임없이 의도한다.
성공하려고, 돈 벌려고, 인정 받으려고,
사랑 받으려고, 칭찬 들으려고 등
다양한 이유로 의도를 일으켜 행동한다.
저마다의 다양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행동하고, 움직여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 ‘많이 움직여야, 많이 행동해야’
더 크게 성공하고, 더 인정 받고,
나아가 더 많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어느 정도는
행위는 곧 행위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업보의 법칙에 따라
행위를 많이 할수록 많은 결과를 가지기도 한다.
많은 시간을 일해야 많은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쉽게 깨닫게 된다.
적은 시간을 일하더라도
더 집중을 하거나,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거나,
어떤 영감이나 직관에 따라 일을 하게 될 때
더 적게 하고도 더 많이 얻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오히려 끊임없이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는 것 보다,
쉴 때는 온전히 푹 쉬어 주고,
할 때는 집중력 있게 몰입해서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큰 성취를 이루곤 한다.
사람도 낮에는 일하지만 밤에는 자야 하고,
농사도 봄, 여름, 가을에는 일하더라도
겨울에는 쉬어 주어야 하는 것처럼,
모든 삶의 이치는
멈추어야 할 때와 나아가야 할 때,
쉴 때와 일할 때,
잠들 때와 깨어날 때,
이완할 때와 수축할 때가
적절히 중도적으로 균형을 유지할 때만이
오히려 더 큰 힘과 지혜와 영감이 생겨난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이치는
이완과 수축, 밤과 낮, 들숨과 날숨 등
모든 것이 파장과 파동처럼
골과 마루가 반복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무위자연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우리 삶 또한 계속해서 ‘행위’만 할 것이 아니라,
쉴 때 충분히 쉬어 줌으로써
‘나아가야 할 때’와
‘멈추어야 할 때’의 흐름을 잘 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연의 흐름, 우주법계의 흐름을 타고
바닷가에서 서핑 하는 사람이
파도를 거스르기 보다 그 흐름을 타고
함께 따라 흐르듯이,
우리의 삶 또한 자연스러운 삶의 파동을 허용해야 한다.
즉, 많이 행위한다고
더 많은 것을 더 빨리 얻으리라는 우리의 생각은
헛된 환상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그런 것처럼 보일 뿐,
정말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삶은 어떤가?
더 많이 움직이고, 일하고, 행위하고,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지만
성공할 거라는 확신어린 환상을 좇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거의 단 한 순간도
‘쉬는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몸과 말과 생각이 온전히 쉬어본 적이 없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가져 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는 것’만이 성공의 열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 않는 시간’은
그냥 버리는 시간이고 아까운 시간이며
낭비하는 시간이라고 굳게 믿어 왔던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하는 것’에 중독되어 있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상태
두 번째로
무의식적으로 ‘하는’ 상태를 살펴보자.
우리는 의도적으로도 항상 무언가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정신병적인 강박 속에서 살고 있지만,
의도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자동 반사적으로
무언가를 하게 되기도 한다.
습관적으로 우리 몸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말 또한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말들이 그저 툭툭 튀어 나오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몸이 저절로 피하게 되고,
입으로는 상대방을 욕하거나 비난하게 된다.
과거에 습관적으로 욕하고 거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올 확률이 높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하는’ 상태는
무엇보다도 생각이 잘 하는 주특기다.
생각은 내 의도와는 전혀 상관 없이
저절로 끊임없이 온갖 것들을
만들어내고 생각해 내곤 한다.
우리가 잡념, 번뇌, 망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생각이 통제 불능 상태로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뇌과학에서도 하루에 이런 생각과 망상들이
하루에 6만여 개 정도가 일어난다고 하니,
이쯤 되면 도저히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생각은 하루 종일
끊임없이 종알대며 생각을 해 대고 있다.
생각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는 모든 ‘doing’의 최고봉이라 할만 하다.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을 한다.
doing에서 being으로의 전환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는 내 스스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끊임없이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상태’에 놓여 있다.
명상의 시작은
바로 이 사실을 직시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고요하게 텅 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
잠시 머물러 보는 것이다.
‘doing’에서 ‘being’으로의 전환,
‘함’에서 ‘있음’으로의 전환, 그것이 명상의 시작이다.
모든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잠시 내려 놓고
잠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고요함 속에
그저 존재해 보는 것이다.
그냥 ‘있어 보는 것’이다.
왜 명상을 해야 하지?
그러면 본격적인 명상 강의에 앞서
왜 행위의 시간에서 있음의 시간으로 옮겨가야 하는지,
‘doing’에서 ‘being’으로 전환해야 하는지를
잠시 살펴보자.
존재의 상태, being의 상태는 곧
텅 빈 공의 상태라고 할 만하다.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고요함이다.
그러나 그러한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는
텅 빈 곳에
꽉 찬 충만함이 있다.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무의미하고 허무한 공이 아니라,
그 텅 빈 가운데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무한한 권능과
모든 창조의 씨앗들을 내품고 있는
무한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텅 빈 충만’의 의미다.
이것을 불성, 본래자리, 자성불, 법신불,
참나, 진아, 대아, 신성, 주인공 등
그 무엇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바로 그러한
실체는 없지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에너지 장이 존재한다.
양자물리학에서도
양자스프, 영점장, 혹은 디바인 메트릭스 등
다양하게 불리는 에너지 장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바로 이 공의 장,
즉 텅 비어 있지만 모든 것이 충만한
이 근원과 보다 더 깊이 연결될수록
우리는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그 근원의 에너지를
현실의 삶에 가져와
현실을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 근원과 연결될 때
비로소
제 스스로 생각으로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속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는
헛된 망상의 고통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을 청산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하나도 힘들이지 않고
우주의 흐름과 하나되는
지고의 평화와 고요 속에 이르게 된다.
어떻게 하면 그 근원과 연결될 수 있을까?
그 근원과의 연결을 끊는 작용을 멈추면 된다.
그 연결을 끊는 작용이 바로 ‘doing’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위함으로써
내 방식대로의, 내 관념과 아상에 입각한 세상을 건립하고,
그 방식대로 되면 행복이고,
그대로 되지 않으면 불행이라고 여기면서
자신 인생의 불행과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
행복과 불행,
선과 악,
옳고 그름,
성공과 실패 등이라는 무수한
이분법적 관념을 만들어 놓고
그 가운데 한 쪽을 선택하기 위해
또 다시 끊임없이 ‘행위’하고 ‘노력’하는 삶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낸 현실이라는 삶의 실체다.
즉 우리는 본래의 근원적인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스스로 빠져 나와
선악 등의 이분법적 현실을 스스로 만드는 행위를 하며 살았고,
그렇게 만든 허망한 관념 속의 현실에서
더 좋고, 더 옳고, 더 행복하고, 더 성공적인
삶을 선택하기 위해 끊임없이 ‘행위’하며 살고 있다.
그렇다면 잠시
우리가 왜 애초에 이런 헛된 관념을 만들어내고,
허망한 세상을 만들어내며,
분별을 만들어 냈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아상’ 때문이다.
이 몸과 마음을 보고 ‘나’라고 착각하고,
‘나’라는 고정된 실체로써 생각하면서부터
모든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가 만들어지면
나와 남을 나누어 놓고, 분별하고,
나에게 이익이 될지 해가 될지를 판단하게 되고,
내 편과 네 편을 나누게 되고,
어떤 것이 내게 더 좋은지 나쁜지를 끊임없이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중심으로
이 허망한 세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이상
우리는 언제까지고
완전한 행복, 완전한 평화와 열반에는 이를 수 없다.
그렇기에 그 모든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낸
모든 행위의 작업들을 멈추고
본래의 근원인
고요하고 텅 빈 그 바탕에
나의 파장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모든 행위를 멈추고
그 순간에 존재해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지금 여기’라는
이미 본래부터 꽉 차 있고 충만했으며
모든 것이 들어오고 나오던
바로 그 근원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그 연습이 바로 명상이다.
너무 쉬워서 어려운 명상
명상이란 이처럼
모든 행위를 멈추고
지금 이 자리에서 존재하여
그 순간의 모든 현실을 알아차림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자각하는 일이다.
아무런 판단이나 분별도 하지 않고,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현재라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그 때
생각이 만들어내는 소소한 성공 조각들을 얻는 대신,
생각 너머의 텅 빈 근원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샘솟아 나오는
원천적인 힘과 지혜와 자비가
삶을 이끌어 가게 된다.
이처럼 명상이란
특정한 기술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라거나,
성공을 위한 좋은 도구라거나,
불행한 상황을 행복한 상황으로 바꾸는 만병통치약이라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삶을 근원에서 성찰함으로써
그동안 잘못 가고 있던 어리석음의 길을 돌이켜
근본적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길이다.
명상을 통해
작은 것들을 얻으려고 욕심을 내지는 말라.
물론 그런 공덕을 당연히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명상의 참된 공덕은
내가 생각해 오던 그 진부한 인생 스토리의 차원을 넘어선
근원적인 변화이며
중생에서 열반으로의 대 전환이다.
내 생각대로 명상의 효과가 확실하게 잘 나오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상은 그런 인생 살이의 소소한 행복을 얻는 기술 같은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삶의 뿌리에서부터 진리에 이르게 하는
대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에는
당장에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이거나,
눈에 띄게 명상을 했더니 사람이 변했다거나,
금방 성공을 했다거나, 행복해 졌다거나,
그런 것을 바라겠지만,
명상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근원의 세계에 직접 다가서는 것이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명상 수행 중에도
큰 변화가 없는 듯 보일 것이다.
이 점이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시작하다 말고 쉽게 그만 두는 이유다.
다른 수많은 것들
예를들어, 운동이나, 공부 같은 것들은
모두가 노력한 만큼,
‘행위’한 만큼 결과가 바로 바로 보인다.
그러나 명상은
그런 것들과는 애초에 뿌리를 달리한다.
행위한 만큼 결과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내려놓고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겉보기에는 행위가 더 빠른 것 같고,
존재하는 것은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지금 여기’라는 이 자리에
머물러 존재하고 자각하는 것이
텅 빈 충만이라는,
무한 근원의 총체가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된다면
왜 명상이 멈춰 서 있는 듯 하면서도
가장 빠르게 가는 길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빨리 가려고 행위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먼 길을 돌아 갔다가
다시 그 먼 길을 돌아와야 하는 숙제만 안게 될 뿐이다.
명상은
우리들이 그동안 너무 먼 길을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지금 이 자리에 멈춰 서서
그저 존재하고
그 자리에 있음을 자각함으로써
더 이상 아무 곳에도 갈 필요가 없고,
그 무엇도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하여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준다.
지금 이 자리야 말로
우리가 꿈에 그리던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우리가 그렇게 행위를 통해 도착하려고 했던
근원적인 목적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상에 앞서 우리는 누구나
귀의를 한다.
귀의란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이다.
계속해서 행위함으로써
먼 길로 내달려 가기만 했고,
그래서 근원의 자리에서 점점 멀어지기만 하던 것을
이제 본래의 근원 자리로, 본향으로
‘되돌아가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참된 귀의의 방법,
되돌아가는 방법,
그저 근원의 힘과 지혜와 사랑의 원천으로
곧바로 뛰어드는 방법,
삶의 방식을 근원적으로 뒤바꾸는 방법,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그래서 명상은 너무나도 단순하다.
하지 말고
멈춰 서서 보라는 것이다.
‘하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
잘 해야 하고, 빨리 해야 하고,
빨리 해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상은
그 모든 ‘하는 것’을 내려 놓는 것이기에
사실 쉬워도 너무 쉽다.
너무 쉬워서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한 번도
‘하는 것’을 멈춰 본 적도 없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 이제 3월 7일부터
명상수행 강의와 금강경 강의가 시작됩니다.
명상 수행은
온 몸으로 직접 실천해서 맛보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머리로만 생각으로만 하는 명상은 명상이 아닙니다.
목탁소리 모든 법우님들이
함께 집에서 생활 속에서 명상수행을 실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교아카데미의 명상강의를
될 수 있으면 글로써든, 강의로써든
함께 공유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공부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공부 생활수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수행법 강의] 2강 - 귀의(歸依) (0) | 2014.03.09 |
---|---|
[기도수행법 특강] 1강 - 수행의 개관 (1) | 2014.03.05 |
당신 앞의 한 사람이 곧 우주 (3) | 2014.02.03 |
법상스님의 '금강경과 명상수행' 강좌 안내 (2) | 2014.02.02 |
'집착'할 것인가 '선호'할 것인가 (0) | 2014.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