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제법무아에서는 모든 존재에 대해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제법무아에서 무아는 ‘고정적인 실체로써의 나’ 혹은 ‘본질적인 나’라는 것 또한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본질적인 나, 즉 불성(佛性)이나 여래장(如來藏), 참나, 진아(眞我), 대아(大我), 주인공 등도 과연 무아인가 하는 점이다. 보통 불교를 믿는 이들은 중생의 성품을 버리고 부처의 성품을 깨달아야 한다거나, 거짓나를 여의고 참나를 찾아야 한다거나, 불성을 깨닫고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렇다면 이는 지금까지 배워 온 사실과는 어긋나는 교리가 아닌가.
여기에서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이 꼭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근본법과 방편법의 이해가 대두된다. 즉 본질적인 가르침, 근본법의 가르침의 이해와 방편법에서의 이해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근본법과 방편법은 언뜻 보기에는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정 반대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존재가 본질적인 근본법에 귀일하도록 하기 위한 수많은 방편들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훗날 중국불교의 교판설에 입각해 본다면, 처음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3.7일 동안 깨달음의 본질적인 세계를 그대로 직설하셨는데 그것이 너무 심오하고 어려워 이해하는 이가 많지 않아서 뒤에 다시 쉬운 방편의 설법을 하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방편설은 바로 이러한 부처님의 자비에서 나온 가르침이다.
조금 쉽게 비유를 든다면,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근본법인 치우침 없는 중도(中道)를 설하셨지만, 유(有)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무(無)를 설하고, 무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유를 설함으로써 중도를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방편을 쓰셨던 것이다. 진리의 산 정상에 오르는 근본법을 부처님은 언제나 설하시지만, 남쪽에 사는 이에게는 북쪽으로 올라가라고 해야 하고, 북쪽에 사는 이에게는 남쪽으로 올라가라고 해야 하는 것처럼 부처님께서는 근본법으로 가기 위한 수많은 설법에서 중생들의 근기와 여건에 맞춰 수많은 방편을 설하신 것이다.
제법무아의 가르침은 변할 수 없는 근본법의 진리이다. 그러나 근기가 낮은 중생들은 무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을 찾게 마련이다. 무언가 본질적인 존재, 궁극의 존재에 의지함으로써 좀 더 쉽게 진리의 산에 오르고 싶어 한다. 그랬을 때 부처님께서 ‘아니다. 쉬운 길은 없다. 어려우면 포기해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만 나를 따르면 된다’고 했다면, 소수의 몇몇 수행자만이 깨달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많은 중생들은 무언가 의지할 것은 찾는다. 이 때 후대의 대승경전에서는 자비로운 방편으로 ‘그래 부처님께 의지해라. 일체 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다. 네게도 불성이 있으니 네 안에 있는 불성에 의지해라. 네가 바로 부처다’라고 함으로써 많은 중생들에게 좀 더 쉽게 믿고 의지하며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방편법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 열반 후에 이런 가르침이 어디까지나 방편이었음을 망각하고 부파불교에서는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 혹은 아공법유(我空法有)라는 사상으로까지 정립되기에 이름으로써 다시금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본질적인 가르침은 근본법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며 삿된 가르침[실유]을 파하고 바른 것[무아, 공]을 드러낸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치로써 공사상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그러면 도대체 불성이나 진아라는 말은 어떻게 나온 말일까. 이러한 방편을 쓸지라도 그에 합당한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일체 모든 것은 무아라고 했다. 예를 들어 한 50%는 무아이고 나머지 50% 정도가 진아라거나, 99%는 무아이고 1%가 진아라고 한다면 무아와 진아의 구분은 엄밀해진다. 그런데 제법무아에서 말하는 제법은 100%를 말한다. 하나도 남김없이 100% 모든 것이 전부 다 무아라는 말이다. 이처럼 온 우주법계의 100%가 전부 순전히 무아라면 거기에 억지로 무아라는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 100% 완전히 ‘무아’인 것은 100% 완전 ‘아’이기도 한 것이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우주 법계 전체에 고정된 실체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그 사실을 진리라고 하고, 그러한 진리가 머무는[법주] 곳을 법계라고 하며, 그러한 법주법계 전체는 그야말로 진리의 세계이고, 참의 세계이므로, 그것을 이름하여 진여, 참나, 자성청정심, 대아, 주인공, 불성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여, 자성, 참나, 불성이라는 용어와 방편의 가르침이 나왔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오해의 소지를 안게 된다. 사람들은 여전히 또 다른 실체적인 불성이나 진여나 참나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방편을 벗어나 외도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 그러니 불성이라는 용어 또한 내 안에 어떤 불성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그 불성을 발현시켜 내거나, 일깨우거나, 숨어있던 것을 튀어나오게 하는 개념으로 수행을 이해해서는 안 되며, 연기법과 무상, 무아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써 이해되어져야 한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무아법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본질적인 실체는 없다. 그것이 부처가 되었든, 열반이 되었든, 불성이 되었든, 여래장이나 진여가 되었든 그 어떤 것도 본질적인 실체라고 할 수는 없다. 부처며 열반이란 언어는 사실 언어를 초월하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부처나 열반에 본질적인 실체라거나, 고정된 실체라는 수식을 붙이는 순간 부처나 열반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방편으로 불성이나 진여본성이나 주인공이나 일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고정된 실체로 보거나, 어떤 실질적인 자아로 보는 순간 우리는 진리를 버리고 외도를 추종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불교의 어려움이 있다. 어떤 경전에서는 방편법을 또 어떤 경전에서는 근본법을 설하며, 어떤 스님께서는 주로 방편법을 또 어떤 스님께서는 주로 근본법을 설하다 보니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은 근본법에 대해 중심을 두고 방편법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방편법을 실천할 때에도 그 중심에는 근본법의 정신이 오롯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불성이나 여래장, 본래면목 같은 것들에 대해서 중도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함을 뜻한다. 유무중도적 관점에서 본다면, 불성과 여래장, 참나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있지 않은 것도 아니고,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있다’고 해도 치우치고, ‘없다’고 해도 치우친다.
예를 들어, 윤회는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윤회가 있다면 지금의 ‘나’와 다음 생의 ‘나’는 같은 존재일까 다른 존재일까? 그것은 같은 존재라고 할 수도 없고, 다른 존재라고 할 수도 없다.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다’는 가르침에서처럼, 업을 지으면 그에 따른 결과는 있으나, 업을 짓는 자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업을 짓는자, 받는자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흐르는 과정에서의 인연 따라 가합으로 잠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타는 촛불과 10분 후에 타는 촛불이 다르지만 다르다고 할 수 없고, 같지만 같다고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 또한 마찬가지다. 같지만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지만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끊임 없이 흐르는 과정일 뿐,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생의 나와 다음 생의 나, 업을 지은 자로써의 나와 업을 받는 자로써의 나도 마찬가지다. 같지만 같다고 할 수 없고 다르지만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이러한 관찰이 바로 중도적 관찰이다.
마찬가지로, 불성, 여래장, 참나도 마찬가지다. 있지만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지만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유무중도로써 바라볼 수 있을 뿐,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있어도 중도적으로 있고, 없어도 중도적으로 없지, 결코 절대적으로 없다거나, 결정코 꼭 있다거나 하는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즘 이러한 불성, 여래장, 참나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있느냐 없느냐의 논쟁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있다’고 하고, 근본불교에서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근본불교의 무아를 공부하는 분들은 대승불교에서 불성, 여래장을 말하는 것은 비불교적인 발상이며 외도의 가르침이지 그건 불교가 아니라고 소리치고, 대승불교를 공부하는 분들은 불성, 여래장, 본래면목, 참나를 찾아야 한다는 말을 외친다.
그러나 중도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논쟁은 무의미한 것이다. 언어라고 하는 제한된 방식을 가지고 불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결론 낸다는 것 자체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불교의 무아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불성을 설한다고 해서 모든 대승불교를 싸잡아 비난할 수는 없다. 언어적 제한 속에서 설명해 본다면,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되었다는 그 자체를 불성의 바탕의 의미로 새길 수도 있는 것이다. 불성이라는 것을 어떤 고정된 실체적 존재로써 여긴다면 잘못 된 것이지만, 불성을 하나의 부처가 될 가능성으로써 이해하게 된다면, 불성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어리석은 무명을 타파하여 깨달음을 얻으신 그 사실은, 언어로써 이해해 본다면, 어리석은 아상으로써의 ‘나’를 타파한 것이며, 그것을 ‘참나’를 되찾은 것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참나, 본래면목을 설하는 것에 무아를 내세워 노이로제가 걸린 것처럼 비판만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불성, 여래장, 참나라는 것을 고정된 실체적 존재 관념으로 이해한다면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없다라고 결정론적으로 말한다면 그 또한 중도에서 어긋난 것일 뿐이다. 불성, 여래장, 참나, 본래면목, 주인공 또한 중도적인 관점에서 살펴야 하는 것이다.
[붓다 수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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