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이처럼 제행무상의 이치는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인생무상’이라는 표현에서 보는 허무주의적이고 공허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허무한 것이 아니라, 무상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무상은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삶에 대한 지극히 공평무사한 통찰일 뿐이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이 무상의 이치를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무상은 허무주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본질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말일 뿐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삶은 무상하기 때문에 그 어떤 가능성도 활짝 열려 있는 변화무쌍한 삶의 희망을 품어볼 수 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나를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열등감은 내 스스로 만든 것일 뿐이지, 본래는 무상의 이치로써 모두는 평등하다. 나 또한 그와 같이, 위대한 위인들과 같이, 부처님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무상이라는 변화의 이치는 사람마다 어떤 방면으로의 변화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방면으로 완전히 열려 있는 무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무상하기 때문에 공허한 것이 아니라, 무상하기 때문에 더 나아질 수 있고, 진보할 수 있으며, 발전해 갈 수 있는 것이다. 무상하지 않다면 가난한 자는 언제까지고 가난해야 할 것이며, 능력 없는 사람은 언제까지고 능력이 없을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무상하기 때문에 나의 모든 가능성은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부자도 될 수 있고, 좋지 않던 성격도 바꿀 수 있으며, 없던 능력도 계발해 낼 수 있고, 심지어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감사의 토대가 바로 무상에 있다. 무상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아름답고도 희망차다.
업도 운명도 변한다
이러한 제행무상의 이치를 설하지만 혹자는 그래도 이미 지어 놓은 업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미 내게 주어진 업장은 어쩔 수 없으니 그 업을 다 받기 전에는 꼼짝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좌절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내 업이 원래 나쁘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악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하면서 나쁜 업을 한탄하며 비관하기도 한다.
참된 수용, 참된 섭수, 참된 받아들임이란 정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제행무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고정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해진 것에 얽매이고 집착하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내 삶이 어떻게 변화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마땅히 다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야말로 참된 받아들임인 것이다.
내 업이 원래 가난하기 때문에 나는 한평생 가난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거나, 내 업이 원래 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평생 병을 달고 살 수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 말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은 전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자기만의 삶의 모습을 갖고 태어난다.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살 것인지, 어느 정도의 학벌과 능력과 외모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얼마 정도의 행복을 누리다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에 대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정해진 업력(業力)을 받고 태어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떤 배우자를 만날 것인지, 어느 정도의 대학이나 학벌을 가지게 될 것인지, 어떤 회사에 취직하여 어느 정도까지 진급을 하게 될 것인지, 어떤 인연을 만나서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받게 될 것인지, 언제 어떤 병이나 사고로 얼마만큼 고통을 겪게 될 것인지, 돈과 재산은 어느 정도를 벌어 쓸 수 있을 것인지, 그렇게 살다가 언제쯤 몇 살 쯤 죽어갈 것인지, 그런 것들에 대한 삶의 윤곽이 전생의 업식(業識)에 의해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전생의 업을 그대로 받을 것이니 이번 생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절대 그 업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것도 인생 일대의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말로 행동으로 생각으로 행하는 행위이다. 전생, 또 오랜 전생을 이어오며 지어왔던 온갖 행위들이 지금 내 안에서 기본적으로 이번 생을 어떻게 펼쳐나가게 될지에 대해 결정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정의 원인은 내 과거의 행위에 있다. 내 과거의 온갖 행위들에 의해 내 현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가. 결론은 내 현재의 행위에 따라 또 다시 내 미래가 바뀔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자신의 마음에 따라, 자신의 욕심과 집착의 크기에 따라, 자신의 마음공부와 수행과 기도의 정도에 따라, 내 삶은 언제든지 180도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달라질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 삶은 그 괘도를 수정해 나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일 있을, 내년에 있을 내 삶의 괘도가 내 행위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되어지고 있다.
그것을 운명이나 숙명이라고 이름 짓지 않고 업(業)이라고 이름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운명이나 숙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반해 업이라는 것은 언제고 바꿀 수 있으며, 바꿀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순간순간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오늘 힘겹게 살아가는 소년 소녀 가장을 만나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고,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 주었다면 바로 그 한 번의 행위가 1년 뒤 파산할 지 모르는 업연을 2년 뒤로 늦춰줄 수도 있다. 오래도록 마음속에 응어리 져 있던 미워하는 원수에 대한 불같은 화를 다스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를 해 주었다면 몇 달 뒤에 닥칠지 모를 홧병이 소멸될 수도 있다. 필요하다고 그 때 그 때 사 들이고, 여유가 있다고 아끼지 않고, 절약하지 않았던 삶의 습관이 10년 뒤에 올 퇴직을 1년 뒤로 앞당길 수도 있고, 나보다 못난 사람,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한 마디의 말이 지금의 내 높은 지위를 1년 빨리 끌어내릴 수도 있다. 어디 그 뿐인가.
파리나 모기, 풀벌레와 작은 곤충들의 생명을 별 생각 없이 죽이거나 괴롭혔다면 그것은 내 명(命)을 몇 년씩 앞당기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산을 함부로 깎고, 나무를 함부로 베는 행위로 인해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폭풍우가 내가 사는 지역을 강타했을 때 바로 내가 사는 집이 무너지고, 내 터전이 깎여나갈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행위에 따라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업은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제행무상이라는 이치에 따르면 그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업이라는 것 또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매일 매일 달라지고 지속된다는 것은 받아야 할 업의 과보 또한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붓다 수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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