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좋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이 아상(我相)이다.
좋아하는 것만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상이다.
아상은 언제나 자기 기준을 정해놓고
좋아하는 것은 삼키고,
싫어하는 것은 뱉어버리는 일만을 할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아상의 놀이에 놀아난다.
백전백패, 아상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만다.
아상은 언제나 나를 위하는 척,
나를 돕는 척하면서 나타나
나를 집어 삼키는 뛰어난 재주꾼이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되돌아 보라.
매 순간의 삶을 살펴보라.
언제나 삶이란 아상에 놀아나고 휘둘리는,
아상의 노예와도 같은 곳일 뿐이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
보고 싶은 것과 보기 싫은 것,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
이 양 극단을 뚜렷이 나누어 놓고,
그 중에서 좋은 쪽, 행복, 기쁨,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편만을
미친듯이 좇아가는 삶이야말로 우리의 삶이며,
아상에 놀아나는 삶인 것이다.
우리는 늘 싫어하는 것,
불행, 고통, 원망, 절망, 슬픔, 미움, 좌절, 스트레스,
하기 싫은 일과는 담을 쌓으며 살아 왔다.
될 수 있으면 그것들은 안 하면서,
그것들을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해 가면서,
요리조리 최대한 머리를 굴려 피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야말로 불행이 쫓아올까 싶어 노심초사하며
끊임없이 도망치는 도망자의 삶을 살아왔다.
좋은 것은 더 가지려고 애쓰며 살고,
싫은 것은 피하려고 거부하려고 애쓰면서 살아왔다.
싫은 것에서는 도망치려 애쓰고,
좋은 것은 쫓아가려 애쓰는 삶,
도망자가 되거나, 추격자가 되는
이 두 가지 삶만을 쫓아 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투쟁의 삶이고, 우리의 삶이 전쟁터가 되는 이유다.
왜 우리는 이렇게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거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 추격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도망자도 바쁘고, 추격자도 늘 바쁘다.
도망자도 바쁘고, 추격자도 늘 바쁘다.
도망자도 초조하고, 추격자도 늘 노심초사해야 한다.
도망자도 늘 괴롭고 추격자도 늘 힘에 겹다.
왜 그런 바쁘고 정신 없고, 두렵고, 힘들며,
초조하게 쫓고 쫓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삶을 살게 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아상 때문이다.
아상이 가진 분별과 차별심 때문이다.
아상이란 언제나 좋고 나쁜 것을 나누어 놓고,
좋은 것은 쫓느라 바쁘고,
싫은 것으로부터는 도망치느라 바쁘다.
이것이 바로 정확히 아상이 하는 짓의 전부다.
여기에 매 순간, 끊임없이, 일평생을 속아넘어 가는 것이 바로 '나'다.
아상이 곧 나라는 생각 때문에,
아상은 언제나 나를 돕느라 그런다는 생각 때문에,
끝까지 아상을 신뢰한다.
아상을 신뢰한 결과는 죽을 때 까지 도망자나 추격자가 되어,
근심, 불안, 초조 속에서 사는 것일 뿐인데도.
그러면 아상에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그건 너무나도 단순하고 간단하다.
아상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주지 않고,
밥을 먹여 주지 않고, 아상을 신뢰하지 말고,
아상을 거스르면 된다.
아상이 하는 것이 바로 좋고 싫은 것을 나누는 것이니,
당장에 좋고 싫은 것을 나누지 않으면 된다.
좋고 싫은 것을 나누어 놓고
좋은 것은 쫓고, 싫은 것에서는 도망치는 것이니,
쫓거나 도망치는 이 두 가지를 하지 않으면 된다.
좋은 것, 행복, 원하는 것, 사랑하는 것, 기쁨,
돈, 명예, 권력, 지위, 재산을 늘리는 것 등등
아상이 쫓는 것에 대한 중요도를 떨어뜨리면 된다.
물론 좋은 경계가 올 때 그것을 거부하라는 말은 아니다.
좋은 일이 생긴다면 마땅히 좋아하고 누리라.
거기에서 벗어날 이유는 없다.
다만 거기에 미친 듯이 올인하지는 말라.
심각하게 중요도를 부여하지는 말라.
그저 담연하게 받아들이라.
싫은 경계, 역경이 올 때 그것을 거부하지 말라.
싫은 경계를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벗어나려 하고
도망치려 하는 것이 아상의 행동이니,
아상에 힘을 주지 않으려면 아상과 거꾸로 가면 된다.
역경, 불행, 슬픔, 좌절, 고통이 올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던 과거의 습관적인 패턴에 제동을 걸고,
선택함 없이 좋아하거나 싫어함 없이
그저 전부를 통째로 받아들여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상의 농간이고,
통째로 전부를 받아들이는 것은
본성, 불성, 참나, 근원의 작용이다.
이건 물론 매우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한 생각 돌이켜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저 단순하게 전부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번 하던 습관대로 늘 받아들이는 것만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럼으로써 무한하게 펼쳐질 수 있는
흥미진진한 영적인 성숙의 그 모든 가능성을 사장시키고 있다.
우리의 뇌는 초당 4,000억 비트의 정보를 처리하는데,
우리는 그 중에 단지 2,000비트만 인식한다고 한다.
습관적으로 내 안에서 좋고 나쁜 것을 나누어 놓고,
그 중에서 좋다고 판단한 것만을 분별해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매번 똑같은 2,000가지의 가능성만이
현실로 지루하게 반복되어 이루어질 뿐,
나머지 399,999,998,000비트의 무한한 가능성은
습관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마음만 활짝 열고,
과거에 만들어 놓은 습관적인 분별과 차별심만 내려놓으면,
그 무한한 삶의 가능성이
우리 앞에 눈부시게 연주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카메라는 분별없이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 담아낸다.
그렇기에 보여 지는 모든 것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자동적으로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여
그 가운데 관심 가는 좋은 부분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기에
같은 것을 보더라도 사람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내 욕망과 선호가 개입된 몇몇 가지만이 도드라지게 뚜렷이 보이고,
나머지 관심 밖의 대상들은
아웃포커싱 되듯 삶의 뒤편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에서는 이 세계를 단지 무한한 가능성의 장으로 본다.
객관적인 물질세계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가능성의 파동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찰할 때 가능성의 파동은
곧장 경험의 입자가 되어 삶을 창조해 낸다.
양자중첩이란
입자가 동시에 두 개 이상의 상태로
둘 이상의 위치에 존재한다는 것으로써,
모든 위치에 존재하다가 관찰하는 순간,
어느 한 위치로 고정되어 ‘입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가능성의 상태로 있다가
우리가 그렇게 보기로 의식하고 볼 때,
‘그런 현실로 창조(입자)’되는 것이다.
이처럼 외부의 세계는 사실 ‘물질’이 아니라 ‘의식의 투영’일 뿐이다.
우리가 견고한 외부의 사물이라고 생각한 것들은
사실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단지 가능성일 뿐이다.
이처럼 물질세계는 언제나 가능성으로 존재하다가
우리의 의식이 비출 때 현실로 창조된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똑같은 것들만을 분별하고 차별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똑같은 삶이 반복될 뿐인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
인생 변혁의 기회는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습관적인 분별과 차별로써
언제나 2,000비트의 정보만을 축소하여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양자가 중첩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장인
399,999,998,000비트의 정보로 눈을 돌리고,
그 가능성을 향해 마음을 여는 순간,
전혀 다른 새로운 현실이 창조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매일 매일 똑같은 일만 반복하며,
전혀 새로울 것도 없이, 진부하고 틀에 갇힌 생활만을
습관적으로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2000이 아닌,
399,999,998,000의 무한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문 앞에서 그 무한 가능성이
언제든 들어 올 준비를 하고 노크를 하고 있지만
우리는 습관적인 차별, 분별심과 아상 때문에
언제나 문을 쾅! 닫은 채 그 가능성을 사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늘 가난하던 사람이
의식의 변혁과 동시에 부자가 되거나,
늘 실패만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성공을 하고,
깨닫지 못하던 사람이
어느 날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치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상에 얽매여
습관적으로 아상이 좋아하는 것만을 선택함으로써
무한 가능성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아상에 묶여 습관적 패턴만 갇혀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주법계에서 보내주는 무한한 깨달음의 가능성,
업장소멸의 가능성, 영적 진보와 성숙의 가능성을 차단시켜 버리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제나처럼 아상이 세상을 창조하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내면의 근원이 그 선택을 대신하도록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우주법계가 보내주는 무한한 가능성이
고스란히 내 삶에서 거침없이 춤출 수 있도록
문을 열고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나를 비워야 한다.
아상이 아닌 ‘공’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상에 갇힌 분별로써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아상이 타파된 무분별로써 돌아가야 한다.
좋고 나쁜 것, 옳고 그른 것, 원하고 원치 않는 것,
보고 싶고 보기 싫은 것을 나누어 놓고,
습관적으로 좋은 것, 옳은 것, 원하는 것, 보고 싶은 것만을 보던 습관을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좋고 나쁜 것을 나누지 말고 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좋고 나쁜 것을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상이 아니다.
그것은 참된 근원의 작용이다.
바로 이 지점이 삶의 근원적인 전환과 변혁과 각성이 일어나는 분기점이다.
이 단순한 차이는, 사실 진리의 전부다.
이 단순한 섭수, 수용, 받아들임, 무분별, 무간택, 무차별을 실천하겠다고
용기를 내어 피하지 않은 채
두 눈 똑똑히 뜨고 그 양 변의 경계를 다 분별없이 받아들일 때
그 때 가능성의 장으로부터 무량수 무량광의 상상할 수 없는
우주적인 힘과 지혜와 자비가 깨어난다.
본래 주어져 있던
그러나 잠시 잊고 있던
그 모든 힘의 근원이 비로소 깨어난다.
삶에 대 전환이 시작된다.
완벽한 삶의 반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업장소멸이란 바로 이 순간에 찾아온다.
이 순간의 업장소멸은 그야말로 수미산이 무너지듯,
한꺼번에 무한히 큰 규모로 일어난다.
매번 좋아하고, 원하고, 바라는 것들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역경, 불행, 좌절, 싫어하는 것들을 통해 얻고 배울 수 있는
엄청난 공부의 가능성, 업장소멸의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 버리기만 해 왔던 것이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우주법계는 당신을 위한 완벽하고도 정확한 깨어남과 성숙과 자각을 위해
신비롭고도 완벽한 삶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주는 언제나 그래왔다.
다만 내가 그 우주적인 협조를 받기를 꺼려왔던 것일 뿐!
우주법계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순간 분별하고 선택하고 차별하던 마음을 돌이켜,
무분별로써 완전히 받아들이게 될 때,
시간의 벽은 무너지고,
억겁에 걸쳐 일어나야 할 업장소멸의 지난한 여정이
단 100일 만에도, 49일 만에도, 21일 만에도, 7일 만에도
아니 단 한 순간 만에도 찰나로써 끝나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상 본위의 삶에서,
우주법계 진리 본위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살아 왔던 아상과 에고의 삶에서,
근원에 내맡기고 우주법계가 준비한 나를 위한 우주적인 삶의 계획에
완전히 나를 내던지는 삶으로의 전환이다.
'나' 위주의 삶을, '진리'에 내맡기는 삶으로 완전히 뒤바꾸라.
아상의 계획에 동조하는 대신,
우주법계의 근원적인 계획에 순응하라.
생각이라는 아상이 끊임없이 올라오면서,
당신을 아상 아래 무릎 꿇도록 지속적으로 방해하겠지만,
그 방해 작전의 농간에 속지 않을 수 있다.
단순하게 분별없이 삶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진리를 어렵게 생각지 말라.
수행을 어렵게 생각지 말라.
신심명에서는 이것을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고 했다.
도는 어렵지 않으니 간택(분별)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도이며, 진리의 시작이자 끝이다.
수행은 어렵지 않다.
다만 분별하지 말고 완전히 받아들이면 된다.
이제 부터 삶을 잘 지켜보라.
경계가 올 때는 '경계구나' 하고 지켜본 뒤,
이 경계를 생각으로 분별하지 말고 고스란히 받아들여라.
경계란 눈귀코혀몸뜻에 들어오는,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 생각의 대상 전부를 말한다.
그야말로 일체 모든 외부적인 것 전부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심지어 마음속에서 생각 하나가 일어나든,
어떤 사람이 말을 걸어오든, 음식을 먹을 때든,
순식간에 좋거나 싫다는 분별이 올라오고,
그 분별에 이끌리는 순간 좋은 것은 쫓고 싫은 것에서는 도망치고자 하는
아상의 속임수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대비하고 있으라.
무언가 경계가 다가오면,
분명히 '경계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그대로 받아들여라.
이 차별 없이 받아들이는 공부를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 보라.
아니 매 순간, 활짝 열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 순간 들어오는 모든 경계를 받아들여 보라.
하루, 3일, 일주일, 21일만이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놓치면 놓치는 대로
다시 시작하면서 꾸준히 마음을 관찰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시작해 보라.
삶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깨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앗, 이것봐라.'
하고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한 힘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미세한 마음의 좋거나 나쁜 생각을 발견하고,
그 분별을 너머서서 고스란히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공부!
이것이 당신이 해야 할 공부의 전부임을 잊지 말라.
이것 말고 더 할 것이 남았나?
없다.
여기에 팔만 사천의 모든 법문이 다 담겨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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