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 고쿄 라운딩 12일차
하산, 신의 거처 마체르모를 지나
외로운 설산 마을에서 한생을 유유하다
침묵에 잠긴 고쿄의 새벽을 두드린다. 서리차고 맑은 공기가 호수의 시린 안개와 어우러져 고쿄는 더없는 신비에 잠긴다. 이 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바지 단잠을 몰아 자느라 이 선경과 만나지 못한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먼동에 호수도 언덕도 봉우리도 마을도 사람들도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한다.
몇 천 년, 몇 만 년 전의 인류가 태어나기 이전 지구 행성의 모습도 이러했으리라. 오직 태곳적 비경과 침묵과 이제 막 시작된 대자연의 여리고 깊은 몇몇 생명들이 자유롭게 이 드넓은 대지와 초원과 푸른 언덕을 누벼왔을 터다. 그리고 어쩌면 그 푸른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이곳 쿰부의 자연은 그다지 큰 훼손 없이, 변화 없이 인류의 자취를 최소한으로 줄여가며 본연의 모습을 지켜왔을 것이다. 그 장대한 역사와 숨결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안에 꽃처럼 피어나고 있다.
오늘부터는 하릴없는 내리막의 연속이다. 마음은 더없이 홀가분하고 몸도 가볍다. 이른 첫 아침 식사를 먼저 시켜먹고는 지텐과 함께 여유로운 길을 나선다. 호수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싱그러운 내음을 맡으며 신새벽을 걷는다.
고쿄 호수를 지나니 또 다른 작은 호수 타보체초(Taboche Tsho, 4740m)를 만난다. 호수 옆 작은 초원 언덕에는 발아래 적당히 부서진 바윗돌들을 정성으로 쌓아올려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자연 초르텐들이 다보탑, 석가탑 못지않은 고색창연함으로 그렇게 서 있다.
새벽길을 분주히 오가는 짐꾼들의 발걸음도 가볍다. 걸음과 걸음 사이에 반짝이는 햇살이 부서진다.
호수를 넘어서면서부터 타보체초 호수로부터 흘러나온 물줄기가 개울을 이루더니 이내 거대한 계곡물로 바뀌며 길 위에 물과 바위와 바람의 악기로 연주되는 아름다운 음악을 배경으로 깔아주고 있다. 물 흐르는 소리가 생명력 넘치는 음악처럼 계속된다. 발걸음에도 선율이 여울진다. 그 계곡을 작은 다리로 건너가고, 그 아래로 계곡이 폭포가 되어 떨어지더니 이내 물소리가 클라이막스를 연주하듯 장쾌하게 증폭되고 있다.
조금 더 걸으니 점차 물소리가 멀어지고 가훼(嘉卉)의 초원 길, 푸른 언덕, 그림 같은 작은 집들 몇 채가 이취를 자아니며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다.
계곡은 이제 저 멀리 발아래 깊은 곳으로 뚝 떨어졌다. 그리고 깊은 계곡 건너편 산 중턱에는 외진 마을, 외딴 마을, 그리고 외로운 마을, 작은 세 마을이 지척의 거리에서 외로움을 서로 달래주며 의지하고 서 있다.
이 고쿄 고을 단한한 고독경 속에서 이처럼 멀지 않은 곳에 도반과도 같은 이웃 마을이 끊일듯 끊일 듯 이어지고 있다.
인간 생의 무수한 윤회 가운데, 이 올연한 산중에서 고고히 한 생을 삭거(索居)해 보는 것 또한 아름다운 것이리란 생각이 스친다. 여러 생을 깨어남에 바친 눈밝은 수행자라면 그런 한 생의 유적함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고방한 독성(獨聖)의 경지를 밝혀낼 수 있으리라.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의 발걸음과 요 며칠 동안의 성산 순례가 이미 한 생의 삶이 아닌가. 육신의 나고 죽음을 한 생이라고 이름 붙여서 그렇지 사실 삶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영원한 삶 속에서 겉모습의 작은 변화에 따라 우리는 나고 죽음이라고 이름붙이고 있을 뿐이다. 사실은 매일 매일이 하나의 생(生)이고, 매 순간이, 하나의 호흡지간이 곧 하나의 생이기도 하다. 하나의 사건도 한 생이며, 한 사람과의 관계 또한 한 생의 사건이다. 이렇게 성스러운 히말라야에서 걷고 걷고 또 걸으며, 쉬고 또 쉬면서 어쩌면 짧지만 하나의 진한 생을 유유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다시 걸음은 이어진다. 내 발걸음과 연하는 길 또한 더 이상 인간계의 그것이 아니다. 초원의 언덕 뒤로 번쩍하듯 설산이 솟아올라 있고 그 언덕 아래 이 속에서 삶을 저어가고 있는 소박한 사람들의 소담한 집 몇 채가 귓속말을 걸어오듯 발길을 멈추게 한다. 다섯 살 쯤 되어 보이는 꼬마 아이가 집에서 뛰어나와 눈 깜짝 할 사이에 옆집으로 숨어버린다. 이 모든 정겨운 풍경이 순례자들을 멈춰 세우고 카메라를 꺼내들게 만든다. 그저 셔터를 누름과 동시에 작품이 탄생한다.
길은 계속 이어진다. 세상의 모든 길은 서로 이어지며 끊어짐 없이 흐른다. 마치 이 세상 모든 것도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 하나의 길이 모든 사람을 수용하는가 하면 또 때로는 무수히 많은 길이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권을 열어 주기도 한다. 길과 길의 중첩, 인드라 망과도 같은 길과 길의 조화가 언덕 아래 삶과도 같이 펼쳐져 있다.
길 옆 바위나 초원 위에서 또 다른 길과 같은 사람이 앉아 길을 주시하며 휴식을 즐기고 있다. 길은 사람을 걷게 하고 또 쉬게도 한다.
때때로 그 길 위로 야크의 행렬이 이어진다.
길 끝나는 곳에는 어김없이 마을이 나타나고 그 끊어짐은 또 다른 삶의 터전 속에서 확장되다가 다시 하나로 모여지곤 한다.
신들의 마을을 지나 계절을 관통하다
이 투명한 길이 마체르모(Machhermo, 4470m), 이름처럼 그림 같은 마을에서 멈추어 섰다.
아! 마체르모! 두고 두고 쿰부 순례를 떠올리면 내 안에서 불쑥 마체르모의 평온한 마을이 스르륵 마음의 문을 열고 튀어나오게 될 것만 같다. 우뚝 선 설산 아래 검푸른 높다란 언덕이 있고 그 아래 옴팡진 곳으로 마체르모, 선연한 작은 마을이 계곡을 끼고 흐른다.
마을은 돌담과 돌담 사이로 몇몇 롯지가 들어 서 있고 그 돌담 안에는 때때로 야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마을 양쪽에서 숨숨한 푸른 초원의 언덕이 거친 바람을 막아주고 명주실처럼 쏟아져 내리는 다사로운 햇살과 그 볕을 받아 또랑또랑 빛나는 계곡 작은 물줄기가 허허로이 흘러간다. 그야말로 이 교박하고 황량한 고지 위에 생명이 살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쿰부의 여신은 마체르모에 선사했다.
이 아름다운 마을 마체르모가 있어서 고쿄 순례 길은 더욱 빛이 난다. 언덕을 내려가 마체르모의 품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고고한 집들과 고풍스런 돌담과 사람과 야크와 구름과 햇살과 푸른 하늘, 푸른 언덕, 오랜 신들의 정원에 맑은 물이 흐른다. 바람도 잠시 쉬어가는 이 마을에서 마음을 쉬고 발길도 잠시 쉰다.
돌담 사이를 지나 마을을 가로질러 이 마을의 근원인 맑고 깊은 계곡 앞에서 숨을 고른다. 졸졸졸 졸졸졸 쉼 없이 흐르는 물이 있어 마체르모가 더욱 풍요롭다. 그 물 위로 난 작은 다리를 건넌다.
그리고 건너편 언덕을 쉬며 가며 오른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체르모는 더욱 아련하다.
언덕 위에 오르면 룽다와 타르초가 마체르모의 일주문처럼 거센 바람의 연주에 맞춰 푸두둥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그리고 다시 길 위를 걷는다. 사람도 걷고 야크도 걷는다. 바람도 구름도 풀꽃들도 함께 이 길 위를 걷는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 유명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칼라파타르를 마다하고 이 먼 곳까지 와서 고쿄 트레킹만을 하고 돌아가는지 이 길이 모든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아름답다는 말을 쓸 수가 없다. 그 말을 써 버리고 나면 저마다의 안에서 자기 식대로 영근 아름답다는 제한된 말의 의미에 갇히게 되지 않겠나. 아, 이 아름다운 곳을 두고 아름답다고 쓸 수 없다니, 언어의 한계에 봉착하는 순간, 비로소 언어를 넘어 선 낱말 너머의 침묵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순간이다.
끊임 없이 이어지는 길 위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의 쉼이 있다. 걷다 걷다 걷다 보면 저절로 초원 위에, 흙 위에, 그리고 바위 위에 앉게 된다. 앉아서 비로소 허리 한 번 펴고, 풍경 한 번 바라보고, 하늘 한 번 보고, 그러면서 이 산 위에, 길 위에 서서 걷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문득 바라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또 다시 길을 저어 당도하는 마을이 ‘루자(Luza, 4360m)’다.
루자 또한 마체르모의 그것과 흡사한 구조와 아름다움을 온전히 부여받은 또 하나의 선물이다. 마체르모보다는 다소 작지만 오히려 그 담소한 풍경이 더없이 충만한 향기를 뿜어낸다.
루자의 여울진 개울을 건너 뒤를 돌아보니 이 마을의 진한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얕은 다리 위로 사람들의 걸음이 이어진다.
내리막길을 걷다 보니 올라올 때는 지도상의 거리감이 꽤나 멀게 느껴지더니 내려갈 때는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지도의 좌표가 금방 금방 지나간다. 사실 고쿄에서 루자까지의 거리만 해도 오르막에 있어서는 하루도 더 가야 할 거리겠지만 아직 점심때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 점심은 돌레에서 먹어도 충분하다고 지텐이 말했을 때 설마 했었는데 이 정도의 속도를 보면 그러고도 남겠다.
누군가가 고쿄든, 칼라파타르든 내려갈 때는 하루만 잡아도 된다고 했던 그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길은 산의 7부 능선 정도에서 꾸준히 이어지고 이 길이 이어지는 반대편 산의 비슷한 고도에 같은 속도로 길게 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절벽 처럼 깊고 가파른 계곡 저 아래로 머얼리 맑은 물소리가 흐르고 있다. 건너편 산중 오솔길 사이사이로 조금만 평지가 나타나더라도 어김없이 그 위태로운 자리를 보금자리 삶의 터전으로 바꾸어 놓은 인간의 삶에의 의지가 눈물겨워지는 순간이다. 제법 큰 마을도 몇몇 곳 눈에 띈다. 지도를 보니 크고 작은 그 모든 마을들이 다 이름을 가지고 있다.
루자를 마주하고 서 있는 마을이 토레(Thore, 4300m)이고, 그 옆으로 조금 더 가면 나오는 마을이 타레(Thare, 4390m), 그리고 가는 길 방향으로 보일 듯 말 듯한 마을이 코하나르(Kohanar, 4048m)다. 두 길이 두드코시(Dhudh Kosi) 계곡 강줄기를 사이로 사이좋게 마주보며 거닐고 있다. 몇몇 아름다운 마을과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품은 채로.
도대체 어떻게 이 아슬아슬하고 황량한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인지 인간의 생명력이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대자연의 품과 배려는 도대체 얼마나 드넓고도 풍유한 것인가. 그곳이 어디든 자연이 살아있는 곳에는 언제나 인간의 삶이 함께 한다. 언뜻 보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 척박해 보일지라도 자연은 아무 조건 없이 언제나 우리에게 무한정 베푼다. 인간의 욕심만 기형적으로 키우지 않는다면 우리가 자연 속에 깃드는 것을 자연은 언제나 반긴다.
사실 땅뙈기 어느 정도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자연이 알아서 책임져 줄 것이다. 단 그것은 최소한의 필요로 만족할 수 있는 무집착과 무욕의 청빈한 마음이 바탕이 될 때의 얘기다. 지금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미친 듯이 벌이고 있는 이 욕심추구와 만족을 모르는 공룡 같은 기형구조를 타파하지 않는 이상 지구의 미래는 암담하기 그지없다. 이제 더 이상 자연이 품어줄 수 없을 만큼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지 모른다. 인류가 만족하지 않는 이상, 너도나도 더 큰 성공과 부와 욕심을 버리지 않는 이상, 이 아름다운 지구별도 별다른 대안이 없다. 지구 전체 차원에서 거대한 만족과 청빈과 무욕의 정신이 물결처럼 파도치지 않는 이상 이 죽어가는 지구를 살릴 다른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오히려 지금의 현실은 지구 전체 차원의 보다 효과적인 파괴와 개발이 계속되고 있으며, 인류 전체 차원의 집착과 욕심과 만족을 모르는 퇴락한 정신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길은 라바르마(Lhabarma, 4330m) 작은 마을을 지나 돌레(Dole, 4200m)로 이어진다. 라바르마를 지날 때 발아래 사뿐사뿐 반짝이며 뛰어노는 나비 두 마리를 보았다. 잘못 보았나 싶어 다시 자세히 보니 아예 이 녀석들이 ‘우리 나비 맞아. 진짜야. 와서 자세히 보렴’ 하듯이 길 위에 가만히 앉아 있다.
그러고 보니 오전 잠깐 사이에 고도를 많이 낮춘 것이다. 날씨도 많이 포근함이 느껴진다. 나비, 나비라니! 오전 시간 잠깐 사이에 5,000고지 그 겨울 같던 곳에서 나비가 살 수 있는 이 따스한 봄으로 내려 온 것이다.
역시나 돌레에 들어서면서부터 풍경은 180도 바뀌기 시작한다. 수목한계선을 뚫고 내려온 것이다!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솟아올랐고 꽃들의 웃음이 만발하다.
나비와 벌과 숲 속의 구성원인 모든 작은 생명들이 숲과 함께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그래, 그래, 그러고 보니 작지만 내 안에서도 조금 더 편안해진 무언가를 감지한다. 숨쉬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돌레에 도착한 시간이 11시가 조금 넘어서 내친김에 포르체 탱가(Phortse tenga, 3680m)까지 가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돌레 주위의 숲은 흡사 한국의 가을을 연상케 할 만큼 낙엽들이 오색으로 물들어 떨어지고 있다. 물론 그 물듦이 단풍이라고까지 명명할 수 없을 만큼 소박하긴 해도 겨울에서 순간 가을로 이동을 해 가는 느낌은 선명하다. 폭포수도 가을처럼 시원스레 쏟아져 내리고, 온갖 꽃들도 생기를 되찾아 꽃무리를 이루며 재잘거린다. 푸르른 숲이 우거진 나무 그늘이 한낮의 땀을 식혀준다.
대자연과의 연대감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숲길, 나무숲의 터널이 이어진다.
드디어 모든 생명이 거리낌 없이 생명력을 발산하고, 온갖 존재들이 아무런 방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것이다. 어떻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높은 고도를 걸을 때의 그 황량한 아름다움과는 전혀 다른,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존재감이랄까, 조화로운 생명의 에너지가 비로소 춤을 추고 있음을 느낀다. 그저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꽃과 나비와 숲을 보면서 일종의 동질감, 연대감 같은 것을 느끼며 ‘그래 여기가 너와 내가, 우리가 살기 알맞은 곳이지’ 싶은 반가운 하나 됨을 느낀다.
‘그래, 나도 너희들처럼 너희들도 나처럼 같은 삶의 터전을 공유하는 조화로운 한 가족, 한 생명이로구나. 너희가 저 위의 고도로는 올라갈 수 없듯이 나 또한 그곳에서는 숨쉬기 힘든 버거움을 느꼈단다. 이제 이렇게 다시금 어머니의 품, 고향으로 돌아오니 나의 오랜 벗들이 이렇게 나를 반겨주는구나.’
역시 생명의 뿌리는 서로 다르지 않다. 내가 살기 힘들면 자연의 모든 생명도 살기 힘들어지고, 내가 살기 좋은 터전에 모든 생명도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느덧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미미하게나마 내 몸도 내가 살아가기 최적의 조건에 딱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느낌과 함께 꽃도 초록도 나비도 숲도 만나게 되니, 우리 모두가 진정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한 가족이었고, 둘이 아니었다는 깊은 일체감에 사로잡힌다. 아, 이 생명들과 내 생명이 하나였구나,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한생명이로구나. 홀로 여행을 떠나왔다는 고독증에서 벗어나, 이 온누리 생명의 벗과 함께 하고 있다는 대자연과의 친근감을 누려본다.
그러니 이 지구에 어느 한 작고 여린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조건으로 바뀌어 버리고 나면, 그 종이 소멸하면서 사실상 우리 인간 존재의 일부도 함께 스러져가는 것이다. 종의 소멸은 곧 있을 인간의 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공동체를 우리는 공유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라는 우리 모두의 삶의 터전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사라져가는 생물 종이 하루에도 140여 종, 일 년에는 최소한 5만 종의 생물종이 멸종되고 있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앞으로 50년 이내에 지구상 생물종의 1/4이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수많은 생물들의 서식처인 열대우림과 숲이 1분에 29ha, 즉 축구 경기장 40개에 달하는 면적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무탄트 메시지』라는 책에는 참사람 부족이 더 이상 오염되어가는 지구별에서 살 수가 없어 부족 스스로가 더 이상 후손을 만들어내지 않음으로써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생생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세계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환경오염과 생물종의 멸종, 지구온난화의 가속 등으로 인해 남성의 정자 수가 급감하고 불임이 늘어 인간 자체능력만으로 임신을 계속할 수 없어 이런 상태로 2017년까지 가면 결국 인간도 멸종의 길을 걷게 됨을 강력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지구라는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과 나아가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들 모두의 공통의 거처인 이 별을 더 이상 인간이라는 하나의 무탄트, 하나의 별스런 희귀종이 자신들만 편히 살자고 다른 생명과 존재와 지구 전체를 무참히 오염시키다 결국 폭발시켜 버리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말기를 저들 순수한 생명은 오늘도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숲이 뿜어내는 직접적인 공기를 마시며 걸으니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또한 두 눈으로, 두 귀로, 코로, 몸으로 이 숲의 빛과 소리와 냄새와 감촉을 고스란히 느끼며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가 분명히 드러난다.
산중 도시, 쿰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다
예상보다 일찍 포르체 탱가까지 도착해 느긋하게 점심 식사를 즐긴다.
포르체 탱가에서 조금 늦은 점심을 먹고 나니 이제부터 작은 산 하나를 넘어야 하는 하산 길의 유일한 오르막을 만난다. 아, 그런데 역시나 신기하다고 느낄 정도로 오르막길이 숨 가쁘지 않고 그리 힘들지 않다. 공기의 존재가 이렇게 고마운 것이었다.
산을 넘고 조금 더 내려가니 올라갈 때 만났던 익숙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한참을 내려갔더니 올라가며 보았던 바로 그 삼거리를 만난다.
이번에는 남체바자 쪽이 아닌 쿰중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오후 3시 즈음에 쿰중 마을에 도착하였다.
쿰중은 생각보다 더 큰 도시다. 남체바자와 거의 맞먹을 정도의 큰 규모의 시내가 펼쳐지는 풍경에 놀란다.
지텐이 추천해 주는 롯지를 잡아 짐을 풀어 놓은 뒤 잠시 창밖으로 펼쳐진 쿰중의 선연한 풍경을 바라본다.
잠시 쉬었다가 쿰중 마을을 한 바퀴 산책한다. 산책하다 보니 베이커리 빵집을 만난다! 빵집이라니 참 오랜만이다. 들어가서 빵을 하나 시키고 음료를 하나 주문하여 꿀맛 같은 모처럼의 군것질을 즐겨본다.
이렇게 호강을 하며 빵집에 앉아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자니 비로소 히말라야의 일정이 끝나고 있구나 하는 녹록한 여운이 밀려온다. 그간의 일정을 회상하다 가물가물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다 깜짝 놀라 일어선다. 아주 짧은 시간의 졸음이 깊은 단잠처럼이나 달콤한 휴식을 가져왔는가! 그 짧은 시간 동안의 졸음 속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설산을 걷는 꿈을 꾸다가 이제 막 깬 것처럼 그간의 걷기가 아련하게 느껴진다. 진짜 꿈을 꾼 건 아닐까! 2주 간 설산에서 보낸 날들이 꿈처럼 거짓말인 것처럼 기억 속에서 하늘거리기만 한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설산 뒤로 넘어가고 있다. 쿰중이 어둠에 잠긴다. 롯지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났더니 몸도 마음도 완전히 긴장이 풀린 것인지, 이제 다 내려왔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피로감이 몰려온다. 이럴 때 따뜻한 물에 목욕이나 하고 푹 자야겠다 싶어 모처럼 돈을 주고 따뜻한 물을 사서 온몸을 덥힌다. 며칠만의 목욕인가. 얼마나 시원하고 좋은지. 목욕을 하고 나서 여느 때보다 일찍 단잠에 빠진다.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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