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면서,
방하착 하라고 하면서
왜 서원을 세우라고 하는가 하고 질문하는 분이 계십니다.
다 놓으라면서 서원을 잡느냐고 말입니다.
집착을 놓으라면서 왜 또다시 원에 집착하느냐고 말입니다.
욕심과 서원은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우리들 중생들은 욕심과 집착 때문에
신구의로 온갖 업을 짓게 되며 그 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끊임없는 윤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보살은 서원을 세움으로써
스스로 선택하여 중생계에 뛰어 든다고 합니다.
중생은 업생(業生)이라 하며,
보살은 원생(願生)이라 합니다.
중생은 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태어나지만,
보살은 스스로 원을 세워
불계(佛界)를 잠시 등지고 이땅 사바예토에 선택하여 오셨습니다.
중생이 업을 짓는 이유는
욕심과 집착이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만들어 놓고 ‘내 것’으로 만들고자
욕심과 집착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나’의 틀을 이미 벗은 분들이십니다.
내가 없음을 깨치셨기에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언제라도 부처님이 되실 수 있는 분들이십니다.
그러나 보살은 부처님이 되지 않고
중생계에 남아 자리이타를 실천하고 계십니다.
보살과 부처가 동일하지 않은 이유는
서원의 유무에 그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일체의 모든 욕망과 집착을 다 끊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그 어떤 형태의 찌꺼기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저 텅 비어 도리어 꽉 찬 법계 그대로가 됩니다.
모양도 형태도 없는 공(空)이 됩니다.
그러나 보살은 아직 중생계에 머물러 계십니다.
중생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아직 욕심과 집착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살을 부처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아직 부처가 되기에는 욕심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보살이 가진 욕심은
우리 중생들이 가진 욕심과는 다른 욕심입니다.
그 욕심은 애써 표현하자면 ‘승화된 욕심’이며,
‘이타적인 욕심’으로 서원을 의미합니다.
서원을 일러 ‘승화된 욕심’이라고 말합니다.
보살은 언제라도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여 원을 세움으로써
보살의 자리에 남아 자리이타를 실천하십니다.
부처님이라면 일체가 딱 끊어진 자리입니다.
원이고 업이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텅 비어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그런 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나와
원을 세움으로써 중생과 부처의 사이에 있기를 자청합니다.
보살은 원이 있기 때문에 아직 부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승화된 욕심''이 아직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업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원이라는 데서
중생과 다른 것이지요.
그렇듯 보살의 서원과 중생의 욕심은
지향하는 바가 다릅니다.
보살의 서원, 수행자의 승화된 욕심은
깨닫고자 하는 욕심이기에
일체를 놓으려는, 일체를 비우려는 욕심이지만,
중생들의 욕심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유하려 하고 가지려 하고
채우려고 하는 욕심인 것입니다.
수행자의 서원은
그 근본이 ‘비움’이기에 업을 녹이는 수행이지만,
중생의 욕심은
그 근본이 ‘채움’이기에 업을 쌓는 원동력이 됩니다.
쉽게 말해 수행자의 서원, 즉 승화된 욕심이란
‘욕심을 버리려는 욕심’ ‘비우려는 욕심’이란 말입니다.
아상이 담긴 욕심은, 즉 나 잘 되자고 하는 욕심은
업력만을 증장시켜 끊임없는 윤회만을 가져오지만,
아상이 녹아 없어진 서원,
일체 만 중생이 모두 함께 잘 되자고 하는 서원은
업력을 녹이며 조금씩 윤회의 사슬을 끊게 만듭니다.
중생은 업을 자꾸 쌓아가지만,
보살은 원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수행자는
첫째가 업을 녹이고 비우며 사는 사람이고,
둘째가 원을 크게 세우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비우면서 채우는 도리입니다.
놓으면서 크게 잡는 도리입니다.
수행자는 업력으로 태어났지만(업생)
새롭게 원을 세움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사람(원생)입니다.
그래서 출가한 수행자는 세상을 다시 태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란 대원을 품고
원생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란 말입니다.
모름지기 수행자라고 한다면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생명처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원력으로써 다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되고자 초발심을 낸 사람이라면
업을 다스리고 원을 세우는데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리이타의 원력이 없으면 수행자가 아닙니다.
업력만 가지고 이 땅에 와서
욕심과 집착만을 키워 더 큰 업력만을 쌓고 가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수행자라면 나날이 원력으로 꽉 차야 할 것입니다.
순간 순간 원력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업이 올라오는 순간을 관하여 방하착 하고,
그 위에 원력의 밝은 씨앗을 심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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