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 지음 / 김영사

인생이 자꾸만 꼬여서 괴롭고 답답한가? 지금이 인생에서 최악의 순간인가? 괴로운 일들이 몇가지씩 겹쳐서 혼란스러운가? 잘되었다. 지금이 바로 삶의 경이로운 반전이 시작될 시점이다. 내 생에 가장 큰 공부가 시작될 것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의깊게 삶을 지켜보라.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라. 느긋하게 삶의 혼란을 즐기라. 아수라장이나 난장판같이 튀어나오는 삶의 모든 위험들을 한발짝 떨어져 가만히 지켜보라. 다가오는 삶을 전체적으로 느끼고 수용하라. 그리고 모든 삶에 감사하라.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삶이란 얼마나 생기있고 아름다운가. 삶의 모퉁이에서 역경과 위험, 좌절을 만나게 된다면 호흡을 가다듬고 반짝이는 눈으로 지켜보라. 혼란스러운 삶도 깊이 바라보면 눈부시게 빛난다.

‘목탁소리’ 법상스님의 인생지침서

괴로움…삶의 경이로운 반전 ‘암시’

고성 운학사에서 군법사로 활동하고 인터넷 생활수행도량 ‘목탁소리’(moktaksori.org)의 지도법사로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는 법상스님〈사진〉의 법문이다. 군더더기 없고 명쾌하다. 자본경쟁과 인간갈등에 휘둘려 상처받고 배신당하면서 좌절하는 현대인에게 뿌려주는 청량한 감로수다. 책 <날마다 해피엔딩>은 책자 한 장 한 장 넘길때마다 ‘해피’한 ‘엔딩’이 된다. 술술 읽히면서 마음속 때를 기분좋게 씻어준다.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지혜로운 중도의 길은, 회피하거나 투쟁하는 양 극단을 떠나,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止) 가만히 지켜보는 것(觀)이다. 아픔이 오면 아픔이 오도록 그저 내버려 두라. 아픔이 내 존재 위를 스치고 지나가도록 그저 놔두고 어떻게 왔다가 스쳐지나가는지 묵연히 바라보기만 하라.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어놓고나면 아픔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아니면 싸워 이기거나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지 않고 내 존재의 일부분으로, 내 삶과 하나로 가만히 포개어 놓고 나면 더 이상 아픔과 싸우거나 도망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아픔과 괴로움, 좌절을 다루는 중도적인 수행방법이다.”

중도적 삶의 장애물 역시 아상(我相)이다. “자기 좋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이 아상이다. 좋아하는 것만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상이다. 아상은 언제나 자기 기준을 정해놓고 좋아하는 것은 삼키고, 싫어하는 것은 뱉어버릴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아상에 놀아난다. 백전백패, 아상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만다. 아상은 언제나 나를 위하는 척, 돕는 척하면서 나타나 나를 집어삼키는 뛰어난 재주꾼이다.”

그러면 어떻게 아상을 버리나. “‘나’ 위주의 삶을 ‘진리’에 내맡기는 삶으로 완전히 뒤바꾸라. 아상의 계획에 동조하는 대신 우주 법계의 근원적인 계획에 순응하라. 생각이라는 아상이 끊임없이 올라와 당신을 아상 아래 무릎 꿇도록 지속적으로 방해하겠지만 그 방해 작전에 속지 않을 수 있다. 단순하게 분별없이 삶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가치관’이란 말도 자주 쓴다. 법상스님은 “부처님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분이 아니라, 모든 가치관을 버리고 세상을 살아간 분”이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모든 가치관에 대한 애착이나 증오, 좋고 싫은 판단을 버리고 다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인연따라 선택하여 쓸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한 자다. 특정한 가치관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가치관도 거부감도 편견도 치우침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여 쓴 뒤에 버려야 할 때가 오면 미련없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참된 중도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좋은 가치관은 무엇인가. 어렵지 않다. 선을 행하라, 보시를 행하라, 집착하지 말라, 소박하게 살라, 내 삶에 나타나는 모든 존재와 행위를 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라, 기도하고 명상하라….

행복한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서른세가지 법칙을 엮은 책은 받아들임(攝受) 내려놓음(放下着) 끌어당김(吸引) 알아차림(觀照) 등으로 나눠 삶의 문제를 해소하는 실천체계를 제시했다. 법상스님의 마지막 메시지. “모든 문제와 근심, 걱정들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가짜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들은 다만 내가 바라볼 것들이지 나 자신의 실체가 아니다!” 

[불교신문 2723호/ 6월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