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은 내가 아니다 – 법구경 41게송 강의
41.
머지 않아 이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야 만다.
그 때 이 몸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버려져 뒹굴 것이다.
한 스님이 좌선 수행 중에 몸에 부스럼이 생기더니 온 몸에 퍼졌고, 종기가 피고름이 되어 고약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위에서 스님들이 간호해 주고, 대소변도 가려주며 도움을 주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병이 점점 더 심해져, 대소변도 못 가리고, 움직이지도 못하자, 스님들의 간호도 줄어들더니 이내 헛간 땅바닥에 버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이를 보시고 직접 찾아가 물을 데워 목욕 시키시고, 옷을 직접 빨아 입히신 뒤 다음과 같이 설하시며 위의 게송을 설하셨다.
“몸이 이렇게 아프고 힘겹지만 이 몸은 결국 누구나 흙으로 돌아간다. 몸에 집착할 것 없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아픈 몸에 대한 집착을 여읜 이 비구는 결국 법문 끝에 아라한과를 성취하였지만 곧 열반에 들게 된다. 이에 제자들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한 뒤에 열반에 들었는지’를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전생의 죄업 때문이라고 말하시며 전생담 들려주신다. 이 비구는 가섭불 당시 새를 잡아 왕실에 바치는 사람이었는데, 왕실을 속여 더 많은 새를 잡아 내다 팔아 이익을 챙기곤 했다. 그런데 많은 새를 잡다보니 보관이 문제가 되어 새의 날개쭉지를 부러뜨리고 다리를 꺾어 도망치지 못하게 해 놓고, 죽지만 않게 한 뒤 때마다 내다 팔거나 잡아먹곤 했는데 바로 이러한 죄업으로 인해 이번 생에 몸에 병이 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하루는 탁발을 온 아라한 수행자를 보고 공양하면서 감동을 받으며 마음이 평화로와지는 것을 보고 ‘저 또한 스님께서 성취하신 것 같은 위없는 진리를 성취하도록 발원합니다’ 라고 발원하였기에 비록 인과응보에 따라 병을 얻기는 했지만 지극한 발원으로 인해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된 것이다.
몸이란 결국 누구나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그 때 이 몸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버려져 뒹굴게 된다. 결국 이 몸은 내가 아니다. 항상하는 것이 아니며,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잠시 이번 생에 인연 따라 내가 돌보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은 이 몸이 ‘나’라고 하는 아상, 아집 때문에 생겨난다.
병으로 인해 괴로움을 느낄지라도 그 병든 몸이 내가 아님을 자각하게 된다면 병으로 인해 통증은 느낄지언정 마음까지 아프거나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몸이 내가 아니란 자각이 있다면 몸에 딱 붙어서 몸에 병 난 것을 가지고, 나에게 병이 났다고 착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병은 ‘몸’에 난 것이나 ‘나’에게 일어난 것은 아니다. 몸은 잠시 잠깐 내가 인연 따라 그리 길지도 않은 이 생에 관리해 주는 것일 뿐이지, 몸 자체가 나인 것은 아니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에 대해 공포스러워하는 것은 다 ‘이 몸’이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몸이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내가 죽는 것이다. 그러나 몸은 내가 아니다. 몸이 내가 아니라는 자각이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삶은 영원하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매 순간순간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고, 지혜롭고도 자비롭게 살아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지, 죽음이 올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몸이 내가 아니라면 죽음은 그저 껍데기를 갈아입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유효기간이 다 된 늙고 병든 몸을 버리고 생생하고 새로운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하고도 완전한 몸을 받는 것이 어찌 괴로운 일인가. 그것은 마치 여행을 떠나는 것 처럼 설레고도 즐거운 삶의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이 직장을 다니다가 또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정도라고 할까.
다만 죽음이 두려운 사람은 삶을 올바로 살지 못한 사람이다. 올바른 선업을 짓지 못하고, 사악한 일들을 일삼으며, 화와 욕심으로 한 생을 점철한 사람에게 죽음은 두렵다. 다음에 갈아입을 육신의 옷이 무엇이 될지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은 결국,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삶이 두려운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나 병고가 아니다. 매 순간순간의 삶이다. 매 순간의 삶을 얼마만큼 깨어있게 살 것인가, 매 순간의 삶에서 얼마만큼 자비를 실천할 것인가 이 지혜와 자비의 정신이야말로 삶을 매 순간 온전히 살아있게 만든다.
이 비구는 병과 죽음이라는 괴로움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부처님의 법문을 통해 병이나 죽음이 괴로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병이 내가 아님을 알았고, 이 몸이 내가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일체의 모든 욕망과 집착과 아상을 완전히 놓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병고에 찌든 육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아픈 몸을 통찰하고, 삶의 이치를 철견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되었다.
어떤 이는 묻는다. 아라한과를 증득했는데 어떻게 바로 죽을 수가 있는가 하고. 아라한과를 증득하면 그 자리에서 불사의 신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깨달음을 얻으면 영원히 죽지도 않으며,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능력 면에서 본다면. 그러나 깨달음을 얻고 나면 그럴 필요가 없다. 이치를 거스를 필요가 없고,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을 거스를 이유가 없어진다. 그저 편안히 쉰다. 우주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그 모든 법계의 이치에 온전히 내맡기고 완전히 휴식한다.
인간들은 병이 오면 기도를 한다. 빨리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아라한은 빨리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할 이유가 없다. 더 오래 살게 해 달라고 조를 필요가 없다. 아라한은 죽음도 병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허용하고 수용한다. 그러한 대자연의 이치, 인과응보의 이치를 거스르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
아라한과를 증득하면 증득한 그 생에 남은 모든 업을 청산하고 말끔히 정리하고 간다고 한다. 이 비구는 아라한과를 증득하였지만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업이 있음을 알았고, 물론 어쩌면 그것을 거슬러 더 오래 살아 남아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업의 과보를 받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가장 지혜로운 흐름을 타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생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 죄업에 대한 과보를 그 자리에서 받고 열반에 든 것이다.
지혜로운 삶은 이처럼 걸림이 없다. 그 어떤 흐름도 거스르지 않는다. 이 몸이 나라는 생각이 있으면 이 몸이 죽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겠지만, 이 몸이 내가 아니란 온전한 자각이 있는 자에게 죽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몸도 내가 아니며, 병도 내가 아니고, 죽는다고 한들 그것이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수행자는 이처럼 몸을 나라고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병, 죽음, 늙음 등 그 어떤 자연 현상에 대해 괴롭다고 느끼지 않는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중생에게는 고통이지만 수행자에게는 고통이 아니다. 병들고 늙고 죽는다는 사실 앞에 우리가 왜 고통 받아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가. 이 몸은 내가 아니라는 이 진실 앞에 두려움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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