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도 깨닫는다 - 법구경 25게송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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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과 마음공부

바보도 깨닫는다 - 법구경 25게송

목탁 소리 2009. 9. 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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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음을 잘 절제하고 게으름 없이 노력하며
주의 깊은 마음 관찰 수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는 지혜로운 이는
홍수로도 휩쓸리지 않는 섬을 쌓은 것과 같다.



마음을 잘 절제하고 게으름 없이 노력하라. 마음에서는 온갖 것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온갖 생각들, 온갖 욕망과 성냄과 과거의 잔재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이 올라오는 생각, 느낌, 욕구들을 잘 절제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렇게 올라오는 생각들에 나 자신을 빼앗기고 휘둘려 그 생각과 감정, 욕망과 화에 나의 주인자리를 내 주고 말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잘 절제할 수 있는가? 주의 깊은 마음 관찰을 통해 그 마음을 잘 절제할 수 있다. 게으름 없이 주의 깊은 마음 관찰 수행을 지속시키며 노력해 갈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을 수 있다.

주의 깊은 마음 관찰을 통해 마음을 잘 절제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는 지혜로운 이는 홍수로도 휩쓸리지 않는 섬을 쌓은 것과 같다. 여기서 홍수란 네 가지 거센 폭류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를 생사윤회의 바다로 거칠게 몰아 넣는 거센 흐름을 말한다. 즉 윤회 바다의 거친 흐름과 폭류, 홍수 속에서 헤매다가 안전한 의지처인 섬을 발견하는 것과 같이 지혜로운 이는 마음 관찰 수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 안전한 섬에 이른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홍수라고 표현한 네 가지 거센 흐름인 사폭류(四暴流)는 감각적 쾌락이라는 욕망의 거센 흐름(欲流), 그릇된 믿음과 견해라는 거센 흐름(見流), 자아의 집착에서 오는 존재의 거센 흐름(有流),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오는 거센 흐름(無明流)을 말한다. 이 네 가지 거센 흐름 때문에 우리는 생사 윤회라는 바다로 거센 흐름의 폭류에 휩쓸려 떠내려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욕망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거센 폭류가 되어 우리를 홍수가 휩쓸고 가듯 순간 생사윤회의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릇된 믿음과 삿된 견해 또한 우리를 생사 윤회의 폭류에 휩쓸리게 하며, 아상의 집착에서 오는 아집과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 역시 거센 흐름이 되어 우리를 생사 윤회의 고해바다에 빠지게 한다.

이렇듯 거센 격류에 휩쓸려 생사 윤회의 고통 바다로 떠내려가 바닥을 발견하지 못하고 헤매다가 섬을 발견한다면 얼마나 안전하고 평안할 것인가. 바로 그러한 안전한 섬을 쌓는 일이 바로 주의 깊게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이다. 생사 윤회의 모든 고통 바다에서 격류에 휩쓸리는 것을 막아주고, 안전한 섬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마음관찰 수행이요, 이것이야말로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이고, 깨달음에 이르는 오롯한 길인 것이다.  


라자가하에 부유한 은행가의 딸이 성숙해지자 부모는 그녀를 너무 심하게 감시하며 칠층 꼭대기 방에 가두었다. 인도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인의 순결과 순종을 집착적으로 지키려는 습관이 있다보니 이런 일들이 다반사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남녀간의 사랑이란 보호하고 떨어뜨리려 애쓰면 애쓸수록 더 불타오른다는 것 또한 이치이고 보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그 때도 유효했던가 보다.

그런 보호와 감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인과 사랑을 나누고 도망쳤다. 도망쳐서 살다가 아이를 낳을 때가 되어 아내가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정으로 가려다가 길 위에서 아이를 낳아 이름을 빤타카(길)라고 지었다. 이 첫째 아이가 마하빤타카이고 똑같은 상황이 벌어져 둘째도 길 위에서 낳았으니 둘째 이름이 우리가 주리반특으로 잘 알고 있는 쭐라빤타카였다.

이후에 친정 부모는 마하빤타카와 쭐라빤타카를 키우게 되었고, 할아버지를 따라 부처님께 가서 자주 법문을 듣곤 했다. 그러던 중 먼저 마하빤타카가 출가하여 무색계 선정에까지 이르른 뒤에 동생도 출가를 시켜 이런 행복을 경험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동생을 출가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쭐라빤타카는 머리가 둔해 4개월 동안 단 한 구절의 가르침도 외우지 못했다. 쭐라빤타카는 전생에 가섭불 시절에 둔한 스님을 보고 바보라고 놀린 과보로 이번 생에 아둔한 인물로 태어난 것이다.

어느 날 부처님과 스님들의 주치의이자 유명한 의사였던 지바카가 스님들을 공양에 초청하자, 공양 배정의 소임을 맡고 있던 마하빤타카가 쭐라빤타카는 아직 공양을 받을 만한 수행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공양초청에서 제외했다. 이에 서운함을 느낀 동생 쭐라빤타카는 환속을 결심하고 절을 떠나다가 이러한 정황을 아신 부처님께서 쭐라빤타카에게 그의 근기에 맞는 특별한 수행법을 알려주게 된다.

그것은 ‘라조 하라낭’으로 이는 ‘때를 닦다’ ‘더러운 것을 닦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인데, 라조 하라낭을 염하며 마루를 닦도록 수행의 재료를 주셨다. 이에 고무된 쭐라빤타카는 마루의 때를 닦으며 수건이 때에 물드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은 변화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광명을 놓아 쭐라빤타카에게 ‘수건이 때로 물드는 것처럼 사람 마음도 때로 물든다. 탐욕의 때, 성냄의 때, 무지의 때가 그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를 보지 못한다. 바로 그러한 때를 완전히 제거하면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라는 법을 설해 주시고, 이에 더욱 용기를 얻은 쭐라빤타카는 더욱 마음을 모아 관찰함으로써 머지않아 아라한을 성취하였을 뿐 아니라 둔함이 사라지고 지혜가 증장되는 공덕을 얻었다.

쭐라빤타카는 과거생 왕이었을 때도 수건에 얽힌 인연 이야기가 있었다. 왕이었을 때 성을 순회하면서 이마에 땀이 흘렀고, 깨끗한 수건으로 닦자 수건이 더러워지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변해가는 것이구나’ 하는 무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졌던 것이다. 수건이 때로 물들고 변해가는 그 단순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마음을 모은 것이 무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왔고, 그러한 이해가 선근의 공부 인연으로 쌓여 이번 생 쭐라빤타카는 라조하라낭을 통해 아라한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거 전생의 작고 사소한 깨달음의 선근까지도 환히 알고 보시는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기에,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모든 이들의 영겁 전생까지를 살펴본 뒤 저마다의 근기에 맞는 수행의 재료를 내려 주시는 것이다.

이처럼 수행이란 것, 해탈이란 것은 크고 대단하며 웅장한 어떤 것 속에서만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다 보면 아주 작고 사소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부처님은 수행의 재료로 주시고, 그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일화를 많이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촛불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거나, 산불이 나는 것을 보고 거기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거나, 흐르는 물을 관하거나,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생각을 관하거나, 느낌을 관하거나, 욕망을 관하는 등의 다양한 수행 재료로써 저마다의 근기와 그릇에 맞는 수행을 닦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거기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했을 때 그 대상은 결코 작지 않다. 우주법계의 진리가 수미산 보다 더 큰 우주 속에도 담겨 있듯이 티끌보다도 작은 데에도 똑같은 무게의 진리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을 보면 크고 웅장하며, 감각을 자극하는 대단한 것들에만 관심이 있고, 무엇을 하더라도 세계 최대, 동양 최대, 최고, 최초 같은 것만을 관심 있어 하지만 사실은 봄에 나지막이 피어나는 소박하고 작은 꽃 한 송이 속에서도 우주의 진리는 연주되고 있는 것이며, 집안을 수건으로 닦거나, 비질을 하거나, 설거지를 하는 그 사소한 일과 속에도 마음만 모아 집중하고 관찰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우주의 진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쭐라빤타카가 아라한을 성취한 것을 아시고는 부처님께서 지바카의 공양에 초청하여 많은 대중 앞에서 부처님을 대신해 법을 설하도록 하셨다. 후에 비구들이 쭐라빤타카에 대한 이야기로 법담을 나누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 위의 게송을 읊으셨다.

아무리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지식이 없고 공부를 못하며 명석하지 못한 이라 할지라도, 다만 마음을 절제하고 게으르지 않은 노력으로 주의 깊게 대상을 관찰하는 수행자는 그 어떤 홍수로도 휩쓸리지 않는 섬을 쌓은 것과 같이 안전하고 평안한 곳에 결국에는 이르게 된다. 아무리 모자라고 어리석다고 할지라도 자기 안에는 자기 스스로 의지처로 삼을 만한 지혜의 소식이 금강과도 같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찾는 것은 지식이나 똑똑한 것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게으름 없는 마음 집중의 힘으로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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