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청평사 오르는 길에...]
비가 옵니다. 방안 널찍한 창 문을 활짝 열고 빗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습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기가 참 힘든데 오늘은 아침부터 우울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거친 파도처럼 밀려오다 밀려가다 그럽니 다.
나무들이며 들풀, 야생화들도 오늘은 한참 정신이 없어 보입니다. 저 녀석들 지금이 야 한참 정신 없다 보니 하늘에서 내리는 거친 비를 원 망할 지 모르겠지만 이런 역경이 자신을 더욱 강인하 게 만들어 준다는 걸 아마도 지금은 모를 겁니다. 비 가 그치고 햇살 쨍 하고 내려 쬘 때 그 때 조금씩 느낄 수 있겠지요.
이른 아침 저 숲 위로, 나 무 위로, 들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차 한 잔 생각도 나고 감성이 더 여리고 새록해 집니다.
저렇게 떨어지는 비를 그대 로 맞고 있는 나무들은, 저 숲의 생명들은 참 의연도 합니다.
절 주위는 얕은 산이라 온 갖 나무들이며 들풀, 꽃들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잠시 도 쉬지 않고 너가 지면 또 내가 피어나고 핀 꽃이 지 면 또 다른 꽃이 피고 그럽니다.
풀들도 처음 여린 잎의 생김새 와 한참 물이 올라 피어오른 모습은 전혀 달라요. 처음 엔 작은 풀이거니 했는데 비 한 번 오고 시간 조금 지 나고 나면 꼭 나무 처럼 쑥쑥 자라 나를 당황케 하는 녀석들도 있고,
처음엔 예쁘고 귀엽던 것들이 얼마나 생명력이 강하고 번식력이 강한지 무서울 정도 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기도 합니다.
채소밭에 너무 큰 풀들은 뽑아 주는데 한참 풀들을 뽑아주다 보면 뿌리가 얼마나 길고 굵 은 지 세상 위로 올라온 것의 몇 배 이상은 됨직한 뿌리를 보 면 섬짓 이네들의 생명력에 놀라고 두려움 마저 일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뽑아 낸다는 것이 어떨 때는 참 미안하기도 하고 저 녀석들도 다 이유가 있 어 피어오르는 것이고, 저렇게 당당한 뿌리를 만들었을 것인 데 하고 생각하면 풀 뽑는 일도 잠시 머뭇거리게 됩니 다.
그래서 될 수 있다면 풀 도 그대로 함께 자랄 수 있도록 내 버려 둡니다. 너무 커 서 채소들 키를 웃자랄 때가 되면 그런 녀석들만 뽑아서 옆에 놓아둘 뿐 될 수 있다면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저 채소들에게도 살아남기 위한 경쟁력도 될 것이 고, 그 경쟁력이 더욱 채소들을 생명력 있게 가꿀 것이 며, 또한 함께 자라주는 따뜻한 이웃이고 도반이 될 수 도 안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기도 합니 다.
이렇게 여러 가지 풀들이 함 께 자라고 이웃 풀들과 함께 경쟁도 하고 또 함께 살아가려고 서로 서로 도와 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자라난 채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실하고 열매가 적을 지 몰라도 그 생명력은 더욱 강인하며 실제로 병해충으로부터의 예방 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채소도 생명인데 우리 사람 들하고 사는 것이 다를 리야 있겠어요? 사람도 마찬가 지 아닙니까. 늘상 온실 속에서 자란 채소들 처럼 온갖 시련과 힘 겨운 경계를 당해 보지 못하고 늘 행복하게만, 늘 풍족하게 만, 늘 보호 속에서만 자란다면 그 사람의 내적인 생 명력은 빛을 잃게 되고 맙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실패 도 맛보면서 주춤주춤 거리다가 그래도 딱 버티며 일어서기 를 몇 번이고 반복할 수록 우리들의 내적인 삶의 빛 은 더 생기를 띨 수 있는 법이지요.
본래부터 아무리 큰 시련이며 역경이라도 꼭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만큼만 오고 또 꼭 필 요한 바로 그 때 오지 내가 이겨내지 못할 일이 도저 히 이겨내지 못할 때 찾아오는 법은 없다고 그럽니 다.
채소도 키워 보니까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처음에 자랄 때 오이에 진딧물이 자꾸 붙길래 손으로 떼어주고 떼어주고 하다가 어디서 주워 들은 얘기를 듣 고 담뱃재 우린 물도 줘 보고 그래도 그래도 끊임없이 끊 임없이 진딘물이 생기데요.
그래서 그래 너도 먹고 살아야 지 싶어 그냥 내 버려 두었지요.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진딧 물도 양심은 있는지 전체 오이를 다 괴롭히는 건 아니고 그 중에 부실한 몇몇 오이에만 가서 붙어 있으니 그래 도 얼마나 고맙나 싶어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었지 요.
우리 사람들이야 어디 그럽니 까. 될 수 있으면 좋은 것, 많은 것 더 가지려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최대한 많은 양을 모아 축적하려고 안달이 지 양심이라는 것이 우리들 욕심 앞에 맥을 못 추지 않아요. 진딧물에게도 배울 점이 있는겁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보니까 진딧물이 많이 붙은 오이에만 개미들이 모여요. 아직도 긴가 민가 하지만 아마도 개미들이 진딧물을 잡아 먹는 가 봅니다. 그러더니 며칠 전 부터는 무당벌레들도 몇몇마리 나와 서는 진딧물 사냥에 나서 주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내가 할 일 을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잘 해 주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다가 진딧물 싫다고 농약 막 쳤어 봐요. 그 농약에 개미들 도 무당벌레도 다 죽었을 거 아닙니까.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지 요. 시련과 역경이, 힘겨운 일이 생기면 그거 이겨내려고 발버둥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그냥 주저 않아 버 리지만, 그 상황이 아무리 최악이다 싶더라도 대자연 부처 님의 숨결에 일체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 수 있다면 분명 대자연 우주 법계에서는 해답을 내려 줄 것입니 다.
아무리 관찰해 보아도 자연 은 참으로 신비롭고 또 정확하다는 걸 느낍니다. 정확하 게 그 일이 바로 그 때 정확하게 일어나고 있어요. 필요 한 일이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생겨나는 겁니 다.
우리들 인간들 머리로 그 위대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려고만 하지 않고, 자연 과 함께 그 이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다면 저 숲 속의 생기어린 생명력과 포근함을 우리 사람 들 내면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연의 이치에 모든 것을 내맡 기고 산다는 것은 흡사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로 알 고 산다는 말이고, 자성불 주인공 자리에 일체 모든 것 을 맡기고 산다는 말입니다. 대자연 우주가 그대로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화신이기 때문이지요.
이 대자연의 숨결에 일체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면, 그래서 내 일로 잡 고 살지 말고 대자연 법신 부처님의 일로 돌려 놓고 살 면 우리 사람들에게서도 저 대자연의, 저 청청한 숲의 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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