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여행의 최절정, 봉화 청량사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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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풍여행의 최절정, 봉화 청량사

목탁 소리 2009. 10. 6. 10:20




가을이 오는 소리가

매미소리를 통해,

또 창밖의 밤 떨어지는 소리를 통해

들려오고 있는 요즘입니다.

 

밤에 자다가

조립식 지붕 위로

뚝 뚝 뚜두둑 하면서

밤 떨어지는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려오는지

깜짝 놀라 깨어날 정도입니다.

 

봄에는 대흥사, 백련사, 무위사를

순례하고 왔었는데요,

이번 가을 순례에는 어느 도량을 갈까 고민중입니다.

 

백양사, 내장사 등을 다녀올까도 싶고,

혹시 계획이 잡히면

목탁소리에도 함께 공지를 드릴테니

시간 되시는 분들은

가을 산사순례를 함께 떠나 보시지요.

 

혹시 가을 단풍 구경 가실 분들이 계시다면

경북 봉화의 청량사를 추천 해 드립니다.

청량사는

그야말로 제가 다녀본 곳 중에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손에 꼽는 도량입니다.

 

이번 가을

청량사로 떠나보시라고,

예전에 다녀 온

가을 청량사 사진과 이야기를 올려드립니다.

 

......

가을...
온 산이 불타고
온 자연이 불타는 계절.

내가 사는 도량도
온통 형형색색의 단풍빛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똑같은 도량이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왜 나는
이렇게 변화하는 자연의 생명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 경이로운 모습을 보지 못하며 자랐을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저마다 다르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있지만
우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보았을 때
가장 대자연 본연의 모습을
우리들 가슴 속에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그건 아마도
마음을 얼마나 비우느냐에 달려있을 것 갔다.

마음이 호젓하게 비어있으면
자연은 바로 그 텅 빈 마음 속으로
빨려들듯 무한하게 들어오지만,
마음이 욕심과 바램, 탐심과 진심으로
잔뜩 꽉 차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을 한 움큼도 담을 마음의 여백이 없다.



지금 이 순간
죽을 일이 생겼다면
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면
왜 그럴 수 없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라.
날 떠나지 못하게 발목 잡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욕망과 집착의 실체일 수 있다.

마음공부는
내가 바라는데로
좋은 일만 있도록 바라는 기도가 아니다.
좋은 일만 있고,
괴로움은 없으며,
날마다 행복만 가득한 것이 수행이 아니다.

좋고 나쁜 것도
즐겁고 괴로운 것도
그 양 극단의 모든 것도 다 놓아버려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
드넓은 하늘의 마음이 바로 수행자의 마음이 아닐까.

그러니 오래 살겠다는 마음도 욕심의 일종이다.
수행 열심히 하면 오래 살겠지
하는 그 마음도 욕심이지 수행심이 아니다.

심지어는 삶과 죽음까지도
턱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 죽는다면?' 하는 좀 극단적인 질문으로
욕심의 실체를 볼 수 있다는 말을 던진 것이다.



그렇게
일체 모든 욕심과 아집, 번뇌와 탐진치를
모두 비울 수 있다면
더이상 깨닫겠다고 애쓸 것도 없고,
지금 이 순간 더없는 온전한 평화가 있다.

평화라고 이름붙일 것도 없는
그냥 텅 빈 그 무엇이
무심(無心) 속에서 피어오른다.

그랬을 때
그렇게 마음을 비웠을 때
대자연의 아름다움도 우리 가슴속에서 꽃필 수 있다.

대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경이롭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우리 곁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으니까.
10년 전에도 그랬고 10년 후에도 그럴 것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그랬고,
초등학생 때나 중고등학교 때, 대학생 때,
막 사회에 발 디뎠을 때도 그랬고,
지금 이 순간도 그러하며,
내가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언제나처럼 빛나는 아름다움과
숨이 턱 막힐 만큼 경이로운 생명의 숨결을 우리에게 선사할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선물이다.
마음을 비운 자 만이 볼 수 있는 선물.
마음이 꽉 찬 사람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그 선물을 얻을 수 없다.
곁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가을이 오면
그러한 선물은 더없는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가을은 봄에 긴긴 겨우내 안으로 거둬들인 생명의 빛을
활짝 꽃피우는 봄꽃들의 생명력에 비할 수 없는
가을만의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어쩌면 봄에 활짝 피어나는
생명 시작의 아름다움 보다도
생명이 활짝 꽃피웠다가 그 빛을 다하면서
막바지 빛을 수놓는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이
더욱 더 내 가슴을 셀레게 한다.

그것은 마치
이른 아침에 깨어있는
부지런한 사람만이 바라볼 수 있는
새벽녘의 떠오르는 햇살도 좋지만,
오히려 하루를 마감하면서
뉘엿뉘엿 이 세상을 노오랗고 붉게 비추는
저녁 노을의 아름다움이 더없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과도 같다.



저녘 노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난 작은 오두막에서
대자연과 벗하며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소망이 있다.
그런데 그 오두막은
내 손으로 흙과 나무를 인연에 맞게 추슬러
만들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언제인고 하니
바로 해질녁 노을을 바라보면서다.
오두막이 되었든 작은 법당이 되었든
그 보금자리는 하루일과를 마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마루에 걸터 앉아
해지는 노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지을 것이다.

시야가 툭 터진 산 중턱 즈음에
해지는 노을을 훤히 바라볼 수 있는 방향으로
큰 창을 하나 내고
해지는 저녁이면 노곤한 몸을 이끌고
이 대자연이 그려내는 지상 최고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며
내 마음 뜨락에도 노을을 하나 그릴 것이다.

매일 매일이 같은 나날일지라도
나의 하루 하루는 날마다 새로울 것이다.
똑같은 하루란 도저히 없는거니까.
매일 매일 똑같은 곳에서 노을을 바라보더라도
난 늘 새로운 그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내 마음도 자연을 닮은 화가가 되겠지...



자연에 중독되면
사람이 참 평화로워진다.

어젯밤에도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저녁 노을에 비친 가을 단풍의 풍경에
그 두 가지 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이 연출해 내는
가슴벅찬 연주를 들었다.

우리 절에서 산길을 따라 난 길을
한 5분쯤 걸으면
그야말로 가슴이 후련할 만큼 툭 트인 풍경을 볼 수 있다.
절에서는 아침 뜨는 해는 볼 수 있어도
저녁 지는 해는 볼 수 없는데
그 아쉬움을 바로 그 장소에서 해소할 수 있다.

그래서 난 이따금씩
그 길을 걸어 저녁 노을을 마주하며
나의 하루를 들여다 보곤 한다.



그런데 어제 저녁
한 해를 마감하면서 온 산을 물들이기 시작한 가을 단풍과
하루를 마감하면서 대지를 물들이는 저녁 노을의
환상적이고도 신비로운 연주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나를 설레게 했고
급기야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방랑벽을 일깨워 놓았다.

그 가슴 벅찬 화폭을 들여다보면서
마음 속에 그려만 놓았던 봉화 청량산과 청량사를 떠올렸다.

가을 단풍으로 온통 물들었을 도량.
산 중턱 가파른 봉우리 아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새겨놓은 가슴 벅찬 도량.

노을이 비출 저녁이면 천상 신들이 사바예토에 내려와
거닐으며 차 한 잔 마시고 갈 것 같은 신비로운 도량.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들과
그 봉우리를 후광으로 딱 버티고 서 있는 청량사의 법당들
그리고 그 대자연과 도량의 아름다움을
한층 경이롭게 수놓는 가을 울긋불긋한 단풍의 향연.

가을 청량사의 아름다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 그 어느 사찰의 그것보다도 뛰어나다.
봉화 청량산 청량사.



봉화라는 땅 부터가
그나마 이 세상의 개발논리로부터
그래도 많이 멀고,
아무래도 자연의 파괴가 덜 진행된
그래서 더욱 내 가슴에 한 줌 고향이 된 땅이다.

퇴계가
'차마 세상에 알려질까 두렵다'고 했다는,
그만큼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기를 바랬다는
그런 곳이 봉화요, 청량산이다.

봉화의 땅이 가장 오지에 가깝고
그래서 땅값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싸다고 해서
가난한 귀농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들었다.
실제로 대자연과 어우러지는, 친환경 농업으로 이루어진
자연 공동체, 농업 공동체, 명상 공동체들이
많은 곳이 바로 경북 봉화땅이라고 한다.

봉화와 함께 우뚝 서 있는
일월산과 청량산
그 속에 서 있자면
마치 산의 숨소리가 들릴 듯 하다.

아마도 요즘 같은 시절에
봉화 쪽에서처럼
도로에 차가 드문 곳도 없을 것 같다.
저녁나절이면
한참을 가야 차 한 대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봉화, 청송 쪽의 산길은 호젓하여 좋다.

조용하게 차분한 음악을 들으며
호젓한 도로를 따라 도착한 청량산 청량사.
한적하던 도로사정과는 다르게
청량산 아래 주차장에는 차들이 많다.

아마도 단풍철이라
이 오지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는가 보다.



처음 찾은 분들은,
더구나 가을 단풍철의 청량사를 처음 와 보는 분들은
한적하던 시골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온 것을 보고 놀라곤 한다.

청량사를 오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놀라는데,
막상 한 30여분 남짓 터벅 터벅 걸어
청량사 도량을 참배하고 내려오는 이들은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이 먼 길을 돌아 돌아 오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제2의 금강산이라고 불린다는데
금강산에 다녀오신 분들 말씀을 빌리자면
청량산의 아름다움은
금강산에 도저히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곤 하신다.

30여 분 터벅 터벅 걸어 올라
청량사 소개 전각을 찬찬히 읽어보고
고개를 딱 돌려 도량을 바라볼 때
그 누가 탄성을 자아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누가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선 도량의 아름다움에 놀라고
도량과 하나가 된 듯
도량 뒤쪽으로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들에 또 한번 놀란다.
거기에 이 가을 단풍으로 물든 도량과 산세를 보자면
그야말로 딱 벌린 입을 다물기가 어려워진다.



지현스님께서
청량사 주지로 부임하시고부터
'산사음악회'를 처음 시작하셨는데,
아마도 청량사 산사음악회가
요즘은 흔해져 버린 산사음악회의 시초가 아닌가 싶다.

이 웅장한 도량에서 울려퍼지는
음성공양의 행진은
가슴속으로 생각만 해 보아도 감동이다.

올해 산사음악회도 미처 가 보지는 못했지만
들려오는 소문을 들으니
여러 종교의 성직자, 수행자들이 함께 모여 음악회를 열어
다른 해의 유명한 가수들이 왔었던 때보다
한층 경건하고 조화로우며 감동적이었던 음악회였다는 들림이 있었다.

그런 음율의 향기가 청량산 그리고 청량사와
내 마음에서 인연을 맺으면서
아마도 이 도량을 한층 더 그리워하게 된 듯 하다.

그런 곳, 그리움의 도량 청량산 그리고 청량사.
청량산은 총 36의 봉우리가 있고
그 가운데 큰 봉우리만 12 봉우리가 있다고 하는데
그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12 봉우리가
마치 연꽃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중심 꽃술의 자리에 바로 이 도량 청량사가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신라 원효스님께서 창건하셨다고 하는데
창건 당시에는 33개의 부속건물을 갖춘 그야말로 대 가람이었다고 하니
상상만 해 보더라도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아...
나는 여지껏 이런 산사를 본 적이 없다.

아마도 가을이었기에
온산을 물들인 단풍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지만
아! 이곳은 사바 예토(穢土)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선 첫 번째로 만날 수 있는 곳이
얼마전 주지 지현스님께서 출판하신 책의 제목과도 같은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라는 현판의 안심당(安心堂),



통나무와 황토벽에 너와지붕을 얹은 다원이
단아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차 한 잔 생각나던 차에
이렇게 고즈넉한 산사에서 전통다원을 만나면
그렇게 행복하고 고마울 수가 없다.
도량에 다원이 있으면 난 그 도량이 더없이 정겨워보인다.

오대산 월정사나 적멸보궁 가기 전에 있는 상원사가 그렇고,



금산사, 대둔사, 지리산 대원사, 영월의 법흥사, 송광사
양평 용문사, 직지사 등
이렇듯 전통다실을 갖추어 놓은 도량은
차 한 잔의 따뜻함 만큼이나 향기가 난다.

그리고 또 한 곳 빼놓을 수 없는
정말이지 차 한잔처럼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경기도 양수리의 수종사.



더없이 경관이 빼어난 곳에 아름답고 운치있는 다실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도 모든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해 놓은 점이 더없이 도량을 더욱 고향처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이 점은 정말이지 모든 도량들이 꼭 배웠으면 하는 점이다.
도량이란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이
몸도 마음도 푹 쉬고 갈 수 있는 고향 같은 곳이다.
고향에 가면 모든 것을 주고 또 주고
그것도 모자라 집에 갈 때 보따리로 싸 주지 않나.
그렇게 까지는 못 하더라도
차 한잔 따뜻하게 대접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도량에서까지 돈이 오고 가기 보다는
그저 모든 이들을 품어주면서
모든 이들에게 차 한 잔 따뜻하게 대접할 수 있는
그런 자비로움이 보다 많은 도량에 전해지길 간절히 바란다.

수종사에서는 처음에 찻값을 받다가
지금처럼 무료로 차를 내어 드리기로 하고부터는
오히려 보시함에 더 많은 희사(喜捨)가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럼 그렇지.
주지스님의 또 사중의 그 후덕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어찌 사람들이라고 모를 리 있겠나.
수종사의 그 따뜻한 차 한잔의 마음이
정말 우리네 중생들에게는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지 모른다.

도량 참배를 끝내고 차 한 잔 마시며 쉬다 가겠노라던 생각이
안타깝게도 한참을 도량 참배하다가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라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말았다.

안심당에서의 차 한 잔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그만큼 도량이 아름다움을
내 안에 담아내기에 시간이 부족했음이니
얼마나 도량에 푹 빠져 있었는지 알 만 한 샘이 아닌가.

다실을 지나 종각을 오르고
종각에서 다시 우뚝 선 봉우리쪽을 바라보니
탑과 전각 그리고 봉우리가 눈안에 시원스레 들어온다.



그 봉우리 쪽으로 오르자면
흡사 설악산 봉정암에서 보았을 법한
야외의 불탑과 그 앞에서 참배하는 기도객들을 볼 수 있다.



불탑에서 삼배를 올리고 일어나서 고개를 들면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나온다.
가슴이 그만 활짝 열리고 툭 터지는 무언가가 있다.

불탑을 바라보면 그 건너편의 산봉우리가 멀리 눈에 들어오고
불탑 아래로는 깎아지른 듯 한참을 아래로 꺼지는 낭떠러지
그 위에 봉우리를 기단 삼아 올려 놓은 불탑이다.



삼배를 올리고 몸을 뒤로 돌리자니
왼쪽으로는 거침없이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가 눈에 들어오고



바로 정면으로는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유리보전이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스님들 방사와 산신각 등의 전각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단아하게 펼쳐진다.



청량사는 다른 도량과는 다르게
대웅전이 있어야 할 곳에
모든 중생들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해 주는
의왕으로써 신앙되는 부처님이신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유리보전이 있다는 점이 특이할만 하다.



유리보전이라는 이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알려져 있고,
그 안의 약사여래부처님은 종이를 녹여만든 귀중한 지불로 유명하다.



그런데 도량 안에 들어가 보니
약사여래부처님 좌우로 문수보살과 지장보살이
왠지 일반 다른 사찰의 그것과는 다르게
조금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듯 보여 그 연유를 알아 보았더니,
전쟁으로 불탄 문수전의 문수보살과
명부전의 지장보살을 약사여래의 좌우 협시로 한 곳에 모셨다고 한다.

그리고 유리보전과 불탑 사이에 큰 소나무가 하나 있는데
그 모습이 특색 있으며 우람하고 아름다워
얼핏 보기에도 무슨 사연이 담기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물론 이 소나무는 소에 얽힌 사연을 담고 있다.



이 소나무는 가지가 셋으로 갈라져 있는데 그래서인지 그 이름이 삼각우총.
즉 ‘뿔 셋 달린 소의 무덤’이다.
도량을 중창 불사할 때 남면에 사는 남씨가 기르던 뿔 셋 달린,
말을 안듣는 골칫거리 소를 보시받았는데,
소가 스님을 도와 기와·나무 등을 져올리며 불사를 마치고 죽었다고 한다.
죽고나서 법당 앞에 묻었더니 이 소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도량에서는
볕 좋고 경치 좋은 어느 적정처 아란냐 한 곳을 택해
가만히 앉아 몸도 눈도 마음도 좀 쉬면서
아무것도 할 일 없이 그냥 쉬다 가는 것이 좋다.

이런 곳에서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혹은 천천히 도량을 거닐기만 하더라도
누구나 저절로 명상의 세계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보이는 모든 것이 그대로 선(禪)적이고 명상적이다.
그저 푹 쉬고 있다보면
이 조화로운 자연의 숨결을 그대로 닮아가지 않겠나.
그것이 명상이고 선이다.

선이나 명상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고 번잡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선에 대해서 너무 관념적으로 따지고 드는 경향이 있다.

선을 수행하는 사람은 어떠해야 하고,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며, 몸가짐은 어떠해야 하고,
어떠한 계율을 지켜나가야 하며,
얼마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서 좌선이나 경행을 해야 하고,
어떤 수행법을 택해 몇 시간씩 앉아 있어야 하고,
말로 따져 보자면 한도 끝도 없는
선과 명상의 길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는
초심자는 그냥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기 일수다.

그러나 선이라는 것은
그러한 방법론이나 이론적인 틀에 가둬두어선 안된다.
어떠한 일정한 틀에 갖힌 것은 선이 아니다.
선은 자유롭다.



‘이것이 선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길 포기한 것이다.
선은 그 어떤 틀이나 고정관념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너무나도 걸릴 것이 없어서
완전한 자유와 평화가 툭 트여있다.
그러면서도 자유나 평화라는 단어에 조차 갖히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번잡하지 않고 푹 쉴 수 있을 때
우리는 누구나 선수행자다.

어디에도 갖혀 있지 않고
활짝 열린 가슴으로
텅 빈 마음으로
그저 다 놓아버릴 수 있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선수행자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너무 쉬운 말이다.
아니 너무 쉬운 말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해야 한다거나 하는 틀이 없는
그저 본연의 텅 빈 자리를 의미하는 표현일 뿐이다.

그러니 얼마나 쉬운가.
‘어떻게’ 하려고 애쓰면 선이 아니다.
그저 다 놓아버렸을 때 선이 된다.

그냥 무심으로
그 어떤 작의나 의도를 다 비웠을 때
참된 선이 드러난다.
완전한 무위의 함이 없는 행이
걸림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다 말이고 표현일 뿐이다.
그저 푹 쉬고
다 놓으면 된다.



그러니 선을 어디에 가두지 말라.
선수행을 하고자 애쓰지 말라.
청정한 선수행자가 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지 말라.
‘선’을 버렸을 때 비로소 ‘선’이 드러날 것이다.

그저 이렇게 아름다운 도량을 거닐으라.
숲 길을 한 발 한 발 거닐으라.
떠오르는 태양을 온몸으로 마주하고
지는 노을을 한마음으로 바라보라.

참된 만행이란 이런 것이다.
선이 곧 만행이다.
그저 새롭고 경이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만행이다.
거닐음도 없이 거니는 것이 만행인 것이다.
그래서 만행이 곧 수행이다.

이런 도량에 와서는
번잡하게 떠올리지 말고
고민하지 말고
분별하지 말고
그저 이렇게 거닐기만 해도 좋은 것이다.

이 아름다운 도량을 한참동안 거닐었다.
거닐면서 내가 선을 수행 했다기 보다는
청량산의 대자연이 나를 선원에 앉아있게 했다.
이 모든 산 생명들의 명상적인 기운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를 선으로 안내했다.

한참을 거닐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시간이 너무 늦어
금탑봉의 응진전을 채 다녀오지 못한 것이 작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하나
안심당에서 차 한 잔 마시지 못한 아쉬움도 함께.



그렇지만 아쉬움을 남긴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언젠가 다시 오게 될 때 그 때 설레는 마음으로 찾을 수 있으니까.
응진전에서의 풍경이 매우 빼어나다던데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또다시 청량사를 찾게 될 것이다.

내려오는 발길이 경쾌하다.
참 정이 가는 도량.
따뜻한 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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