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이 만드는 세상은 가짜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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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생활수행

신념이 만드는 세상은 가짜다

목탁 소리 2009. 9. 1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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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처음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 태어났을 때 마주치는 경험은 온전하다.

아무런 시비 분별도 없고,
다만 경험 그 자체로써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은 천진무구하다.
칼을 들이 대더라도 울지 않고,
불을 보더라도 뛰어 들곤 한다.

그들에게 있어 모든 경험은
다만 경험 그 자체일 뿐
좋고 싫은 것도 아니고, 옳고 그른 것도 아니다.
아무런 분별 없이 다만 경험할 뿐이다.
다만 느끼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천진불 어린 아이도 조금씩 경험에
시비와 분별을 붙이게 된다.
시비와 분별은 곧 신념을 만들어 낸다.

경험을 통해 신념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어떤 한 가지 경험을 했으면
그 경험을 통해 한 가지 신념을 쌓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신념은
또다른 경험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경험은 또다시
그 신념을 뒷받침해주고 증명해 주게 된다.

그럴수록 그 신념은 보다 확고해지고
신념이 확고해질수록
그 신념에 점점 더 집착하고 고집하게 된다.

이윽고 그 신념이 ‘옳다’고 확정짓는다.
그럼으로써 신념과 가치관, 고정관념이 늘어간다.
그것이 늘어갈수록 혹자는 그것을 지식이라고도 하고,
가치체계라고도 함으로써 그것이 올바른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점점 더 우리의 신념은 깊어간다.
그러다가 내 신념과 충돌되는 다른 사람의 또다른 신념을 만났을 때
상대의 신념은 ‘잘못된 것’이 되고
나의 신념이 ‘옳은 것’이다 보니
나의 신념을 상대에게 주입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러면서 다툼도 일어나고
좌절도 일어나고
모든 괴로움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어떤 한 가지 신념에 대해
보다 확고한 경험을 반복적으로 많이 했을 수록
그 신념은 더욱 깊어져
자기 안에서 진리처럼 받아들여진다.

깊이 믿으면 믿을 수록
그 신념으로 인해 상대와 부딛칠 일이 많아진다.
그러더라도 자신은 옳고 상대는 그르기 때문에
쉽게 신념을 포기하지 못한다.
내가 옳고, 내가 진리이며, 내가 정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진리라도
고집하고 집착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유연하며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에서도
부처님 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하물며 법 아닌 것에 집착하겠는가 하는 말이 나온다.

다시말해 신념으로 인해 만들어진 경험은 참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억지스럽고 작의적이며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참이 아닌 것에 집착할 필요가 무엇인가.

자신 안에 강한 신념이 자리하고 있다보면
그 신념이 모든 경험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경험은 참이 아니라는 말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어떤 한 가지 ‘옳다’는 신념이 있게 되면
그 신념 때문에 계속적으로 그 신념과 관계된 경험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마음이 세상을 만들고,
마음에서 그렇게 믿는 것은
그대로 세상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신념이 그 경험을 만들어 낸 줄 모르고
자꾸 경험을 하니까 그 신념이 옳은 것인 줄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신념을 내 안에 만들어 놓으니까
자꾸만 그 신념대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념으로 인해 경험하는 경계는 참이 아니라는 말이다.

요즘 마음공부와 명상이 사람들의 치워드가 되면서부터
온갖 종류의 마음공부와 명상 프로그램 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어떤 곳에서는 바로 이 점을 악용하고 있기도 하다.

신념이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사실.
바로 이 하나의 사실만을 가지고
그 신념을 바꾸도록 온갖 방법으로 이끈다.

신념이 바뀌면 경험이 바뀐다는 사실,
믿는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그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 진리를 운운하면서
신념 바꾸는 프로그램을 수많은 돈을 내고 참여하도록 독촉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크게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다.
바로 신념이 만들어내는 경험은 참이 아니라는 점.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도
마음이 세상을 만들어낸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은 거짓이라고 하셨다.
꿈이고 환상이며 신기루이고, 공(空)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이전의 자리를 깨닫도록 이끄시지,
마음을 가지고 시비 분별을 하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신념을 또다른 신념으로 바꾸거나 덮어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지는 않으셨다.
신념 그 자체를 비워버릴 수 있도록 이끄셨다.

일체 모든 신념과 고정관념을 타파하도록 이끄시지
하나의 고정관념을 다른 고정관념으로
부숴버리도록 하지는 않으셨다는 말이다.

물론 방편의 가르침으로
어떤 한 가지에 크게 집착할 때는
그 집착을 깨주기 위한 방법으로 방편설을 하기는 하셨지만
본래의 가르침은 일체의 모든 알음알이를
비워버리고 놓을 수 있도록 이끄시고 있다.

그런데도 그러한 부처님 본래의 법에서 멀어져
신념을 바꾸는 작업을 프로그램화 하여
돈벌이로 장사하는 장사치의 일을
마치 불법인 양 도량에서 버젖이 하는 일이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신념을 또다른 신념으로 바꿈으로 진리를 체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모든 신념 그 자체를 놓아버렸을 때 진리는 온다.
선과 악을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선을 택하는 것은
작은 깨달음이고 방편의 가르침일 뿐,
본래에서 본다면 선과 악이 없기 때문에
따로이 선을 택할 것도 없이
선악이라는 관념 자체를 놓아버릴 때 진리는 드러난다.

부처님은 모든 신념을 버리라고 하셨다.
그 어떤 견해나 경험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 하고 나누지 않아야 한다.
신념을 가진다는 말은
어떤 한 가지 견해를 ‘옳다’고 고정짓는다는 말이다.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나누고 분별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분별없이 다만 멈추고(止) 바라보기(觀)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본래의 평화가 찾아온다.
신념이나 견해, 옳고 그른 분별 이전의
딱 끊어진 본래의 참됨과 마주할 수 있다.

그 어떤 신념도 고정관념도 놓아버려라.
그리고 다만 바라보라.
그랬을 때 모든 참된 진리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진리의 경험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분별된 모양이 아니다.
그 어떤 경험도
아무런 시비 분별이 없는 무차별의 지혜가 된다.
거기에는 그 어떤 신념도 따라 붙지 않는다.
그 어떤 신념이나 고정관념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분별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신념이나 고정관념을 만들어 내지 않고
다만 치우치지 않은 정견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경험이든
그 경험에 가치판단을 하게 되고
신념을 부여하게 되면
그 때부터 그 경험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진
거짓의 경험이 되고 만다.

신념을 가지면
이 모든 진리의 경험이
그로인해 삐뚫어지고 왜곡된다.

바람이 불고, 새가 하늘을 날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
내가 이렇게 호흡을 하고, 걷고, 움직이는 것,
내 앞에 펼쳐지는 일체의 모든 경험은
분별하지 않고, 신념으로 투영하지 않으면
그대로 진리의 경험이 되는 것이다.

이미 이 우주 법계 삼라만상 그 자체는
그대로 부처이고, 그대로 온전한 부처님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따로 깨달을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깨달아 있는 것이다.
항상 온전한 진리가 우리 앞에 늘 그렇게 펼쳐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다만 분별하지 않고,
그 어떤 신념이나 견해, 고정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진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진리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별하고 나누며
자신 안에 신념이라는 틀을 만들기 때문인 것이다.

분별하지 말고
신념을 덮씌우지 말고
다만 모든 분별을 멈추고 바라보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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