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엄정토분
정토를 장엄하다
莊嚴淨土分 第十
佛告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燃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不也 世尊 如來在燃燈佛所 於法 實無所得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是故 須菩提 諸菩薩 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 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 爲大不 須菩提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 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어떤 법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의 일상무상분에서는 깨달음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말아야 함을 말하였는데, 이 분 장엄정토분에서는 그러한 가르침을 정토장엄이라는 우리들에게 익숙한 표현을 빌어 다시한번 강조하시면서 정토를 장엄한다는 상을 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정토를 장엄한다거나, 불교를 수행한다거나, 중생을 구제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상을 깨버릴 것을 강조한다. 깨달음에도, 정토에도, 부처에도, 그 어디에도 머무는 마음을 내면 그것은 온전한 깨달음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눈귀코혀몸뜻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 그 어디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하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일상 생활 속에서 ‘함이 없이 하는 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 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어떤 법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에 대한 일화들을 다룬 경전에서는 공통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 인행(因行)의 시기에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受記)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연등부처님께서 꽃을 공양하는 선혜 비구에게 장차 사 아승지 십만 겁 후에 석가모니라는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내리셨다고 한다. 이러한 수기로 인해 일반적으로 연등부처님께서 과거에 선혜 비구에게 이미 어떠한 특별한 법을 주었으며 그 법을 얻어 결국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셨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기는 불본행집경, 자타카, 육도집경, 본생경 등에 등장하는 것으로써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다.
선혜 비구가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는 모습을 [불본행집경]을 통해 잠시 살펴보자.
어느 때 선혜라는 젊은 행자가 있었다. 생사의 진흙 수렁 속에서 방황하는 자신과 세상의 모습을 보고 크게 발심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큰 행원을 일으켰다.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끝없이 많사오니
내 부처되어 마지막 한 생명까지 기어이 건지리라.
젊은 선혜 행자는 부지런히 노동하고 받은 보수를 아껴서 은전 오백량을 모았다. 이 때 연등부처님께서 이 나라에 오시니, 왕과 백성들이 꽃을 바쳐 공양하려 하였다. 선혜 행자도 이 소식을 듣고 꽃을 구하려 하였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꽃을 찾아 거리를 헤매다가, 한 궁녀가 푸른 연꽃 일곱 송이를 감추어 가는 것을 보고, 사정 사정하여 은전 오백량을 주고 다섯 송이를 샀다.
이 때 연등부처님께서 거리로 걸어 오시니, 선혜 행자도 시민들과 함께 푸른 연꽃을 들어 바치었다. 마침 그 때, 연등부처님께서 걸어가시다가 진흙탕에 이르셨다. 이 모습을 본 선혜는 입었던 사슴 가죽옷을 벗어 진흙탕에 깔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자 엎드려 머리털을 풀어 길을 만들었다.
이 때에 연등부처님께서 선혜 행자를 향하여 찬탄하셨다.
“아 장하다. 선혜여! 그대의 보리심은 참으로 갸륵하구나. 이같이 지극한 공덕으로 그대는 오는 세상에 결정코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부르리라.”
이렇듯 연등부처님은 선혜 행자에게 석가모니가 되리라는 수기를 주셨다. 그런데 이 경전에서는 왜 수보리는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도 얻은 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가. 금강경은 일체의 모든 방편을 파하고 근본을 드러내는 경전이다. 금강경 앞에는 일체의 그 어떤 방편도 설 자리가 없다.
깨달음을 전해줄 수 있는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참된 깨달음은 전해주거나 전해받는 어떤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고 받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항상 현존하고 있다. 그대 앞에 항상 참된 모습으로 꽃을 피워내고 있다. 아니 그대의 존재 그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의 증거이며 부처의 현현이다. 우린 이미 완성되어 있다. 이미 깨달아 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받을 필요도 없고 얻고자 애쓸 것도 없다. 진리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여여부동하게 오고 감이 없이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어찌 두 부처님 사이에 법이 오고 갈 수 있단 말인가.
중생과 부처 사이에 법이 오고갈 수 있는가? 중생과 부처가 따로 나뉠 것이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오고 갈 법 또한 없다. 그런데 어찌 중생과 부처 사이에, 혹은 부처와 부처 사이에 오고 갈 어떤 법이 있겠는가. 주고 받고 할 어떤 수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없다.
아무것도 나뉘지 않은 텅 빈 적멸의 세계에서는 그저 부처만 있다. 이름을 부처라고 해서 그렇지 오직 ‘그것’만 있을 뿐이다. 오직 영원의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오직 성성적적의 적멸만이 가득 차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이미 부처이다. 당신은 과거에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는가. 어떤 깨달음을 선물로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 주고 받을 것이 없는데 어찌 이런 물음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나는 부처님께 수기를 받지 않았고, 어떤 특별한 법을 받지도 않았는데, 저 선혜라는 비구는 부처님께 이미 수기를 받았구나 하고 부러워 할 것도 없다. 선혜가 수기를 받는 순간 우리 모두는 함께 수기를 받았다. 아니 선혜가 연등부처님께 수기를 받았다는 그 표현 자체가 일체 모든 중생이 수기를 받았다는 방편의 설법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완전한 부처라는 방편의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무엇이 문제기에 깨달은 완전한 부처가 이렇게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왜 우리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중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어떻게 하면 그 사실을,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가. 어찌 하면 얻을 수 있는가.
간단하다. 진리는 너무나도 단순한 데 있다. 일체를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얻어진다. 그냥 놓아두면 된다. 놓아버리는 순간 영원한 대자유가 찾아온다. 그것은 얻는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그냥 본래의 고요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 깨닫게 되어있다. 깨닫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이미 부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은 항상 깨달음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만히 놓아두면 누구나 저절로 깨닫는다. 그냥 놓아두기만 하면 된다.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내면 깊은 곳에서 깨어있음의 빛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생각하고, 애쓰고, 안달하고, 수행하고, 고민하고, 노력하려는 그 모든 ‘나’의 행위들을 다 놓아버려라. 겉에 드러나 있는 거짓의 ‘나’가 행하는 모든 활동들을 멈춰라. 껍데기의 ‘나’를 놓아버려야 본래의 ‘나’가 활동을 시작한다. ‘나’를 가지고 어떻게 해 보려고 애쓰지 말라. 깨달음을 얻고자 안달하지 말라. ‘어떻게’ 해 보려는, 깨달아 보려는 마음을 푹 쉬기만 하면 된다. 푹 쉬었을 때 이 가짜의 ‘나’는 활동을 멈추고 내면의 ‘그것’이 드러난다. ‘그것’을 한마음이라고 해도 좋고, ‘참나’라고 해도 좋으며, ‘부처’라고 해도, ‘자성’이라고 해도, 그 어떤 표현을 써도 좋지만 거기에 머무르지는 말라. 그 표현에 집착하지 말라. 다만 다 놓아버리고 그 어떤 것도 붙잡지 말며, 그저 푹 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꾸만 ‘나’를 가지고 ‘어떻게’ 해 보려고 한다는데 있다. 그냥 있으면, 그냥 푹 쉬면 저절로 이루어지는데, 공연히 붙잡고, 깨닫고자 애쓰며, 부처가 되려고 노력한다. 모든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냥 놔두지를 않는데서 모든 문제가 생긴다. 모든 괴로움이 생기며, 모든 번뇌가 생기고, 모든 욕심과 집착이 들끓는다.
그냥 놓아두라. 애쓰지 말라. 애쓰려는 마음을 놓으면 그냥 얻어진다. 이미 얻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래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얻을 것’이 생기면 결코 얻을 수 없다. ‘얻고자 하는 것’이 없을 때 그 때 비로소 얻게 된다. 아니 그냥 ‘얻음’이란 말 자체가 끊어지고 지고한 평화만이 현현한다.
선혜 비구가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을 얻었다고 생각지 말라. 그 때 선혜 비구가 연등부처님께 무언가 얻은 특별한 법이 있었다면 선혜 비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법도 얻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부처를 이룬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앞 장에서 수행 사과라는 깨달음의 계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러한 깨달음 조차 놓아버려야 함을 언급했다. 수행 사과의 깨달음이라는 것도 본래 얻은 바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장에서는 과거 연등부처님에게 수기를 받은 선혜 비구 또한 어떤 특별한 법을 얻은 것이 아님을 밝혔다. 이렇듯 모든 보살들이 얻은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다.
여기에서는 보살의 깨달음의 사회화의 과정인 불국토 장엄에 대한 물음이 이어지고 있다. 깨달은 자는 스스로 깨달았다는 생각이 없다. 하물며 깨달은 자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깨닫지 못한 중생이나 할 수 있는 것이 불국토의 장엄이다. 깨달은 자는 불국토를 장엄하지 않는다. 장엄하지 않음으로써 장엄하고 있다.
불국토는 별도로 장엄할 필요가 없다. 불국토는 더없이 완전하다. 더 이상 손 댈 곳이 없다. 어떤 장엄이 따로 필요한 곳이라면 그곳은 불국토가 아니다. 스스로 완전한 곳 그곳이 불국토요 정토다. 그러므로 보살은 정토를 장엄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 장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장엄이라는 말 자체가 매우 생소하다. 그런 말이 필요 없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불국토며 정토이기 때문이다.
불국토, 정토는 어떤 곳인가. 부처님의 땅이며, 깨끗한 땅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땅이란 어떤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이 아니다. 만약 어떤 특정한 공간을 가지고 정토라고 했다면 그곳은 더 이상 정토가 아니다. 정토는 영역이 정해지지 않은 곳이다. 별도로 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없다. 정토의 경계를 긋는 순간 이미 정토는 사라지고 만다. 깨달음에는 시공(時空)의 차별이 없다. 하물며 어떤 특정한 공간을 가지고 정토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지역을 정토라고 했다면 그 지역에서 벗어난 곳은 예토(穢土), 즉 더러운 땅이 될 것인데, 그렇게 깨끗하고 더러움을 나누고, 이쪽 저쪽을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깨끗한 쪽을 택하는 그런 상대적인 곳을 가지고 어찌 정토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부처는 차별이 없다. 깨달음에는 그 어떤 나뉨도 없고, 극단도 없다.
그러니 정토를 장엄한다는 말은 어리석은 중생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보살은 정토를 장엄할 이유가 없다. 그들 자체가 그대로 정토이다. 정토를 장엄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온갖 정토를 무한히 장엄하고 있다. 정토의 장엄은 정토의 장엄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토의 장엄이다.
불교를 어느 정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알음알이로 지식을 축적하면 할수록 더욱 깨달음과는 멀어진다. 불교를 많이 공부한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수행을 많이 했고, 경전도 많이 보았으며, 깨달음과도 가깝고, 부처님의 좋은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많이 가르쳐 주며, 포교도 많이 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러한 모든 행위가 정토를 일구는 장엄한 깨달음의 길이요, 포교의 길이라고 여긴다. 스스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원을 잘 성취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복도 더 많이 짓고, 공부도 더 많이 했으니까 지옥에 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더 빨리 깨달음을 얻어 성불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깨달음과는 멀다. 오히려 초심자들의 발심보다도 더욱 멀어져 있다. 초발심의 행자들은 하심하며 지극히 겸손하다. 스스로 수행을 많이 했다거나, 불교를 좀 안다거나, 깨달음과 가깝다거나, 포교도 잘 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상이 없다. 오직 그런 마음을 비우고 하나에서부터, 낮은 마음에서부터 정진할 뿐이다. 초심자의 하심은 고참자의 그것보다 깨달음에 더욱 가깝다. 지식이 많을수록 깨달음과는 멀어진다. ‘공부했다’는 상에 빠질수록 공부와는 멀어지고 만다.
그래서 수행자의 첫 번째 덕목은 하심이며 겸손이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 말은 공부와 멀어졌다는 말이다. 해도 한 바가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의 수행은 깨달음과는 정 반대로 치닫고 있다. 포교를 했고, 법보시를 했고, 열심히 기도를 했으며, 온갖 불사를 했고, 정토를 일구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공덕은 사라진다. 그래서 달마는 전국에 온갖 불사를 이루어 놓은 양무제에게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했다. [전등록]을 잠시 살펴보자.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 절을 짓고 경전을 편찬하고 스님을 만든 것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은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이것은 인간과 천상의 작은 과보를 받는 유루(有漏)의 원인일 뿐,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있는 듯 하나 실체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입니까?”
“청정한 지혜는 묘하고 원만하여 본체가 원래 비고 고요하니, 이러한 공덕은 세상의 법으로는 구하지 못합니다.”
“어떤 것이 성스러운 진리의 제일가는 이치입니까?”
“텅 비어 성스러움이란 없습니다.”
공덕은 없다. 인간과 천상의 작은 과보를 받을 뿐. 아무리 복을 짓더라도 그것은 천상에 태어나거나, 조건 좋은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하는 그런 작은 과보만을 받을 뿐이다. 물론 사람들에게는 그런 과보처럼 크고 좋게 보이는 것이 없을 테니 큰 공덕이라고 좋아하겠지만 그것은 유루(有漏)의 공덕일 뿐, 무루(無漏)의 공덕에 미칠 수 없다. 아무리 천상에 산들, 아무리 조건 좋은 인간으로 태어난들, 설사 잘 생기고, 돈 많고, 집 좋고, 가문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한들 그것이 그대로 ‘행복한 삶’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조건 속에서 괴로움에 허덕이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조건을 뛰어넘어 어떠한 조건이나 상황 속에서도 의연하고, 초연하며, 여여하고, 평화로운 깨어있는 정신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 그러한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조건도 실체 없는 그림자요 헛된 환영일 뿐이다. 돈, 명예, 권력, 지위, 계급, 이 모든 것이 다 환영일 뿐이지 않은가.
그러면 참되고 진실한 공덕은 무엇인가. 청정한 지혜 공덕은 원만하며 고요하고 텅 비어 있다. 비어 있기에 세상의 법으로는 구할 수 없다.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지위나 계급이 아무리 높더라도, 청정한 지혜 공덕을 살 수도 얻을 수도 없다. 얻으려는 노력이나 애씀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다. 세상의 그 어떤 법으로도 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다. 빈 것은 따로 얻을 것이 없다. 이미 빈 그대로 충만하다. 빈 것을 또 다시 애써 비울 필요는 없잖은가.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도 그와 같다. 성스러운 진리는 맑게 비어 있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성스러운 진리는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라 다만 이름이 성스러운 진리인 것이다.
이처럼 진리도, 공덕도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실천하더라도, 공덕을 짓더라도 진리라는, 공덕이라는 상이 남아 있는 이상 그것은 가짜일 뿐이다. 무엇이든 잘 해 놓고 잘 했다고 상을 내면 잘 한 것이 아니다. 수행을 열심히 해 놓고 열심히 수행했노라고 하면 수행한 것이 아니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었노라고 하면 그 깨달음은 가짜가 된다.
아무리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더라도 불국토를 장엄했다는 상을 일으키고 거기에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참된 장엄이 아니다. 모름지기 함이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머무는 바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을 하고서도 수행했다는 바에 머물지 않아야 하며, 베풀고서도 베풀었다는 상을 일으켜 베풂에 마음을 머물지 않아야 한다. 마음이 머물게 되면 썩고 만다. 마땅히 마음을 일으키되 그 일으킨 마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마음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방하착하라. 일체를 다 놓아버리라. 다 놓아버렸을 때 그대로 진리는 드러난다고 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이 말을 자기방식대로만 해석을 한다. 다 놓아버려야 하니 아무 일도 할 것이 없고, 아무런 마음도 낼 것이 없으며, 그냥 빈둥 빈둥 놀기만 하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또 다 놓아버린다면 저 강가의 돌이나 산의 바윗덩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고 이 가르침을 의심한다.
다 놓아버리라고 하고, 얻을 것도 본래 없다고 하며, 깨닫고자 애쓰지 말고, 정토를 장엄할 것도 없다고 하니까 불교는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거냐고 따질지 모른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런 물음을 한 번 쯤은 던져 보았을 것이다. 이 게송은 바로 그 점에 대한 명확하고도 통쾌한 답변을 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모든 의문은 풀어질 것이다.
아무 마음도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마음을 낼 것인가 또한 어떻게 마음을 낼 것인가가 중요하다. 마땅히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청정한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는 것이며,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는 것이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어떤 바깥의 대상에도 마음이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즉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이다.
마음을 내고 나면 보통 사람들은 거기에 얽매이고 머물러 집착한다. 착한 일을 행하고도 거기에 마음이 머문다. ‘선행을 했다’는 상을 남기게 된다는 말이다. 착한 일을 했다는데 마음이 머물러 상을 남기게 되면 연이어 거기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게 된다. 보상을 기대하는 그 어떤 바람도 우리를 괴롭게 할 뿐이다. 기대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이고, 바람이 있을 때 그것의 성취 유무에 따라 괴로움과 즐거움이라는 두 가지 극단의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착한 일을 행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마땅히 마음을 일으켜 착한 일을 행하되 함이 없이 하라는 말이다. 선행을 하고도 선행을 했다는 상을 버려야 한다. 거기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돈을 열심히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돈을 벌되 돈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돈에 머무르는 마음으로 벌면 안 된다. 그것은 곧 괴로움을 가져온다. 돈에 대한 집착으로 돈을 벌면 많이 벌었을 때와 못 벌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 극단으로 치닫는다. 즐거움과 괴로움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린다. 즐거움에 휘둘리는 것은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즐거움도 일종의 괴로움이다. 즐거움에 크게 휘둘리는 사람일수록 괴로움에 크게 휘둘리게 마련이다. 즐겁거나 괴롭기 보다는 그 양 극단을 다 놓아버린 여여한 평화를 찾아야 한다.
수행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수행을 하되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수행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했다는 상을 내지 말고, 이만큼 수행했으니 곧 결과가 있겠지 하는 바람도 놓아버리고, 수행이라는 그 자체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수행을 했으니 곧 깨닫겠지, 혹은 이렇게 수행을 했는데도 왜 깨달음은 오지 않을까 하고 탓할 것은 없다. 다만 수행을 할 뿐이지 수행의 결과를 바란다거나, 내가 행한 수행에 대해 바라는 바를 가져선 안 된다. 그것은 집착이며 집착은 괴로움이다. 수행은 오직 지금 이 순간 행하는 것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지, 그것이 미래의 어떤 깨달음을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직 할 뿐, 바람을 놓아라. 수행이라는 말 자체가 머물지 않음을 뜻한다. 그것이 함이 없이 하는 도리이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법이다. 금강경의 모든 구절은 바로 이 뜻을 함축하고 있다.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행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주로 어디에 마음이 머물러 있는가. ‘나’라는 주관이 만날 수 있는 일체 모든 객관의 ‘대상’들에 마음이 머물러 있다. 주관은 무엇이고 객관계의 대상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이것을 십이처(十二處)로 설명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여섯가지 기관으로 세상과 접촉하고 대화한다. 그 여섯가지란 눈, 귀, 코, 혀, 몸, 뜻을 말한다. 눈으로 모든 형상을 바라보고, 귀로 세상의 소리를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며, 몸으로 감촉하고, 뜻으로 모든 대상들을 분별한다. 이 여섯 가지 말고 또 다른 세상을 접하는 기관이 있는가? 오직 이 여섯 가지가 한다. 바로 이 여섯 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을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여섯 가지 내 안의 뿌리라는 뜻이다.
주관인 이 여섯 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각각의 대상을 만나는데 그 대상이 바로 육경(六境)이다. 육근이 만나는 대상이 바로 육경이다. 그것은 각각 형상과 소리, 냄새와 맛, 감촉과 대상이다. 눈이라는 근(眼根)으로 형상이라는 경계(色境)를 접촉하며, 귀라는 근(耳根)으로 소리라는 경계(聲境)를 접촉하게 된다.
이렇듯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바로 그 때 일체의 모든 괴로움과 즐거움, 좋고 나쁜 느낌이 일어난다. 그 느낌에 따라 좋은 느낌은 더 많이 느끼기 위해 붙잡아 두려고 집착하고, 싫은 느낌은 느끼지 않기 위해 버리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래서 좋은 느낌을 많이 얻을 때 즐거움을 느끼고, 싫은 느낌을 많이 얻을 때 괴로움을 느낀다. 이렇듯 좋고 싫은 느낌에 따라 모든 집착이 생겨난다. 애욕이 생겨나고 증오가 생겨난다. 좋은 것을 더 갖고 싶은 것도 집착이며, 싫은 것을 버리고자 애쓰는 것도 집착이다.
우리들이 괴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육근과 육경이 접촉하고, 연이어 좋고 싫은 느낌이 일어나며, 그에 따라 온갖 집착이 생기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 집착이 바로 머무름이다. 어떤 경계를 대할 때라도 항상 집착이 생긴다. 눈귀코혀몸뜻이 대상을 만날 때면 항상 이렇듯 집착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즉 형상에 마음이 머물게 마련이고, 소리에 마음이 머물게 마련이며, 냄새와 맛, 감촉과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눈으로 좋은 것을 볼 때 더 보고 싶은 집착이 생겨나고, 칭찬을 받을 때 더 받고 싶은 집착이 일어나며, 좋은 냄새에도, 좋은 맛에도, 좋은 감촉에도 집착이 생겨난다. 이렇듯 모든 대상을 접촉할 때 집착이 생기므로 마음이 머물게 되는 것이다.
모든 수행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 머무는 마음, 집착을 놓아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일체 모든 대상을 만나고, 대상과 접촉하면서도 어떤 대상에도 머물러 집착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집착이 생겨나면 연이어 일체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
금강경에서는 이 가르침을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안내해 주고 있다. 마땅히 모든 마음을 내되 머무름이 없을 수 있다면 그 어떤 걸림도 있을 수 없는 대자유를 만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느끼고 있는 일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집착과 머무름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육근이 그 대상인 육경을 만나 접촉함으로써 좋고 싫은 느낌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 좋고 싫다는 느낌의 분별에서 온갖 집착이 생겨난다.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그 사이에서 온갖 시비 분별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이 대상을 받아들일 때 그 대상 자체는 과연 분별할 것이 있는 것일까?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뜻의 대상이 과연 좋고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차별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모양과 색깔이라는 형상에서 옳고 그른 것이 어디 있고 좋고 싫은 것이 어디에 있는가. 온갖 나무와 꽃들이 있지만 어떤 나무와 어떤 꽃은 옳고 다른 것은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의 일체 모든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대상은 모두 무분별(無分別), 무차별(無差別)이다. 우리들의 의식에서 차별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지 이 세상에는 본래부터 나뉨이란 없다.
태양과 달과 별, 바다와 시내와 강과 들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린 것인가. 정치인과 경제인 가운데 누가 옳은가? 서양의 여인과 동양의 여인과 아프리카의 여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 그들은 그저 서로 다를 뿐이지 분별할 수는 없다. 점수를 매겨 줄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체의 모든 차별과 분별로써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나누고 차별하고 점수 매기고 등수를 매기는 따위의 나눔은 오직 인간들만이 한다. 이 대자연 법계의 모든 존재와 생명은 오직 전 존재로써 받아들일 따름이다. 인간들만이 세상을 대상으로 차별하고 분별하며 그렇기에 인간들만이 좋고 나쁘며 옳고 그르다는 등의 어리석은 극단을 설정한다. 그리고 그 극단과 나뉨은 곧 부조화와 평화롭지 않은 상태를 가져온다. 그로인해 인간은 늘 어지럽고 복잡하며 괴롭다.
세상은 다만 변화할 뿐이다. 변화하는 세상에 어리석고 좁은 소견으로 좋다거니 싫다거나 하는 차별을 가하지 말라. 세상은 다만 변화만이 있을 뿐, 좋고 싫은 것은 없다. 봄을 알리는 꽃이나 여름의 우거진 초록이나 가을의 오색 단풍, 또 겨울의 호젓한 눈꽃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다. 1, 2, 3, 4등 등수를 매길 수는 없다. 어느 계절이 더 좋고 나쁜 것은 없고 다만 변화만 있을 뿐이다. 변화의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 변화의 어느 한 과정을 콕 찝어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맞다느니 틀리다느니,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차별하지 말라.
소리와 냄새와 맛 그리고 감촉 따위의 것들은 또 어떠한가. 그것들 또한 인연따라 잠시도 쉼 없이 변화할 뿐이지 차별되어 있지는 않다. 똑같은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듣기 좋은 말도 되었다가 또 어떤 이에게는 듣기 싫은 말도 될 수 있다. 청국장 찌개의 냄새처럼 똑같은 냄새가 어떤 때는 참 좋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구역질이 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육경이란 대상에 대한 일체 그 어떤 분별도 다 우리들의 의식이 만들어 내는 거짓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은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늘 여여(如如)하다. 다만 변화할 뿐 그 어떤 차별도 있지 않다. 본질은 무엇이든 다 부처이며 청정한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이 세상에 무엇을 차별하고 분별하며 나누겠는가. 무엇을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할 것이며, 무엇을 잘났다거니 못났다거니 할 것인가. 무엇을 크다거니 작다거니 분별할 것인가.
본질에 있어서는 옳고 그름도, 잘나고 못남도, 미추도, 장단도, 대소도, 그 어떤 나뉨도 없다. 두 가지로 나누게 되면 거기서부터 질긴 집착과 그로인한 괴로움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분별할 것이 없으면 집착할 것도 없고 따라서 괴로울 것도 없다. 그렇기에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도 분별하거나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양 극단을 설정해 놓고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해 대상을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양 극단은 세상을 올바로 정견으로 보는 눈이 아니다. 오직 중도(中道)만이 세상을 바로 보게 해 준다.
이 모든 것이 둘이 아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말이나,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이나, 분별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둘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말이 그대로 중도의 가르침이며 연기(緣起)의 가르침이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인 삼법인(三法印)의 가르침이다. 육근[육입(六入)]과 육경[명색(名色)]이 접촉[촉(觸)]함으로 느낌[수(受)]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좋고 싫은 애욕과 증오[애(愛)]가 일어나고, 그럼으로써 집착[취(取)]이 일어나고, 그로인해 온갖 업[유(有)]을 짓게 되어 생노병사[생(生), 노사(老死)]의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십이연기(十二緣起)의 가르침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설법에 이어 수미산만한 사람의 몸을 비유하며 크고 작다는 분별을 비우도록 이끌고 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모든 차별과 분별을 놓아야 한다. 아니 머무는 바가 없으면 차별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 어떤 마음도 일어날 것이 없다. 바로 그 때 일체 모든 분별이 타파되며 그랬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바라보는 정견의 눈이 열린다.
만약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그 몸이 큰 것인가 하는 부처님의 물음에 수보리는 크다고 답변을 드린다. 방금 설법한 것에 의하면 본래 크고 작을 것이 없어야 하는데 수보리는 왜 크다고 했는가. 이것이 바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법이다. 분별과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아무런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할 것인가.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며, 아무런 마음도 일으키지 말고 그저 저 산의 나무처럼, 저 들의 돌처럼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옳다 그르다는 표현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하고, 좋다 싫다는 표현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마땅히 마음을 내야 한다. 그러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크다는 마음도 내고 작다는 마음도 낼 수 있다. 그러나 크고 작음에 걸려 집착하면 안 된다. 옳고 그른 마음도 낼 수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불교는 산중에 홀로 들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아무런 분별도 일으키지 말며 은둔해서만 살아야 하는 그런 종교인 것은 아니다. 큰 것은 크다고 마음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좋고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한 쪽에 머물러 집착하는 마음을 키우다 보면 집착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다시 본문으로 가서, 부처님께서는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라고 하셨다. 그래서 수보리에게 비유로써 물음을 던지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형상이 그렇게 크다는 것을 말한다. 수보리에게 부처님은 수미산만큼 큰 사람의 몸이라는 형상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형상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다.
부처님의 물음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몸은 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몸이다. 큰 몸을 큰 몸이라고 하면 그것은 큰 몸이 아니다. 큰 몸은 큰 몸이 아니며 그랬을 때 큰 몸인 것이다. 큰 몸이라는데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크다고 할 수 없다. 다만 크고 작다고 방편으로써 말하고 있을 뿐 크다는데 머물고 작다는데 머물기 위해 크다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매우 크다고 답변을 드렸지만 그 이유는 큰 몸이라는데 머물러 있지 않았기에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큰 몸이라는데 집착을 하여 작은 몸에 상대되는 ‘큰 몸’으로써 ‘매우 크다’고 했다면 수보리의 답변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는 부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고 하셨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크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형상에 머물러 크다고 답변을 드린 것이 아니라 형상에 머무는 바 없이 크다고 답변을 드린 것이다.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말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답변이다.
차별을 넘어선 ‘법의 몸’, 법신(法身)은 어떤가. 그것은 크다 작다로는 표현될 수 없다. 수미산만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작은 것도 아니다. 법신의 몸은 한 티끌 속에도 포함될 수 있으며, 온 우주 법계 전체라는 표현으로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법신은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다. 말로써 표현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말로써는 도저히 표현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법신은 항상 침묵으로 우레와 같은 사자후(獅子吼)를 설함 없이 설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마음을 내지 않을 수 없다. 말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마음을 내되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물었고 수보리는 대답했다. 그것은 철저히 머무름 없는 물음이고 머무름 없는 답변이다. 단순히 크다고만 답했다면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단순히 크다고만 했다면 그것은 ‘이생기심(마음을 낸 것)’이지만, 그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응무소주(머무는 바 없음)’가 설명 되었다. 큰 이유는 몸이라는 것은 몸이 아니기에 큰 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큰 몸이라는데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큰 몸일 수 있는 것이다.
아래 산스크리트 원문의 답변을 들어 보면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세존께서 몸, 몸이라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것은 몸이 아니며, 몸 아님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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