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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무위복승분
무위의 복은 수승하다
無爲福勝分 第十一
須菩提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數 何況其沙 須菩提 我今 實言 告汝 若有善男子 善女人 以七寶 滿爾所恒河沙數 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 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佛告 須菩提 若善男子 善女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 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다면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 모든 항하의 모래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항하의 수만 하여도 셀 수 없이 많겠거늘 하물며 그 모래이겠습니까”
“수보리야,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너에게 이르노니,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칠보로써 저 항하강 모래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그가 얻는 복덕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이 앞에서 말한 복덕보다 더 뛰어나리라.”
무위복승분에서는 함이 없는 무위의 복이 유위의 복덕에 비해 얼마나 뛰어난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 하나만이라도 올바로 받아 지니도록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무위의 복덕은 그 어떤 세속적이거나 물질적인 복덕보다 더욱 뛰어남을 설하고 있다.
이 말의 뜻을 잘 알 수 있어야 한다. 무조건 금강경의 사구게 가운데 하나를 남에게 잘 설명해 주는 것만으로 무위의 복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만을 가지고 무위의 복이 수승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경전 사구게를 수도 없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줬다면 그것만으로 완전한 무위복을 성취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 받아 지니고 그것을 설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받아 지닌다는 것, 수지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수지하지 못하고 다만 남을 위해 알려주기만 한다고 그것이 그대로 무위의 복이 될 리는 없다.
그러면 금강경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사구게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며, 그 어떤 집착도 가져선 안 된다는 말이다. 일체 모든 상이 다 허망한 것임을 알아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금강경의 가르침을 수지한다는 것은 스스로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을 수지한 사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아상이 타파되어 있다. 이러한 금강경의 뜻을 수지한 사람이 어찌 남을 위해 설해 주고도 스스로 설했다는 상에 갇혀 있을 수 있겠는가. 어찌 스스로 남에게 설해 주었다는데 머무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이렇듯 금강경 사구게의 뜻을 스스로 잘 수지하여 일체의 상이 타파되고,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 수 있는 사람은 금강경의 게송을 남에게 설해주고도 설해주었다는 상이 남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구게의 게송을 남을 위해 설해 주는 행위 자체가 무위의 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수지하지도 못한 채, 스스로 온전히 깨달아 알지도 못한 채, 아무리 많은 경전이나 사구게를 남을 위해 연설해 준다고 한들 그것이 유위의 복이 되기는 할 지언정 무위의 수승한 복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금강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스스로 수지하여 남을 위해 연설해 주었을 때는 무위의 수승한 복덕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금강경의 사구게 자체가 무위의 행을 설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위의 머무는 바 없는 행을 찬탄하는 것이라 하겠다.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다면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 모든 항하의 모래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항하의 수만 하여도 셀 수 없이 많겠거늘 하물며 그 모래이겠습니까”
“수보리야,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너에게 이르노니,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칠보로써 저 항하강 모래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그가 얻는 복덕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이 앞에서 말한 복덕보다 더 뛰어나리라.”
이 분에서는 금강경의 사구게를 수지하고 위타인설하는 공덕은 일체의 물질적인 유위의 복덕에 비해 더욱 뛰어난 무위의 복이 된다고 말함으로써 법보시의 공덕이 얼마나 수승한 것인가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항하강은 인도의 갠지스강을 말한다. 항하사란 항하의 모래란 뜻이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수량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 갠지스강의 모래의 수가 얼마나 셀 수 없이 많은가를 설하면서 그렇게 많은 항하강의 모래 수만큼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가득채워 보시하는 무량한 물질적 보시보다도 금강경의 가르침을 스스로 수지하고 위타인설하는 복덕이 더욱 뛰어남을 비유를 통해 들어 보이고 계신다.
항하강의 모래 수만큼 셀 수 없이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가득 채운다면 그것이 얼마나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물질적 보시가 될 것인가. 도저히 우리들의 상상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양이며 복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많은 양으로 보시한다면 이는 분명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복이 될 것이며, 그 복덕의 결과는 엄청난 양으로써 우리에게 보상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것은 엄연한 인과의 법칙이다.
천원을 보시하면 천원 만큼의 복이 되며, 만원을 보시하면 만원 만큼의 복이 된다. 백만원, 천만원을 보시하면 분명 그만큼의 복이 쌓여 언젠가는 그 결과로써 복된 삶을 보장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복은 유위의 복이다. 스스로 백만원을 보시하고 ‘백만원의 보시’란 상이 남게 된다면 그것은 유위의 복이다. 유위의 복은 계산이 철저하다. 백만원의 보시를 했다면 백만원의 결과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위의 행이 되었을 때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행한 보시는 같은 백만원이지만 그 복덕의 결과는 무위인가 유위인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이 분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뜻은 두 가지로 나누어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무위와 유위의 복에 대한 이해이며, 둘째는 물질적인 복과 법보시의 차이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위와 유위복에 대한 이해이다. 그것을 이 분에서는 무위를 법보시로, 유위를 물질적인 칠보의 보시로 대변시켜 놓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왜 그러한가. 물질적인 보시를 하면서도 무위로써 행할 수 있고, 금강경 사구게를 들려주는 법보시를 하면서도 유위로써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시하느냐가 아니라 무위로써 했느냐 하는 점이다.
바로 그 점을 잘 새길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법보시 즉 금강경 사구게의 보시를 내세운 이유는 금강경 사구에 안에 담긴 의미가 바로 ‘무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강경 사구게를 남에게 설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수지하여 무위의 참뜻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다시말해 이 경의 깊은 속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지 겉으로만 이해해서는 그 참 뜻을 놓치기 쉽다는 말이다. 얼핏 들어서는 물질적인 수많은 보시보다 법보시가 더욱 중요하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질적 보시보다 금강경을 들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그러다보니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금강경이 배포되었다. 수많은 양의 금강경이 인쇄되고 사경되었으며 설법되어져 내려왔다. 물론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금강경의 배포와 위타인설은 물론 큰 복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유위의 복에 멈춰서서는 안 된다. 단순히 금강경을 많이 인쇄하여 배포하고 많은 이들에게 읽히도록 하는 일은 유위의 법보시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금강경의 한 구절만이라도 스스로 밝게 이해하여 함이 없이 위타인설할 수 있다면 그 공덕이 앞의 공덕보다 더욱 뛰어나다. 금강경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공덕보다 스스로 올바로 이해하고 수지하여 단 한 사람에게 그 뜻을 나누고 이해시키는 것이 더욱 큰 복덕이 된다는 말이다.
또한 이렇게 무위로써 금강경을 수지하고 위타인설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물질적인 보시를 하더라도 그대로 무위의 뛰어난 복덕이 될 수 있다. 그는 칠보가 아닌 그 어떤 것으로써 보시를 행하더라도 무위의 뛰어난 복덕을 성취한다. 문제는 물질적인 보시냐, 법보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칠보로써 삼천대천세계를 채워 보시하느냐, 게송 하나를 남에게 알려주느냐가 아니다. 그것이 무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이 무위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바로 ‘금강경의 게송’이다. 그렇기에 금강경의 게송 하나라도 일러주는 것이 뛰어난 복덕이 된다는 말이다.
사실 금강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깨달은 자는 따로이 보시를 할 것도 없다. 금강경의 뜻을 스스로 수지하여 무위의 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존재 자체가 무위의 뛰어난 보시가 된다. 그에게는 보시라는 말 자체도 성립되지 않는다. 보시라는 말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는 행위가 아닌가. 그러나 참된 보시는 ‘누가’도 없고, ‘누구에게’도 없으며, ‘무엇’도 없는 것이다. 무위의 보시는 바로 이러한 삼륜이 청정한 보시이며, 무주상의 보시이다.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는 보시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시에는 보시하는 ‘주체’도 사라지고, 보시를 받는 ‘대상’도 사라지며, 보시할 ‘것’도 사라진다. 이 세 가지가 사라진다면 ‘보시’라는 말 또한 필요 없는 군더더기가 될 뿐이다. 그는 다만 존재할 뿐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대로 보시를 대변하고 있으며, 지혜를 대변하고 있고, 깨달음을 대변하고 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머무름이 없는 무위의 함이 없는 행위이다. 그것이 참된 보시이다.
참된 보시는 이와 같이 바른 지혜가 바탕이 된다. 지혜가 구족되지 않은 보시는 무위의 보시가 아니고, 무위의 복덕이 아니다. 보시가 그대로 지혜이며, 지혜가 그대로 보시이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란 금강경의 가르침에 대한 온전한 이해이다. 즉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지혜이며, 범소유상 개시허망의 지혜이고, 아상 타파에 대한 지혜, 금강경 사구게의 지혜이다. 금강경의 가르침, 금강경의 사구게를 온전히 수지한 이는 그 존재 자체로써 완전한 지혜의 완성이며, 완전한 복덕의 구족이다.
이 분에서는 바로 이 점을 밝히고 있다. 금강경 사구게 하나만을 온전히 수지하여 위타인설할 수 있다면 그것이 그 어떤 유위의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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