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1분 법회인유분 강의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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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과 마음공부

금강경 1분 법회인유분 강의

목탁 소리 2009. 8. 26.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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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법회인유분
법회가 열리게 된 연유

法會因由分 第一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俱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1250인의 큰 비구 스님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공양 시간이 되자, 가사와 발우를 수하시고 사위성에 들어가시어 차례대로 탁발을 하신 다음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하셨다. 공양을 마치시고는 가사와 발우를 제자리에 놓으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가부좌를 결하시고 몸을 곧게 세운 뒤 입가에 마음을 집중하시고서.)

법회를 열게 된 연유를 알리는 바로 이 부분, 제 1분이 금강경의 서분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금강경을 주해하신 많은 선승들께서는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부처님 최상의 설법이며 32분까지의 모든 가르침이 사실 이 제 1분에서 다 설해 마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계실만큼 제 1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언뜻 보면 아무 것도 설한 것이 없고, 우리가 공부해야 할 만한 그 어떤 가르침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저 평범한 부처님의 일과를 잠깐 이야기 한 것을 가지고 그렇게 거창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이러한 부처님의 일과를 단순하게 겉모습만 본다면 깨달음의 한 줄 작은 빛도 보기 어려울 것이지만, 마음의 눈으로 이러한 하루 일과를 온전히 살고 계시는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다면 수많은 선사 스님들의 그러한 고결한 안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마음의 눈을 맑게 씻고 2500여 년 전 부처님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그 마음을 살짝 들여다 보도록 하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여시아문’ 경전을 몇 번이라도 독경하고,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경전의 앞 부분에 늘상 등장하는 이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말은 경전이 부처님께서 스스로 쓰신 것이 아니라 법문을 들은 제자가 부처님께 들은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경전은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이신 아난존자에 의해 암송되고 옮겨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시고 20여 년 간을 홀로 전법의 길을 걸으셨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나고 나니 가르침을 배우려는 제자들도 나날이 많아지고, 또한 부처님의 연령 또한 많아지고 있었기에 제자들이 시자를 둘 것을 간곡히 권유하셨고, 부처님께서는 이윽고 허락을 하셨다. 제자들이 가만히 살펴보니 아난 존자는 총명하며 기억력도 뛰어나고 성품도 온화하였으며 외모도 출중하고 또한 부처님의 사촌동생인지라 부처님을 곁에서 시봉하기에는 적임자로 판단되었다.
부처님께서 29세에 출가하시고, 35세에 성도하셨으며, 55세 즈음에 비구 아난을 시자로 두었으니 아난은 부처님께서 80세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약 25년간을 곁에서 시봉하였다. 가장 오랜 기간 부처님 시봉을 하다보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아난이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을 하시자마자 상수제자인 가섭존자는 아난존자와 우파리존자를 위시하여 500아라한을 모아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게 되었다. 물론 그 때 부처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던 아난 존자의 역할이 중요하였을 것임은 분명하다. 부처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은 아난 존자가 가르침 즉, 법을 담당하고, 출가하기 전에 이발사였던 우파리존자가 처음 출가하는 수행자들의 머리를 깍아 준 인연으로 율에 대하여 가장 많이 들었기에 율을 담당하여 결집을 이루게 된 것이다.
경전을 결집하는 방법은 아난이 먼저 일어나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여러 대중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 때 아난은 언제라도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시작함으로써 내 생각대로 부처님 가르침을 함부로 이야기 하지 않고, 부처님께 들었던 사실만을 온전히 대중에게 이야기 하고자 하였다. 이 사실은 불교 경전들이 비교적 지금에 이르기까지 큰 혼란됨 없이 잘 이어져 내려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한 가지 말을 들었을 때, 백이면 백 다 제각기 자기 색안경으로 걸러 알아듣기 마련이다. 자기 판단과 고정관념이 개입되기 쉽고 그렇게 되면 특히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는 데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난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판단이 개입됨이 없이, 아무런 가감도 없이 그대로 부처님께 들은 것들만 있는 그대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이 무엇을 말할 때 대부분 ‘내 말’인 것처럼 이야기하기 쉽다. 물론 내 말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말은 사회에서, 학교에서, 책에서, 스승님들에게서 얻어 들은 말들이다. 그런 것들을 우린 오직 내 잣대, 색안경에 비추어 걸러내어 ‘내 식대로’ 조합하는 역할 정도를 할 뿐이다. 그리고는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 얻어 들은 것을 ‘내 생각’이라고 고집하며, ‘내 말’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곤 한다. 물론 자신 스스로도 그것이 온전한 내 생각인 줄로 착각하고, 옳은 생각인 줄로 착각을 하고 산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 혹은 부처님 말씀을 누군가에게 들려 줄 때, 아난 존자의 이런 겸손함과 진실함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말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또한 말을 순수하고 참되게 전달할 수 있으며, ‘내가 옳다’라는 아집와 아상이 비워진 텅 빈 진실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이야 그저 입가에 떠오르는 말들을 아무런 걸러짐 없이 그것도 자기 생각인 양 마구 끄집어내다 보니 여러모로 번거롭고 복잡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에게 주워들은 내용을 내 말인 양 마구 토해 내다 보니, 자신 내면에서 침묵과 명상을 통해 향기롭게 피어오르는 진실을 더욱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팔만대장경이라는 수많은 경전을 이렇게 생생한 부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었던 데는 아난의 역할이 가히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가감 없고 진실된 아난의 음성은 이 다음 구절에서부터 더욱 빛을 발한다.

한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1250인의 큰 비구 스님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공양 시간이 되자, 가사와 발우를 수하시고 사위성에 들어가시어 차례대로 탁발을 하신 다음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하셨다. 공양을 마치시고는 가사와 발우를 제자리에 놓으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가만히 이 광경을 그려보라. 1250인이라는 대식구가 저마다 보리수나무 아래 차분히 명상에 들어 있다. 아마도 아침 햇살 내리기 전 새벽녘에 밝게 깨어 저마다 좌선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공양 때가 되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처님을 위시하여 모든 비구스님들께서 가사를 수하고 발우를 들고는 차례로 줄지어 마을로 향한다. 배가 고파서 조금 빨리 걷고 싶더라도 ‘배고픈’ 마음을 관하며 차분히 대열에 서서 한 발 한 발 차분히 무겁고도 신중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을 것이다. 1250인이라는 수많은 스님들이 걷고 있지만 그 걸음 걸음에는 한없는 고요와 침묵만이 향기롭게 대열을 감싸고 있다.
사위성 큰 마을에 다다르자 스님들은 차례 차례 골목 골목으로 나뉘어 부처님께서 설법해 주신 것처럼 분별심을 놓고 부잣집, 가난한 집을 따질 것 없이 처음 정한 집에서부터 차례로 일곱 집을 걸어 탁발을 한다. 어쩌면 부처님께서 사시 때 일종식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시간에 맞춰 집 앞에서 음식을 준비해서는 부처님과 그의 청정한 제자들이 오기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아직 승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스님들은 저마다의 탁발한 음식이 다름을 보고 분별심을 일으킬지 모른다. 음식의 맛과 양 또 그 종류에 따라 때로는 탐심이 올라오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곧 다른 많은 스님들이 그렇게 하시듯 그 마음을 관찰하고는 분별심을 놓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고요히 탁발을 하시고는 다시금 본래 자리로 돌아오셔서 저마다의 자리에 앉아 공양을 할 것이다. 공양을 하기 전에 잠시 저마다 침묵으로써 명상을 할 것이다. 이 음식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수많은 인연, 온 우주 법계의 인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안으로 안으로 은은히 피어오르게 할 것이다. 행여 몸이 약하거나 병이 들은 도반이 곁에 있다면 내 발우에 담긴 몸에 좋은 음식이나 고기 등을 나누어 줌으로써 약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때때로 맛에 탐착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를 잘 관하며 고요히 공양을 할 것이다. 공양이 끝나면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금 고요히 선정에 들 것이다.

이러한 아난의 묘사에 어디 시끄럽고 복잡스런 느낌이 있는가. 이 많은 스님들이 일상을 살아가지마는 어느 한 구석 시끌벅적한 광경이 아닌 한없이 고요하고 여법한 광경일 뿐이다.
부처님의 시자 아난은 항상 그림자처럼 부처님 옆에 서 있다. 부처님께서 탁발을 나가실 때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부처님을 따르고, 공양을 하실 때 말 없이 옆에 앉아 함께 공양하며 항상 부처님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한 부처님에 대한 지켜봄이 있었기에 부처님의 일상 그 자체가 얼마나 큰 깨달음의 순간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우리가 보았을 때 시시콜콜해 보이는 이런 사소한 일상까지 아난존자는 경전에서 소중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수많은 선사 스님들께서 이 광경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으며 부처님 최상의 가르침이라고 하셨던 연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하루를 돌아보면 어떠한가. 잠이 안 깨니 자명종도 소리 큰 것을 사다가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출근하기 직전 빠듯할 만한 시간에 맞춰놓고 잠에 든다. 시끄런 자명종 소리에 일어나지 못해 푹 눌러 놓고는 또 자다보니 이만 저만 늦은 게 아니다. 그러니 아침이 얼마나 바쁘겠나. 정신없이 시계 보면서 씻고 화장하고 대충 밥 먹고, 아니 아마도 아침밥도 굶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서 후다닥 뛰쳐나가 회사로 학교로 출근을 한다. 하루의 시작이 정신없으니 어찌 하루가 온전할 수 있겠는가.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저녁 때 동료들과 어울려 한 잔 걸치고 집에 들어와서는 쓰러지듯 잠이 들곤 한다. 다 이렇지는 않겠지만 정신없이 마음 챙기지 못하고 사는 것은 이와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이런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 금강경 제 일분에 나오는 부처님의 평화롭고 고요한 삶과 우리의 허둥지둥 정신 없는 삶을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하루 일과는 모든 순간 순간이 그대로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밥 먹고, 걷고, 씻고, 앉는 이 모든 일들이 어느 하나 소중한 수행 아닌 것이 없으니 따로이 수행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다. 어느 한 가지 사소하고 덜 중요한 일이 없이 모든 일과가 그대로 소중한 깨어있음의 행이다. 우리들은 중요한 일이 있고 사소한 일이 있으며,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사소한 일들은 일일이 신경을 쓰지 못하곤 한다.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지간한 사소한 일이나 과정에서의 소소한 일들은 그냥 흘려 보내기 쉽다. 회사에 가야 된다는 목적 때문에 집에서 밥 먹고, 버스를 타고, 회사로 걸어가는 그런 일상은 사소하고 귀찮은 일 쯤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행에 있어 사소하고 중요한 분별은 없다. 낱낱의 모든 일상은 그대로 하나의 소중한 깨달음의 행이 된다.
밥 먹는 그 사소한 일상이, 밥 먹는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밥 빨리 먹고 나서 좌선에 들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오직 밥 먹는 그것이 그대로 목적이다. 밥 먹는 순간 온전히 밥만 먹는 것이다. 밥 먹으며 다른 생각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과거를 떠올리며 그렇게 번잡하지 않고, 오직 밥만 드실 뿐인 것이다.
밥을 먹는 순간, 발을 씻는 순간, 걷는 순간, 탁발을 하는 순간, 매 순간 순간 몸과 마음이 온전히 거기에 있다. 매 순간 도착해 있다. 어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이미 도착해 있기 때문. 도착지란 바로 지금 이 순간일 뿐, 또 다른 도착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도착하려고 애쓸 것도 없고, 깨달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이 괴로운 세상 잘 살아 보려고 애쓸 것도 없이 매 순간 순간 도착해 마친 것일 뿐이다. 그러니 더없이 평화롭고 향기로울 수 있는 것이다. 걷는 순간 오직 걸을 뿐, 탁발을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고, 발을 씻는 순간 오직 씻을 뿐, 빨리 씻고 좌선에 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낱낱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좌선이고 깨어있음이다. 모든 순간 순간 더 이상 도달할 곳이라고는 없다. 그 순간이 가장 온전한 순간이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들이 그렇게 찾아 나서던 궁극의 순간인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라. 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려 하고, 무엇인가 목적 달성을 위해 애쓰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욕망과 집착의 사슬에 빠져 한 시도 만족하지 못하며, 한 시도 도착의 평화로움을 맛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바로 이러한 점을 일깨우고 계신 것이다.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일과라도 매 순간 순간의 삶이 지금 부처님의 삶에서처럼 온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마조스님께서 말씀하셨던 ‘평상심이 도’라는 말 또한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선사 스님들께서 부처님의 일상을 언급하신 금강경 제 일분을 두고 깨달음 최고의 순간이며 최상의 설법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똑같은 일상이라도 그 일상이 깨달음의 순간이 될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중생들의 평범한 일과가 될 것인가 하는 데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똑같은 일상이라도 온전히 그 순간 집중을 하여 깨어있게 되면 그것은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늘상의 일과가 깨어있지 못한 우리들의 안목으로 보았을 때, 금강경의 제 일분이 얼마나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겠나. 그저 우리들의 삶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의 눈을 맑게 씻고 2500여 년 전 부처님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그 마음을 살짝 엿보게 되면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모든 일과가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겉모습은 서로 같더라도 그 내면에서는 하늘과 땅만큼의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도 배 고프면 밥 먹고 잠 오면 자고 역대의 고승들도 지금의 우리들도 모두 배 고프면 밥 먹고 잠 오면 자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듯 평범하고 똑같아 보이는 일상일지라도 내면에 중심을 세우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보내느냐 그저 정신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느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평화롭게 깨어있는 낱낱의 일들이 곧 좌선을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모든 일상을 살아감이 그대로 좌선하고 앉아 마음을 집중하는 것과 둘이 아니라고 말이다. 생활과 수행이 둘이 아니라고 말이다.

가부좌를 결하시고 몸을 곧게 세운 뒤 입가에 마음을 집중하시고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구절인데, 아쉽게도 우리가 많이 독송하고 있는 구마라집의 번역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일대일로 직역하는 것을 중시하는 현장스님의 번역이라던가, 진제, 보리유지 등의 다른 한역 금강경본에서는 모두 번역이 되고 있으며, 빠알리어 경전에서도 이 부분은 잘 드러나 있음을 볼 때, 분명 이 부분은 금강경의 원본에서는 나타나 있는 경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금강경 제 일분에서 말하고 있는 부처님의 일상 하나하나가 그대로 가부좌를 결하고 앉아 마음을 집중하는 좌선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이 부분에서는 말하고 있다. 앉아서 하는 좌선은 중요하고 법 먹고, 탁발하고, 발을 씻는 등의 일은 중요치 않은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낱낱의 행위가 그대로 마음집중의 수행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양이 끝나시고 부처님께서는 여느 때처럼 가부좌를 결하시고 몸을 곧게 세운 뒤 입술 바로 위쪽으로 호흡이 들고 나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시며 앉아 계신다. 호흡이란 지금 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스님은 이 부분을 ‘주대면념’이라고 하여, ‘전면에 마음을 집중하시고서’라고 해석을 했다. 빠알리어에서는 ‘전면’이라고 해석한 부분을 원본에서 ‘무카(mukha)’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얼굴, 혹은 입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하고, 산스크리트본에서도 무카는 입이나 얼굴을 나타낸다고 한다. 전후 사정을 보았을 때 아함경 등에서 나오는 사념처 수행에 빗대어 ‘얼굴에 마음을 집중한다’거나 ‘전면에 마음을 집중한다’는 해석 보다는 ‘입술 위 부분의 호흡이 들고 나는 곳에 마음을 집중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본다. 어쨌거나 여기에서는 호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순간 온전히 마음을 집중하여 깨어있다고 하는 점에 말씀의 중심을 새겨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금강경의 제일분에서는 부처님의 평범한 하루 일상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가르침을 열고 있다. 우리들의 삶과 부처님의 삶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똑같이 먹고 자고 걷는다. 그러나 부처님은 깨어있는 정신으로 오직 그것을 할 뿐이며, 오직 매 순간 순간 최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매 순간 다른 곳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달해 있기 때문에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 또한 부처님의 하루 일과를 보며 우리의 삶도 부처님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된다. 외양상으로는 그리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말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내면의 빛을 현실에 피어오르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들 또한 그대로 깨달음을 삶 속에서 피어오르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꾸 어디로 갈까 망설이지 말고, 자꾸만 욕망을 일으켜 도달할 곳을 찾지 말고, 번뇌와 집착으로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부처님의 삶과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을 일러주고 계신 것이다.

매 순간 순간 깨어있으라. 그것이 부처님의 행이고, 금강경의 실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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