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대승정종분
대승의 바른 종지(대승보살의 나아갈 길)
大乘正宗分 第三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則非菩薩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인, 이른바 알에서 태어나는 것,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 화현하여 태어나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실은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 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승정종분은 ‘대승의 바른 종지(宗旨)’란 뜻으로 금강경이라는 이 경전의 가르침의 요지가 핵심적으로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정종’이란 바르고 으뜸 된다는 뜻으로 이 부분이야말로 대승불교 경전인 금강경의 종지를 밝히는 핵심이 되는 장이다.
보통 대부분 경전의 구성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이 그것이다. 서분은 육성취(六成就)라고 하여 경이 설하여지게 된 연유를 여섯가지로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며, 유통분은 정종분에서 설하신 교법을 제자들에게 부촉하여 후세에 널리 유통되도록 하기 위한 부분이고,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본문이 바로 정종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 번째 분의 명칭이 대승정종분인 것은 금강경의 본문인 정종분 가운데에서도 그야말로 정종인 부분, 즉 핵심 중의 핵심에 해당되는 부분이므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이 금강경 전체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고 사실 이 제 3분 이후에 나오는 많은 설법들은 이 대승정종분의 내용을 풀어 해설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1분에서는 부처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임으로써 가르침이 그대로 삶 속에서 녹아들어 있는 모습을 설함이 없이 행동으로 설하셨다면, 이 부분에서는 부처님께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을 설법하고 계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부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發心) 한다.
보살마하살에서 마하살이란 마하살타의 준말로 마하는 크다는 대(大)의 의미이며, 살타는 중생 혹은 유정(有情)의 의미로 마하살타는 큰 중생 즉 대유정 혹은 대사(大士)라고 번역되는 보살의 별칭이다. 보살마하살은 보살의 크고 위대한 덕을 높여 붙이는 존칭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앞 분 선현기청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 선녀인이 부처님께 질문하는 내용에 대한 답변이 이 분 대승정종분인데, 바로 이 부분 보살마하살과 앞 분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자라는 부분이 산스크리트 원본에서는 '보디사뜨와야나 삼쁘라스티따(bodhisattva-yana-samprasthitena)'라고 하여 같은 원어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말해 보살마하살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 선녀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 선녀인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답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와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발심한 모든 선남자 선녀인들이 곧 보살마하살이라는 점이다. 즉, 이미 깨달음의 직전에까지 이른 보살만 보살이 아니라, 단지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는 초발심을 낸 모든 남녀 신도들이 그대로 보살마하살일 수 있다는 점이다. 화엄경이나 법성게의 '초발심이 곧 바른 깨달음' '초발심시변정각'이라고 했던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금강경은 이미 상구보리라는 깨달음에 거의 이르러 하화중생을 실천하기 위한 보살들을 위한 설법인 동시에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발심한 모든 남녀 신도들을 위한 설법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부분은, 의역에 중점을 둔 구마라집의 한역을 보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문맥을 보더라도 그렇고, 빠알리어 경전이라거나 현장의 해석(發趣如是之心)을 참고하였을 때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발심(發心)’으로 해석하는 것이 알맞다고 여겨진다. 물론 항복받는다는 의미나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것은 의미상 크게 어긋나지는 않으니 어떤 해석도 무방하다고 본다.
앞의 제 2분에서 수보리의 질문, 즉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에 대하여 이 장 대승정종분에서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답변하고 계신 것이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인, 이른바 알에서 태어나는 것,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 화현하여 태어나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하리라.
다시 말해 부처님 말씀은 일체 모든 중생들을 다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하겠다는 대 서원의 발심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모름지기 대승 보살의 몫은 하화중생의 마음을 내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면 부처님 답변의 의미를 살펴보기에 앞서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라고 말씀하신 아홉가지의 중생의 종류, 즉 구류중생(九類衆生)에 대해 먼저 그 뜻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들이 일상에서도 쉽게 사용하는 단어인 ‘중생’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디까지의 범위를 의미하는지 여기에서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보통 우리들은 우리 인간들만 중생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짐승들까지를 중생으로 본다거나 하지만 경전에서는 이상에서 언급한 아홉가지의 종류를 모두 중생으로 분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보통 구류중생 중 처음의 네 가지인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으로 분류하는 것은 온갖 중생들의 태생 방식에 따른 분류라고 할 수 있다. 난생(卵生)은 알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조류 등 알에서 태어나는 일체 모든 것들을 말하며, 태생(胎生)은 모태(母胎)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온갖 짐승들이나 사람 또한 이 곳에 속한다. 습생(濕生)은 습기(濕氣)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모기, 지렁이, 온갖 벌레들이 이에 속하고, 화생(化生)은 모태나 알 등의 태어나는 원인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업력에 따라 화현(化現)하여 태어나는 것으로 천상의 신들이나 지옥의 중생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그 다음의 두 가지 종류인 유색(有色), 무색(無色)의 분류는 형상의 유무에 따른 분류로서 유색은 모양과 빛깔을 가진 중생으로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에 사는 이를 가리키며, 무색은 모양과 빛깔이 없는 신들로써 무색계(無色界)에 사는 이를 가리킨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의 종류인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분류는 인식의 유무에 따른 분류로서 유상은 인식작용이 있는 중생으로 무상천과 비상비비상처천을 제외한 나머지에 사는 중생이고, 무상은 인식작용이 없는 중생으로 색계의 세 번째 하늘인 무상천[무상유정천]에 사는 중생이며, 비유상비무상은 인식작용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중생으로 비상비비상처천[비유상비무상천]에 속하는 신들을 말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보살마하살의 수행자들에게 구류중생, 즉 일체 모든 중생들을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하리라는 발원을 해야 한다고 설하고 계시는 것이다. 무여열반이란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고도 하며 일체 모든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 다 끊어져 마지막 육신까지도 소멸하여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궁극의 경지로서 완전한 열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유여의열반이란 일체의 번뇌를 끊어 없앴지만 아직 육신을 남겨 둔 열반을 말하는 것으로,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남음이 없이 그 육신마저 없어졌을 때를 무여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승정종분이라 대승의 바른 종지가 담겨 있으며, 이 금강경의 핵심 요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이 분에서 아마도 금강경을 공부하는 많은 수행자들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마음을 닦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법문을 기대했을 터인데 이러한 부처님의 답변이 한편 실망스러울수도 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질문과 좀 맞지 않는 답변이 아닌가 하고 의문스레 생각되는 분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경전이 대승불교가 아닌 근본불교의 경전이었다면, 또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 선녀인’들을 대상으로 설법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또 수보리를 위시하여 이미 부처가 되기 직전의 깨달음에 이르렀지만 열반적정의 ‘저 언덕’으로 가버리지 않고 ‘이 언덕’에 남아 하화중생의 서원을 세우려는 ‘보살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들에게 행하는 법이 아니었다면 부처님의 답변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 우리들처럼 금강경을 공부하고자 마음을 내는, 그러나 아직 깨닫지 못한 우리네 중생들을 대상으로 설법을 하셨다면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하여 우리들 근기에 맞는 좀 더 자세한 설법을 들을 수 있었을른지 모른다. 그러나 수보리의 질문의 핵심은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즉,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한 이들 이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고 할 수 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부처님께서 이미 수많은 설법을 하셨고, 수많은 가르침과 실천 방법에 대하여 이미 많은 법문을 해 주셨다. 다만 이 경전에서는 대승의 종지, 다시 말해 보리심을 발해 보살의 길로 들어선 대승불교의 수행자들에게 대승의 종지, 보살의 종지를 말해주고자 하셨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다.
보살의 공통된 서원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지만, 지금 질문하고 있는 수보리는 거의 깨달음을 이루신 분으로써 상구보리를 원만하게 성취하고 계신 분이다. 다만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저 언덕으로 가기를 잠시 미루고 이 언덕에서 하화중생의 발원을 실천하기 위해 남아 있는 것다. 또한 그러한 원력의 수행자를 대승불교에서는 보살, 혹은 보살마하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따로이 상구보리를,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수행해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하는지를 설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를 비롯하여 ‘보리심을 발해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 선녀인’들이 보살의 길을 온전하게 걷기 위해서는 하화중생의 발심이 보살에게 있어서는 생명과도 같이 중요한 것임을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보살을 부처라 부르지 않고 보살이라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발심과 원력이 있기 때문임을 다시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일체 중생 제도의 서원이야 말로 보살을 보살일 수 있게 해 주는 보살의 요건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대기설법인 것이다. 설법을 듣는 상대의 근기에 맞게, 그 내면의 깊은 뜻을 온전히 헤아려 그 핵심을 바로 짚어 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 입장에서는 금강경의 핵심이라는 이 내용을 보고도 그다지 깊은 신심을 일으키지 못한다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실망감을 안고 금강경을 덮어 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속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어차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많은 경전은 이와 같이 부처님과 어떤 특정한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 졌던 대기설법들을 모아 기록된 것이다. 내게 한 설법이 아니니 나중에 내가 보살의 길로 들어섰을 때, 내가 수보리처럼 깨달음을 얻어 이 질문이 나의 질문이 될 때, 그 때 금강경을 다실 열어 봐도 되지 않겠나 하는 분별은 그냥 놓아버려도 좋다. 앞 장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금강경은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들을 위한 설법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우리들 즉 보살이 되고자 노력하고 초발심을 일으킨 바로 현실의 우리들에게도 훌륭하고 온전한 설법이 된다. 경전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설법의 표현방식이 다를 수 있을 뿐이지 궁극에서 그 내용은 온전한 진리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길로 올라가더라도 궁극에서는 정상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실망감을 조금이라도 느끼셨던 분이시라면 이제부터 나오는 부처님의 설법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이 부분이 제 3분의 설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진리를 향해 정진하고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또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수행해야 하며, 살아야 하고 발원을 성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소중한 법문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실은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
이 대목이 이 제 3분의 핵심이면서 또한 금강경의 핵심이고, 나아가 모든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말만을 바라보면 안 된다. 그 깊은 의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잘 관해볼 수 있어야 부처님 말씀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이 부분이 불교의 핵심이라고 하는지 하나 하나 짚어 보자.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보살의 길로 들어선 이들에게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으로 일체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해야 한다고 발원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말이 방편법(方便法)을 말하는 것이라면 지금 이 부분은 근본법(根本法)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 제도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어느 한 중생도 제도되지 않았음을 깊이 통찰하여 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말은 수없이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수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전달하고 있다. 이 말 속에서 무분별(無分別), 무아(無我), 연기(緣起), 공(空), 중도(中道)의 이치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중생들은 열반에 들지 못하고 수없이 많은 번뇌와 괴로움, 불행 속에서 헤매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환상이며 거짓이고, 신기루이며, 꿈이고, 물거품과도 같은 것일 뿐, 이 세상 그 어떤 이들도 본질적으로 괴롭지 않다. 다만 꿈 속에서, 환상 속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다만 이것이 환상이고 신기루임을, 꿈임을 그저 알기만 하면(반야) 더 이상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이미 제도되어 있고, 열반의 저 언덕에 이미 도착해 있는 것이다. 다만 환상과 같은 탐진치 삼독에 빠져 환상과 같은 괴로움에 허덕이며 환상과 같은 열반을 찾아 헤매고 있을 뿐인 것이다. 중생들의 불행이 환상이기 때문에 보살들의 구제 또한 환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모든 중생들은 이미 구제 되어 있다. 새삼스럽게 또다시 분별을 일으켜 누가 누구를 깨닫게 할 것도 없고, 구제할 것도 없는 것이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우리가 바라던 니르바나의 ‘저 언덕’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다만 모를 뿐. 무명(無明), 즉 어리석음으로 인해 이 삶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하고자 하는 말씀은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하화중생의 발원을 가져야 하지만 ‘함이 없이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중생을 저 피안의 세계로 인도해야 하지만 사실 그들은 중생이 아니며, 이미 인도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어서도 안 되고, 거기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걸림 없이, 집착 없이 발원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며, 발원의 성취라는 것 또한 성취가 아님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중생들이 느끼고 있는 불행과 괴로움이라는 것도 환상이지만, 더 나아가 제도되어야 할 중생도 환상이며, 제도해야 할 보살 또한 환상일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고정된 ‘자아’가 아니다. 제도해야 할 ‘중생’도 없고, 제도 해야 할 ‘나’ 또한 모두 공(空)하고, 무아(無我)인 것이다. 제도 하고 제도 받는 주체가 모두 공할진데 공한 가운데 일어난 불행이며, 괴로움이라는 관념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큰 허구에 불과한 것인가. ‘나’도 공이고 무아이며, 중생도 공이고 무아이며, 중생의 괴로움도 공하고 보살의 구제 또한 공한 것일 뿐이다.
나와 남을 분별할 것도 없고, 중생과 부처를, 생사와 열반을, 행과 불행을, 제도 받는 이와 제도하는 이를 분별할 것도 없이 이 세상은 본래부터 무분별이고 공이며 무아인 것이다. 그 어떤 한 쪽에도 치우치면 안 된다. 본래부터 극단은 있지 않다. 그렇기에 중도의 실천만이 무분별과 공 무아를 체득할 수 있게 해 준다. 다만, 이렇게 세상이 만들어지고 온갖 경계가 나타난 것은 다만 공한 가운데 꿈처럼 인과 연이 서로 화합하고 흩어지고를 반복할 뿐인 것이다. 인연화합의 법칙, 인과응보, 연기의 법칙에 의해 다만 꿈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할 뿐이다. 그러니 무아라는 말, 공이라는 말, 중도라는 말은 다시말해 연기법의 실상을 달리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정된 실체적인 존재가 아닌 연기되어진 존재, 인연화합의 존재이기 때문에 공이고, 무아라고 말하는 것이란 말이다.
이러한 이치, 진리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아(無我)’라고도 할 수 있다. ‘나’도 없고, ‘남’도 없고, 구제받을 사람도 없고, 구제시켜 줄 사람도 없으며, 그렇기에 온갖 번뇌며, 속박, 무명 또한 모두 고정된 실체적 관념이 아니며, 실제적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랬고, 대승불교가 출현할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아트만’이라거나, ‘푸드갈라’ ‘지바’ ‘뿌루샤’ 등의 ‘자아개념’을 설정하여 그것을 ‘영원불멸의 근본적인 존재, 생명자리’로써 이해를 하고 있었다. 부처님 당시에도 브라흐만의 ‘아트만’ 사상에 갇혀 있는 많은 이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주기 위해 ‘무아설’ ‘제법무아’를 말씀하셨지만, 수백년에 걸쳐 내려오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고정된 실체적 자아’를 상정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것은 온갖 부파와 사상가들 사이에서 온갖 다른 이름을 가지고 등장하여 집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통적인 아트만 사상을 무아로써 극복하셨던 것처럼, 대승불교 출현 당시 즉 금강경이 설해질 당시의 온갖 ‘자아’ 관념(푸드갈라, 지바, 뿌루샤, 아트만 등)들에 집착하고 있는 수많은 사상가며 수행자들에게 거기에서 벗어날 것을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음 구절에 가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구절에서 금강경의 가르침은 절정을 이룬다. 앞서 말씀하신 ‘모든 중생을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는 말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기도 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법무아에 대한 회귀이고, 근본불교에 대한 회귀이면서 대승불교의 파사현정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라 하겠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금강경이 설해질 당시 수많은 수행자와 사상가, 종교가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심지어는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부파에서 조차 고정된 ‘자아’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쉽게 말해 ‘나’ ‘나의 것’ ‘내 생각’ ‘내 몸’ ‘자아(atman)’ ‘중생(sattva)’ ‘영혼(jiva)’ ‘개아(pudgala)’ 등의 관념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나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며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확고하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관념도 내가 아니며, 본질이라고 할 수 없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계신 것이다. 일체 모든 관념과 모양 소견, 집착, 번뇌며 온갖 상(相)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마도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해 금강경을 공부한 많은 분들도 궁금증을 시원스레 벗어버리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한 해석은 아마도 금강경이 설해진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상가, 종교가, 철학가며 수많은 스님들에게 많은 의구심이 들게 했고, 그 결과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많은 해석으로 분분하게 펼쳐져 왔다. 그러다보니 금강경을 해설해 놓은 책들마다, 금강경을 설법하시는 스님과 법사에 따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해석은 제각기 다르며 통일되지 못한 실정이다. 물론 그 근본에 있어서의 내용이야 모두가 아상을 타파하는 무아의 실천, 연기, 공의 실천으로써 온전하게 전달되어 왔음은 다행한 일이다. 결국 다 다르게 해석될 수는 있지만 근본에 있어서 그 내용의 변질은 없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한 해석을 보다 분명하게 해 두는 작업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이는 곧 금강경 나아가 반야경 전체에 대한 해석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네가지 상, 사상(四相)에 대해 온전히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금강경을 설하게 된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근본불교, 초기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당시의 육사외도라든가, 브라흐만의 아트만 사상들을 논파하기 위해 연기법과 공의 해석을 ‘무아’라는 점에 치중하여 설명하였음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즉 아트만이나 자아관념에 집착해 있던 당시의 상황 때문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연기법과 공 무아 중도 등의 개념이 모두 동일한 근본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무아라는 단어를 수시로 채택하여 설법을 하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금강경을 설하는데 있어서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의 이해는 필수적이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대승불교가 막 태동할 때 많은 사상가며 불교 수행자들은 ‘자아’ ‘중생’ ‘영혼’ ‘개아’ 등의 온갖 실체적인 관념에 많이 집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약간씩은 다른 의미일지라도 모두 ‘실체적 자아’관념, 다시 말해 ‘무언가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데 불과한 것으로, 이 네가지 의미는 거의 동의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인데,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실체적 자아 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설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 하나 사상에 대하여 설명해 보도록 하자. 역사적인 상황에 비춰 설명하기 위해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금강경의 산스크리트 원문을 알아보는 일이다. 구마라집 역의 한문 원전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순서로 나와 있지만,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그 순서가, 아상, 중생상, 수자상, 인상의 순서로 등장하며, 그 원문을 보면 ‘atman(아상)', 'sattva(중생상)', 'jiva(수자상)', 'pudgala(인상)'라고 되어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다른 책의 설명을 보았을 때, 순서가 바뀐 것은 한문으로 번역할 때의 리듬과 운율을 맞추기 위해서 아와 인을 붙여 놓았을 뿐 그리 중요한 의미는 없다고 보여진다. 여기에서는 통상적이고 일반적인 번역에 맞춰 구마라집 번역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번역을 따르고 있지만, 산스크리트 원문과 현장의 번역을 참고하여 새롭게 해석한 각묵스님의 [금강경 역해]에 나오는 사상의 해석인 자아[아상, atman], 중생[중생상, sattva], 영혼[수자상, jiva], 개아[인상, pudgala]라는 해석을 채택하여 그 역사적 상황이 갖는 사상의 의미에 대해 살펴볼까 한다. 산스크리트 원문을 살펴보면 이 네 가지 상의 역사적 상황이 갖는 의미를 유추해 보기가 좀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우선 ‘아상’의 원문인 'atman'[자아]은 인도 전통 종교인 브라흐만의 아트만 사상에 대한 부정이다. 이는 흡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아트만을 부정하기 위해 무아(無我)법을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아트만이란 고정된 실체적 자아 관념으로 브라흐만에서는 윤회의 주체라고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는 고정된 실체적 자아관념, 다시 말해 고정된 실체로써 ‘나’를 상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브라흐만의 아트만 사상에 빠져 집착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아트만이라는 집착을 가져선 안 된다고 하는 설법이 바로 아상타파의 교설인 것이다.
두 번째 ‘중생상’의 원문인 ‘sattva’[중생]는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살아있는 모든 것’이란 의미로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모든 중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번째는 불교 내부적으로는 수행자들이 중생과 보살이라는 이원론적인 분별심에 빠져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나는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죽어있는 것들과는 다르다는 이원론적인 분별심에 빠져있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위로는 깨달은 이와 견주면서 난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는 상에 빠져 보살과 중생을 나누고 분별하는 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고, 아래로는 난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죽어있는 저 바위며 물 흙보다 우월하다는 분별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말로써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추어, 중생과 보살을 나누고, 생명 있고 없음을 나누는 어리석은 이원론적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설법이 중생상의 타파인 것이다.
세 번째 ‘수자상’의 원문인 ‘jiva’[영혼]는 ‘목숨’ ‘생명’ ‘영혼’이라는 말로써, 자이나교에서 ‘생사를 초월해 있는 존재’ ‘순수영혼’이라는 의미로 자이나교의 가르침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며, 지바라는 생사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한 순수영혼이 실체로써 존재한다는 상에서 벗어날 것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간을 초월하고, 생사를 초월하는 영원한 참생명이 있다는 상을 타파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자이나교 ‘순수영혼’설에 대한 반박의 교설이다. 자이나교의 ‘순수영혼’에 빠져 집착해서는 참된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다.
네 번째 ‘인상’의 원문인 ‘pudgala’[개아]는 ‘개인’ ‘인간’ 등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쓰이나, 부파불교의 한 부파인 독자부(犢子部)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의미하는 말로 유위법과 무위법의 중간자적 존재라고 상정하고 있으며, 여기에서는 이러한 생사를 초월한 윤회의 주체인 뿌드갈라가 존재한다는 상을 가지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초기불교의 교설을 살펴보면 윤회를 한다고 하면서 윤회의 주체로써의 실체가 있지 않다고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업의 결과’는 있으나 ‘업을 짓는 자’는 없다라고 하여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고 있지 않다. 이 문제, 즉 윤회와 무아의 문제는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모순이라는 논쟁이 진행중인데, 아마도 부처님 열반 후 훗날 부파불교 가운데 독자부에서 윤회와 무아의 모순을 고민하다가 윤회를 하려면 ‘실체적인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에서 ‘뿌드갈라’라는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인상의 설명인 본문에서 조금 벗어나는 듯 하지만 잠깐 무아와 윤회문제를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 금강경의 설법에서도 보듯이 독자부에서 말한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며, 그렇듯 윤회의 주체인 ‘뿌드갈라’(인상)를 상정하게 되면 그것은 곧 보살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잠시 무아와 윤회 문제를 살펴보면,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고정된 실체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언급해 두어야 한다. 윤회의 주체라는 것을 이름하여 유식불교에서도 ‘아뢰야식’이라고 붙여 놓긴 했지만 그 아뢰야식이 고정된 실체적 관념으로 붙인 것이 아니란 점을 이해해야 한다. 아뢰야식은 그야말로 업들이 모여 있는 업장이요, 장식인데, 그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제행무상의 한 모습일 뿐이다. 우리는 수많은 생을 이어가며 수많은 업을 짓고 받는다. 그러면서 업은 수없이 변하고 변하는 가운데에 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업의 모임’인 업장, 아뢰야식도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니까 이번 생에는 사람으로 윤회를 했다가 다음 생에는 축생으로도 태어나고 지옥에서도 태어나고 천신으로도 태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즉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이지만 그 윤회의 주체 또한 변화하는 ‘무아’ ‘공’ ‘제행무상’ ‘연기’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윤회의 주체를 딱 정해 실체화할 수 있겠는가. 윤회의 주체를 가지고 고정적인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나’라고 하는 것 또한 끊임없이 변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부파불교의 한 부파인 독자부에서는 생사를 초월한 윤회의 주체를 ‘뿌드갈라’라고 하여 실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뿌드갈라라는 상에 빠져 있는 어리석음을 타파하기 위해 인상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처럼 아상[자아], 중생상[중생], 수자상[영혼], 인상[개아]라는 말은 모두가 고정된 실체적 존재로써의 ‘나’를 상정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는 거의 동일한 개념, 동일한 의도로 쓰여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나’의 본질은 실체가 없이 인연따라 오고 가는 ‘무아’적 존재요, 공한 것일 뿐 그 어떤 실체적 자아관념을 만들어 거기에 빠져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 것이다. 다만 이렇게 네 가지 상을 말하고 있는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부파나 종교별로 이름만 다를 뿐 더 많은 ‘실체적 자아관념’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가장 보편적이고 널리 알려져 있는 관념이었기에 이 네 가지 상을 대표로 나열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 궁극적으로는 이 모두가 ‘실체적 자아관념’ ‘실체적인 나’를 내세우지 말라는 무아의 설법이요, 공과 연기의 설법인 것이다. 이렇듯 사상에 집착하면 보살이 아니라는 설법으로써 ‘나’라는 상에 빠지지 않도록 한 이유는 ‘나’라는 상이 일체 모든 상에 빠지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라는 상이 근본이 되어 일체 모든 상이 만들어 진다. 쉽게 말해서, ‘나다’ ‘내것이다’ ‘내가 옳다’ 라고 하는 아상이 있음으로써 나와 너를 둘로 나누는 분별도 있게 되고, 인간과 자연을, 또 생사와 열반을, 중생과 보살을 나누는 분별들을 비롯한 일체의 분별 망상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네 가지 상의 타파는 곧 ‘나’라는 상을 깨버리는 수행을 의미하며 이는 무아(無我)를 깨닫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연기(緣起)되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무아이고, 공(空)이라고 보았을 때, 사상의 타파가 곧 연기법을 깨닫는 것이고, 공성을 깨닫는 것으로 불법 수행의 요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부분의 설법이 불교의 핵심이며, 금강경의 핵심이고, 정종분의 핵심이라고 앞서 말씀을 드린 것이다.
그러면 조금 더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의미로서의 사상(四相)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아상[자아, atman]라는 생각은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는 것, 혹은 나의 본질적인 근원이나 윤회의 주체 등을 설정하여 ‘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이것이 일체 모든 분별과 고통과 번뇌 그리고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는 근본의 어리석은 생각인 것이다. 아상으로 인해 일체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고, 분별이 시작되고, 집착과 애욕이 시작되는 것이다. 불교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아상을 타파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상의 타파는 중요한 불교 수행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아상의 타파가 바로 무아의 실천이고, 연기, 공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아상은 좀 더 세부적으로 ‘나다’ ‘내것이다’ ‘내가 옳다’고 하는 분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나다’하는 것은 이 몸뚱이와 이 마음이며 생각이 나라고 착각하는 분별이다. 몸뚱이는 이 우주법계의 지수화풍의 요소들이 인연따라 잠시 내 몸의 지수화풍으로 화했을 뿐 고정된 실체로써 이 몸이 영원불멸의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몸은 과거 10년 전 내 몸과 물질적인 세포로만 보았을 때 전혀 다른 물질에 불과하다. 몸이란 것은 신구의(身口意)로 지은 업(業)에 따라 이 우주 법계의 지수화풍의 요소들이 잠시 이 몸뚱이로써 인연화합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흐르면 이 몸은 없어질 터인데 고작 이것을 가지고 ‘나’라고 이름 짓겠는가? 결국 이 몸이 ‘나’인 것은 아니다. 또한 마음이나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내 성격’이며, ‘특기’ ‘적성’ ‘IQ'를 가지고 ‘나’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이란 것도 인연따라, 상황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며, 성격이나 특기, 적성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지 ‘내 성격’ '내 마음‘하고 딱 정해진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일 뿐이다.
다음으로 ‘내것이다’하는 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일체 모든 것들을 내것이라고 착각하는 분별이다. ‘나다’ 하는 아상으로 인해 ‘내것’이라는 소유욕이 생겨난다. 그러나 소유라는 것은 엄청난 착각에 불과하다. 소유의 주체인 ‘나’라는 것이 공하였고, 무아일진데 어찌 소유의 관념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하나라도 있다면 ‘내 것’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영원히 내 것이라고 할 것은 아무데도 없다. 잠시 인연따라 나에게로 와서 쓰여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다시 흩어질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분별하여 ‘내 것’이 되었다가 ‘남의 것’이 되었다고 분별함으로써 괴로워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우주 법계의 일체 모든 것들은 제 스스로 정확히 제 자리에 언제나 그렇게 있을 뿐이다. 누가 누구의 주인도 아니고, 누가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이 되었다가 누구의 것으로 옮겨가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법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저 늘 있어야 할 자리에 인연따라 정확하게 있을 뿐인 것을 사람들은 어리석은 아상으로 인해 ‘내 것’이라고 하며 쌓고 집착하는데 여념이 없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살아가면서 ‘내 것’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내 것’은 어디에도 없다. 애써 표현한다면 내 것이기도 하며 전체의 것이기도 한, 오직 우주 법계의 것이 있을 뿐이고, 무분별의 부처만 있을 뿐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아상은 정신적인 것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내가옳다’고 하는 생각, 내 가치관이 옳다라고 여기는 어리석은 분별이 바로 그것이다. 아마도 오직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내 생각’이라고, ‘내 가치관이며 세계관’이라고 생각하는 일체 모든 견해들은 모두가 다른 사람의 것들일 뿐이다. 배운 것이거나, 보고 들은 것이거나, 책에서 읽은 것이거나, 그도 아니면 그 좁은 경험으로써 몇 번 체험했던 것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을, 수도 없이 듣고 배운 것들을 내 식대로 조합하고 짜맞춘 것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그래 놓고 그것을 ‘내 생각’이라고 고정 짓고, 그것만이 옳은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안에서 순수한 ‘내 생각’을 찾아 보라. 그 어떤 견해도 순수하게 내 생각일 수는 없다. 또한 그 어떤 생각도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고 분별할 수는 없다. 옳고 그르다는 것, 맞고 틀리다는 것도 사실은 우리가 만들어 낸 상대세계에서의 분별일 뿐이지 우주 법계는 그저 그대로 여여하게 흐를 뿐, 어디에도 맞고 틀리는 것이 없이 그저 절대적으로 항상 옳을 뿐이다. 맞고 틀림을 나누어 놓고 그 중에 맞는 것을 택하는 맞음이 아닌 그저 아무런 분별도 붙이지 않은 절대선이며,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란 말이다. ‘내가 옳다’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 줄 알아야 한다.
이상에서처럼 우리 안에서 ‘나’와 ‘상대’를 나누는 일체 모든 분별에서 온전히 벗어나야 그 때 나도 없고 상대도 없는, 내 것도 없고 상대의 것도 없는, 내가 옳고 그를 것도 없는 무분별의 절대 깨달음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상은 아상인 줄 알고, 타파해야 한다고 설파를 하면서도 막상 그 위에 ‘참나’를 세우고, ‘아트만’을 세우고, ‘자성불’을 세우면서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실체적 존재로써의 ‘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부처님께서 자아, 중생, 영혼, 개아라는 단어들을 쓰시면서, 또 금강경의 현장 번역을 보면 사상 뿐 아닌 아홉가지의 상을 열거 하면서 까지 아상을 타파할 것을 말씀하시는 데는 그 안에 그 어떤 절대적인 ‘나’도 상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상뿐 아니라 현장이 말하고 있는 아홉가지의 상은 모두 여러 가지 단어로써 절대적인 존재를 가설하는 것을 정형화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궁극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그것이 바로 아상의 극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즈음에 이르면 많은 분들께서 깊은 수렁에 빠질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부처가 되려고 수행하는 것이고, 자성불을 찾고, 참나, 진아(眞我), 본래면목, 일심, 한마음, 자성청정심을 찾으려고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는 것인데, 그것이 모두 아상에 불과하다고 하니 이 즈음에 이르러서는 금강경의 철저한 아상타파의 정신에 잠시 혼란스러움을 경험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런 혼란스러움을 잠시 비워두고 부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고 있는 ‘참나’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보통 우리가 참나를 말할 때, 그 참나는 참나가 아니라 참나라는 말일 뿐이고, 생각일 뿐이고, 참나라는 개념의 인식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선지식 스님들께서 참나를 찾으라고, 자성불을, 본래면목을 보아야 한다고 방편설법을 하시지만, 많은 제자들은 ‘도대체 참나가 무엇일까’ 하고 참나에 대하여 생각하고, 분별하고, 인식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참나는 생각되어질 수 없고, 말로 표현되어질 수 없으며, 우리가 인식할 수도 없는 언어 그 너머에 있고, 생각 그 너머에 있으며, 우리의 인식과 분별의 그 너머에 있고 없음을 넘어 서 있을 뿐이다. 행여 ‘생각 그 너머에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나’를 말로 표현했다고 했을 때 조차 그것은 그렇다고 말로 표현되어지고 있을 뿐이지 그것은 여전히 참나가 될 수 없다. 단지 ‘우리의 생각과 인식, 말을 초월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일어날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들 중생들의 마음에서는 무언가 표현을 하길 바라고, 논의 되길 바라고, 설하여 지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는 표현할 수도 없고, 논의의 대상도 아니며,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대한 그 어떤 상도 내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이 즈음에서는 ‘참나’라고 방편으로 세워 놓은 그 방편까지도 오직 일미(一味)의 진리로써 거두어 들이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세속제와 제일의제(第一義諦)라는 말이 대승불교 경전이 나온 이후에 논사들에게 설파되고 있는 점도 이러한 점, 이렇듯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그 자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동안 방편으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자성불을 찾아야 하고, 본래 면목을 보아야 한다고 하셨던 그 말 또한 단지 말일 뿐 참 진리의 당처에서는 한참 멀어져 있는 것임을 진리의 말 아닌 말로써 표현하고 계신 것이라는 점을 살필 수 있어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참 진리의 자리를 도무지 표현할 수 없다 보니 유마경에서는 ‘침묵’으로써 말씀을 하게 된 것이고, 역대의 조사스님들께서는 사량 분별이 끊어진 말아닌 말 즉, ‘화두’로써 그 의미를 설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쉽게 쓰는 말 ‘참나’니, ‘자성불’이니, ‘본래면목’이니, ‘한마음’이니 하는 이 모든 것들 또한 하나의 진리를 표현하는 ‘말’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당처인 것은 아니니, 그러한 말에도 걸려서는 안 되며,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금강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자성불은 자성불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자성불일 뿐이다’라는 설법으로 마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그래도 방편일 뿐이지만 자성불이 있긴 있는게 맞지요?’ 하고 질문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그것마저도 다 놓아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지금 금강경에서는 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아상에 대한 타파의 법문이 금강경의 전체에 깔려 있으며, 아상의 다른 표현으로써 중생상, 수자상, 인상, 즉 자아, 중생, 영혼, 개아라는 사상(事狀)도 설정이 되게 된 것임을 이해하면서 다음의 중생, 영혼, 개아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으로, 중생상[중생, sattva]이라는 생각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중생이라는 의미는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모든 존재’를 의미하는 말로,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 중생을 분별하는 착각이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존재와 죽어있는 존재를 분별하는 착각을 의미한다. 중생상도 그 근원에서는 ‘나’라는 아상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의 주체인 ‘나’라는 상을 상정해 놓기 때문에, ‘내가 깨달아야 한다’거나 ‘나는 아직 못 깨달았다’거나, 혹은 ‘나는 깨달았다’라는 상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과 부처라는 것도 착각일 뿐, 깨달은 각자(覺者)의 눈에는 일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부처의 현현일 뿐, 깨달은 것도 없고 깨닫지 못한 것도 없으며, 생명 있는 것도 없고 생명 없는 것 또한 없을 뿐이다. 오직 아무런 분별도 짓지 않은 텅 빈 자리에서 홀연히 여여하게 존재할 뿐인 것이다. ‘나’라는 생각, 아상이 타파되면 중생상도 자연스럽게 타파될 수 밖에 없는 상인 것이다.
다음은 수자상[영혼, jiva]이라는 생각으로, 목숨과 생명에 대해 집착하여 생사를 초월하는 그 어떤 영혼이나 지바가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사를 초월하고자 하고, 목숨과 생명이 끊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 또한 ‘나’라는 것이 있다는 착각, 아상에서 시작되는 것에 불과하다. ‘나’가 있으니 내가 조금 더 오래 살고 싶고, 생사를 뛰어 넘고 싶고, 그 어떤 불생불멸의 초월적인 내재적 존재[영혼, 지바]를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없는 무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고 죽음도 있을 수 없고, 목숨의 길고 짧음 또한 꿈이며 환상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네 번째는 인상[개아, pudgala]라는 생각으로, 이것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윤회의 주체로서의 그 어떤 실체, 뿌드갈라가 존재하여 나고 죽음을 영원히 반복하더라도 이 실체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것을 의미하고 있다. 후대 유식사상에서의 아뢰야식과도 비슷한 개념이라고 하겠는데, 아뢰야식은 윤회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상속한다고 하여 연속성은 인정하더라도 실체적 개념은 아니며, 아뢰야식 또한 무아(無我)라고 하는 반면에 당시 부파불교의 독자부에서는 윤회의 주체로써 생사를 초월한 주체인 뿌드갈라를 상정하였으므로 그것에 대한 타파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보통의 해석에서는 개아(인상)를 나와 상대를 갈라놓는 분별심에 대한 타파, 혹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에 대한 타파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뿌드갈라의 어의(語義)가 ‘개인’ 혹은 ‘인간’을 의미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했다고 생각되어진다. 어쨌든 개아라는 생각 또한 결국에는 ‘나’라는 상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생사를 윤회하는 주체로서의 ‘개아’를 상정하는 것 또한 앞서 자아의 설명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결국에 타파되어야 할 것임이 분명하고, 나와 상대에 대한, 혹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에 대한 분별로 보더라도 이것은 ‘나’라는 상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아상의 연장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처럼 부처님께서는 일체 모든 ‘나’라는 상에 대해 철저하게 타파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나’라는 상이 근본이 되어, 일체의 모든 상이 생겨나기 때문에, 나라는 상을 타파하면 동시에 ‘나 아닌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분별 또한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제 3분에 대한 설명이 많이 길어졌는데, 그 이유는 앞서 말한대로 제 3분이야말로 금강경의 본문이 정종분 중의 정종분이며, 불교의 핵심이며 금강경의 핵심 사상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하였으며, 앞으로 진행될 금강경 공부에서 이 부분의 내용들이 여러번 반복되고 다른 표현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약하고 전체적인 설명을 하였다. 좀 더 세부적이고 자세한 이해는 앞으로 나올 경문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제 3분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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