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수, 받아들이라 - 연기법의 생활실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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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수, 받아들이라 - 연기법의 생활실천(3)

목탁 소리 2009. 8. 25. 07:00
연기법의 세계에서 일체 모든 존재는 우연이나 운명론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며 존재가 만들어 내는 현상들은 모두가 그럴만한 인과 연에 의해 인연따라 연기되어진 것이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원인에 따른 분명한 과보를 받게 마련이다. 인과응보, 업인과보의 법칙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은 움직인다. 원인이 있으면 그에 따른 분명한 결과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나에게 주어진 현실은 어떠할까. 나에게 주어진 현실 또한 엄연한 인과응보의 결과일 뿐이다. 현실이라는 결과 또한 과거의 내 인연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에 받는 것이다. 내 스스로 만들어 내 스스로 받는 것이다. 업인과보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그것은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분명한 인과의 흐름을 타고 내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억울한 것 같고, 불평등한 것 같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일지라도 그것은 엄연한 인과의 법칙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부자들은 계속해서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오히려 정직하고 노력하는 자는 가난해 지기 쉽고, 오히려 열심히 살지 않더라도 머리만 잘 쓰고, 이기적인 사람이 성공하기 쉬운 현실을 한탄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에도 불만이 많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을 잘 만나 행복하게 부유하게 자라지만, 또 어떤 사람은 가난한 가정에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다. 그 뿐인가. 어떤 사람은 부자 나라에서 태어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척박한 땅에서 가난과 기아와 질병과 전쟁 속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은 세상을 한탄하고, 신을 원망하며, 진리가 과연 있는 것이냐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세상은 왜 이리도 불공평하단 말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이야말로 완전한 평등의 진리가 꽃피어나는 곳이다. 다만 우리의 눈에는 일부분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불공평한 것 처럼 보일 뿐이다. 전생과 이번생, 그리고 다음 생으로까지 이어지는 시간을 뛰어넘어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며, 공간적으로도 볼 수 있는 시야는 한정되어 있다.

인과라는 엄연한 진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정견의 시야가 없으며, 연기적이고 상호연관되어 일어나는 현상들을 전체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다. 그렇기에 우리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불평등하고 조화롭지 못하게 보인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세상, 인연과보, 연기의 세상은 완전한 대평등의 세계다. 어떤 이들에게는 인과가 적용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적용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인과의 진리는 적용되고 있다. 지혜로운 이는 인과를 보고 알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인과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등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인과를 전체적으로 볼 수 없더라도 이 세상이 연기법, 인과응보라는 진리로써 운행된다는 것을 안다면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연기라는, 인과라는 진리를 온전히 믿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믿든 안 믿든 연기와 인과의 진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연기와 인과의 법칙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앞에 펼쳐진 그 모든 것들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연기와 인과는 분명하다. 내 앞에 펼쳐진 그 어떤 괴로움일지라도,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모든 것은 인연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인과응보의 분명한 법칙에 따라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어떤 현실도 원인 없이, 이유 없이 나타날 수는 없다. 바로 지금이라는 현실이 내가 그 결과를 받아야 할 순간이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괴로운 일이 벌어지더라도, 조금은 불평등해 보이는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모든 것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꼭 필요한 일이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너무 괴로워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일지라도 그것은 바로 지금이라는 이 시기에 내가 받을 수밖에 없는 연기적인 현실이다.

그 현실은 누가 만들어냈는가. 그것은 바로 나다. 내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지을 때는 복도 짓고 죄도 짓지 않았는가. 그동안 우리는 살면서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우리 안에는 선업과 악업이 항상 공존하고 있다. 언제든 현실에서 발현되기만을 기다리다가 인연에 맞는 때가 오면 바로 그 순간에 선업이든 악업이든 현실로써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을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지을 때는 선행과 악행을 함께 지어 놓고 받을 때는 선행의 결과만 받고자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스스로 만든 현실을 내가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앞에 펼쳐진 그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라. 거부하지 말라. 받아들인다는 것, 섭수한다는 것이야말로 연기를 이해하는 모든 수행자들의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다. 즐거운 일은 과거에 지어 놓은 선의 결과를 받는 것이니 즐겁게 받아들이고, 괴로운 현실은 과거에 지어 놓은 악업의 결과를 받는 것이니 이 또한 받아들임으로써 악업을 녹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는 것이다. 업이 올라오는 순간에 완전한 긍정으로써 크게 받아들이고 섭수하면 올라오는 대로 녹아내린다. 눈부신 햇살에 겨울눈이 녹아내리듯 현실에서 나타나는 그 모든 인연들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여 녹이라.

받아들임에는 좋고 나쁜 분별이 없다. 좋고 나쁜 것이 있으면, 좋은 것은 받아들임을 넘어 집착이 붙게 마련이고, 나쁜 것은 거부와 배척이 뒤따른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선과 악 등의 이분법적인 분별이 붙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인간의 분별이 온갖 극단을 스스로 만들어 낼 뿐이다. 모든 경계를 다만 있는 그대로 분별없이 바라보면 받아들임의 지혜가 생겨난다. 좋고 나쁜 것이 없으니 좋다고 집착할 것도, 싫다고 거부할 것도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받아들임이야말로 곧 무분별과 무집착과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실천이며, 연기의 실천인 것이다.

이처럼 받아들임, 섭수야말로 연기와 중도, 공에 대한, 이 우주적인 진리에 대한 수용이며 존중이고 실천이다. 우주적인 진리를 진리로써 인정하며 그 앞에 나를 굴복시키고 복종시키는 진리의 숭고한 실천이다.

내 앞에 펼쳐지는 그 모든 상황을 전체적으로 수용하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 현실을 통째로 인정하라. 좋은 현실이든 나쁜 현실이든 분별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섭수하라.

순간순간의 모든 삶과 삶 속에서 피어나는 모든 경계들을 흔쾌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에는 평화가 깃든다. 삶을 대상으로 투쟁해 온 모든 다툼과 전쟁은 종식되고 지고의 안온과 평화와 자유로움이 깃든다. 모든 선악과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림이라는 극단적인 분별이 소멸되고 중도의 지혜와 텅빈 고요함이 드러난다. 섭수는 삶을 인정하는 것이고,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부처님과 부처님의 진리를 고스란히 내 품에 끌어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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