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거짓을 바로 알라 - 법구경 11,12게송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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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과 마음공부

진실과 거짓을 바로 알라 - 법구경 11,12게송

목탁 소리 2009. 7. 22. 07:21




11.
거짓을 진실이라 생각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그릇된 소견에 빠져 있기 때문에
끝내 진실에 이를 수 없다.

12.
거짓을 거짓인 줄 알고
진실을 진실이라 바로 아는 사람은
이러한 올바른 견해로 인해
마침내 진실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산다. 자기만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나 진리관을 정해 놓고 그 밖을 엿볼 생각 없이 오로지 자기 생각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살곤 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지금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라고 생각하는 그 사실 바로 그 사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모든 생각이나 견해는 여기 저기에서 끌어모아 내 것으로 채택하여 받아들인 것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끌어모아 내 생각인 양 조합하여 받아들인 것들 조차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사고방식 안에는 언제나 유대교적인 구약의 가르침들이 온전한 진리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신에게 유일하게 선택받은 민족이며 자신들만이 신의 대변자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슬람교적인 문화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다. 그 가르침만이 절대적인 진실성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불교든 기독교든 마찬가지다. 한 가지 종교에 치우친 사람일수록 그 사람에게 그것은 절대불변의 진리이며 진실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완전히 소멸된다. 도저히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거나 화합조차 하지 않으려 할 지 모른다. 심지어 자신의 종교를 믿지 않는 이들을 절대자의 이름으로 헤칠 수도 있고,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 자신의 종교야말로 절대적인 진실이며 다른 종교는 절대적으로 거짓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결코 다른 종교에 마음을 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바로 종교의 가장 큰 위험성이다. 절대적으로 ‘이것이 옳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옳지 않다.’ 어딘가에 완전히 치우쳐 있는 사람은 결코 진실을 만날 수 없다.

아무리 위대한 진리라도 그것을 절대화하는 순간 그 위대성은 소멸되고 만다. 절대화라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들과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사실은 ‘이것이 아닌 것은 틀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옳고 그른 것이 확연히 나누어지고 나면 그 뒤에 나타나는 것은 편을 갈라 다투거나 분쟁을 일으키는 것밖에 없다.

그렇게 인류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전쟁을 일으켜 왔는가. 세상 모든 종교가 ‘이것만이 진리다’는 고집을 버리고 어디에도 치우침 없는 완전한 중도적인 평화의 가르침을 따를 때 이 세상에 분쟁과 다툼과 나뉨은 사라지고 안온과 화합과 조화로움이 깃들 것이다.

불교의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올바른 불교 신자라면 ‘불교가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본 종교 가운데 가장 옳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믿는 것’이 되어야 한다. 전자와 후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큰 차이가 있다. 후자처럼 불교를 믿는 자는 언제고 더 옳다고 생각되는 종교가 나타난다면 그것을 믿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불교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실이고 진리라면 그것이 불교여도 좋고, 그 어떤 종교여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 진리를 불교에만 한정시켜야 하는가. 세상 어디에도 진리는 숨시고 있다. 다른 종교, 다른 사상, 다른 사람들에게도 진리는 깨어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교 그 자체에도 집착하면 그는 더 이상 불교를 모른다고 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불교적인 수용의 가르침 때문에 불교의 역사에는 수많은 독각(獨覺)들이 있어왔다. 독각은 홀로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 불교를 접하거나, 불교 경전을 공부했거나, 출가를 한 것도 아닌데 전혀 불교를 모르는 상태였더라도 홀로 깨닫는 것이 가능하다. 깨달음은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린 본래 바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린 정신이야말로 모든 진리의, 모든 종교의 본연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진리가 진리로 꽃피어날 수 있고, 모든 종교며 진리며 사상이 화합과 조화의 우주적인 연주에 동참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한 종교인들이 역사 속에는 수도 없이 많았다. 내 종교만이 절대 진리라는 편협되고 치우친 생각들에 사로잡힌 이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으며 나아가 이 세상까지 파멸로 몰아간다. 끝끝내 거짓을 진실이라고 집착하며 참된 진실을 보고도 거짓이라 생각하는 이는 그러한 그릇된 소견에 집착하는 이들은 끝내 진실에 이를 수 없다.

여기에 그런 한 지도자가 있다. 그는 바로 산자야다. 산자야는 본래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목련과 가섭의 스승이었다. 목련과 가섭의 출가 전 이름은 꼴리따와 우빠띳사였는데, 이 둘은 산자야의 문하에서 수행을 하다가 더 이상 산자야에게는 배울 것이 없음을 깨닫고 서로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러면서 둘은 약속한다. 진리를 만나거나, 참된 스승을 만나거든 서로에게 알려 주어 함께 그 길을 가자고.

우빠띳사는 어느날 부처님의 제자였던 앗사지 비구의 위의에 감동하여 법을 듣고는 부처님을 찾아 귀의하기 위해 꼴리따를 찾아간다. 함께 출가를 결심하였지만 전 스승이었던 산자야가 마음에 걸렸다. 결국 둘은 산자야를 찾아 가 올바른 진리의 스승인 부처님을 찾았으니 함께 부처님께 귀의하기를 거듭 부탁하지만 계속해서 거절을 당하고 만다. 오히려 산자야는 위대한 두 제자를 부처에게 빼앗기는 것에 원망과 질투를 느껴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만다.

결국 부처님을 찾은 두 제자는 아라한을 성취하고 으뜸가는 두 상수제자가 되었지만 산자야는 끝까지 목련과 가섭의 청을 거절하고 말았다. 이를 본 부처님께서 위의 게송을 설하신 것이다.

산자야처럼 거짓을 진실이라 생각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그러한 그릇된 소견으로 인해 끝내 진실에 이를 수 없다. 목련과 가섭처럼 자기 견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거짓을 거짓인 줄 바로 알며 진실을 진실이라고 바르게 아는 사람만이 그러한 치우침 없는 올바른 견해로 인해 마침내 진실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요즘의 시대야말로 이러한 가르침이 얼마나 귀한가. 이념의 갈등, 세대의 갈등, 동서의 갈등, 종교의 갈등 등 수많은 갈등으로 나뉘어 있는 요즘의 시대에 이러한 화합과 열린 정신이야말로 이 시대를 치유하고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되지 않을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느 한 가지 이념이나 사상이나 생각들에 치우치고 고집해 다른 이념과 사상을 가진 이들과 나뉘고 대립하며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치우친 생각들을 여의고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참된 진실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거짓을 진실이라 고집하여 치우친 소견에 빠지는 것이 깊어지다 보면 후에는 그것이 거짓인지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기기 위해 거짓을 택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전도된 뒤집혀진 생각이다. 중심에 진실을 두어야지 중심에 내가 이기고 지는 것, 내 입지가 강화되고 약해지는 것을 두어서는 안 된다. 나를 놓아버리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마침내 진실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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