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대상을 봅니다.

'보는 것'일까요? '보이는 것'일까요?

'보는 것'은 '내가 본다'는 것이고, '보이는 것'은 그저 보일 뿐 거기에 내가 개입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내가 본다'고 말하고, 잘 보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눈앞에 어떤 대상이 탁 들어오면, 그냥 저절로 보이지 않는가요?

억지로 보려고 애써야지만 볼 수 있나요?

그냥 보이잖아요.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들리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소리가 납니다.

애쓰지 않아도 그저 들리지요.

만약에 '내가 듣는다'고 하려면, 내 마음대로 들을 수 있듯이, 내 마음대로 들을 수 없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소리가 들리면, 듣기 싫어도 그냥 저절로 들립니다.

내가 듣는 것이면 내 마음대로 들을 수도 있고, 듣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냥 들리는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듣는 것을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요?

내가 보고, 내가 듣는다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은 그저 보이고 들렸을 뿐입니다.

거기에 '나'를 개입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보고 듣기 위해 전혀 애쓰지 않더라도, 그저 무위법으로써,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보고 듣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보고 듣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맛보고, 냄새맡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이와 같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향기가 나면 저절로 향기를 맡게 됩니다.

어떤 대상을 보면 저절로 생각이 떠오릅니다.

감촉을 느끼면 저절로 촉감이 자각됩니다.

이처럼 삶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일어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연스럽게 무위로써 살려지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살려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듯 아무런 문제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반응하며 인연 따라 물 흐르듯 살아간다면 아무런 일이 없습니다.

괴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저 매 순간 보일 뿐, 들릴 뿐, 생각할 뿐, 느낄 뿐, 아무런 시비가 붙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위자연이며, 불이중도이고, 일 없는 무사인의 삶입니다.

이렇듯 시비분별만 붙이지 않으면, 이렇듯 이미 문제 없는 실상의 삶이 살아지고 있습니다.

진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토록 완벽하게 주어진 삶을 상대로, '나'라는 허상을 개입시켜, 내가 본 것이 옳으니, 내가 듣기로는 기분이 나빴다느니, 나는 감정이 상했다느니 하는 등의 아상, 에고, 분별심을 내세우면서, 이 완전한 삶이 내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 내 기준으로 좋거나 나쁜 삶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나라늘 생각과 분별만 없다면, 삶은 지금 이대로 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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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에서 '['19.7.14 일요법회] 괴로움을 없애는 진짜 수행은 기도, 염불, 좌선이 아니라 중도! 도성제, 사념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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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