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라.

진실은,

두려워 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두려워할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우리 스스로 두려움을 만들어 낼 뿐!

 

이 우주의 근원의 에너지는

언제나 사랑이요, 무한한 자비다.

실체라는 말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 말을 써야 한다면,

우리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자비와 사랑이라는 말 뿐일 것이다.

 

자비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우리라는 존재의

근원적 실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 파장은

오직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신도,

그 어떤 염라대왕이거나,

그 어떤 진리의 다르마도,

당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분들은,

성스러운 붓다며 신은,

우리 나약한 인간들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벌을 주기 위해

온갖 지옥을 만들어 내거나,

온갖 고통을 만들어 내거나,

인간을 단죄하기 위한

온갖 다양한 틀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이 두려움에 떨어야 할

그 어떤 장치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답지 못한 인간,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

신을 믿지 못하는 인간,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

온갖 악행을 일삼는 인간,

성적으로 타락한 인간,

그 어떤 최악의 인간들을 처단하고 벌주기 위해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무시무시하며,

두려움에 벌벌 떨 만한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이는

그런 지옥을, 지하세상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일 뿐!

오직 인간의 생각일 뿐!

인간의 욕심일 뿐!

 

부처는

다만 무한한 자비 그 자체이며,

신은

무한한 사랑 그 자체일 뿐이다.

 

그 분들은

인간을 단죄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의지도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은, 붓다는

오직 순수한 사랑일 뿐!

단죄하는 분이 아니다.

 

방편으로

계율을 율법을 지키라고,

죄를 짓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는 하셨을 지언정

그것을 어겼을 때

벌하기 위한

그 어떤 특단의 조치도 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시다.

 

다만 그 모든 인간의 악행들을

아무런 판단도 없이 지켜보실 뿐!

 

그 분들의 시선에서는

악행, 선행이라는 차별이 없다.

다만 사랑으로 지켜보실 뿐이다.

 

선악을 넘어선 분이

선악을 구분지어 놓고

그 가운데 악을 행한 자만을 단죄하고

선을 행한 자를 선물주기 위해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고,

우리 멋대로 지어낸 신에 대한, 절대자에 대한

바람이고 환상일 뿐이다.

 

신은, 붓다는, 절대자는

아무런 판단도 없이

일체 모든 이들을 위해

다만 오직 사랑과 자비만을 준비해 두고 있다.

 

아니 신은, 붓다는, 이 우주는

그 자체가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의 의식 속에는

지옥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고통도 있으며,

무시무시하고 소름돋는

최악의 지옥이 있다.

 

가짜로 있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인연 가합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누가 만들어 냈는가?

 

그렇다.

신이 만들어 낸 것이거나,

붓다가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내었다.

 

가짜로.

생각으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생각은 에너지를 갖는다.

생각이 바탕이 되어 삶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렇게 창조된 가짜 세상일지라도

그것은 인간들에게 마치 진짜 같이 느껴진다.

 

고통도 진짜고,

지옥도 진짜고,

모든 것이 진짜처럼 생생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의 진실은,

그 모든 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없다.

오직 사랑만이 있고,

오직 무한한 자비와 연민만이 있을 뿐!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이 창조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말고

삶을 사랑하는데 마음을 쏟으라.

두려워할 것이 없는 본연의 사랑이라는 세상에

생각으로 두려운 것들을 창조해 내지 말라.

 

세상이 당신에게 알려준,

종교가 당신에게 알려준,

사람들이, 선생님들이, 종교인들이 당신에게 알려 준

원죄에 속지 말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었다.

삶은 두려워할 무엇이 아니다.

죽음 또한 두려워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이다.

무한한 아름다움이며, 무한한 지고의 기쁨이다.

 

죄를 지으면 지옥 간다고 했던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계율을 범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지 말라는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죄의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신이 우리를 단죄한다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심판을 한 뒤 몇몇은 지옥으로 던져버린다고?

계율을 어기면 지옥에 간다고?

 

지옥은 없다.

죄 또한 없다.

그렇기에

두려워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항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이 없고, 죄 또한 없다면

잘못을 저질러도 되고,

악행을 저질러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물론 상관이 있다.

물론 지옥에 떨어진다.

큰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준비해 둔 것이거나,

부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니며,

더욱이 그 곳은 실체적인 곳이 아니다.

 

똑같은 상황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천상을 경험하게 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연봉 3,000만원이 괴로움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한없는 즐거움이지 않은가.

 

배가 터지도록 부른 사람에게

자장면 곱빼기는 고통을 가져오지만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그것은 천국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고통을 받지만

그 고통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지옥에 떨어지지만

그 지옥은 실체적인 어떤 영역에 신이 만들어 둔

절대적인 영역이거나, 절대적인 곳이 아니라

다만 스스로 만들어 내고

스스로 그 곳에 빠져 괴로워하기로 선택한 그런 곳이다.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지옥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지옥을 생각으로 만들어내어

그곳에 떨어지면 어쩌지?

죽고 나서 지옥에 가는 건 아닐까?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함으로써 있지도 않은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말라.

 

우리가 두려움에 떨면

그 두려움으로 인해

두려운 세상을 창조한다.

지옥에 가게 될까봐 걱정 근심을 한다.

 

누구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는 지옥에 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그 두려움이 지옥을 창조해 낸다.

 

그러니 두려움에 떨지 말라.

두려움으로 인해 지옥을 창조해 내지 말라.

두려운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죄의식이 죄를 만든다.

 

마음 속에

지옥을 품지 말고,

두려움을 품지 말고,

죄의식을 품지 말라.

그것을 품음으로써 그것을 창조하지 말라.

 

대신에

마음 속에

무한한 사랑을 품으라.

무한한 동체대비의 자비로움을 품으라.

 

신은 무한한 사랑이며,

붓다는 무한한 자비로움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죽음을 사랑하라.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오히려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죽음은 경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삶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래를 두려워하는 대신,

지은 죄를 두려워하는 대신,

삶을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라.

 

삶도 죽음도 경이롭다.

그 둘은 둘이 아니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아무리 달려갈지라도,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쓸지라도,

혹은 아무리 도달하려고 애쓸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뿐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 자신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주어진 삶을 사랑하라.

다가올 미래를 사랑하라.

진리를, 신을, 붓다를 사랑하라.

 

오직

다만

사랑이기만 하라.

 

두려움도,

고통도,

죄의식도,

근심 걱정도,

지옥도,

죽음도

모두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

사랑 안에 녹아내리게 하라.

 

본래부터 그것은 없던 것이고,

가짜일 뿐이니,

진짜로 가짜를 품어 안으라.

 

사랑할 때,

사랑이 창조된다.

아니 본래 사랑이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언제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을 향해 도착할 뿐이다.

 

영적인 진보,

수행의 완성,

그것은 곧 잊고 있었던 사랑을 되찾고,

사랑이라는 근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숭고한 귀의(歸依)의 여정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사랑과 하나될 것이다.

무한한 자비로움을 체험할 것이다.

 

두려움이라고 불리우는

가짜에 속아오던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사랑과 자비의 파장으로 춤출 것이다.









  1. 1 2010.01.19 10:46

    웃기고 자빠져 있네.
    그러면 당신 말대로라면 유영철이는 수십명 사람을 죽이고 나서도
    스스로 양심의 가책 안느끼고 잘 살고 있으면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고 함)
    그는 아주 자유로와질 수 있는거네?
    글만 길게썼는데 뭔소린지 핵심은 없고 그냥 주저리 주저리. 나무아비타불.

    • 제 눈에 안경이란 말이 생각나네요. 2010.04.08 11:35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지요. 참.. 한글자 한글자 님의 심성이 보입니다. 글을 못 알아 듣는 다고 하셨는데... 당연히 못 알아 들을 수 밖에...언제 알아들을지.. 안타깝네요.
      여기와서 무식드러내지 말고 조용히 수행하세요. 네가지 없는 말버릇도 좀 청소하시구요.^^


 

[사진 : 북한산 진관사]

옛 사람의 글을 읽다가
승조스님의 죽음 앞에 읊은
한 자락의 게송이
가슴에 짠한 울림을 가져다 줍니다.

수많은 경전을 역경하신 구마라집 문하에
승조(僧肇)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본래는 노장사상에 심취하였었는데
뒤에 유마경을 읽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불교에 귀의하신 분입니다.

워낙 명성이 뛰어나
불교계 뿐 아니라 세간에서 또한 크게 숭상받았는데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의 모함도 받게 되었고
왕이 부하로 만들려고 협박을 하기도 하셨지요.

특히 이 승조 스님을 탐낸 진나라 왕 의희는
스님을 퇴속시켜 자신의 부하로 만들려고
갖은 희유와 협박을 다 하였습니다.

"스님께서 속인으로 돌아와 재상이 되면
천하의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니
부디 짐의 청을 저버리지 말라"

그러나 스님은
"재상이 다 무엇이고 천하가 다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 법에서 볼 때는 모두가 부질없는 꿈 속의 일일 뿐입니다.
나는 무상대도를 얻어 만 중생을 이익되게 할 것입니다."
라며 단번에 거절하여 버렸습니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진왕은 승조스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승조스님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사형이 집행되기 전 칠을 동안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꿰뚫은 보장론을 저술하며
죽음을 앞에두고도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번역하는데
몰두하였습니다.

곧 형틀에 올라 칼로 목을 베이는 참수형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태연하게 게송 하나를 읊었다고 합니다.

四大元無主
五陰本來空
將頭臨白刀
猶似斬春風

"사대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원래 주인이 없고
다섯 가지로 모여진 이 몸은 본래부터 비었도다.
장차 흰 칼날이 내 목을 자를 것이나,
이는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을 뿐이다."


마치 봄바람을 칼로 베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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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저는
'만약 이 복잡한 세상을 살다가
어느 순간 죽게 된다면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이며, 어디에 태어나게 될까'
하는 생각만 하면 두려워집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설령 그대가 죽는다 해도 괴로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오랫동안
믿음과
계율을 지님,
진리를 배움,
집착과 욕망을 버림,
지혜을 닦는 등의 수행을 하였다면
비록 언제 어떻게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설사 사나운 짐승이나 새에게 먹힌다해도
그의 마음은 높이 올라 좋은 곳으로 가게 된다.

마치 기름종지를 깊은 연못에 넣어 깨트리면
깨진 종지의 조각들은 가라앉겠지만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이
오랜동안 믿음, 지계, 진리, 비움, 지혜를 닦은 이는
설사 죽는다 해도 그의 마음은 높이 올라 좋은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처럼 그대가 죽는다 하더라도
나쁜 죽음은 없을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

죽은 뒤를 걱정하지 말라.
언제 어떻게 죽을지 걱정하지 말라.
어차피 죽음은 오게 되어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죽음 이후를 걱정하지 말고
다만 지금 이 순간
나의 믿음과 지계, 진리, 비움, 지혜가
부족하지 않은가를 살피라.

죽음 이후는
이미 지금 여기에서
나의 삶을 통해 결정된다.

삶에서
진리에 대한 굳은 믿음을 지니고 살았는가!
계율을 생명처럼 지키고 살고 있는가!
진리를 배우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는가!
욕망과 집착을 비우며 살고 있는가!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고 있는가!

이 다섯 가지에 대해
나는 얼마나 떳떳한가!
얼마나 지키고 닦으며 살고 있는가.

이 다섯 가지 실천의 가르침을
아름답게 실천하고 있다면,
혹 완전히 지키지는 못할지라도
이 실천을 향해
내 삶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면,
진보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가라앉지 않고
높이 높이 올라 좋은 곳으로 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설사 죽음을 맞더라도
죽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나쁜 죽음은 없을 것이다.

똑같은 죽음을 목격한다고
그것이 모두 같은 죽음이 아니다.
같은 병으로 똑같이 죽었을지라도
그 죽음은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 이후는 전혀 다르다.

나의 죽음 이후를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나의 삶을 보라.
삶에서 내가 벌이는 모든 일들을 살피라.
그 삶의 방향이
믿음과 계율과 진리와 비움과 지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나 답하기가 두렵다면
그 삶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며,
죽음과 동시에 간장종지가 깨져
호수 아래로 가라앉듯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아
지옥 끝까지 도달할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삶을 두려워하라.
주의깊지 못한 삶을 두려워하라.

수행자에게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
이 육신의 겉모습은
살 수도 죽을 수도 있지만
근본에서는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삶 그 자체는 언제나 영원하다.

지혜로운 수행자는
미래에 올 죽음을 걱정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주의깊게 살핀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도 생사의 분별에 집착하지 않으면
평생을 쌓아온 업장이라도 소멸할 수 있다.
일생을 수행했을지라도 임종에 이르러 생사에 집착하면
그 수행은 물거품이 되고 오히려 마귀의 포로가 되고 만다.
지금이라도 본래 마음을 깨달으면 다시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달마대사 혈맥론(血脈論)]


하루 중에도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 중요하다.

시끄러운 TV 소음에 시달리다 잠에 들면
잠든 내내 소음이 꿈속까지 뒤따라 와 정신을 뒤흔들어 놓지만,
잠들기 직전 고요한 와선 속에서 잠에 들면
밤새 고요함이 지켜진다.

가만히 잠들기 직전 무슨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는지,
그리고 그 생각들과 꿈에는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를 떠올려보라.
잠들기 직전의 생각이 온통 꿈속까지 휘젓고 다니며
단잠을 방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데는
그리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하루 중에 이처럼 잠드는 순간이 중요하듯,
일평생 가운데는 죽는 순간이 중요하다.

아무리 일평생 수행을 잘 했다 하더라도
죽는 순간 생에 집착하여 미련을 못 버린다면
그간의 모든 수행은 물거품이 되고
오히려 마귀의 포로가 되어 헤매고 말지만,
죽음에 이르러 생에 집착하지 않고
냉철한 깨어있음으로 죽음의 순간을 지켜본다면
일평생의 수행을 뛰어넘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부처님 당시 밤사국 왕인 우데나왕의 왕비
사마와띠는 첫째 왕비인 마간디아의 음모로 인해
시녀 500명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궁에 갇혀
불에 타 죽게 된다.

그 때 깨어있음의 수행을 익힌 사마와띠는
함께 불법을 수행하던 500의 시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불에 타 죽게 되는 인연을 알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작을 알 수 없는 긴 윤회 속에서
이 또한 분명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떤 원인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니 순간 순간 일어나는 현상에 마음을 챙기십시오.
불에 타는 고통스런 순간에도
그 고통에 반응하는 마음을 정확히 관찰하십시오"

사마와띠의 말을 들은 500의 시녀들은
모두 불이 몸에 다가오는 순간에도
동요 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의 고통스런 느낌에 마음을 집중해 수행했다.
그래서 죽기 직전에 어떤 이는 사다함과를
또 어떤 이는 아나함과를 증득했다고 한다.

죽는 순간 생사의 집착에서 자유롭기 위해
사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생사의 집착을 놓아버리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하루 하루의 삶이 깨어있으며,
집착을 버리고 욕망을 거스르며,
온갖 번뇌를 놓아가는 쪽으로 비움과 수행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죽음은 삶의 연장이다.

삶의 순간 순간을 어떤 방식으로 살았느냐에 따라
죽는 순간을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결정되어지기 때문이다.

올바른 웰빙이란 웰다잉과 다르지 않다.
웰다잉을 위해, 죽는 순간의 공부를 위해,
사는 순간 생사의 집착 없이 올바로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생사를 비롯한 양극단의
모든 분별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참말로 잘 죽는 웰다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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