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아, 이렇게 비가 내리고 있네요. 비가 오니까 초록들이 더 싱그러움을 띄는 것 같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서 바람도 함께 불다보니까 창밖으로 나뭇잎들이 싱그럽게 오고가는 모습들이 얼마나 보기가 아름답고 생기로운지 모릅니다.

그때그때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항상 우리 주변에는 있거든요. 그런데 때때로 고민이 있거나 괴로운 일이 있어서 상담을 하려고 찾아오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을 가만히 뵈면 찾아서 걸어 들어오는 그 얼굴에 아주 큰 고민과 번뇌와 안쓰러움이 얼굴 표정에도 묻어납니다.

그런 분들을 뵈면 제 마음이 참 안쓰럽고, 안타깝고, 아프거든요.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전혀 눈길 한번 줄 수 없고, 이 아름다음을 누릴 수 없는 가슴을 가지고 찾아오신 것에 대한 안타까움, 이런 것들이 자리하게 되곤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를테면 '수행을 하십시오'라고 하고, 당장 빚 독촉 때문에 시달리고 계시는 분한테 '수행하라'고 하거나, 당장 죽을병에 걸린 분이라던가 아니면 부부 관계가 안 좋거나 뭔가 자식이 당장 어려움에 처했거나 세속적인 큰 결정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계시는 분에게는 대개 어떤 이야기를 해주어도, 어떤 좋은 부처님 가르침을 말해 드리더라도 그것이 귀에 잘 들리지 않습니다.

때때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수행해라, 기도해라 하는 이야기가 그냥 멀쩡한 사람들한테나 해당되는 얘기지 우리같이 힘들어 죽겠는 사람한테 그런 얘기 하면 되겠습니까, 우린 당장 먹고 살 길이 힘들고 당장 내 앞에 갑갑한 일들이 많은데 그 수행이 어떻고 하는 게 다 팔자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얘기 아닙니까?”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불교의 근본법과 방편법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불교의 본질, 근본법에 입각해서 본다면 수행에 대한 담론으로 들어가야 될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다양한 방편법들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은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현실 생활 속에서 힘들고 고되고 괴로워하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은 먼저 그것부터 어떻게 풀 수 있을지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방편법으로써 다가서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행히도 불교는 다양한 상황에 처해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이들을 위한 다양한 방편 법문을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방편으로써 우선 그 사람의 힘든 일부터 보듬어 주고 그 사람이 살면서 당장에 최소한 필요한 의식주부터 잘 다스릴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뭐랄까 부득이하게 본질적인 근본법보다는 방편법을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생겨나게 되기도 합니다.

 

시크릿을 보는 불교적 관점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방편법에 관련된 건데요, 조금 쉽게 말해서 내가 좀 잘 살고 싶고 뭔가 좀 남들만큼 살고 싶은 사람들, 정말 지금 나한테 있어서 나의 목을 콱 조이고 있는 이 힘들고 고된 문제부터 어쨌든 먼저 해결해야 되겠다 싶은 그런 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보통 쉽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면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세속적인 성공과 관련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관련된 책들도 요즘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요즘에 『시크릿』이라고 해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시크릿』에서는 내가 마음 하나 일으키는 것으로서 내 삶을 창조해 낼 수가 있다, 내가 마음먹은 것을 세상에서 끌어당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주 희망에 찬 이야기지요. 이것이 불교의 아주 가장 기본이 되는 방편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 삶에 있어서 아주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생각을 조작해서 성공하는 삶, 생각을 조작해서 부자가 되는 삶,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 우주라는 것, 이 세상이 만들어진 창조의 원리는 무엇이냐 하면 나의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그 생각한 것을 어떻게 말로 내뱉고 또 그것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느냐 하는 것이 나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인데, 그 근본에는 바로 생각이 있는 겁니다.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이 생각을 가지고, 이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써야지만 내 삶을 멋지게 만들 수 있느냐, 행복한 삶으로 바꿀 수 있고 성공적인 삶으로 바꿀 수 있느냐,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즘에 아주 유행하는 『시크릿』이나 어떤 다양한 이런 류의 책들은 이 생각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기 때문에 이 생각으로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이니까 이 생각을 조작하고 움직임으로써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런 관련된 책들 가운데 어떤 것은 가난을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청빈의 정신을 말하는 것을 자기는 참을 수가 없다, 용납이 안 된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사람이 있던데요, 방편법에 너무 치우치게 되면 이런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생각에 실체가 있어서 생각으로 부유함을 창조해 내고 부자가 되라, 성공해라, 여기까지를 얘기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 부자와 성공에 너무 집착해 있는 모습을 그런 책들을 통해서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의 한계 같은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 정도 까지만 해도 많이 발전된 모습이라고는 보여집니다. 그렇게 우선 방편의 진리라도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보다는, 그래서 괴로움 속에 허덕이고 사는 것 보다는 일단 일차적인 문제부터 해결하고, 내 삶에 딱 중심을 잡고 그리고 나면 이제 근본법을 향해 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동안은 많은 근본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던 것 같고 오늘은 이 방편의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가지고 내 삶을 아름답게 바꿔낼 수 있느냐, 어떻게 내 삶을 정말 행복한 삶으로 바꿔내고 성공적인 삶으로, 부유하고 풍요로운 삶으로 바꿀 수 있느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 하나하나 자세히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창조과정과 업보

불교에서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신구의 삼업으로서 이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랬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생각한 그것이 하나의 에너지가 되어서 그것이 이 우주 법계로 진동을 해 나간다는 것이지요. 즉 내 생각으로 내 삶을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어떤 절대자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내 삶을 대신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설계하고 창조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우리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서 화가가 마음 먹은 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듯이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내 현실 세계라는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지요.

마음에서 일으키는 대로 현실세계를 그림 그리듯 그려나갈 수 있다 이 말은 어찌 보면 많이 들어본 듯한 그런 이야기인데요, 이것은 그저 내가 아는 이야기야 하고 덮어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본적은 있을지언정 이것에 대해서 굳게 믿거나 진지하게 사유해보거나 그것이 정말 맞구나 라고 무릎을 쳐 본적은 사실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 생각할 뿐이에요.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하면 생각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때때로 몇몇 가지는 생각한대로 이루어지는 수도 있지만 세상이 어떻게 생각한대로 이루어지느냐, 그렇게 안 된다, 이렇게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일체유심조가 아니라는 쪽으로 굳게 믿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여러분의 삶을 만들어내는 것은 여러분의 바로 그 생각입니다. 그 마음입니다. 내가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서 내가 마음 쓴 대로 현실이 만들어지고 창조되는 것입니다. 또 마음 일으키는 것이 근본이 되어서 말로 가고 행동으로 감으로써 신구의 삼업이 바탕이 되어서 내 현실세계를 이루어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인간으로 태어났거나, 부자로 태어났거나 가난하게 태어났거나, 능력 있게 태어났거나 능력 없게 태어났거나 이 모든 현실의 모습이 내 과거의 신구의 삼업에 의해서 지금 만들어진 결과라는 말입니다.

업의 결과, 즉 업보(業報)로써 지금의 이 현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누가 만들어 주었겠어요. 내가 지은 업(業)에 따른 보(報)를 받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만들어 주었겠습니까.

모든 것이 그냥 신의 뜻대로 라든가 부처의 뜻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어찌 그렇게 부처나 신이 불공평할 수가 있겠습니까. 누구는 부유하게 태어나게 해 주고, 누구는 가난하게 태어나게 하고, 누구는 태어나자마자 한 살, 두 살, 세 살 밖에 안 되었을 때 기아로 죽어가도록 내버려 둔다는 말이지요. 이런 사람이라면 자유의지를 가지고 뭔가 새롭게 아름다운 삶을 살아볼 여지가 없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으니까 말이지요.

닭장에서 한 달 만에 죽어서 무슨무슨 치킨이며 온갖 닭고기, 통닭으로 우리 입에 들어가고 있는 닭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태어나자마자 아무 힘도 못써본 채, 파닥거리지도 못해본 체 그냥 한 달 만에 죽어가지고 그렇게 도살을 당해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이 만듭니다. 내가 만들지 결코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이 마음의 힘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엄청나고 어마어마합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우리가 알아야 되는 아주 확실한 불변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불교에서는 이 세상이 공한 것이다, 환영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이 세상은 공한 것이고 환영 같은 것이어서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듯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실체가 없는 그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단 말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에게 그 고통은 실체가 아니야 라고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람은 그 고통이 당장 자신에게는 실체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空)병에 걸려가지고, 깨달음 병에 걸려가지고 '모든 것이 다 공이야' 라고 쉽게 치부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내일 당장 죽더라도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가난해지더라도 상관이 없고 고통 받아서 내일 당장 큰 병으로 죽어 가더라도 휘둘리지 않을 정도는 되는 사람이라야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느냐, 그런 깨달음에 놓여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렇지 않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방편법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을 잘 쓸 수가 있는지, 이 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이것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를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껍데기 마음, 표면의식, 거짓 나

그러니 그것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보자는 거죠. 우선 제가 아주 쉽게, 어렵게 하면 복잡해지니까 쉽게 마음을 두 가지 정도로 분류해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것 또한 방편입니다. 첫 번째 마음은 편의상 이렇게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껍데기 마음’이라고 한번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이 껍데기에 드러난 표면의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것, 내가 내 생각을 가지고 ‘아, 오늘 이런 생각을 했구나. 저런 생각을 했구나’ 하고 느끼는 마음, 이 생각으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살아가는 것, 내가 생각을 쓰며 살아가는 그 표면의식, 껍데기에 들어가는 그 생각들, 그걸 이제 껍데기 마음이라고 한번 이름 붙여 보자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겉에 드러난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껍데기 마음, 이것을 가지고 세상을 만들어내고 창조해내고 있습니다. 이 겉껍데기 마음, 표면의식의 특징이 뭐냐 하면 끊임없이 생각이 올라온다는 겁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내 의지대로가 아니라 제 멋대로 우후죽순으로 올라옵니다. 이건 논리도 없고, 체계성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합니다. 우리가 꿈 꿀 때 보면 갑자기 이 꿈의 장면에서 갑자기 다른 장면으로 막 그냥 휙휙 바뀌는데 논리적이지가 않고 막 왔다 갔다 하잖아요. 오락가락 합니다. 그걸 보면서 왜 그렇게 꿈은 말도 안 되게 오락가락할까 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오락가락하죠. 가만히 내 생각을 지켜보다 보면, 이 생각이었다가 갑자기 저 생각으로 바뀌었다가 뜬금없이 또 다른 생각으로 바뀌었다가 정말 논리도 없고 맥락도 없는 아무 생각이나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옵니다. 논리가 없어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그것이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면서 나의 실체라고 착각하면서 그 생각을 부둥켜안고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 생각에 휘둘려서 살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온갖 생각들에 하나하나 그냥 휘둘려 가면서 에너지를 쏟아가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겉껍데기로써의 나’는 주로 아상(我相), 아집(我執), 아견(我見)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상, 에고에 갇혀서 언제나 나에게 도움 되는 일, 나한테 이익 되고 좋은 일들만을 계속 하고 있는 겁니다. 이 ‘나’라는 아상에 치우쳐진 껍데기 나는 어떻게 하면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까 하고 생각할 뿐 이타적인 마음이 거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아상에 밥 주는 일’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상, 아집을 강화시키는 일에만 힘을 쏟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껍데기 마음, 표면의식은 항상 나한테 좋은 방향이 뭘까만 생각합니다. 아상에 갇혀 있어요. 이것을 아상, 에고 말고도 ‘거짓자아’ ‘거짓 나’ ‘가짜 나’ ‘껍데기 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거짓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순식간에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해가 될까, 이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해가 될까 하는 것을 그냥 자동적으로 계산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사실 이 표면의식, 껍데기 마음, 아상, 생각이라는 것은 우리가 신뢰할 바가 못 됩니다. 신뢰할 바가 못 되고 진실 되지 못합니다. 항상 거짓을 꾸며내고 항상 이기적인 마음들만 꾸며내게 마련입니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는 아주 귀한 존재이고, 나를 돕고, 나를 가엽게 여기고, 언제나 나를 위해 희생하는 존재이니 나에게는 둘도 없는 귀한 존재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은 근원적인 참나에 대한 이해가 없고, 이타적인 자비가 없으며, 이 우주법계가 둘이 아닌 하나 된 존재라는 이해가 없습니다.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것이지만, 지혜로운 이가 보기에는 이타성이 결여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껍데기 마음, 표면의식에 휩싸여 왔는데, 여기에 휩싸여 살아서는 우리 삶을 온전하게, 아름답게, 지혜롭게 살아 낼 수가 없습니다.

 

더 깊은 마음, 근원의식, 참 나

그러나 우리 마음은 그 껍데기 마음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는 더 깊은 차원의 깨어있는 마음, 참나, 근원적인 자아가 있습니다. 사실 앞에서 말한 겉에 드러난 표면의식의 생각들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그 표면의식의 밑에 그 바다 그 엄청난 뿌리에는 히말라야와도 같은 엄청난 근원적인 뿌리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드러난 것은 표면에 드러난 빙산의 일각밖에 안 보이지만 더 깊은 차원의 세계,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이 우리 안에는 내재돼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제 편의상 ‘더 깊은 마음’이라고 제가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물론 이것 또한 근원의식이라고 불러도 좋고, 참나라고 불러도 좋고, 불성, 신성, 어머니 대지, 그 무엇으로 불러도 좋습니다. 대충 짐작하셨겠지만, 이 ‘더 깊은 마음’은 우리 내면의 깊은 마음, 참나이면서 동시에 이 우주법계 전체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더 깊은 마음’은 나에 한정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근원을 이루는 근간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더 깊은 마음의 특징은 어떤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나와 남이라는 분별이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더 깊은 마음’은 나와 남이라는 분별이 없습니다. 이 우주법계 일체 모든 존재의 근원이니 어떻게 나와 남의 분별이나 차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겉에 드러난 표면의식의 특징은 물론 나와 남의 구분이 분명합니다. 나와 남의 분별이 있으니, 나와 너를 나누고, 내 편 네 편을 나누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분별하며, 모든 대상물을 나누고 구분짓고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더 깊은 마음,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나와 남의 분별이 없으며, 일체의 모든 분별과 차별이 없습니다. 그렇듯 나다 너다 하는 마음의 분별이 없으니까 이기적인 마음이 일어나지가 않는 거예요. 상대가 곧 나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온 우주를 평등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 이익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를 이타적인 사랑으로 바라봅니다. 그렇기에 항상 온 우주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모든 일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나와 남의 분별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더 깊은 마음의 주요 특성입니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우리 마음의 본질은 우리 겉에 드러난 껍데기가 아니라 근본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본질은 나와 남의 구분이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보통의 나는 이 껍데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서 나와 남을 끊임없이 분별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남에게 욕하고, 남이 잘되는 것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남들에게 해코지를 하고 산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들을 깔아뭉갤 수 있느냐 이런 것에 교묘하게 머리가 돌아간단 말이에요. 조금 똑똑하고 세련된 지성을 가진 사람일수록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자기를 높이고 남들을 내려 누릅니다. 그러나 그 근본을 보자면 전부 나라는 상에 입각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거죠.

 

상대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

그러다보니까 우리는 보통 남에게 욕을 하고 시비를 걸고 하기를 좋아하는데 더 깊은 마음의 특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 내가 남에게 욕하는 것은 곧 뭐를 의미하냐면, 내가 나 자신을 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근본에 있는, 내 본질에 있는 마음에서는 나와 너의 분별이 없으니까 내가 남들한테 '너 이 죽일 놈, 나쁜 놈' 하면서 욕을 하면, 우리 본질의 마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면 나와 남이 없으니까, 너 죽일 놈 나 죽일 놈이라고 하는 너나의 구분이 없으니까 본질의 마음에서는 뭘 인식하냐 하면 욕이라는 것만 인식하는 겁니다. 죽일 놈이라는 것만 인식하는 겁니다. 내가 남에게 죽일 놈 욕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은 나 자신을 죽일 놈을 만드는 창조의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들에게 욕을 했다 했을 때, 못난 놈이라고 얘기하고 실패나 해버려라 하고 얘기 한다면 사실은 정작 내 마음은 나와 너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한 얘기지만, 남에게 한 나쁜 생각이고 나쁜 마음이지만 그것은 돌이켜 나에게 와서 화살이 꽂히는, 그래서 나의 현실을 창조해 내는 창조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욕하고, 탓하고, 시기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은 나 자신을 탓하고 욕하고 시기하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나는 이런 부정적인 현실을 창조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 스스로가 그 부정적인 현실을 창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나는 하지 않았다’고 착각할 뿐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나는 절대 실패를 창조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남들에게 욕하고 시비하고 실패하라고 얘기했던, 남들을 미워했던, 그 마음이 고스란히 나에게 와서 꽂히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내가 나의 미래를 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미래를 그렇게 창조한 적이 없고 남에게만 욕을 했지 나에겐 안했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거꾸로 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남에게 행하는 것은 고스란히 내가 나에게 행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본질적인 더 깊은 마음의 특징이에요. 거기에는 너와 나의 차별이 없습니다.

앞에서 ‘더 깊은 마음’은 이 우주법계 전체의 근간을 이루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근원이자 이 우주 전체의 근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너와 나의 분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근원의 자리에서는 네가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너인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입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를테면 다른 사람에게 보시를 베푼다, 자비를 베푼다, 사랑을 베푼다, 그 사람이 힘들 때 옆에서 도움을 주고 상담을 해준다고 할 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상대방을 돕는 것을 넘어서 내가 나 자신에게 베푸는 최고의 보시행위입니다. 내 인생을 풍요롭게 창조하고 내 인생을 행복하게 창조하고 내 인생을 부자로 창조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내가 남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오니까 이 우주의 법칙은 내가 보낸 대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이 고스란히 나에게로 돌아오게 되어있어요.

욕이 나가면 반드시 욕이 돌아옵니다. 칭찬이 나가면 칭찬이 돌아옵니다. 마음속에서 저 사람을 어떻게든 무너뜨려야지 하고 생각한다면,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져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게 생각할 때 이 우주법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무너뜨려 줍니다. 어떤 문제 때문에 근심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 또한 내가 나 자신을 향해서 끊임없이 근심 걱정하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점을 어떻게 맞춰야 하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남이 잘 안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 내가 잘 안 되기를 바라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남을 물고 늘어지면 안 됩니다. 남을 물고 늘어지면 내 바깥을 향한단 말입니다. 에너지의 방향이 자꾸 바깥을 향해 있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성공하고 싶다, 진급하고 싶다, 부자 되고 싶다 이랬을 때, 내가 진급하고 싶다는 생각은 차라리 낫지요, 나의 경쟁자가 어떻게든 사고를 쳐가지고 좀 무너져라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나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일한 말의 에너지라도 전혀 다릅니다. 부정적인 것을 상대방에게 보낼 때는 그것이 나에게 오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상대방에게 보내는 연습을 하지 말고, 나를 향하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상대방을 향한 연습을 하게 되면 끊임없이 우리 마음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쏟아 붓게 됩니다.

그런데 나를 향하게 마음을 쓰게 되면 항상 긍정적이 돼요. 내가 나 자신에게 욕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내가 나 자신이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래서 우리 본래의 마음은 나와 너의 구분이 없습니다. 분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남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내가 나에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라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본래적인 마음의 더 깊은 마음의 특징을 안다면 우리의 삶이 바뀌어야 되겠죠. 상대방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나에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말입니다.

 

긍정적인 언어의 파장

또한 둘째로, 이것도 비슷한 얘기인데요 ‘더 깊은 마음’ ‘우주적 근원의 마음’은 완전한 무분별이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라는 것이 없습니다. 네 편 내편이 없어요. 또한 긍정 부정이라는 분별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단어를 사용할 때 부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면 안 됩니다. 긍정적인 단어를 자꾸 사용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우주법계는 말하는 대로 그저 현실로 만들 뿐이지 긍정적인 것은 만들고 부정적인 것은 안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주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똑같은 창조에너지로 작용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말하는 것은 모두 구업(口業)으로 작용합니다. 즉 말이란 것은 에너지가 되어 특별한 파장으로 우주법계에 기록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록된 것은 반드시 나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부정적인 에너지의 단어를 많이 사용하면 부정적인 현실이 창조되고, 긍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면 긍정적인 현실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우주법계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분별없이 내 입에서 나간 것을 전부 나 자신에게로 되돌려 주는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황을 보고 부정적인 단어로 얘기할 수가 있고 긍정적인 단어로 얘기할 수 있잖아요. 긍정적인 마음의 에너지를 뿜을 수가 있고 부정적인 마음의 에너지를 뿜을 수가 있습니다. ‘너 자꾸 거짓말 하면 나쁜 놈 된다.’ 이렇게 자식한테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부정적인 단어를 자꾸 연습시키는 겁니다. 이 말에는 ‘거짓말’이라는 말과 ‘나쁜 놈’이라는 부정적인 말들이 계속 연이어 반복됩니다. 이 똑같은 말을 이렇게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진실 된 말을 하면 아주 착한 사람이 된단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같은 의미이지만 긍정적인 단어의 연속으로 바뀝니다. ‘거짓말’ 대신 ‘진실 된 말’로 바뀌었고, ‘나쁜 놈’ 대신 ‘착한 사람’으로 바뀌었단 말이지요. 그 에너지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단어를 쓰게 되면 그것이 고스란히 자식에게 가서 탁탁 박히게 되는거에요. 이것은 어찌 보면 사소한 말의 습관이지만, 이 평범한 말의 습관이 전혀 다른 과보를 우리에게 가져옵니다.

사실은 요즘 젊은이들이나 어르신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정말 신기하게도 자기 자신의 숨겨져 있는 엄청난 잠재의식을 현실에서 전혀 써먹지 못하고 사는 게 현실 세계입니다. 여러분에게 엄청난 능력이 있는데 그것을 써먹지 못하고 살아요. 그 이유가 뭔지 압니까? 어릴 적에 우리가 부모님한테 들어왔던 습관 때문에 그래요.

'하지 마' '안 돼' '나쁜 사람 돼' '무조건 하지 마' '절대 안 돼' 이런 소리를 듣고 자라오다 보니까 우리는 자동적으로 인식이 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아, 나는 안 되는구나.’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나쁜 것이구나’ 이런 것들만 인식이 되는 거예요. 좋은 것이 인식되지 않고 나쁜 것들이 자꾸 인식이 됩니다.

이를테면 불교에서도 그렇게 방편으로 말을 쓰긴 하지만 ‘무명(無明)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라는 말을 쓰기보다는 차라리 ‘지혜가 충만하게 되기를 발원합니다’하는 모습이 발원문에 쓸 때 훨씬 아름다운 긍정의 표현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 안에서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내 안에서 내가 쓰는 생각, 많은 패턴들이 얼마나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는가 이것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것을 부정적인 것이라고 인식을 안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우주 법계는 그렇다 아니다 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긍정, 부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쓴 그 단어 자체가 나에게 와서 꽂히는 거예요. ‘나쁜 놈 되지 않기를 발원합니다.’ 이거는 나쁜 놈이라는 에너지를 내보내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 되기를 발원합니다.’ 쪽이 얼마나 더 듣기도 좋습니까.

 

근원에 믿고 맡기라

그리고 또한 세 번째는 ‘더 깊은 마음’은 이 우주 법계와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합니다. 완전히 연결되어 있을뿐더러 즉 내안의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여러분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고 또 내 안에 있는 마음과 이 우주법계 전체에 있는 마음이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연결만 되어있는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정보, 모든 지혜, 모든 지식, 모든 에너지, 모든 업장까지 모든 것을 다 그 안에 구족(具足)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의 설법을 통해서 과학적으로 증명됐던 이야기들을 말씀 들렸을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 더 깊은 차원의 이 마음은 어마어마한 지혜의 저장고입니다. 엄청난 지혜와 어마어마한 정보와 엄청난 업력(業力)과 모든 우리가 원하고 추구하는 일체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족되어 있습니다. 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모르는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표면의식, 껍데기 마음에 의해서 세상을 살아가면 아집에 길들여진 그런 현실 세계를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아상에 물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요. 항상 보면 좀 문제 있는 삶을 살아가기가 쉬워집니다.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것이 생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 내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 그런 표면의식으로 살지 않고 더 깊은 차원의 마음에 나를 일치 시키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항상 완벽하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항상 나를 돕고 있습니다. 항상 나에게 끊임없는 자비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깊은 차원과 내가 일치를 이룰 수만 있다면 그 근원의 마음이 나를 이끌고 갈 수 있고 우리 삶은 더 이상 문제를 만들어내는 삶이 아닌 기존에 만들어냈던 문제를 끊임없이 비우고 없애버리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있게 됩니다. 내가 사는 삶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어떤 부처가 나를 이끌고 가는 삶, 내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의 세계가 나를 이끌고 가는 삶을 살 수가 있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때때로 ‘일체 모든 것을 맡겨라’ ‘너라는 아상이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근원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겨라’ ‘네 일이 아닌 부처님 일이다’라는 내맡김의 수행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어떻게 세상을 잘 살아 보려고 애쓰지 말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모든 것을 근원의 주인공 자리에 맡기고 가라, 그랬을 때 될 것은 될 것이고 안 될 것은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곧 표면에서 안 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써 안 되는 것이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서 잘되어야지만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깊은 차원의 지혜는 더 큰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당장은 힘든 일을 겪더라도 마땅히 그것을 겪게 해줌으로써 그 사람을 더욱 더 한 단계 성숙시키기 위한 더 큰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계획을 우리는 다 알 수가 없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인지, 이 일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업장이 녹아내리는지, 나의 영적 성숙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다 알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오직 모를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 수가 없어요. 이 우주법계의 모든 계획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답답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다만 어떠한 계획이 있구나, 더 깊은 차원에서 나를 위해서 준비해 놓은 또 다른 어떤 계획이 있구나 라고 굳게 믿고 내 안에 있는 근본에 모든 것을 턱 믿고 맡기고 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아상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진리가, 지혜가 나를 끌고 가게 되고 그렇게 됐을 때 나도 모르는 생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결정지을 때 생각으로서 판단하기 보다는 어떤 더 깊은 차원의 어떤 직관이나 어떤 영감 같은 것이 나를 이끌고 가도록 나를 완전히 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안의 직관적인 힘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끄심은 항상 정확해요.

 

우주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또 한 가지는요, 무엇이든지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모든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본질은 모든 것은 이대로 완벽하며 완전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눈에 완전하게 보이지 않고, 불완전하게 해석되어서 그렇지 본질적인 무분별의 근원적 시각으로 본다면 삶은 언제나 완전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쓸 때 내 생각을 하나하나 쓰잖아요. 그러면 내 껍데기의 마음은 많은 생각을 하는데 더 깊은 차원에서는 내 껍데기가 만들어 놓은 내 생각들을 구현해 내는 작업을 합니다. 껍데기 마음이 일으킨 것을 현실로 창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드러난 이 생각은 그것을 현실로 이루는 힘이 없어요.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얘기한 것은 내가 껍데기에서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깊은 차원에 있는 그 마음이 힘을 실어준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표면의식만 잘 다스릴 수 있으면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의 창조 에너지를 끌어 쓸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을 다스려라, 번뇌를 놓아버려라, 집착을 버려라, 욕심을 버려라 하는 이유가 표면의식을 잘 다스리라는 이야기 입니다. 겉에 드러난 이 껍데기의 마음을 잘 다스리면, 그 겉에 드러난 껍데기 마음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더 깊은 차원의 어마어마한 힘, 어마어마한 창조의 에너지 장을 우리 현실로서 가져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 마음의 어마어마한 힘과 에너지는 어떤 특성이 있을까요? 우리는 이 힘이 현실로 나타나도록 해야 하는데요, 우리 안에 잠재된 이 창조에너지를 우리는 때때로 현실에서 경험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이것은 우리의 표면의식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어떤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이 나를 이끌고 가는 작업이었구나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어떤 직관적인 힘, 어떤 느낌을 딱 감지하거든요. 그럴 때 그것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을 때때로 목격하게 됩니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어떤 사람이, 나와 깊은 인연이 있는 어떤 사람이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부모님이 자식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날따라 무언지 모를 어떤 찜찜한 직관 같을 느낌들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것은 겉 표면의식이 그것보다 더 깊은 차원의 마음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동시성(同時性)

이를테면 융이 말하는 동시성(同時性)이라는 것도 이것과 좀 비슷한데요. 이 우주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테면 우리가 어떤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새롭게 무언가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그 전에는 그 공부한 것이 눈에 띄지 않다가 내가 뭔가 새로운 것을 공부했을 때 갑자기 그런 내용들이 TV를 켜면 TV에서 나오고, 책을 보면 책에서 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우연히 그 얘기를 하기도 하고, 내가 이것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망신당할 뻔 했구나 싶을 때도 있는 등으로 동시적으로 현실에 나타나게 된다는 거지요.

또 예를 들어 내가 뭔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는데, 이것에 대해 내 내면 안에 눈덩이처럼 커진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TV를 켰을 때 우연히 그 TV에서 거기에 실마리가 될 만한, 답변이 될 만한 소식을 들을 수가 있다거나, 누군가 우연히 만났던 사람이 한 마디 던진 말이 해답을 가져다 줬다거나, 우연히 책을 아무 페이지나 펼쳤는데 나에게 정말 필요한 대답이 탁 들어 있었다거나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보살님께서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불법이 담겨있는 책을 항상 가까이 놓아두고 때때로 읽어보고 있다는데, 우연히 뭔가 자식문제로 고민이 있거나 이런 저런 고민이 있을 때 중간에 아무 곳이나 책을 펼치면 신기하게도 마침 거기에 내가 오늘의 문제를 풀어 줄 만한 얘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두 번, 세 번 이어진다는 것이에요. '야 이거 참 신기하다.' 그래서 이분이 뭔가 풀리지 않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책에다 손을 얹고서는 마음속으로 마음을 비운답니다. 마음을 말끔하게 비우고는 책을 넘긴대요. 그러면 물론 이것이 100% 다 맞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 필요한 답변이 될 만한 경구들을 발견하게 되더라 이런 얘기들을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는 우연이라고 볼 것이냐,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어떤 동시성의 원리가 실제 우리 현실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에서 이 우주 법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연결 되어진 상태에서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우주 법계가 나에게 답변해 주는 작업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또 모처럼 누군가가 생각이 나서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해야지 하고 생각을 했는데 그 사람에게 먼저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고, 내가 누구에게 전화를 하려고 막 누르려는데 그 사람도 나에게 전화를 하고 있는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심상화 기법(Visualization)

요즘 의학계에서는 심상화기법(Visualization)이라는 것을 많이 사용한다고 하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상상하게 됐을 때 그 일이 현실로 신기하게도 이루어진다 하는 내용입니다. 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방사선 치료로 인해 암세포들이 막 죽는 상상을 해라, 또 백혈구가 죽어 있는 그 암세포를 밖으로 막 떼어 내어 주는 그런 상상을 해라, 하고 마음속으로 상상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심상화기법을 암 환자들에게 실행했더니 159명의 치료 불가능한 불치병 환자들 가운데 4년 후에 63명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 평균치의 두 배가 넘는 경우라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전 나사(NASA) 연구소의 연구원이자, 현재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있는 경기력 과학연구소장인 찰스 A, 가필드(Charles A. Garfield) 박사에 의하면 구소련의 최정상급 운동선수들을 대상으로 마음의 상상력과 실제 신체능력 간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먼저 운동선수들을 네 그룹으로 나눈 뒤 첫 번째 그룹은 연습시간의 100%를 훈련에만 전념시켰고, 두 번째 그룹은 75%의 시간은 훈련을 시키고, 25%의 시간은 그들이 하는 운동에서 바라는 성과를 그대로 이루는 모습을 상상하는데 쓰게 했습니다. 금메달 따는 장면, 승리하는 장면 등을 상상으로 생각하도록 심상화기법을 쓴 것이지요. 세 번째 그룹은 그 비율을 50 : 50으로 했고, 네 번째 그룹은 25 : 75로 했습니다. 그야말로 네 번째 그룹은 조금 모험에 가까웠지요. 한 시간을 연습시키고 세 시간을 앉아서 자신이 승리하는 장면을 떠올리게만 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1980년도 뉴욕의 레이크 프레스드에서 벌어진 동계올림픽에서 네 번째 그룹, 즉 세 시간을 마음속으로 승리한다고 생각하고 1시간만 운동했던 그 그룹이 가장 뛰어난 경기력 향상을 보였고, 그 다음이 세 번째, 그다음이 두 번째 그룹 순이었다고 합니다. 심상화기법은 쓰지 않고 운동만 했던 첫 번째 그룹은 운동량에 있어서는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실제 결과에서는 심상화기법을 사용한 그룹보다 경기력 향상이 적었다는 것입니다. 가필드에 의하면 심상화기법이 신체의 움직임을 두뇌 속에서 홀로그램 방식으로 기록되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연구들 덕분에 요즘에는 운동선수들을 보면 이런 심상화 트레이너가 별도로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위약(僞藥) 효과, 즉 플라시보 효과도 일종의 이런 힘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몸이 아플 때 병원에 갔다 오면 낫곤 합니다. 그런데 병원 갔다 와서 나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의 20~30% 정도만이 병원에서 치료에 의해서 나은 것이지 실제로 70~80%는 플라시보 효과일 것이라고 현대 의학계에서도 인정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상당 부분의 경우 내가 병원 갔다 왔으니까 낫겠지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나를 낫게 해 준 것이지 실제 약이 나를 낫게 해 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런 위약효과의 연구는 아주 너무나도 많은데요. 예를 들어서 50년대에 협심증 환자들의 경우에는 수술을 해야 했답니다. 그런데 그 수술을 할 때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한 팀은 정상적인 수술을 했고요, 다른 한 팀은 신체를 잠깐 조금만 절개를 했다가 수술했다고 하고 닫아 놓고는 그 사람에게는 수술이 잘 끝났다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똑같이 양쪽이 다 협심증이 치료되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플라시보 효과가 온갖 병들, 두통, 알레르기, 감기, 천식, 사마귀, 통증, 구토, 위궤양, 우울증, 상당한 정신과적 증후군, 관절염, 당뇨병 심지어 암에 이르기까지 어지간한 것들이 플라시보 효과로 완쾌가 되더라하는 말입니다.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심지어 말기 암 환자가 죽을 때가 됐는데 플라시보 효과로 위안을 주면서 신약이라고 하면서 이걸 먹으면 무조건 난다라고 했을 때 그 걸 멀고 완쾌가 되더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9세기 유행을 했던 결핵이라는 병은 1880년부터 갑자기 없어지기 시작을 했다는데요. 그 결핵의 원인이 1882년 로베르트 코흐라는 박사에 의해 밝혀지고 그 사실이 세계적인 이슈가 되면서 이제는 약만 개발하면 된다는 아주 기쁜 소식에 들떠 그 신문기사만을 보고도 결핵환자들이 획기적인 감소를 했다고 합니다. 단지 원인만을 알아냈지 그것을 통해 약을 만드는 데는 약 50년이 소요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알아냈다는 희망적 기사만을 가지고 그 당시 10만 명당 600명이 결핵 환자였는데 200명으로 갑가지 대폭 감소를 했다는 것입니다. 10만 명당 400명이 그 소식만 듣고 나아버린 겁니다.

이것처럼 사실 우리 마음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바꾸고 다스리느냐에 따라 불치병도 낫고, 온갖 질병이 나으며, 운동 경기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고, 심지어 동시성이라는 방식을 통해 이 우주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끌어당겨 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끌어 쓸 수 있는 방법만 안다면 좋은데, 문제는 여러분이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 몇 가지 말씀을 드렸지만, 그 방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내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

제가 교육을 하던 중에 사람들에게 『시크릿』이라는 책을 읽은 사람이 많기에 그 책의 내용 즉, 마음에서 일으킨 것은 현실로 이루어진다, 마음에서 어떤 것을 끌어당겼을 때 그것이 이 우주에 있는 것을 끌어 당겨서 이루어지게 만들어준다, 우리 마음의 힘이 그만큼 엄청난 것이다 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진짜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아니 어찌 생각해 보면 조금 당연하지만 한 10~20% 정도만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있을 것이라고 믿는 반면에 나머지 80~90% 정도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냐 하고 반문을 하곤 하였습니다. 될 수 있으면 마음을 긍정적으로 해 나가라고 권장사항 정도로 말해 놓은 책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하거나, 마음을 낸다고 100% 그것이 실제 현실로 일어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만약 실제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그걸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실제로 마음 낸 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은가 하고 반문을 하더란 말입니다.

신기하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마음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처럼요. 그러니 어때요. 내 안에서 스스로 그런 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한 그대로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안 믿기 때문에 그것이 현실로 되지 않아요. 이처럼 안 이루어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고, 창조해 낼 수 있는 큰 힘을 가진 존재들이지만 그것을 현실로 그려낼 수 있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못해요. 그러면 왜 그런 힘을 내가 쓸 수 없는지, 그 이유를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사실은 많은 것이 이루어진다. 보지 못할 뿐!

우선 첫째는, 사실은 많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 내는 대로, 여러분이 생각한 것의 상당수가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스스로가 살면서 깨어있지를 못해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분명히 지켜볼 수 있는가요? 평소에 마음이 어떤 것을 일으키고 만들어내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지켜보지 못해요. 내 안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지 조차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또 겉에 드러난 마음에서는 이런 생각을 했지만 깊은 속마음으로는 어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내가 미처 캐치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나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게 왜 벌어졌지 하고 착각을 하는거에요. 내가 분명히 생각을 한 것인데, 그러니까 내가 주의 깊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일으킨 생각에 대해서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안 이루어졌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사실은 우리가 일으켰던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아니 사실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 것들만이, 창조한 것들만이 내 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지켜봐야 합니다. 지켜보게 되면 ‘아, 이 생각이 이러한 현실을 창조했구나’라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를 똑똑히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면 사라진다

또한 심지어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을뿐더러, 분명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만성 두통 환자분들이 있는데요. 만성 두통 환자들을 모아놓고 뭔가 실험을 하려고 두통 환자들에게 우선 어느 정도의 강도와 어느 정도의 빈도로 두통이 일어나는지 알아보려고 몇 가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일단 치료할 수 있는 기초 작업을 하려고 얼마만큼의 강도로 머리가 아프냐, 그리고 얼마만큼 자주자주 머리가 아프냐를 조사하게 했습니다. 매일매일 얼마만큼 머리가 아프고 얼마만큼 자주 아픈지를 다 쓰게 했어요. 오늘은 얼마만큼 아프고 얼마만큼 자주 아프고 몇 번이나 아팠고 이런 것을 자세히 관찰하며 쓰게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그냥 그 빈도와 강도를 단지 조사해서 쓴 것 밖에 없는데 두통이 나아버린 겁니다. 사실은 기초 작업을 하려고 한 것인데 그 기초 작업만을 가지고도 두통이 나아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만성두통이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그것을 지켜보게 되었을 때 그것만으로도 두통이 해소되기도 합니다. 해소되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해소가 분명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오락가락 하는 마음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생각의 특성은 너무나도 엄청난 잡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쉴 새 없이 온갖 잡념, 온갖 생각들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오고 있단 말이에요. 이게 밑도 끝도 없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너무나도 많은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올라와요.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창조적인 마음의 에너지가 집중되지를 않는 겁니다. 온갖 잡다한 생각들마다 다 에너지를 실어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다가 우리 마음이 어떠냐하면 그 한 가지를 줄곧 밀고 가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할까 하다가도 바로 마음이 바뀌어 저렇게 하고, 이 결정을 할까 하다가 금세 저 결정으로 바뀌곤 한단 말입니다. 사실은 수백 수천 번도 더 오락가락하면서 어느 한 쪽의 마음을 딱 선택하지 못합니다. 아침에 어쩌다 절에 나오시는 분들은 '절에 갈까? 에이, 가지말자. 에이, 그래도 가자.' 머릿속에서 이것 하나 결정하는데 열 번 백 번을 반복하다 오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그 정도로 무슨 한 가지를 판단 할 때도 우리 생각은 끊임없이 오락가락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한 가지에 집중적으로 창조 에너지를 실어 주어야 그것이 실현이 될 것인데, 이랬다저랬다 하고, 오락가락 하니까 우주의 에너지가 제대로 실리지가 않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하자’ 그랬다가 오후에는 ‘하지 말자’ 그랬다가, 또 10분 전에는 ‘가자’ 그랬다가 10분도 채 못 되어 ‘가지 말자’ 그런단 말입니다. 자장면 먹자 그랬다가 금방 짬뽕으로 바뀌듯이 말입니다. 중국집에 밥 한 끼 먹으러 가면서 발은 걷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자장면이냐 짬뽕이냐를 가지고 수십 번도 넘게 반복한단 말 이예요. 이렇게 우리 생각이 날뛰는 원숭이처럼, 조금 심하게 말하면 정신병자처럼 오락가락합니다.

 

명상수행과 창조에너지

그래서 우리가 명상을 하거나 집중을 합니다. 무언가 한 가지에 집중함으로써 삼매에 빠지는 경험도 하고, 조용히 마음을 고요히 지켜보는 명상을 한단 말입니다. 명상을 하고 집중을 하게 됐을 때, 한 가지에 딱 집중을 하게 됐을 때 잡념이 사라지고 그 한 가지에만 집중을 하게 되잖아요. 그리 됐을 때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이 강력한 힘으로 바뀌게 됩니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평소 상태는 온갖 잡념 상태이거든요. 복잡다단한 생각들, 문맥도 없고, 맥락도 없고, 주제도 없고, 명확한 방향도 없는 온갖 잡스런 생각들이 우리 머릿속을 끊임없이 휘청거리며 오고가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런 잡념이 우후죽순처럼 올라오는 사이에 성공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부자가 되어야지, 내가 잘돼야지, 이렇게 생각한들 온갖 잡념 중에 하나밖에 안되니까 그것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해서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이를테면 이 공기 중에는 모든 라디오 주파수가 다 떠돌아다니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주파수를 딱 맞추려면 제대로 맞춰야지만 하나의 주파수가 딱 잡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대로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지지직거리기만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주파수를 제대로 딱 맞추면 소리가 분명하게 잘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산란된 마음을 비우고 한 가지 마음의 원(願)으로서 딱 주파수를 맞췄을 때 그것이 내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딱 주파수가 연결이 되어서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설마 진짜 그렇게 되겠습니까?’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비움과 집중 속에 드러난 하나의 생각, 마음, 서원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해 주는 아주 중요한 통로요 방법이 됩니다. 껍데기 마음이 비움과 집중을 만나 하나의 강력한 마음으로 바뀔 때 그것은 강력한 창조의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겉껍데기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집중과 관찰입니다. 깨어있음, 명상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지관(止觀)수행이죠.

예를 들어 여러분들 발원(發願)기도를 하잖아요. 이렇게 되기를 발원하고, 저렇게 되기를 발원한단 말입니다. ‘건강해지기를 발원합니다.’ 이런단 말이에요. 발원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을까요? 막 시도 때도 없이 발원한다고 그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을 비운 다음에, 마음을 고요히 비운 상태에서 한 가지를 발원하고 마음을 냈을 때 그 발원은 큰 힘을 얻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때요. 기도하지 않습니까. 집에서 기도하고 참선하잖아요. 기도 끝에, 기도함으로써 마음을 비우고 수행함으로서 그 마음을 딱 비워놓은 다음에 그 청정해진 마음을 가지고 발원을 했을 때 발원에 강한 창조의 에너지가 붙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집에서 기도할 때도 발원문은 기도를 다 하고 난 제일 마지막 부분에 독송하라는 것입니다. 법회를 가도 사홍서원의 발원을 제일 마지막에 하잖아요. 마음을 비우고, 욕심과 집착을 비우고, 기도로써 마음을 고요히 한 끝에 발원을 하면 거기에 더 큰 힘이 붙습니다.

그것은 온갖 산란한 마음들 사이에서 일어난 생각이 아니라 마음이 고요해진 사이에 일어난 한 생각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것은 내 겉에 드러난 껍데기 마음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되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우주법계의 근원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비워진 상태에서 마음 하나를 딱 일으켰을 때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이 되고 온 우주 법계의 마음과 연결 되어서 우주 법계가 나를 도와주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 말입니다.

그 일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작업을 내 내면만 시작하는 게 아니라

온 우주 법계 전체가 나를 도와주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뭔가 원을 세울 때는 마음을 고요히 한 상태에서 원을 세워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이 몇 천 배, 몇 만 배, 수십억 배 높아지게 되는 겁니다. 그 본연의 에너지를 완벽하게 쓸 수 있는 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력이 높은 수행자일수록 한 번 일으킨 마음이 금방 현실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행력이 낮은 사람일수록 생각과 현실의 창조 사이가 멀어요. 창조가 될지라도 늦게 창조가 되는데 반해 마음이 청정한 수행자는 한 생각 일으킨 것이 곧장 우주법계와 연결이 되어 곧장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라한과를 증득하면 과거의 수많은 업장들을 그 생에 다 해결하고, 그 한 생에 동안 받을 것 다 받고 완전한 반열반(般涅槃)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수행력은 곧 창조의 힘과 다르지 않습니다. 수행하고 명상하는 사람은 무한한 창조에너지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한정의 관념을 타파하라

다음은 세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 마음이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인데 그것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믿음’에 있습니다. 왜 안 이루어지느냐 하면 제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안 믿거든요. 스스로 안 믿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안 믿어요. 스스로 자신은 능력이 없고, 부족하고,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부족한 현실이 창조되고, 능력 없다고 생각하면 능력 없는 현실이 100% 창조되는 것을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힘을 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못 쓰는 쪽으로 창조하고 있으니까 사실은 못 쓰는 쪽으로 완벽한 창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일으킨 마음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절대 안 믿습니다. 100%를 못 믿어요. 한 50%만을 믿거나 어떤 사람은 한 30%정도쯤 믿거나 이런단 말입니다. 내가 100% 믿으면 그것이 100% 힘을 발휘하고 50% 믿으면 50%만 힘을 발휘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자기 능력에 대해서 스스로가 ‘내 능력은 이 정도 밖에 안 돼’ 하고 자기 한정의 관념에 빠져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된다, 나의 능력은 이 정도야 라고 한정 짓고 있단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자기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의 틀 속에 제한하고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어떻게 성공하고 싶은지를 물어보면 ‘나는 그냥 조그만 식당하나 운영해서 적당히 먹고 살 정도만 되면 됩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기왕이면 좀 더 넓은 식당을 운영해서 부자 되면 그것으로 남들에게 복도 많이 짓고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지 않느냐 하고 물으면, ‘아닙니다. 저는 그 정도 능력은 안 되고요. 그냥 밥 벌어 먹을 정도나 할 수 있으면 좋은 거죠.’ 이렇게 생각해요. 더 큰 힘이 나에게는 없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재수해 가지고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목표가 어디냐 그러면 '그냥 서울에 있는 대학 정도 되면 됩니다.' 라고 합니다. 기왕 목표를 잡을 거면 서울대나 하버드대학을 목표로 잡지 왜 그 정도를 잡느냐 그러면 '해봐도 안 됩니다. 제 능력은 제가 아는데, 공부는 못한다는 걸 뻔히 아는데 그렇게 목표 잡아봐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물론 높은 목표에 집착하라거나, 부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높은 목표에 집착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내 스스로의 능력을 미리부터 한정 지을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과 청빈이라면 좋지만, 내 스스로 나는 안 되고, 가난하고, 못난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가난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내 능력이 그것 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능력을 완벽하게 한정 짓고 제한하기 때문에 내 능력은 내가 한정 지은 그것만큼 밖에 드러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능력은 요만큼 밖에 안 돼’라고 내 마음으로 딱 만들어 놨잖아요. 그러니까 우주 법계에서는 내 마음에서 만든 것을 100% 힘을 실어줍니다. 100% 이루게 해줘요. 그러니까 고만큼만 100% 이루어지는 거지요.

내가 공부 열심히 하면 한 50%는 서울대에 붙을 것도 같고 50%는 안 붙을 것도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붙을 확률이 반반 입니다. 그게 사실은 우주에서 100% 힘을 실어준 거예요. 내가 50%만 원했으니까 50%만 이루게 해준거에요.

마음의 힘, 의업(意業)의 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은 어때요. 그게 100% 이루어진 겁니다. 내가 믿지 않는 만큼 안 이루어졌거든요. 그러니까 100% 이루어진 거 아니에요. 안 이루어지도록 믿었으니까 안 이루어 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한정시키고, 제한시키게 되면 결코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 울타리, 그 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나는 안 돼’ 하고 울타리를 쳐 놓으면 그 틀은 그 누구도 대신 깨줄 수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부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자기라는 틀을 깨주려고 노력을 했지만 스스로 울타리 친 그 틀은 부처님조차 대신해서 깨뜨려 주지 못했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출가를 하실 때 마부로 뒤따라왔던 찬나라는 마부가 나중에 출가해서 수행자가 됐는데 ‘지금은 이렇게 부처님의 제자들이 많지만 초기에 부처님이 출가하셨을 때는 나밖에 없었어. 너희들이 대단한 제자들이라고 으스대지만 내가 최고다. 너희들 중 누가 처음에 부처님 출가하셨을 때 옆에 있었느냐? 그때 부처님을 지켜준 건 오직 나뿐이었다. 내가 최고의 제자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겸손하지를 못했지요. 찬나에게 부처님께서는 몇 번을 설득하고 타이르면서 그런 마음을 버려라 버려라 해 주셨는데 그 마음을 못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부처님 살아생전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어요.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시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한 끝에 그 이후에 깨달음을 얻게 됐습니다. 그 특단의 조치가 뭐냐 하면, 모든 제자들에게 저 찬나에게는 모두 침묵으로 대해라, 말도 응해주지 마라, 묵빈대처(默賓對處)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 전에는 이런 묵빈대처의 방법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교화가 불가능한 외도들에게만 그런 방법을 쓰셨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찬나가 그 얘기를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아! 부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지. 여기엔 뭔가 뜻이 있지 않겠는가. 내가 잘못이 이 정도로 컸단 말인가. 어리석었구나.' 하고 스스로 크게 뉘우친 끝에 결국 나중에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처럼 자기 스스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나는 이렇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틀이 있으면 부처도 그 틀을 깨주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나의 능력을 한정 짓고 있는 이상 그 능력은 내 스스로가 깨야 되는 것이지 부처가 와도 여러분의 그 자기한정과 제한된 틀을 못 깨줍니다.

큰 스승을 만나면 깨줄 것 같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멋모르고 스승만 찾아다닌다고 그 스승이 나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언제나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내 안에서 시작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내면에 변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올지라도 외부에서 나를 변화시키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나 내가 활짝 열려 있어서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내 옆에 있는 내 도반이 나의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고, 나의 자식도 훌륭한 스승이 될 수가 있는 거예요. 그 때는 세상 곳곳에서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나를 열어두고 내 스스로가 ‘내 능력은 이것밖에 안 돼’, ‘나는 깨달음을 얻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라고 한정 짓는 마음을 먼저 버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자신 스스로 자기를 가두는 마음을 버려야 해요.

 

상대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

다음은 네 번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가 거꾸로 연습하는 겁니다. 우주는 마음에 뭔가 연습한대로 되돌려주려고 한다고 그랬잖아요. 우리가 방법을 모르는 거예요.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우주는 나와 너의 구분이 없는데, 나와 상대가 따로 떨어진 존재로 있는 줄 알고 상대방에게 욕을 하니까 사실 그것은 곧 나 자신에게 욕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타인을 욕하고 공격하고 못났다고 낮추는 것이 곧 나를 욕하고 내 능력을 위축시키는 일이거든요. 저 사람 확 망해버려라 하면서 그 사람이 성공 하는 것에 대해 배가 아프다면, 사실 그 말은 나를 성공 못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전에 몇 번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는 기도를 하고 뭔가 원하고 바라면서 기복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무언가를 원하고 빌고 바란다는 마음 자체가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몸에 지병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몸이 낫기를 바라고 원하면서 ‘몸 낫기를 바랍니다’ 하고 기도한단 말 이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되레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질 수가 있습니다. 그 바람 자체가 ‘내 몸은 너무 좋지 않다’라는 사실을 자꾸만 느끼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계속된다, 또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지속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관(觀)하라는 알아차림의 관 수행을 자주 말합니다. 마음을 관찰하고 깨어있으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 깨어있는 것이 잘 안 됩니다. 그런데 때때로 마음을 어떻게 관찰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런 분들에게 저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느껴 보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그것을 느껴보라, 우울한 사람에게는 우울감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 말고 우울한 그 느낌을 느껴보고, 고독한 그 느낌을 느껴보라고 합니다. 화가 날 때는 그 화나는 느낌을 느껴보고 지켜보는 것입니다. 욱하고 화가 올라올 때 그 올라오는 화를 느껴보아라 하는 겁니다. 느낀다는 것 자체가 관(觀)한다는 것이고요. 그 관하고 느끼는 것, 그것에 우주 법계는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는 마음은 무엇을 느끼게 해주느냐하면 우리에게 부족한 바로 그것을 느끼게 해줘요. 결핍된 것을 느끼게 해줘요. 그러니까 사실은 '부처님, 부자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빌지만 사실 그 말은 ‘지금은 부자가 아닙니다’ ‘나는 부족합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뜻이 되고 그 결과 부족과 결핍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지금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지금 현재 받고 있는 연봉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그 돈에 대한 풍요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랬을 때 돈에 대해서 긍정과 감사와 풍요로움이 느껴져요. 그러면 우주법계는 이 사람이 풍요로움을 느끼니까 풍요로움을 자꾸 가져다줍니다. 돈에 대한 풍요로움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돈을 가져다줘요. 내보내는 것이 돈으로 인해 풍요로운 마음을 내보내니 그 결과로써 들어오는 것도 풍요로운 결과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언제나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온다는 법칙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업보의 법칙 이예요. 생각으로 업을 지으면 그 과보를 받는 겁니다. 부유하고 풍요롭다는 생각, 의업을 세상으로 내보내면 거기에 따라 풍요롭고 부유한 현상세계가 그 과보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불만이 많은 사람은 그 자식이 계속 불만스러운 행동을 하게 됩니다. 자식이 컴퓨터와 게임에 빠져 있잖아요. 그럼 너는 왜 만날 컴퓨터에 빠져있어 하고 화를 내고 탓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결코 그 컴퓨터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 집착을 내가 놓아 버리기 전까지는. 오히려 거기에 대한 더 큰 집착이 생기게 됩니다. 오히려 그것을 탁 놔버릴 줄 알았을 때 그랬을 때 이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은근히 마음속에 반발심이라는 게 엄청 커요. 부모님이 하는 이야기에는 일단 반발심부터 일어납니다. 그 반발심을 잠재우지 못하면 어떤 좋은 말도 거꾸로 들려요. 거꾸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만화책 보지 마! 컴퓨터 하지 마! 게임 하지 마!’ 이 말이 오히려 게임을 더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자꾸 받아들여진다는 말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못 하게 하면 더 애틋한 마음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도 떼어 놓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 둘 사이의 사랑의 감정은 더 깊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게임하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잘못된 것일까요? 이건 옳다 그르다하는 차원에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옳다 그르다 얘기한다면 게임하면 안 되겠죠. 그렇죠? 그러나 게임하면 안 된다는 부모님 마음의 집착 그 집착이 더 큰 문제입니다. 자식이 게임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그 문제의 크기보다 너는 그 게임하면 안 되고 공부만 해야 돼 라는 부모의 집착이 사실은 더 문제고 더 큰 탁하고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져 옵니다. 우주 법계를 더 어둡게 만든다 이 말 이예요. 그건 자식과의 관계회복도 어려워지게 하고 그렇게 되면 결코 자식은 부모님 말을 듣지 않고, 부모의 말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금강경』에서는 불교 그 자체에도 집착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거기에 집착해서 그것을 고집하는 것이 도가 넘어서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도 아니고, 지혜로움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창조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이상에서처럼 창조의 원리를 말씀드렸고, 왜 우리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창조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놓쳐서는 안 될 창조과정의 핵심적인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하되 결과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떤 마음을 가짐으로써, 마음속에서 바라고 의도함으로써 현실을 창조해 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상에서와 같은 이이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힘을 낼 것입니다. ‘아, 나도 저렇게 마음을 잘만 쓰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겠구나’, ‘나도 원하는 대로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지위나 권력도 얻을 수 있고, 능력도 키울 수 있겠구나’ 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이면에는 창조에 대한 바람, 집착이 있게 마련입니다. 무언가를 원하고 의도했는데 그대로 되지 않았을 때 괴롭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많이 의도하고, 많이 바라고, 큰 에너지로써 창조한 것일수록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괴로움도 크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창조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괴로움을 창조해 내는 것이 되고 맙니다.

『금강경』에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고 하여,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마음을 일으키지도 말고, 의도를 일으키지도 말고, 창조 작업을 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아무런 분별도 없이 그저 멍하니 바보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다 내고 살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땅히 마음을 내고, 의도하고, 창조하고, 바라면서 살기는 할지라도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순수하게 마음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묻겠지만 당연히 가능합니다. 사실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이런 삶도 괜찮고 저런 삶도 괜찮다, 이 결과도 좋고 저 결과도 좋다고 믿고 받아들이되, 다만 나는 이런 쪽을 선택하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방향을 설정하는 겁니다. 그 방향이 다른 방향보다 더 좋아서가 아니라, 반드시 이 길 아니면 절대 안 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두 가지 평등한 길 가운데에서 어느 한 쪽을 자연스럽게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길도 좋고 저 길도 좋으나 나는 그저 이 길을 택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 길로 접어들더라도 상관없단 말입니다. 어차피 어느 쪽으로 가든 내 표면의식대로는 안 되었을 지라도 더 깊은 차원의 우주에서는 나에게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것을 언제나 보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이 우주법계는 정확히 필요한 일을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보내주고 있습니다. 우주는 언제나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사실은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일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완전한 일이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깨달음을 얻은 자는 무언가를 창조하고,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를 가지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 자신은 더 이상 그 무엇도 바랄 것이 없고, 얻을 것도 없고, 필요한 것도 없고, 창조할 것도 없이, 이대로 완전하고 완벽하다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창조하는 방법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 더 본질적인 것은 매 순간 순간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이 부분은 뒤에 가서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고 다시 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

그러면 이제 정리를 해야 할 시간이 오고 있는데요, 세상을 창조하는 방편의 가르침과 내맡기는 본질적인 가르침을 아우르는 아주 경이로운 수행방법 하나를 말씀드리면서 마칠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입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 라고 반복하는 거예요.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어떤 경계, 어떤 느낌, 어떤 괴로움이 일어나더라도 그 괴로움을 대상으로, 그 미운 사람을 대상으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 순간순간의 모든 마음들을 대상으로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 아니면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 숨을 내쉬면서 사랑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숨이 들어 올 때 감사함으로써 대긍정으로써 들어올 수 있도록 내 안의 에너지를 긍정으로 감사로, 풍요로움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나에게 그 어떤 것이 들어오더라도 그것은 감사할 재료가 됩니다.

자식이 컴퓨터에 빠져서 미쳐있습니다. 그거는 감사할 일이에요. 감사할 일이죠. 자식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을병에 걸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부모님 입장에서 그냥 공부 못해도 좋으니까, 컴퓨터 앞에서 게임만 할지라도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할 거거든요.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그런 감사함의 결정을 할 것이냐 하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그 결정을 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공부 잘하기를 바라지 말고 성적이 떨어지더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적이 떨어졌다는 그 사실 때문에 스스로 충격을 받아서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도 있거든요.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은, 분별하는 것은 좋은 쪽으로 분별할지라도 차라리 분별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부모님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스님, 자식들한테 자꾸 좋은 얘기를 해줘야지. 분별하지 않고 그냥 뭐든지 받아들여 주고 허허 웃기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말이지요. 물론 안 될 수도 있지요.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똑바로 얘기해 주는 것을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말은 거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집착해 빠져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옳은 것이 아니게 됩니다. 분별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거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식과의 관계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말을 하되 그 말에 집착하지 않고 하면 자식이 나쁜 짓을 하게 되더라도 괜찮아요. 내가 내 생각에서 나쁜 짓이고, 그 아이의 행동에 대한 나의 해석이 나쁜 것이지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어떤 것이 되었든 들어 올 때는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또 나에게서 나갈 때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 나갈 수 있도록 내가 내뿜는 호흡도 사랑의 호흡을 내뿜을 수 있도록, 또 나에게서 나가는 말 한 마디도 ‘사랑’으로 나갈 수 있고, 나에게서 나가는 행동 하나도 ‘사랑’이 가득한 행동으로 내보내고, 모든 마음의 에너지를 내보낼 때는 사랑의 에너지를 보태서 내보내는 것입니다. 육근(六根) 즉,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로써 들어오고, 심지어 누가 나한테 욕을 하더라도 감사하다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못 할 이유가 없지요.

감사할 이유를 찾으면 감사할 이유는 모든 것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주 법계는 언제나 나를 돕고 있으며, 나를 성숙케 하기 위한 자비로운 일만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괴로운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나를 영적으로 성숙시키기 위한 더 큰 차원의 계획의 일환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 내 계산으로 따지면 나쁜 일일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주법계의 계산으로 따지면 사실은 모든 것이 근원적으로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렇게 했을 때는 모든 것이 감사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육근(六根)으로 들어오는,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감사하게 느껴지고, 귀로 들리는 모든 소리가 감사하게 느껴지고, 코로 냄새 맡는 모든 것이 감사한 냄새가 되고, 맛보는 모든 음식을 감사하게 음미하게 되고, 감촉 느끼는 것, 생각하는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써 들어오게 되고 나에게서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내 폐를, 내 오장육부를, 내 내면을 한번 거치고 나갈 때는,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감사와 사랑과 자비심으로서 융화가 되어서, 그것이 뿜어져 나갈 때는 항상 사랑으로써 나갑니다. 자비로움으로써 나갑니다.

그랬을 때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얼마나 경이롭게 바뀌는지, 그냥 조금조금 바뀌는 게 아니라 얼마나 획기적으로 바뀌는지를 스스로의 존재로서 증명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라는 존재를 가지고 내가 얼마만큼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내 인생 내 존재가 그렇게 바뀌어 갈 수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해 내지 않으면 체험이 안 됩니다.

불교는 체험의 종교이지 그냥 껍데기 종교가 아닙니다. 이걸 내 스스로 체험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현실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내 스스로가 실천하게 된다면 여러분 인생은 지금부터 경이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요, 사실은 부단한 노력을 통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한 생각 바뀌면서 삶이 바뀌는 겁니다. 그 한 생각 바꾸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뭐 하러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혹은 아주 안 좋은 경험을 통해서나 고난을 격고 나서야 비로소 한 생각을 바꿉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에 한 생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 한 생각 바꾸는 아주 좋은 방법, 그래서 생각을 아름답게 바꾸는 방법, 방편적인 진리의 실천, 그것이 바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고 그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은 호흡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으로 나를 항상 데려오게 만듭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본질법, 근본법과도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삶에서 풍요롭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끕니다.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에 대해서는 별도로 목탁소리 홈페이지나 저의 다른 글들에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내 능력은 무능하다. 나는 능력이 없다. 이렇게 생각했던 모든 마음의 에너지들을 거둬들이고 이제부터 새롭게, 정말 멋지게 내 삶을 내 스스로 부처가 되어서 내 삶을 바꿔 나갈 수 있는 그런 엄청난 경이로운, 신비로운 그런 삶을 스스로의 존재로서 살아내 보시고 직접 체험해 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법상 (도솔,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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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어벽을 허물고 삶을 받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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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9. 6. 28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방어벽을 허물고 삶을 받아들이라


 

삶은 고(苦)가 아니다

 보통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아마도 삶을 힘겹게 살아가면서 ‘아!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구나’라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들에게 삶은 힘들고 고된 괴로움의 연속처럼 보입니다. 불교에서도 일체개고라고 하여 ‘삶은 괴로움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원래 이렇게 힘든 곳이구나’ ‘누구나 이렇게 힘든 삶을 근근히 버텨내고 있는 것이겠지’ 하며 힘들고 괴롭게 살아가는데 아주 익숙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하다고 착각을 하고 살고 있어요. 이것이 당연한 것이지 라고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때때로 즐거운 일이 생기고, 아주 행복한 일이 생길 때 어떻게 생각 하느냐 하면 그것이 사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한테 어떻게 이런 좋은 일만 자주 생길 수 있지?’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계속 좋은 일만 있다가 뭔가 큰 괴로운 일이 오려고 이러는 거 아냐?’ 하면서 좋은 일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불안해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만큼 우리는 인생을, 삶이라는 것을 ‘고통스러운 것이구나!’, ‘삶은 힘든 것이구나!’ 이렇게 많이 인식하며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이면에서, 본질에서 이야기한다면 삶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아주 신비로운 것이고 또 그 자체만으로 경이로운 것입니다. 삶이라는 자체가, 나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나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의 중요한 본질이 뭐냐면 바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괴롭게 사는 게 우리의 원래 모습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고, 자유롭게 살고, 걸림 없이 살면서 아주 평화롭게 이 삶을 아주 아름답고도 멋들어지게 살아 내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본질적인 삶의 모습대로 살지 않는단 말입니다. 보통 우리들의 삶은 아주 고되고, 힘들고, 답답하고, 속상하고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 앉아 가지고 이만큼 1미터 부웅~ 떠올라 앉아 있는 게, 그게 삶의 신비가 아닙니다. 그게 경이로운 일이 아니고, 그게 신통자재한게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우리들의 존재자체, 삶 자체, 그것이야말로 가장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것 그 자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원래가 우리가 이렇게 괴롭게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행복하게 살도록 되어 있는 게 우리 본래 모습이라면 '나는 왜 이렇게 괴로운 것인가?' 말이죠. 원래 우리 삶의 바탕이 행복에 있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힘겹게 삶을 살고 있을까요?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게 살수도 있는데 현실은 괴롭게 살고 있단 말이죠.

또 여러분들이나 저나 깨달음을 얻고자 한단 말입니다. 왜 그렇게 깨달음을 얻고 싶은데 깨달아지지 않는가, 그 이유가 뭐겠는가 말입니다. 그 이유를 바로 알고, 그 이유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으면 우리 삶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새로운 전환점이 시작됩니다.

 

삶이 괴로운 이유가 뭐지?

 

그러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뭐냐?', 그것은 사실은 이 세상이 전혀 행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을 가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가로 막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돈이 없어서 불행하니까, 돈 없는 이런 상황이 나를 가로 막고 있다’ 이렇게 내 바깥을 탓하거든요. ‘저 사람과 결혼을 하기만 했다면, 저 사람과 사귀기만 했어도 나의 행복이 완전할 수 있을 텐데. 저 사람이 나를 차버리는 바람에 내 행복은 무너져 버렸다’ 하면서 내 바깥에 탓을 돌린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행복을 차버린 것은 나다, 딴사람이 아니라 내가 바로 행복을 차버린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행복을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내 안에서 행복이 들어오는 모든 통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모든 통로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주변에 장막을 치고 있습니다. 내 주위에 방어막, 방어벽을 딱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정말 참된 행복이라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는 것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내 주변에 아주 촘촘하게 방어벽을 쌓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실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하는 작업이 바로 이 방어벽을 쌓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그 방어벽을 허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을 허물지 못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쌓고만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구하려 하지 말라, 찾으려 하지 말라, 다만 깨달음이 오는 것을 막지만 말라’ 바로 이것입니다. 깨달음이 들어 올 수 있도록 나라는 존재를 허용하기만 해라, 완전히 나를 열어둬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 주위에 방어벽을 치고 틀어 막고자 하는 그 마음만 버리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내가 깨달음을 찾고자 애쓰지 말고 깨달음이 나를 찾아 올 수 있도록 허용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깨달음이 나를 찾아 올 수 있도록 그렇게 나를 열어 둬야 된다는 거지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깨달음을 찾으려 해도 찾아지지 않습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너도나도 힘들고 고된 수행의 ‘일’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하나의 일이 되고 하나의 문제가 된다 이 말입니다. 다만 나를 완전히 열어두고 허용하면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지 못하고 딱 내 주변에 울타리로 방어막을 딱 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친 방어벽은 무엇인가

 

그런데 여러분들이 '저는 방어막을 안치고 있는데 왜 방어막을 친다고 하십니까?' 이렇게 의문을 표시할 수 있지요. '도대체 뭐가 방어막이냐? 내가 치고 있는 방어막이 도대체 뭐기에 그 방어막 때문에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고 하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틀에 박힌 생각, 관념으로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이 여러분이 쳐놓은 방어벽입니다. 좀 쉽게 이야기 한다면 우리 안에 어떤 막힌 탁한 에너지나 업장(業障), 업습(業習)이라든가 또는 관념이라던가, 바람이나 꿈이라던가, 과거나 미래와 연결되어진 모든 생각이 만들어낸 구조물들이 전부 다 방어벽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의 구조물로서 내 주변에 벽을 치고 방어하고 있다는 말인데요, 세상이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진리가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딱 벽을 쌓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아상(我相), 아집(我執), 아견(我見) 이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나라고 생각하는 어떤 견해 또는 모양, 관점 이런 것으로써 나를, 내 주변을, 딱 벽으로 둘러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특성, 특징들 이런 것들이 전부다 하나의 방어벽으로서 작용을 합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 삶을 행복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허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삶이라는 신비가 완전히 경계 없이 방어벽 없이 모든 것이 나에게로 흘러들어오도록 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내 주위의 방어벽이 되고 있습니다.

 

배 고파도 밥도 못 먹는 사람

 

예를 들어서 쉬운 것부터 이야기를 해 본 다면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혼자서 밥을 못 먹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밖에 나가서도 혼자서 밥을 못 먹겠더라. 누구랑 같이 먹어야지, 어떻게 혼자서 밥을 먹어? 혼자 밥을 먹으면 왠지 모르게 남들이 친구도 없는 왕따로 보지 않을까', ‘외롭다고 느끼지 않을까’하는 등의 관념을 고수하느라고 남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밖에 나가서 혼자 밥을 못 먹는 사람이 있단 말이지요. 이런 관념을 가지면 '내가 혼자 밥을 못 먹는다' 하는 그 생각, 그 견해가 하나의 방어막이 되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탁' 가로 막기 시작한다 이 말입니다.

내가 배가 고파요.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면 되지요. 그저 가까운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되는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행은 뭐냐면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된다는 단순한 사실이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때요? 자연스럽게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되는데 갑자기 한 생각 방어벽이 생겨납니다. 내 안에서 생각이 지껄입니다. '야! 어떻게 혼자 밥을 먹으려고 하냐? 주위에 봐라. 전부 다 가족이 왔거나, 친구와 왔거나, 연인이 함께 왔잖아? 너 혼자 밥 먹으면 남들이 어떻게 보겠어? 처량하게 혼자 밥먹는 것을 쳐다보는 남들 시선을 생각해봐’ 그런 생각이 치켜 올라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자연스럽게 밥을 먹지 못하게 되고, 굶든가, 아니면 밥을 먹고 싶어도 그냥 어디 슈퍼에 들어가 빵이나 하나 사먹고 때우던가 한단 말입니다. 이 얘기를 하니까 제 경험도 떠오르는데요, 저도 대학 초년 시절에 어느날은 삼겹살이 너무 먹고 싶은 겁니다. 삽겹살 집 앞을 지나는데 얼마나 배가 고프던지요. 마음 같아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 삽겹살을 시커서 먹고 싶었지만 혼자서 고기 먹으러 간다는 것이 여간 찜찜한게 아니데요. 이런 경험들 아마 다들 조금씩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실 혼자 먹지 못할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저 내 스스로 내 안에서 ‘혼자 먹으면 좀 그래’ 하고 딱 벽을 쳐 놓고, 관념을 만들어 놓으니까 그 때부터 스스로 만든 벽에 스스로 걸려서 자연스럽게 넘어가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배고파도 밥 한 끼 자연스럽게 못 먹고 살아요. 그래서 중생인가요! 밥 먹고 사는 이 사소한 일상 하나에도 생각이 만들어 낸 구조물에 얽매여서 자유롭지 못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배 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그 단순한 삶이야말로 도(道)다, ‘평상심이 바로 도’라고 했단 말이지요. 일상 생활을 단순하게, 자유롭게 그냥 하면 그게 바로 깨달음이고 자유로운 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 생각, 저 생각, 온갖 자신이 만든 생각의 감옥, 울타리, 방어벽에 갇혀 별일 아는 것에도 오락가락 하는 차별심으로 사는 삶이 바로 우리들 중생의 삶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리더십이 부족한 사람

 

또 다른 예를 들어보죠. 어떤 사람은 '나는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렵고, 리더십도 없고, 뭔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라고 하면 두렵다' 이런 생각의 구조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어벽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정작 나서야 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서질 못합니다. 살면서 내가 어떤 뭔가 발표를 해야 되는 일이 때때로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그걸 피해갈려고 애를 써요. 그러다보니 직장생활 자체가 그 하나의 방어벽 때문에 스트레스가 됩니다. 때때로 무언가 발표를 해야 되고, 앞에 나서야 하고, 뭔가 만들어야 하고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한다는 한 생각에 딱 차있는 이상, 그때부터는 그것을 피해갈 생각만 하게 됩니다. 직장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완전히 열려 있어서 모든 직장을 다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건 안 되니까 이런 직장은 제외하고, 저건 안 되니까 저런 직장은 제외하고, 나는 이런걸 못하니까 이런 직장은 제외하고, 그런 식으로 나에게 맞는다고 생각되는 건만 찾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의 선택의 폭은 너무나도 축소가 되고, 제한이 되고, 나의 삶은 너무나도 위축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을 향해서 모든 가능성에 완전 나를 열어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하고 있고 한정하고 있으니 사실은 인생이 그것 때문에 괴롭고 버겁고 풀리지 않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 인생이 꼬였다거나 내 직장생활이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 보면 그것은 그 이면에 바로 내 생각이 만들어낸 그 구조물, 거기에 내 스스로 붙잡혀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 '나는 앞에 나가 발표를 못해'라는 생각에 부딪혀서 삶이 풀리지 않는 것이기 쉽습니다. 사실은 내가 앞에 나가서 발표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는 앞에 나가서 발표를 못해, 발표할 때만 되면 덜덜덜 떨려'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발표를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것이 주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하죠. 내 생각, 견해가 경험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 나의 경험들이 모여서 신념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내 생각으로서 딱 굳게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현실을 만들어 낸다 이 말입니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

 

예를 들어 ‘나는 영어를 못한다’하는 신념이 자리잡으면 영어가 두려워서 영어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못합니다. 1년이나 2년 해외연수가 준비되어 있는데,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는 영어를 못한다, 나는 두렵다' 하는 것 때문에 내 앞에 딱 드러난 그 기회를 우리는 딱 마땅히 차단시켜 버립니다. 영어 공부가 필요하면 그냥 자연스럽게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저질러 시작하면 되는데 마음 속에서 영어에 대한 방어벽을 칩니다. ‘나는 원래 영어를 잘 못한다’거나, ‘이 나이가 되어 뒤늦게 영어를 다시 시작한들 젊은 사람들 따라갈 수 있겠어’ ‘너무 늦었어’ ‘학교 다닐 때 그렇게 열심히 해도 잘 안 되는 것이 지금 한다고 되겠어’ 이런 등등의 수많은 방어벽들이 순간 둘러쳐진단 말입니다. 숭산 큰스님 아시죠? 세계 살아있는 4대 생불이라 하는 숭산스님께서는 해외로 다니면서 하버드대를 비롯해 다양한 곳에서 영어로 법문을 하시고, 전세계인들에게 영어로 법문을 하시면서 감동을 주셨단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원래 숭산스님께서 어릴적부터 영어를 잘하는 분이신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당신이 47세 때인가에 영어를 시작했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 다닐 때 못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영어를 못한다'란 생각에 딱 부딪혀 있으면, 혹은 ‘나이가 많아서 영어를 시작하기 어렵다’는 생각의 벽을 만들어 놓으면 그 때부터는 내가 내 인생에서 뭔가 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많이 위축시키고 축소시키게 만들고 맙니다. 나의 능력을 한껏 축소시키게 만듭니다.

 

나를 둘러싼 다양한 방어벽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우유를 못 먹습니다. ‘나는 원래 우유를 못 먹어’ ‘우유를 먹으면 배탈이 나고 뭔가 문제가 생겨’라는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 이런 사람은 우유만 먹으면 배탈이 나요. 그런데 이를테면 그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놓고 우유를 먹게 하면 맛있게 먹고도 몸에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유를 못 먹는다는 것은 몸에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못 먹는다는 한 생각이 우유를 못 먹게 만드는 거예요. 내 몸에서 우유를 거부하고 배탈이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산에 가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예를 들어 어릴 적에 아버지가 가기 싫다고 하는 것을 끝까지 붙잡고서 아들을 데리고, 딸을 데리고 산에 왔다갔다 다녔단 말입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 큰 정기를 키워주고 싶은 마음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정말 가기 싫어 죽겠는데 아빠가 가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가게 되가지고 산이 싫어졌을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산이 싫다고 했던 그 한 생각, 그 한 생각이 그때부터 산과 관련된, 산행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 나를 나의 마음을 비좁고 웅크리게 만드는 거예요. 이번에 우리 직장에서 3박4일 지리산 종주를 간다더라, 그러면 마음에서 거부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딱 막아서는 마음이 일어나요. 방어벽을 딱 칩니다. '나는 산행은 못해'합니다. 아니면 집에 가서 생각합니다. ‘그때 무슨 핑계를 댈까? 무슨 핑계를 대서 이 산행을 내가 안 갈수 있을까? 하루도 아니고 3박4일 동안 그 험한 지리산을 어떻게 가느냐?’ 하면서 탁 방어벽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생각은 온갖 핑계 거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아주 말도 안 되는 일도 벌인단 말이예요. 나에게 오는 삶의 가능성을 딱 막아서는 겁니다. 이를테면 어릴 때는 산이 싫었지만 마음을 열고 새로운 마음으로 산행을 가 보면 그전에는 전혀 눈뜨지 못했던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눈을 뜨게 될 수도 있어요. 왜 애초부터 과거에 얽매여 그 가능성을 해 보지도 않고 막아서는 겁니까. 모든 가능성에 대해 거부하지 말고, 막아서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나에게 주어진 삶을 통째로 받아들여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방어벽을 깨고 자유로와지는 길이예요.

또 다른 예를 들어 볼까요. 어떤 초등학생들은 그런다고 하데요. 학교에서 주사를 맞는 날이다 하면 그 주사를 맞기 싫어서 그날 하여간 무슨 짓이라도 한다는 겁니다. 학교에 뭔가 핑계를 대고 안 가거나, 갑자기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거나, 또 어떤 어린아이는 주사바늘 앞에서 그냥 기절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성격’,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격’ 그런 것도 마찬가지죠. 이런 사람은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거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안절부절을 못 합니다. 마음에서 방어벽을 치고 그 상황에서 빠져나갈 궁리에 몰두합니다. 사실은 그 만남에서 사람들과 함께 친해지고 어울릴 수 있는 아주 소중한 변화의 때를 만나게 될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 자체를 방어벽을 침으로써 애초에 거부하고 마는 것이지요.

또 어떤 사람은요, ‘나는 집만 나가면, 집 나가서 어디서 잠을 자거나 하면 화장실을 못 간다’ 이런 사람도 있데요. 내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화장실에 가 큰일을 못 보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를 들어 ‘여러분들 송광사 여름수련회나 해인사 여름수련회나 어떤 수련대회를 한번 참석해 보십시오’라고 추천해 주었습니다. 이런 추천을 받고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고 허용하며 ‘좋습니다. 한 번 가 보죠’ 하고 시원스레 답하는 사람이 잘 없어요. ‘수련회 한번 가 보십시요’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자기가 쳐놓은 방어막에 걸려 그것을 있는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생각으로서 방어막을 탁탁 쳐 댑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밖에만 나가면 화장실을 못가서 그 수련대회 3박4일, 4박5일 가는데 5일 동안 대변을 못 보면 어떡하나? 나는 그것 때문에 못 간다’ 이래요. 설마 그러시죠? 지금 웃으시는 분도 계시는데 실제 그런 사람이 있다니까요. 이를테면 어떤 보살님이 하도 열심히 수행하고 정진하기에 출가하라고 했더니 우스개로 하는 이야기겠지만 나는 머리 깎으면 머리가 안 예뻐서 출가 못한다는 겁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니까요.

또 ‘수련대회를 가라’ 이러면 한순간 마음속에 ‘나는 가부좌 틀고 참선을 오래 못해’, ‘다리가 아파서 나는 그것 때문에 못가’ 이렇게 방어벽을 딱 칩니다. 참선하는데 다리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어요. 밤새 철야정진하고 잠도 안 재우고 수행시킬지 모르는데 '아! 나는 잠은 절대 포기 못해. 잠은 푹 자야해' 이렇게 방어막을 딱 칩니다. 온갖 자기 나름대로의 방어벽을 다 치거든요.

제가 이 자리에서 만약에 정토회에서 하는 ‘깨달음의 장’ 수련대회 가 참 좋다더라, 거기에 한 4박5일 한번 갔다 오십시오 하고 이야기를 했단 말입니다. 여기 한 이삼백 명이 앉아 있어도 이중에 갈수 있는 사람은 한둘도 안 될 겁니다. 그만큼 방어벽이 견고해요. '거기 갔다 와서 엄청난 깨달음을 느끼고 왔다. 삶이 정말 확 바뀌었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너무나 좋으니까 꼭 다녀오십시오.' 라고 온갖 찬사를 하며 추천을 했습니다. 그러면 갈 것 같죠? 대부분의 사람은 못 갑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방어막에 스스로 걸려 넘어져서 그것을 탁 잡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잠을 여덟 시간은 자야 된다’는 울타리를 딱 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그 전날 여섯 시간을 잤다, 그러면 마음 한편에 두 시간, 두 시간, 두 시간, 출근을 해서도 나는 두 시간을 못 잤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뭔가 두 시간만큼 피곤이 몰려옵니다. 어디 구석 불편한 곳에서 새우잠이라도 한 두 시간을 자고나면 그때 되서야 이제야 잠에서 해방됩니다. 그런데 수행자들 중에는 ‘하루에 세 시간만 자도 전혀 문제없다’ 그러는 사람도 있거든요.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세 시간만 자도 돼, 어떤 사람은 나는 다섯 시간은 자야 돼, 나는 여섯 시간은 자야 돼, 하고 딱 잠에 대해 울타리를 치고 나면 내가 울타리를 친 그 관념 때문에 그것이 나의 실제가 돼 버립니다. 실제 삶에서 내가 정해 놓은 그 시간의 잠에 걸려 넘어진단 말이지요. 내가 만들어 놓은 관념이 나를 움직이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거사님은 잠에 대한 아주 독특한 그 신념을 가지고 계세요. 당신은 잠을 많이 자고 조금 자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한 시간이라도 자고만 일어나면 되는 겁니다. 이분은 당신이 한 시간을 자든 두 시간을 자든 그 다음날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또 실제로 그런 관념에서, 그 신념에서 그런지 몰라도 당신은 잠 때문에 뭐 힘든 것이 없데요. 그리고 또 아주 신기한 것은 뭐냐면 이분은 자다가 중간에 한 번 깨고 나서 또 자면 우리는 괜히 좀 찝찝하잖아요. 푹 못 잔 것 같고, 잠을 설친 것 같고 그렇단 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거사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냐면 잠에서 깼다가 다시자면 ‘아~ 그것처럼 좋은 것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고 물었더니 하루에 잠을 한 번 자면 되는데 하룻 밤 사이에 두 번이나 잤으니 더 좋다는 겁니다. 저는 농담이겠지 생각 했는데 실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니까 중간에 뒤척이다 다시 잠들더라도 별로 괴로울 일이 없는 겁니다.

자식들에 대해서는 ‘공부 좀 해라. 성적 좀 올려라. 좋은 대학을 가야돼’ 한단 말이지요.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고 있을 때 자식은 항상 뭐를 하고 있어야지 마음이 놓여요? 공부를 하고 있어야 되지요. 부모님이 자식을 바라볼 때는 항상 공부하고 있어야지 아주 정상적인 상황입니다. 아주 뭔가 제대로 가는 상황 이예요. 그런데 볼 때마다 공부만하고 있는 상황은 어찌 보면 불행한 상황이지요. 그 활자에 거기에 놓쳐서 친구와의 아름다운 사귐, 자연 속에서 뛰어놀 수 있는, 이 햇볕 속에서 뛰어 놀고 자랄 수 있는, 그런 천연의 아름다움을 상실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부모가 볼 때 자식은 늘 공부하고 있어야 되요. 그러니까 아이가 한참 공부하다가 부모님이 딱 들어갔을 때 마침 컴퓨터를 켰는데 닦달을 한단말이죠. '너는 하루 종일 컴퓨터만 하고 있냐?', ‘또 컴퓨터야?’ ‘공부는 안하고 맨날 그것만 하고 있다' 그런단 말이죠. '자식은 공부를, 공부만 해야 되는 사람이다' 이건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방어벽입니다. 그런 방어벽이 있게 되면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식이 공부를 안하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확 올라옵니다. '저놈은 또 공부는 안하고 저 짓거리를 하고 있구나' 이렇게 올라온단 말이예요. 그 방어벽을 탁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려놓으면 아이가 놀더라도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며 흥미롭고 행복하며 함께 재미있습니다.

아이에게 물어보는 것이 항상 '오늘 뭐 공부 잘했니? 오늘 공부 많이 했니? 시험 잘 봤어? 성적이 얼마 나왔어?' 이런 걸 주로 물어보지, '너는 어떤 친구가 있니? 아! 그 친구는 어떤 것을 좋아하니? 뭐하는 걸 좋아하고, 취미는 뭐고, 함께 하면 무슨 놀이를 하고 지내니?' 이런 것들을 물어보지 않는단 말입니다. '오늘 뭐하고 놀았니? 뭐해서 재미있었니? 오늘 하루도 즐거웠어?' 이걸 물어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대상으로 공부해야 된다는 방어벽을 탁 놓아 버리게 되었을 때에 그 아이를 비로소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공부를 안 하더라도 미운 대상으로 보이지 않게 된단 말입니다. 왜 있는 그대로의 자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 안의 온갖 생각들, 잣대들에 끼워맞추면서 편견어린 시선으로 자식을 바라봅니까. 그럼으로써 우리의 아이들이 얼마나 부모가 만들어 놓은 생각의 감옥으로 인해 아파하고, 상처받고, 자유롭지 못해야 하는 겁니까. 부모 눈치보는 자식으로 키우면 안 되요. 자유롭고도 당당하게 자기 삶을 휘적휘적 창조적이고도 자율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자주적인 아이로 키워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부모의 틀에 갇힌 생각 속에 아이를 끼워넣는 작업을 중지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내 스스로 만든 구조물에 갇혀 가지고 그렇게 내 스스로 문제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단 말이죠. 성공해야 한다, 항상 1등해야 된다, 이런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 이 틀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 예를 들어 봅니다. '나는 여자다' 하는 것도 하나의 상이고 방어벽입니다. 여자다 혹은 남자다, 이것도 내가 만들어 낸 방어벽입니다. ‘여자다’라는 방어벽 때문에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내가 남자로만 태어났어도 혼자 배낭여행을 한 번 꼭 가보고 싶다, 그런데 여자다 보니 위험해서 홀로 여행을 못 떠난다. 자유롭게 홀로 떠날 수 있는 남자들이 참 부럽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과연 이 말이 진실일까요? 사실은 혼자 배낭여행을 다니는 여자가 더 많을까요? 혼자 배낭여행 다니는 남자가 더 많을까요? 제가 외국에 다녀보니까 혼자 배낭여행을 다니는 여자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 생각에서는 홀로 떠나는 배낭여행은 남자들이나 한다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사실은 그런 여자분들이 더 많단 말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여자이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방어벽을 쳐 놓고 그 방어벽에 갇혀서 안 된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여자라서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된다, 남자라서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된다, 이렇게 울타리를 딱 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걸려 넘어져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나이가 오십 살이다, 나이가 스무 살이다, 하는 그 나이에도 걸립니다. 내 나이가 오십 살이다 그러면 ‘내가 이 옷을 입으면 남들이 괜히 주책이라고 하지 않을까? 늙어서 나이값도 못 한다고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때문에 이를테면 입고 싶어도 못 입는 옷도 있고요, 꾸미고 싶어도 못 꾸미는 경우도 있고, 내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고작 나이 하나에 걸려서 말이지요.

아이들 다 독립시켜 놓고 내가 뭔가를 새롭게 공부라도 하고 싶은데 ‘이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는 게 말이 되겠어?’ 하고 내 나이 오십이라는 것에 큰 방어벽을 쌓고 있기 때문에 그때 저지르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이 말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나이는, 우리의 본질적인 나이는 없습니다. 항상 제로예요. 어떤 틀이 박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내 스스로 방어벽을 쌓고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대학 못 나온 것이 콤플렉스가 되고, 전문대 나온 것이 콤플렉스가 되어서 사람들이 대학교 이야기만 하면 꽁무니를 줄줄 빼고 자리를 뜨기도 합니다. 대학이라는 학벌이 내 인생의 하나의 커다란 방어물이 되는 겁니다. 군대 안 갔다 온 사람들이나 방위 갔다 온 사람들은 은근히 그것이 그렇게 큰 스트레스랍니다. 군대 갔다 온 사람이야 별일 아니다 싶겠지만,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괜히 남자가 위축이 된다 합니다. 그거 그럴 필요가 없지요.

사회적인 지위가 높으신 분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스스로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엄청난 방어벽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곤 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있다보니 이렇게 행동해야 된다, 근엄하게 행동해야 한다, 천박하게 보이면 안 된다, 이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 하는 방어벽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스님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승복을 입고 어디 밖에 나가면 이게 족쇄가 돼버리고 감옥이 돼버려요. 그럼 하고 싶은 것도 못합니다. 뭔가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못 먹고, 바쁜 일이 있어서 조금 뛰어가야 하는 일이 있어도 자유롭게 뛰지 못합니다. 여기저기 감옥에 걸린단 말이지요. 사실은 계율이라는 것도 본질에 있어서는 걸릴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무애도인, 걸림 없는 옛 도인들의 삶은 언뜻 중생들의 판단, 분별, 생각으로 보면 막행막식이다 싶을 정도로 일상적인 삶에 걸림이 없이 살기도 했단 말입니다. 당신은 안에 어떤 스스로를 가두는 틀이 없고, 방어벽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유롭죠. 남들이 보기에는 계율도 안 지키는 것 같고, 말도 막 하는 것 같고, 도인 같지 않아 보이지만 그 내면 세계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군에서 보내주는 자기계발 프로그램 같은 것에 갈 수 있게 되어 동사섭이라는 용타스님이 운영하시는 수련장에를 갔었는데요. 거기에서 일종의 행동명상을 하는데 남녀노소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까지 전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방에서 한 1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스님께서 자기라는 상을 다 놓아버리고 오직 스님의 말만 따르라고 하는 겁니다. 남자라는 상, 나이라는 상, 지위가 높고 낮다는 상, 그 모든 상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 만이라도 완전히 자유인이 되어 보자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방어벽을 모두 벗어보자 하는 말과 다르지 않은거지요. 스님이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내가 아니에요. 내가 아니고 스님이 말씀하시는 그것이 돼야 합니다. '나'라는 상을 완전히 놓아 버리고 그것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것이 안 되면 그것은 '나'라는 상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입니다. 예를 들어 스님이 지금부터 우리 모두 '개다! 강아지다!' 그러면 갑자기 지금부터 개가 되어야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강아지처럼 ‘멍멍!!’ 짖어대면서 깨물고 날뛰며 나를 버리고 개가 되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근엄하신 분들일수록, 아상이 많은 사람일수록, 방어벽이 높은 사람일수록 눈치 살살 봐가면서 작은 목소리로 '멍멍' 한번 하고 말지 적극적으로 자기를 비우고 개가 되지 못하더란 말입니다. 자기라는 상을 딱 놓아버린 사람들은 그냥 사십, 오십, 육십이 되더라도 마구 짖고 뛰어다니면서 잘도 논단 말입니다. 진짜 개가 된 것처럼 말이지요. 거 신기하게도 한 60이 넘어 보이시는 근엄하게 생기신 분께서 그냥 '개'하라 하면 그냥 막 개가 되고, 고양이가 되라하면 고양이가 되고, 애기 하라하면 갑자기 애기가 되어 가지고 응애응애 울고 이런단 말이죠. 그런데 내가 만들어 놓은 그 벽! 그것이 크면 클수록 그게 잘 안되지요. 자유롭게 그것을 못합니다. 그 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틀들은 바로 내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매순간 순간 이 세상을 향해서 수많은 방어벽을 치고 있고, 그것 때문에 이 세상의 다양한 가능성들과 풍성한 새로운 경험들, 그리고 본질적인 요소들이 나에게 흘러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깨달음이 나를 찾아오도록 하라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깨달음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찾아나서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 본질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제 스스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아니 찾아 온다기 보다는 언제나 깨달음 아닌 순간이 없고, 참된 자성이 아닌 적이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행복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지 내가 행복을 찾아가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금 불행하기 때문에 언젠가 있을 행복을 찾아 나서겠다, 달려가겠다, 그게 행복의 본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때때로 어떤 선지식이나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을 보면 끊임없는 정진과 피나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어느날 갑자기 불현듯 깨달음이 나를 찾아왔다고 말하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뭔가 치열하게 수행을 해 가지고, 피나는 노력을 해 가지고 결국에 깨달았다 하는 이런 게 정답인줄 알았는데 그런 방식으로 올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올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수행이라는 것에 ‘수’자도 모르고, 불교의 ‘ㅂ’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더라도 그 사람에게 깨달음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불교나 깨달음은 불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해탈과 열반이 불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르침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를 이름하여 불교라고 이름지었을 뿐이지 사실은 불교라는 그 비좁은 이름 속에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수행이라는 것은 사실은 나를 완전히 여는 작업입니다. 가두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를 활짝 열어두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고 노력하는 일이 아니라 깨달음이 들어올 수 있도록, 참된 진리가 들어올 수 있도록 나를 활짝 열어두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은 매 순간순간 나에게로 오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닫힌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방어벽을 딱 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고 반사되어 나가버립니다. 진리란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활짝 열고 보면 진리 아닌 것이 없고, 언제 어느때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아니 함께 하고 있었다기 보다 나를 포함은 모든 것은 그대로 진리 그 자체입니다. 다만 내가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외면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눈도 어때요? 무엇을 찾으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분명히 그 방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못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있었지만 못 찾아요. 그것이 그 방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본 것이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법당에 아~ 꽃들이 다양하게 피어 있습니다. 꽃다지가 있고, 개망초가 있고, 별꽃, 패랭이, 연꽃, 참나리 뭐 다양한 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다양한 꽃들이 눈에 보이거든요. 절에 오면 ‘아 이 절 관음사는 꽃들이 많아서 좋아’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꽃을 향해서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은 전혀 꽃이 눈에 보이질 않죠. 꽃은 전혀 나에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꽃은 항상 지천에 열려 있지만 그 꽃이 나에게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그 꽃들은 꽃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꽃에 관심이 없다가 어느 날 꽃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염과 동시에 아름다운 꽃들이 신비롭게 막 들어오기 시작해요.

제가 예전에 어떤 절에 있을 때 그때 갑자기 그냥 불현듯 막 꽃이나 나무나 숲, 자연의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지고 신비롭게 느껴지면서 그저 꽃들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하던 그런 때였는데요. 그때부터 꽃에 대해서 아주 유심히 관찰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그 절에 오면서 이렇게 외진 곳에, 이렇게 척박한 곳에 절만 하나 뚝 떨어져 있으니까 너무 삭막해 보인다고 이야기를 했었고 저도 처음 봤을 때 그렇게 느꼈었던 말입니다. 그런데 꽃과 야생초나 이런 것들을 좀 보다보니까 너무 신비로운 곳인 겁니다. 사실 그곳이 군사보호구역이다 보니 오래도록 사람들의 발길도 별로 없었던 곳이고 숲이 우리 생각하는 것처럼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도 아니였다보니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더없이 정리가 안 되어 있고, 삭막하고, 그렇게 느끼겠지만 야생의 숲이 주는 자연스러운 풍요를 가만 가만히 느끼고 지켜보다 보니 그것은 그 어떤 식물원에서도 감상할 수 없는 엄청난 생명의 보고이자 신비의 보고였더란 말입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꽃들, 생각지 못했던 약초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산야초들, 책에서만 보았을 법한 그런 온갖 종류의 희귀한 식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그 작고 소박한 절이 얼마나 풍요로운 곳이고, 이름다운 곳이고,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운 꽃들로 넘쳐나는 곳인지를 알게 되면서 그 절의 전혀 새로운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될 수 있었지요.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과 신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의 문을 열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리 안 된 쓸모 없는 땅이거나, 가치 없는 숲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서, 혹은 몇몇 마음을 연 사람들에게만 그 가치는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새로 절에 나오게 된 보살님 한 분이 야생화를 많이 공부하고 관심 가지던 분이 계셨는데요, 그 분과 저만 이심전심 염화미소를 보내며 그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 있었지, 다른 분들은 여전히 깜깜하더란 말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라

 

우리가 마음속에서 마음을 활짝 열어 놓지 못하면 이 세상에 있는 진리가 나에게 들어오질 않습니다. 여러분들! 이것을 분명하게 좀 들으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깨달음은 나에게 오고 있다, 지금 이순간도 모든 진리, 모든 자유로움, 모든 행복은 항상 오고 있습니다. 언제 왔냐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오고 있다. 아니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막아서는 내 마음의 방어벽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보통 우리는 무엇을 보더라도,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중에 나에게 필요한 것만 쏙쏙 뽑아서 선택해서 받아들이는데 익숙합니다. 우리 마음은 자동적으로 좋고 나쁜 것, 적과 아군을 구분해서 어느 한쪽만 받아들이고 다른 쪽은 거부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도 나에게 이익 되는 사람, 도움 되는 사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좋아하면서 사귐을 유지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오면 이렇게 밀쳐내기 시작합니다.

직장에서의 일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일이 오더라도 내 몫이려니 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이러이러한 일은 내가 잘하니까 받아들이려하고, 이러이러한 일은 딱 거부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거부하려고 애썼던 그 일속에 나를 일깨워줄 수 있는 엄청난 신비로운, 비밀스러운, 이치가 담겨 있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단 말입니다. 바로 그 생소한 일을 통해 우주는 나에게 아름다운 삶의 이치나 또 다른 새로운 진리에의 가능성을 보내주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례히 그렇듯, 하던대로 거부하는데 익숙합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더라도 마음에 불편함과 벽을 가진 채 받아들이니까 그것이 온전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은 새로운 변화나 어떤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자주 인사이동을 해야 하는 분들 같은 경우에 ‘이런 곳은 가고 싶고, 저런 곳은 안 갔으면 좋겠다’ 하고 방어벽을 쳐 놓습니다.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친 집착을 한단 말이지요. 내 삶이 어떻게 펼쳐지든, 내가 어느 곳으로 가든 바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몫이라고 생각하고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모든 가능성을 향해 나를 활짝 열어놓치 못한다는 거예요. 어디를 가도 좋고 무슨 일이 있어도 좋다, 시골을 가도 좋고 도시에 가도 좋다, 서울을 가도 좋고, 전라도를 가도 좋고 어디를 가도 좋다, 어디를 가든 바로 그곳이 이 우주법계가 지혜와 자비로움으로써 나를 돕기 위해 나를 보내주는 곳이구나 하고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생각 자체가 좁아지고, 내 삶의 엄청난 가능성이 한껏 축소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그곳이 바로 내가 완전히 받아들여야 할 곳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못한단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삶을 대상으로 마음속에서 딱 벽을 칩니다. 이러이러한 곳에 가고 싶다 하고 벽을 치니까 어때요? 거기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못한 곳에 갔을 때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저 친구는 나보다 뭐가 잘나서 저 좋은 곳에 보내주고, 나는 여길 보내 줬느냐?’ 하고 그냥 시비거리가 생겨나고,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다 말이죠. 나를 완전히 열어 놓는다면 어디가도 좋다, 어떤 일이 나에게 멀어져도 좋고, 어떤 인연을 만나도 좋고, 어떤 사람을 만나도 좋다, 설령 어떤 직장을 갔는데 작장 상사가 너무 나쁜 사람이고 너무 사람을 괴롭힌다 할지라도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은 왜 그런 일이 왔느냐? 나에게 어떤 영적인 각성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나에게 어떠한 깨달음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혹은 나에게 업장소멸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우주법계가 자비로움으로써 계획해 낸 일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를 대장부라는 말로 많이 표현하곤 하는데요, 이 정도 너른 마음, 활짝 열려서 꽉 막혀 있지 않은 마음, 무엇이든 오너라 하고 당당하게 삶을 받아들이는 이 정도가 되어야 대장부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방어막을 침으로써 허용할 것과 허용하지 못할 것,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 이것을 딱 분명하게 나눠 놓습니다. 내가 받아들일 것,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둘로 나눠 놓고 그중에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깨어남이 자꾸 더뎌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업장소멸의 가능성이 자꾸 뒤로 미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한 완전한 깨달음, 열려있음, 행복, 자유로움 이런 것을 스스로 걷어차고 있다 이 말입니다.

다른 게 감옥이 아닙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게 감옥이 아니라 이렇게 내가 방어막을 치고서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내가 친 방어막에 내 스스로 갇혀 있는 것! 그게 바로 존재의 감옥이고, 의식의 감옥입니다.

 

삶은 언제나 나를 돕고 있다

 

그래서 다음의 이 명제를 분명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삶은 항상 나를 일깨워 주기 위한 일만 벌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은, 모든 사건은 여러분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여러분을 완전한 각성으로 이끌기 위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끌기 위해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저 나를 시험해보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모든 신의 시험은 사실 그것 자체로써 나를 위한 신의 사랑입니다. 이 사람이 나를 참으로 믿는지 시험해 보자 하고 신께서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 벌이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지 선택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나에게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빛이 못 들어오게 방어벽을 쳐 놓음으로써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로 막은 것은 세상의 많은 어두운 요소들, 문제들, 경제적인 궁핍 내지는 내 능력의 부재, 이런 것이 어두움처럼 느껴져서 나를 어둡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빛이 한없이 들어 올 수 있는데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어벽을 딱 치고 있음으로써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놓고 나서 스스로 어둡다고 ‘삶은 왜 이리 어두우냐? 삶은 왜 이렇게 힘들고 답답한 것이냐?’ 라고 삶과 다투고 투쟁하고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가 나를 찾도록 완전히 나를 진리에 내맡기고 포용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리냐? 일상이 바로 진리다, 나에게 주어진 삶이 바로 진리라는 겁니다. 사소한 것이야말로 가장 신비로운 것이고, 가장 경이로운 겁니다. 가장 사소한 것 속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보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나를 완전히 활짝 열어둘 수 있어야 된다 하는 소립니다. 일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정확히 나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은 정확히 여러분이 받아야 될 바로 그 사람인 겁니다. 이 모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건, 사고, 일, 경계, 사람 이 모든 것들은 진리의 세계, 법계로 부터 아주 치밀하게 계획된 그것도 우리를 이끌어 주고, 일깨워 주고, 우리를 깨닫게 해줄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등장한 어떤 진리의 소식이요 부처님의 큰 자비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리가 삶 속에 등장하는 방식입니다. 아주 일상적인,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일상이 바로 진리의 나툼이다 이 말입니다. 그 모든 사소한 일상의 경험이야말로 나에게 깨달음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진리의 계획입니다. 하루 하루 매 순간순간 내가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기적이고 신비이며 진리의 소식입니다. 우리를 깨어남으로 이끄는 최적의 공부인 것입니다. 일상의 삶이야말로 깨어남을 향한 장대한 여행인 것입니다. 업의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 안에 오래도록 깊이깊이 저장되어 있던 어떤 업장들이 오랜 기다림 끝에 모처럼의 풀려날 최적의 기회를 맞아 가지고 나에게 찾아 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건이든 사고든,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아무리 평범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것은 더 깊은 차원에서부터 어떤 특정한 깨우침을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고, 우리를 평화와 자유로움으로 이끌어 주는 상황들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상의 신비를 맞는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삶이라는 평범함 뒤에 감춰진 경이로운 순간을 맞이하는 우리 마음가짐은 어떠냐 말이지요?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죠. 전혀 소중하게 여기거나, 새롭게, 신비롭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매일 매일이 그저 그렇게 반복되는 진부한 일상일 뿐이란 말입니다.

세상이라는 것에, 삶 그 자체에 완전히 나를 열어두지 못합니다. 그 모든 삶을 분별하고 해석하고 차별하고 선택함으로써 통째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고, 특정 대상에만 나를 열어 보입니다. 사람을 만나도 선택적으로 만나고, 어떤 일을 만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선택적으로 만나고 그런단 말입니다. 삶이라는 진리가 나에게 주는 선물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려면, 삶 그 너머의 깊이에 있는 참된 의미를 깨닫고자 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을 취사선택하거나 나누지 않고 무엇이든 받아들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책을 한 권 선물해 주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휘익 대충 한 번 훑어 보고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주제가 아니야’ 하고는 툭 처박아 놓습니다. 그 안에 얼마나 엄청난 깨달음이 담겨있는 책인지도 모른 채 그냥 책장에 꽂혀서는 몇 년이고 처박혀 있기만 합니다. 그렇게 책에 대한 방어막을 쳐놓은 그 사람에게는 그 책이 들어올 수 없어요. 그 가르침이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 존재가 깨어나게 되면 내가 어느 정도 열려 있게 되면 그 진리나, 그 가르침이나, 어떤 삶의 부분에 대해서 열려 있게 되면 그때부터 그것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집안에 푹 처박아 놓았던 그 책이 이렇게 보배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합니다.

잘 따라오고 있나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계신 건가요?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들이 이중에 많은 분들에게는 아마도 별 의미 없이 다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뭔 이야기를 하는 건가?’ 하고 내가 딱 닫아걸고 있으면 그 어떤 것도 들어 올 수가 없거든요. 부처님 제자들도 부처님께서 그 오랫동안 법을 설하고 했지만 스스로 닫아 건 사람은 결코 가르침을 흡수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부처님을 오래도록 곁에서 시봉했던 아난존자나 처음 부처님께서 출가하실 때 마부로 따라왔다가 훗날 출가하여 비구가 된 찬나장로도 부처님이 계시는 동안에 그 많은 가르침과 훈계와 지도가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부처가 있더라도 스스로를 닫아거는 사람에게는 그 부처도 아무런 선지식으로서의 역할을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삶을 향해 나를 완전히 열어둔 사람에게는 만나는 모든 사건, 모든 일들, 모든 사람, 모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이 바로 나를 일깨워 주기 위한 깨우침의 일이 됩니다.

그래서 내 삶에서 등장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할 필요가 없단 말이예요. 그 모든 일들이 나에게 흘러와서 흘러가도록 내버려둬야 합니다. 자꾸 가둬두거나 못 들어오게 틀어막을 필요가 없어요.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그냥 완전히 나를 허용하는 겁니다. 그럼 그 일이 진리의 일이 되고 부처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매순간순간 우리에게 펼쳐지는 모든 일들은 아까 제가 말씀 드린 방어벽을 없애주기 위한 목적으로 나에게 찾아옵니다. 만약에 어떤 새로운 일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는 하나의 방어벽에 대해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방어벽을 허무는 방법

 

보통 사람들은 방어벽에 걸리지 않는 것들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잖아요. 그런데 뭔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잖습니까? 방어벽에 걸리는 것, 사상적으로도 그렇고 뭐든 내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뭔가 나한테 와서 부딪치고, 내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내 마음에 화를 남기거나, 내 마음에 짜증을 남기거나, 이거는 내가 좀 거부하고 싶거나 이런 마음이 올라오는 것, 사실은 그것이야 말로 내 방어벽을 깨주기 위한 목적으로, 내 방어벽을 깨 줌으로써 나를 영적으로 성숙시키고, 나에게 진리가 파도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띠고 이 자리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것들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았던 것이라도 나에게 오는 것, 나에게 오는 모든 일들을 대상으로 나를 완전히 열어두게 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이 파도쳐 들어오고 그랬을 때 내 안에 내가 꽉 울타리 쳐놨던 방어벽들이 하나둘씩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어떤 경지에서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 말입니다. 어떤 방어벽도 없으니까 모든 것이 자유롭게 오고 간단 말입니다. 어디에도 걸릴 것이 없어요. 이 자리가 바로 무애도인의 자리라고 했어요. 그랬을 때 비로소 아까 말했던 다양한 예를 들었던 방어벽들, 그런 어떤 크고 작은 관념, 관념의 틀, 방어벽 그것에서 내가 놓여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어떤 틀에 잡힌 관념에 빠져가지고 거기에서 괴로워하는 일들이 없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그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방어벽 너머에 자유로움이 있다, 내가 쳐 놓은 그 방어벽 너머에 깨달음이 있고 빛이 있다 하는 겁니다. 어디 가서 깨달음을 찾으려고, 진리를 찾으려고, 행복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다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진리가 더 이상 거부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나에게 파도쳐 들어올 수 있도록 다만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삶이고 깨어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절에서 수행하는 것만 영적이고, 수행자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세속적인 나에게 욕하는 사람, 나에게 욕하는 상황이 바로 아주 영적인 대상인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이 녀석이 나한테 욕했다고 시비를 붙이고 싸움을 걸 때 그것이 세속적인 분쟁이 되는 것이고 중생이 되는 겁니다. 남들이 나에게 욕을 했을 때 그 마음을 관찰하면서 내 안에서 올라오는 화를 들여다보고, 그 욕하는 것을 그냥 허용하는 겁니다. 왜 이 우주에서 어떤 한 사람이 나에게 욕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까? 그건 문제가 아니지요. 누구도 나에게 욕 할 수 있어요. 세상을 살다보면 그런 일은 당연히 있는 거예요.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닌 겁니다. 오히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그걸 허용해야 됩니다. 그것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닫아 걸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걸 허용하고 났을 때 비로소 그 욕이 나에게 와서 흔적을 남기고, 화를 남기고, 두려움을 남기지 않게 됩니다. 욕 얻어먹기 싫어서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두려움에 못 하게 되는 일이 없어집니다.

제가 전에 그 말씀을 드렸나 모르겠는데요. 종교가 화합을 해야 된다, 불교든, 기독교든, 어떤 종교든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이런 취지의 내용을 인터넷에 블로그 기사로 올려서 포탈 싸이트에 메인으로 채택이 한나절 됐는데 그 사이에 몇 만 명이 그 글을 봤어요. 그 한나절 동안 댓글이 천육백 개가 달렸는데 그냥 언뜻 읽어보면 정말 불교도 옳고, 기독교나 천주교도 옳을 수도 있고, 모든 종교, 모든 사상이 다 옳을 수 있다,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함께 화합을 하고 아름다운 것을 지켜 나가야 된다, 뭐 그런 내용이거든요. 언뜻 보더라도 특별히 시비 걸 내용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천육백 개 댓글 가운데 한 반수 가까이가 아주 상스러운 욕입니다. '그래. 너 잘났다. 이 중놈아!' 거기 첫 번째 댓글, 그것이 아주 강렬했기 때문에 다른 건 하도 많아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첫 번째 댓글만 딱 기억이 납니다. 딱 네글자였어요. ‘까고있네’ 하 이거 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웃음) 그래가지고 그 안에서 수십 수백개의 댓글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겁니다. 종교전쟁이 일어난 거예요. 종교전쟁 하지 말자고 쓴 글 밑에서 버젖이 종교전쟁이 일어난단 말이지요. 그러면 그것을 보고 제가 그 다음부터 ‘야! 이렇게 욕을 얻어먹을 바엔 차라리 글을 쓰지 말자’ 해야 되느냐 그게 아니다 이겁니다. 욕을 얻어먹을 수도 있는 거지요. 인생에서는 나를 욕하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부처님도 외도들에게 수도 없이 욕도 얻어 먹고, 억울한 누명도 쓰고, 심지어 죽이려 한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의 교화활동을 중지해야 옳으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을 허용해야 되는 거예요. 나한테 괴로운 일도 있는 겁니다. 그것을 왜 부정합니까? 다 허용할 필요가 있어요. 나를 완전히 열어두고 좋은 일에 대해서도, 나쁜 일에 대해서도 나에게 오는 모든 것에 대해서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게 됐을 때 내 인생은 엄청난 깨어남이 시작되고, 내 인생에 큰 자유로움이 시작됩니다.

단, 나를 완전히 오픈했을 때, 모든 것을 받아 들였을 때, 어떤 일종의 자아상실감이라든가 일종의 내가 무너지는 것 같은, 내가 좌절되는 것 같은 이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 보호막을 치는 것, 방어막을 치는 것이 내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라고 알고 살아오면서 엄청난 방어막을 쳤고, 그 방어막이 바로 나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방어막이 바로 난데 내가 바로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되니까 우리는 일순간 괴로워 지는 거예요. 그러나 그 괴로움을 허용하라는 말입니다. 그 자아상실감은 바로 아상이 깨지는데서 오는, 바로 무아(無我)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아상이 타파되는 아주 좋은 경험입니다. 아주 즐거운 경험이다 이 말입니다. 그 정도 쯤이야 충분히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수행자가 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내 방어벽이 좀 깨짐으로서 내 존재가 조금 상실감이 오더라도 그것은 좋은 소식이다 이 말이예요.

 

받아들임이 곧 깨어있음이다

 

그것만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를 완전히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행복, 깨달음, 진리, 자유로움, 우리 삶의 걸림 없는 삶 이런 것들은요 지금 이 자리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한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거든요.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열어두고 받아들이는 것이지 그것은 과거나 미래가 하는 일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나를 열어두고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바로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분별 없이 매 순간순간을 관하며 사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있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활짝 열고 삶을 허용할 때 직장에서 진급할까? 안할까? 뭐 돈을 벌 수 있을까? 없을까? 이번 사업이 잘될까? 못될까? 남편하고 싸웠는데 맘 풀어졌을까? 안 풀어 졌을까? 자식이 공부를 잘할까? 못할까? 내가 미래에 잘 살 수 있을까? 없을까? 1년 뒤에 있을 수능시험 결과가 좋을까? 안 좋을까? 그 어떤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죠. 그것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생각이 만들어 냈고, 이 세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 사람들이 만들어낸 생각의 구조물일 뿐이에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일 뿐이고요. 허상이란 말입니다. 허상. 수많은 대학교에 가면 연구논문들 있잖아요? 그 연구논문이 그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 또한 상당수가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 아니겠어요. 제가 그것 자체를 그냥 묵살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깨어 있는 순간 그 모든 것도 다 공허한 것이란 말입니다.

오직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 느끼고 있는 지금, 듣고 있는 이것만이 실재입니다. 이 죽비를 듣고 있는 이 순간 ‘탁 탁 탁!’ 이것입니다. 지금 이 죽비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이 소리가 들리죠? 귓 전을 생생하게 울린단 말입니다. 이것!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이 자리에 깨어있을 수 있는 것, 이 자리로 가져다주는 것! 그것만이 실재입니다. 내가 온전히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때 모든 걸 포용하게 되고, 내가 완전히 관하고 있을 때 모든 것을 허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만들어 놓은 그 방어벽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한 번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시고 하여간 내 인생에서 뭔가 껄끄러운 평상심에서 벗어나는 무언가의 경계가 나타난다면 ‘아 이게 바로 나를 붙잡는 방어벽이구나. 이게 바로 나의 행복과 자유로움과 깨달음을 방해하는 방어벽이구나’ 하고 바로 알아차리고 그것을 포용하시길 바랍니다. 나한테 오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용하시기 바랍니다. 허용하고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진리는 나에게 엄청난 파동으로서 파도쳐 들어올 것입니다. 그 파도쳐 들어오는 것을 내가 막지만 않으면 된다는 겁니다. 어때요? 여전히 어렵습니까?




 

 

우리 인생 전체를 놓고 살펴보자.
우리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평범한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나를 확장시키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나'라는 에고를 증장시키는 것,

다시말해 ‘나’라는 상(相)을 강화시키고, 확장시키고,
확대시키며, 널리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다.
‘나’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무엇이기 때문에
나라는 진짜배기 실체를 확장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라고 생각하는 상’, 즉 허상을 강화시키고 확장시키려는 것일 뿐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간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사는가?
바로 아상을 늘리려는 목적, 에고를 확장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내 돈, 내 소유를 늘리고자,
내 집, 내 차, 내 사람, 내 사랑, 내 명예, 내 권력을 늘리고자,
나아가 내 학식, 내 고집, 내 사상, 내 종교, 내 가족, 내 나라,
온갖 ‘내 것’이라는 아상을 늘리고 확장하고 확대시키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준다.

이처럼 삶이란 끊임없이 ‘내 것’을 늘리는 작업의 연장이다.
그래서 이 ‘나의 확장’에 성공한 사람은
인생을 성공한 것이고,
여기에 실패한 사람은 인생에서 실패를 한 것이 된다.

‘나’라는 상을 확장시키는데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사장, 회장, 정치인, 종교인, 교수, 의사, 판검사...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직업의 요소들이 모두
아상의 종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나 자기가 처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직업 속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싶고, 자기를 과시하고 싶고,
자기라는 상을 확장, 확대하고 싶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거나, 유명세를 타거나,
명예나 지위가 높아지거나 하는 것 등을 통해
자신이 ‘더 높아진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상의 확장이요 에고의 확대다.
그 직업이나 직책 같은 이름을 자기 자신으로 동일시 하는 것이다.

 

 



보통 학생 시절에는 공부를 잘 함으로써,
혹은 반장이나 학교 회장 등이 됨으로써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아상을 키워가며,
회사에 취직하면
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진급을 통해
아상을 확장시키려 하고,
사업을 시작했다면
보다 많은 돈을 끌어모음으로써
나라는 아상은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의 경우에
20대 즈음이 아상이 확장되기 시작하는 때이고,
30대, 40대를 거치며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아상은 한없이 확장되고 솟구친다.

그러나 아상이라는 것의 속성이
무한정 확장될 수 없는 것이며,
언젠가는 축소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기에
아무리 확장되던 아상도 때가 되면 축소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50대, 60대 즈음이 되어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게 되거나,
사업을 하다가 망했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거나,
몸에 큰 병이 왔다거나,
혹은 유명인들이 젊었을 때 솟구치던 인기가 시들어져
시대의 뒤안길로 잊혀져 간다고 느낄 때,
그 때 우리는 엄청난 아상의 소멸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아상의 소멸은
곧 ‘나’의 소멸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최고의 좌절이며, 실패이고,
더 이상 이 세상에 나를 드러낼 방법이 없어지는
최악의 절망의 순간이 되곤 하는 것이다.

물론 나이와는 상관 없이
젊었을 때 아상의 소멸을 경험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잘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비리 혐의로 구속이 되었다거나,
아름답던 외모가 화상으로 흉측하게 변했다거나,
건강하던 몸에 큰 병이 오게 되었다거나,
삶에 어떤 큰 고통과 좌절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의 아상은 완전히 꺾이고 마는 것이다.

내가 보아 온 가장 큰 아상의 소멸은
때때로 목격하게 되는
자식의 죽음, 부모의 죽음, 가족의 사망과 같은 때이다.
나와 완전히 동일시하고 살아왔던 사랑스럽던 자식이
갑자기 죽게 되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전히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사실은
누구나 아상의 확장과 확대를 꿈꾸며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아상은 축소되고 꺾인다는 것이다.

즉 아상의 확대에서 오는 즐거움은
결코 영원하지 않고, 유한하며, 제한적이다.
잠시 즐거울 뿐이다.
그 즐거움, 그 아상확장의 유혹에 빠져 집착하게 된다는 것은
곧 언젠가 오게 될 불행, 고통을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의 목적은
여전히 아상확장에 있다.
그것을 결코 버릴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진리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고,
가장 큰 괴로움으로 여기는 아상의 축소, 아상의 소멸을
오히려 가장 큰 즐거움,
가장 큰 수행의 목적, 진리의 목적으로 여긴다.

세상에서는 아상의 축소를 가장 괴로워하지만,
진리에서는 아상의 축소가 가장 즐겁고,
세상 사람들은 아상의 확장이 유일한 삶의 의미이지만
진리의 길을 걷는 수행자에게 아상의 확장은 곧 절망이다.

사실은 아상이 무한히 확장되는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절박한 순간이요, 위기의 순간이다.
아상이 확장될 때, 집착과 욕망도 함께 확대되며
우리는 우리 안에 잠재적인 괴로움의 크기를 한껏 부풀리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아상이 축소될 때, 아상이 꺾이고 좌절될 때,
바로 그 때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회의 순간이요,
영적인 성장을 도모하고,
삶에서 한 단계 정신적인 도약을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깨달음의 순간인 것이다.

여기에 인생의 아이러니가 있다.
우리 눈에는
아상이 확장되는 것이 행복이고, 성공이며,
아상이 축소되는 것은 좌절이고, 실패로 보이지만,
사실은, 진리의 눈에는
아상이 확장되는 것이 좌절이고, 위기이며,
아상이 축소되는 것에서 영적 성장과, 깨달음의 기회가 오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의 이치를 눈여겨 보라.
그동안 아상을 확장시키려고,
성공하려, 진급하려, 돈 벌려고, 지위를 얻으려고,
앞도 뒤도 안 돌아보고,
자식이며 가족도 희생시키면서,
동료들을 밟고 일어서면서까지,
정신 없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아상확장의 길 위를 미친듯이 질주하던
우리의 삶에 제동을 걸고 멈춰 서서 돌이켜 보라.

내가 인생의 성공이라고 생각하던
바로 그 길이 바로
아상확장, 아상확대의 길은 아니었던가.
‘내 것’이라는 소유의 확대,
‘나’라는 존재감의 확대,
이 사회 속에서의 ‘내 영향력’의 확대와
내 이름이 드러나는 것에
너무 병적으로 집착해 왔던 것은 아닌가?
바로 그것이 ‘아상확장’의
어리석은 길이었음을 모른 채.

물론 외적으로는 그런 길을 걷더라도,
내면에서 집착함이 없고,
머무는 바가 없으며,
자연스럽게 인연 따라 그 길 위를 걷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외적인 확대와 확장 속에서도
아상은 한 치도 확대되지 않은 것이다.

그랬을 때는
그 사람의 직업이나 일이
곧 수행의 길이며, 마음공부의 길과 일치한다.
또한 물론 그런 사람이 종종 사회 곳곳에서
아름다운 삶의 가치를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다.

그 사람은 아무리 유명세와 지위와 부와 명예를 얻었더라도
전혀 거기에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그것이 자기 자신의 실체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다만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일 뿐이지
내가 언제까지고 집착하여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때가 되면 소멸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런 사람은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부유함을 수많은 사람과 나누고, 사랑을 전하며,
한없는 겸손함과 소박함의 덕목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연예인들 가운데
끊임없이 자선하며 아무런 바람 없이 남몰래 기부하는 이들이나,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에서 보듯이
사업으로 모은 재산을 많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근검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아가는 이들,
이런 사람은 아상의 확장에 집착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아상이 확대되는 것을
곧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가 실재적으로 확대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삶의 진실을 바로 본다면,
아상이 확대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기요,
아상의 소멸, 아상의 축소야말로 즐거움이며 기회의 순간이다.

아상의 확대를 경계하라.
아상이 확대되고,
돈을 많이 벌며, 계급이 높아가고, 인기가 늘어가며,
소유가 늘어가고, 지위가 높아져 갈수록
내 영적인 토대는 흔들리기 쉽다.

그렇기에 아상이 확대되었을 때,
바로 그 때가 가장 중요한 위기의 순간임을 알고,
명명백백하게 자기 자신을 지켜봄으로써
그 아상의 확대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외적으로 드러난 성공, 부, 명예, 권력, 지위, 명성들이
곧 ‘나 자신’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것을 나와 동일시하며,
그로인해 내가 높아지는 착각에 빠지고,
교만과 아만과 환각에 취해 있게 되면
삶은 빛을 잃고 만다.

반대로
아상의 축소를 즐거워하라.
아상이 축소되고 소멸되는 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들의 기쁨이자 선열미의 양식이다.

아상의 축소를 즐거워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들은 진급하는 것을 즐거워하지만,
진급에서 떨어지는 것이야말로 아상의 축소이니
그것을 즐거워 하라는 것이다.
도저히 즐거워하지는 못하겠다면
진급 낙선 그 자체를 괴로움이라고 단정 짓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 눈에는 괴로움일지라도 또 다른 차원에서 그것은 즐거움일 수도 있다.
물론 보다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완전 무분별의 평등한 것이다.
진급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진급 낙선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거나 대박 나는 것을 즐거워하지만
돈을 못 벌고 가난할지라도
그 아상의 축소를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부자였다가 갑자기 사업이 망해 가난해 졌을지라도
그것 자체가 절대적인 괴로움인 것은 아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 그것은 아상의 소멸이요,
그렇기에 그것은 또 다른 기회이자,
영적인 차원의 진보로 발전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보통 일반인들은 사업이 망했다는 평등한 하나의 사건에
절망, 패배, 실패라는 평가와 판단을 함으로써 불행으로 삼지만
지혜로운 이는 그 사건이야말로 아상의 축소를 가져다주는
새로운 영적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임으로써
삶의 전환을 삼을 수도 있다.

내 명예와 명성과 인기가 떨어지더라도
거기에 기죽고, 풀 죽어 있을 필요가 없다.
그것이야말로 아상의 축소요,
그것이야말로 모든 성자가, 수행자가, 현자들이 기뻐한 일이다.
일부로라도 세상의 명예와 명성을 피해 은둔했던
옛사람의 삶을 생각했을 때,
이렇게 여건이 저절로 마련되어 진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좋은 일이며, 법계가 나를 위해 마련한 공부의 때인가.

사랑하는 이와 이 생에서 이별을 고했더라도
거기에 좌절하고, 아파하며 언제까지고 고통받기만 할 것은 없다.
언젠가 우리는 그 누구와도 이별을 해야 할 것이며,
단지 그 때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별과 죽음은 또 다른 차원에서
나를 아상소멸과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게 함으로써
그로인해 삶의 크나큰 영적 성장을 도모할 수도 있고,
그로인해 좌절과 방황 속에서 끝을 보고 말 수도 있다.

사실 아상의 축소든 확대든 모든 상황이나 사건은
어떤 분명한 하나의 가르침과 삶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을 지혜로운 이는 바로 보고 거기에서 얻을 것을 얻지만
어리석은 이는 외적인 현상만 보고 판단함으로써 고통을 얻을 뿐이다.

 

 



아상의 축소, 아상의 소멸은
이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고,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져 버리는 것 같으며,
내가 상대보다 더 작아지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사실은 이 세상이 버린 대신 진리가 나를 선택한 순간이며,
물질적으로 적어지는 대신 정신적으로 커지는 것이며,
이번 생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대신 다음 생의 즐거움이 커지는 것이고,
비로소 깨어있음, 비움, 진리, 깨달음, 평화라는 덕목이
내 존재 위를 아무런 걸림 없이 자유로이 오고 갈 수 있는
토대가 완성된 순간인 것이다.

어리석은 이는
아상이 축소될 때 괴로워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아상의 축소를 반긴다.

더 나아가
어리석은 이는
아상이 축소될 때 괴로워하고, 아상이 확장될 때 즐거워하면서
양 극단에 좌지우지되는 휘둘리는 삶을 살지만,
지혜로운 이는
아상의 축소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상의 확장에도 집착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아상의 확장과 축소에 걸리지 않은 채로
언제나 여여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해 간다.

아상이 확대되면 거기에 걸리지 않으면서
그 확대된 것을 이웃과 나누며 살면 되고,
아상이 축소된다면
그것을 자연스러운 비움으로 받아들이고,
아상타파라는 금강경 실천의 기회로 받아들이며,
비로소 수행자가 될 최고의 조건이 찾아왔다고 생각함으로써
그것을 영적인 전환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실패를 두려워 말라.
실패는 곧 아상 소멸의 때이니 실패도 즐거움의 소식이다.
직장을 잃을까 두려워 말라.
직장 퇴출이 곧 아상 소멸의 때이니 그 또한 또 다른 기회의 순간이다.

명예나 명성을 잃을까 두려워 말라.
아무런 명성 없이 은둔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큰 공덕이 깃드는 때이다.
가난을 두려워 말라.
가난한 삶이야말로 모든 성인과 현자가 걸어간 삶의 방식이다.

남들의 비난이나 욕 얻어 먹는 것을 두려워 말라.
비난받을 때가 바로 아상 소멸의 때이니
그 때야말로 내 업장이 소멸되는 감사한 순간이다.

심지어 죽음조차 두려워 말라.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또 죽은 뒤 49일의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열려있는 영적 전환의 순간이다.
죽음 직전에 ‘나무아미타불’ 10번을 부르면 극락간다는 말 속에는
죽음 직전이라는 완전한 아상소멸의 순간을 받아들이고
열린 마음으로 수용함으로써
금강경의 무아상, 아상타파의 깨달음이 깃들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위기의 순간,
모든 아상 축소의 순간은
외적으로는 고통인 대신에
그 내면적으로는 또 다른 차원의
성스러운 배움의 기회와 성장의 기회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사실은 아상이 축소될 때가
기쁘고 즐거운 때이다.
성숙한 이는 아상의 축소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한 때로 받아들인다.

아상이 축소되고, 내가 작아질 때야말로
법계가 나에게 주는
자연스러운 아상타파의 성스러운 법문을 베푸는 순간이다.
그 사실에 즐거워하라.

 

 

 






우리가 흔히들 생각하는 '나'란 존재에 대해
명상을 해 보는 일은 매우 의미있는 작업입니다.

우린 모두
'나'란 틀에 갖혀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만을
'나'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참으로 '나'를 그르치기 쉽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에 대한 명상을
해 보기로 합니다.
물론 이것은 '너'에 대한 명상일수도 있으며
이 우주 전체에 대한 명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를 포함한 일체모든 만유는
시간, 공간적으로 모든 것(一切)에 서로 서로
의지해 있다는 의미심장한 결론을 먼저 내려 두기로 합시다.
그리고 시간적인 면에서 바라본 '나'의 실상과
공간적인 면에서 바라본 '나'의 모습을 하나씩 살펴보는 것입니다.

먼저 시간적인 '나'의 생명을 명상 해 봅시다.
나를 낳게 해주신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할머님, 할아버지
그 위 모든 조상님들, 그리고 또 그 위 조상님들,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이 역사 속의 모든 사람들이 나의 형제요 부모 아님이 없습니다.
나로부터 20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209만명
30대를 소급해서 올라가면
약 21억이 넘는 조상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엄격히 따져보면 이들 중 한 명만 빠져도
나란 존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지금의 나란 존재는
시간을 거슬러 일체 모든 과거의 인연들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속의 모든 인물들과 나는
뗄 수 없는 상호 연관된 존재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의 나란 존재는
아버님과 어머님의 사랑으로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의 고리 일체가
나와 통해 있고 지금 이 순간
내 속에 갈무려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 인류의 역사가
지금 이 순간 내 속에 나라는 모습으로
생동감 있게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따져도 마찬가지 입니다.
동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지금의 나를 관찰해 봅시다.
옷을 입고, 신발, 양말을 신고 다니며,
아침, 점심, 저녁으로 밥을 먹습니다.
그것들 나를 살아가도록 해주는 부수적인 것들은
과연 나에게 그대로 구족된 것인가요?
'나'만의 능력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옷이 지금 내 몸에 붙어 있기까지는
너무나도 많은 이들의 노고와 피땀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옷 공장이 돌아가려고 해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매달려야 하는가요.
유통과정에서의 도매상, 소매상, 옷가게 주인 등등...
그리고 내가 먹는 밥은 어떠합니까.
단지 내가 내돈 내고 먹으니 내것이고
나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니
내가 고생해서 내가 먹는 거지라는 생각은
너무도 편협한 생각입니다.

내가 밥을 먹기 위해서는 농부들의 피땀이 필요하고
그 농부가 있기 위해서는 비료 만드는 사람,
삽만드는 사람, 쟁이 만드는 사람,
곡식이 잘 자랄 수 있는 모든 조건,
즉, 땅, 씨앗, 물, 태양, 등등의 많은 것이
연관되어 있지 않고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례로 태양이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버틸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얼마안가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폐허가 되고 말 것입니다.
물이 없어도 마찬가지 겠지요.

이처럼 우리는 그저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주위의 모든 조건들과
상호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존재의 무한한 은혜에 의해
살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라 의상스님의 법성게에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란
바로 이런 사실을 읊은 것입니다.
'한 티끌 속에 온 우주를 머금었다'는
화엄의 법계연기의 세계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시간, 공간적으로
'나'란 존재는
일체 모든 만유, 만생, 유정, 무정의 중생들,
그리고 자연만물과 함께 연관되어서
공생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일체의 사소한 미물과도
하다못해 곤충, 짐승, 물, 태양 등과도
나는 연관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시간, 공간적으로 일체 모든 존재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인연생입니다.
그러나 유일신에서의 신은
오직 스스로 유일한 존재이기에
불교에서는 수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세요.
모두가 나의 다른 모습들입니다.
나와 인연을 주고 받는 참으로 아름다운
나의 도반들이며
나의 부처님 이십니다.
이 모두에게 불공 올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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