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마리]

요즈음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밝은도량 주위
자연의 새로운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 도량에
또다른 사랑이
마음 속에서 싹튼다.

봄이 오고
산에 도량에 꽃이 피니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이래서 봄이란
사람들 마음을 생기롭게 움트게 하는 계절.

연한 초록의 산빛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냥... 어찌 할 수 없게 만든다.

정말이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온갖 꽃들이
앞다투어 핀다는 말도 그냥 가슴에 팍팍 와 닿는다.

수많은 야생화들하고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들
그리고 새순이며 약초들 봄나물들이
얼마나 화알짝 신명나게 피어있는지
하루 종일 거닐며 바라만 보아도 도무지 질리지 않는다.

더구나
봄이 되고 보니
더욱 이 산의 멋스러움과 소중함이 더하다.

얼핏 보면
그냥 얕은 산이고
멋 없는 산일지 모르지만
이 산엔 그야말로 없는 것 없이 다 있다고 하면
조금 과정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불러주고 싶을 정도.

온갖 작고 앙증맞은 야생화가
군락을 지어 피어오른 곳이 곳곳이고,
-이름을 명확하게 다 모르는 것이 너무 애석-

또한 작고 앙증맞은
우리꽃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고 있는 꽃들로
주름잎, 꽃마리, 냉이꽃, 꽃다지, 민들레,
제비꽃, 하얀 각시제비꽃, 양지꽃,
뱀딸기꽃, 별꽃, 산괴불주머니...
등이 피어있고,

나무도 주로
참나무, 밤나무, 자작나무, 오동나무 정도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곳곳에 예쁜 꽃들을 피워내는
이름모를 나무들이 봄 연출에 한창이고,

봄 밥상을 풍성하게 해 주는
두릅나무 새순도 막 올라와 있고,
고사리도 막 올라오고 있으며,
참나물 원추리 돋나물 민들레 제비꽃 꼭두서니 쑥 고들빼기도
봄나물로 무쳐 먹으니 입맛이 돈다.

민들레나 고들빼기는
쓴 봄나물의 명성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는 듯
야생의 그것이라 그런지
시장에서 파는 재배된 봄나물에 비해
써도 너무 쓰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이란 계절에
너무 더워 수분이 많은
수박이나 참외 같은 것이 많이 나오듯,
봄에는
춘곤증 같은데 좋은
쓴 나물 들이 많이 나온다고,
봄에 쓴 나물들은
법계에서 내려 준 선물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요즘 재배되는 나물이며 채소들은
그야말로 온실에서 고이 자라다 보니
모든 채소들이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맛이고,
거의가 연하고 질기지를 못하며,
저마다 특유의 쓴맛이라던가 특유의 향들이
많이 사라져 버렸다.

똑같은 비료주고, 똑같은 거름주고
늘 똑같은 땅에서 키워지니
맛도 다 똑같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온실이나 검은비닐 같은 것으로
경쟁할 수 있는 다른 풀들이 아주 자라지 못하게 막아 놓고,
심지어 재초제로 채소외의 다른 것들은 다 죽게 해 버리니
경쟁할 수 없어 생명력이 약화되고
연하고 당장 입에는 질기지 않고 달지 모르겠지만
그 내적인 생명력은 그냥 작살이 나고 마는 것이다.

사람도 저마다 특유의 삶이 있고, 향기가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만이 가지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그는 그 자신의 모습으로써
부처님의 성품을 확연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특이하게 보일 것은 없겠으나,
요즘같이 교육도 똑같이 시키고
똑같은 것들만 똑같이 머릿속에 주입을 시키고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먹을거리에, 똑같은 주거환경이며
똑같은 TV를 보고, 책을 읽으며, 삶의 학습을 받아오고,
돈, 명예, 권력, 학벌, 등 똑같은 삶의 욕망을 삶의 제일가치로 알고
똑같은 삶의 방식을 따르다 보니
저마다의 색깔이 없어지고
'자기자신'의 모습으로 나툰
자신만의 화신불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장 나답게 살 때
그것이 가장 진리답게 사는 것이고,
부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자연도 그러하지만
애석하게도 요즘의 대자연은 인위적인 힘으로 인해
자기자신의 삶의 모습을 훼손당하고 있어 안타깝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도량 주위에 돋아난 봄나물들만 캐어 먹어도
어지간한 채소는 농사지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지천으로 먹을 것이 널려있으니 말이다.

모를 때는 그냥 다 잡초라고 치부해 버리고 지나치지만
조금만 알고 나면 봄들녁의 새싹들은
그야말로 다 먹을거리가 된다는 것이 신비로울 정도다.
무슨 무슨 대형 마트에 가서 에어콘 바람 쐬가며 쇼핑도 하고
카트를 끌고다니며 채소를 고르는 것 보다
조금 덥더라도 차라리 산으로 들로 호미 하나 들고 뛰어들어
자기 자신의 무한한 생명력을 드러내는 것은 어떨지.

사실 올바른 농사란 그런 것이 아닐까.
사람의 노력을 들여
심고 물주고 뿌리고 가꾸고
나아가 농약주고 풀 뽑아주고 비료에 재초까지 해야 하는
고된 노동을 생각했을 때,
또 반환경적이고 반생태적인 현재의 농사법을 생각했을 때,

그저 대자연에서
제 스스로 씨앗 뿌리고 가꾸고 만들어 내는
그런 것들이야말로 가장 온전한 먹거리일 것이고,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것을 필요한 만큼 가져다 먹는 것이야말로
가장 온전하고 깨어있는 농사고 농부의 일이 아닐까.

그랬을 때
인간의 노력과 욕심, 또 반환경적인 어리석음을 투여해서 일구어낸 먹거리 보다
더 생명력이 강할 것이고,
더 온전한 영양이 깃든 먹거리가 될 것이며
온전한 삶과 건강의 토대가 되어 줄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법계에서 내려 준 선물이고,
부처님의 음식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산은,
대자연은
가만히 두어도
날마다 비옥해 지지 않나.

물주고 가꾸고 비료주고
농약이며 재초재 비료 뿌려주고
갈아주고 잡초 뽑아주고 북주고
그러기 위해 온갖 것들을 돈들여 사야하고
노동력을 탕진해야 하며
많이 수확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뭐 그런 것 하나도 하지 않더라도
산은 항상 비옥하며
항상 그 자리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숲을 가꾸고
모든 생명들을 품어내고 있다.

그것이
참된 법계의 모습이고, 진리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게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우리 사람들도 자연을 가까이 할수록
진리와 가까워지고
행복해지며
평화로움이 내면에 깃드는 것이다.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다.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
법신 부처님을 닮아가는 것.

봄 따스한 햇살에
앞다투어 하루가 다르게 피어나는 봄의 생명을 보며
내 안의 생명도 한없이 피어남을 느낀다.







2장 깨어있음

21.
깨어있음은 영원의 길이며
깨어있음에 나태한 것은 죽음의 길이다.
바르게 마음을 관(觀)하여 깨어있는 사람은 영원히 살지만
마음이 집중되지 않아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죽은 것과 같다.

22.
이러한 진리를 온전하게 깨달아
항상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는 수행자는
그 깨어있음 속에서 법열(法悅)을 누린다.
그는 언제나 성스러운 깨달음의 길 위에 서 있다.

23.
언제나 굳은 의지력으로 깨어있음의 명상을 수행하며
매사에 주의 깊은 자각으로 평화와 선정을 성취하나니
이러한 현자는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마침내 저 자유로운 열반에 이르게 된다.



깨어있음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삶의 방식이요 영원한 동반자다. 삶 속에서 매 순간 순간 깨어있다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삶을 100% 완전하게 살고 있다는 뜻이다. 깨어있는 순간은 영원히 사는 순간이지만, 깨어있지 못한 순간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 뿐. 그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깨달음이 거창한 어떤 것이거나, 수행을 통해 결과적으로 얻어야만 하는 성취지향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모든 순간에 일어나며,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 깨달음이 완성된 순간만 깨달음이 아니라, 마음을 바로 집중하여 현재를 관함으로써 깨어있는 자에게는 모든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 된다. 그는 순간 순간 깨어있음 속에서 법의 즐거움을 누린다.

삶은 매 순간 완성되어 있다. 모든 순간이 완벽하다. 그 어떤 깨달음의 달성과 성취를 위해 미래로 달려가는 일은 수행이 아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이 곧 깨달음이며, 깨어있음의 순간이 바로 내 삶의 최고의 순간이요, 완성된 순간임을 바로 아는 지혜가 깨달음을 찾는 불가의 오래된 방법이다.

깨어있음이란 마음을 과거나 미래로, 혹은 다른 어떤 장소로 뛰어다니게 하지 않고 오직 ‘지금 여기’라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몸과 마음을, 느낌과 생각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의 핵심이다. 다만 관하되 분석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만 보는 것, 그것이 바로 깨어있음의 수행이다.

끊임없이 삶을 관하라. 몸과 마음을 관하라. 처음에는 마음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관하려고 하면 계속해서 마음이 이리저리 원숭이처럼 날뛸 것이다. 과거로 갔다가 미래로 갔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갔다가, 미워하는 사람에게로 갔다가, 끊임없이 날뛰느라 한 순간도 마음을 고요히 지켜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더라도 굳은 의지력을 가지고 마음을 관하라. 흩어진 마음을 다시 모아 지금 여기로 돌아오라. 의지력과 주의 깊은 자각으로 삶을 관하는 깨어있음의 순간이 길어지다보면 조금씩 깨어있는 순간의 평화와 고요를 나아가 선정과 삼매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는 모든 속박과 번뇌에서 벗어나 마침내 저 자유로운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코삼비국의 왕비인 사마와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종을 통해 전해듣고 깨어있음의 수행을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국왕의 다른 왕비인 마간디야가 사마와띠를 질투해 부처님과 불결한 내통을 한다거나, 왕을 독살하려 한다거나 하는 등의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왕비의 궁에 불을 질러 사마와띠를 죽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세 번에 걸친 마간디야의 음모와 살해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마와띠는 죽기 직전까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집중의 관수행을 통해 깨어있음을 지켜나갔고, 죽음의 순간에도 불길에 휩싸인 궁 안에서 당황하지 않고 이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며 깨어있음의 좌선수행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결국 죽음 직전에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었다.

사마와띠의 죽음을 안 국왕은 마간디야의 짓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발뺌할 것을 알고 ‘아, 이제야 안심이다. 그동안 사마와띠가 나를 죽이려 하여 공포에 떨었는데, 누군가가 이런 왕의 근심을 알고 대신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이 일을 한 사람과 도운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어 큰 보상을 하겠다’고 묘수를 썼다. 이에 마간디야와 그의 친척들이 궁으로 몰려들어 자신의 소행임을 밝히자 왕은 그들을 모두 처참히 죽여 버렸다.

이러한 사건이 세상 뿐 아니라 비구스님들 간에도 화제가 되자 부처님께서 사마와띠와 그 궁녀들이 왜 불에 타 죽게 되었는지 그녀들의 전생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전생에 왕비와 궁녀로 물놀이를 갔다가 따뜻한 불을 쬐고 싶어 근처의 작고 허름한 초막에 불을 붙였는데, 마침 그 초막이 왕의 존경을 받는 빳쩨까붇다라는 수행자가 선정에 들어있었다가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왕비와 궁녀는 그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면 큰 벌을 받을까봐 아예 빳쩨까붇다를 화장시켜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보에도 불구하고 사마와띠는 이번 생에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어있음의 수행을 의지력을 가지고 꾸준히 했기 때문에 죽는 순간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렇기에 사마와띠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위의 게송을 설하셨다.

이처럼 깨어있는 수행자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깨어있음 속에서 법열을 누리고, 마침내 저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열반에 이른다.






[보물 제833호 기림사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부처님입니다. 이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중심으로 왼쪽에 보신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으며 삼존부처님은 현재 보물 제95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수인은 지권인으로 부처와 중생 무명과 지혜가 둘이 아닌 세계를 상징하고 있으며, 온 우주법계 일체 모든 존재가 그대로 부처님 참생명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부처님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바로 '이 순간' 나의 삶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나의 참생명
부처님 생명이 성성히 깨어 있는 깨침의 순간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다시금 이곳 현실까지 불러들여
집착하고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괴로움으로
지금 현실을 괴롭힐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앞에 떨어진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재, 바로 지금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부딪히는 때는 언제입니까...
우리가 실제로 부딪히는 것은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니요
오직 바로 지금이라는 현실일 뿐입니다.
평생을 살더라도 과거를 살 수도, 미래를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는 괴로움의 마음은
이미 지난 과거에 얽매이는 마음과
오지도 않은 미래에 얽매이는 마음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지금 이순간 완벽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선지식들이 말하길
"배고플 때 먹고, 배부르면 싸고, 졸리면 자고 하는 것이 바로 道이다.
평상심이 곧 도이다."라고 했습니다.
현재심을 올바로 가질 것을 경책하는 말입니다.
바로 현재를 올바로 사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배고플 때 오직 먹기만하고,
졸리면 온전히 자기만할 수 있다면 참된 수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행위에 충실히 온전히 온 힘을 기울여 살아가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
온전히 밥 먹는 것에 집중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배고플 때 밥만 먹는 것이 아니고
밥먹으며 딴 생각하고 딴 짓하고
밥 먹는 한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합니다.
겉 모습은 똑같이 밥을 먹고 있더라도
이렇게 수행자와 비수행자의 내면 세계에서는 커다란 차이점이 나는 것입니다.

틱냩한 스님은 말씀하시길
"설거지를 위한 설거지"에 대해 말씀하시며
설거지를 할 때에 오직 설거지만 할 수 있다면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설거지를 하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릇을 깨끗이 하기 위해 설거지를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설거지를 하기 위해 설거지를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하기 싫고 짜증나는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청소하기 싫고, 설거지 하기 싫고, 일하기 싫고, 공부하기 싫고,
수행하기 싫고, 절하기 싫고, 남편 뒷바라지 하기 싫고...
이러한 일을 행할 때는 반드시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빨리 빨리 청소나 설거지를 하고 쉬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일을 한다면
마음이 짜증나고 싫고 빨리 끝내려는 마음만 앞서게 됩니다.

이렇게 청소, 설거지를 끝내고 나면
다만 깨끗하다는 결과만 우리에게 남게 됩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마음으로 했으니 얼마나 깨끗할까요.
그러나 청소를 위해 청소를 한 수행자는
그 행위 속에 수행의 힘까지 남게 됩니다.

청소를 하며 마음을 집중하고 청소하는 그 마음에 온 힘을 기울였기에
청소 그 자체가 수행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청소하는 그 순간 이 사람은
온전히 깨어 있는 것이 되고 방하착 한 것이 됩니다.
빨리 하고 나서 쉬어야지 하는 게으른 마음이 놓여졌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것, 공부하는 것, 수행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공부할 때 공부를 위해 공부를 해야지
대학가기 위해 공부를 한다면
공부하는 순간의 마음은 조급하고 공부에 충실할 수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오직 대학합격이라는 오지도 않은 미래에 생각이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그렇게 빼앗기면 그만큼 공부하기가 힘들어 집니다.

일을 할 때
빨리 시간이 지나길 바라는 마음에 퇴근할 시간에만 마음이 머문다면
일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봉급에만 마음이 머문다면
우리는 돈은 벌 수 있을지언정 진정 깨어있지 못하게 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 그 자체를 위해 절하는 그 순간, 염불하는 그 순간이
그때 그때 목표가 되어 그때 그때 현실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빨리 수행해서 성불해야지 라든가
빨리 수행해서 복많이 짓고 편한 삶을 살고 집안이 편안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수행하고 절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빠른 시일안에 수행의 결과를 바라게 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부처님을 원망하며
심지어 원하는 데로 되지 않았을 때 개종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능 시험이 끝나고 잘되면 내탓
못되면 부처님 탓을 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집에서 남편 뒤 바라지, 자식들 뒷바라지를 할 때에도
오직 그때 그때 내가 가족들에게 행하는
그 뒷바라지 자체에 충실할 일입니다.

뒷바라지 한다는 상이 있게 되면
남편이 승진을 못할 때, 자식이 대학에 떨어질 때,
자신에게 잘 못해줄 때 괴로움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뒷바라지 하는데 하는 상(相)이 있으면
자식이나 남편이 내게 서운하게 대할 때면 괴로워집니다.
오직 남편, 아내, 자식, 부모님을 부처님으로 여기고
부처님 시봉하듯이 현실, 현실을 충실히 시봉하면
그것이 바로 수행인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은 가정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체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 처럼 모시며 시봉하면서
해 나가는 것이지 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절에서 하는 것은 수행이고
집에서 직장에서 일상에서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집에서 남편을 대할 때, 자식, 부모님을 대할 때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 시봉한다는 마음으로 현실 현실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크나큰 수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집에서 행하는 사소한 일상 하나 하나,
예를 들면 설거지하는 것, 청소하는 것, 밥 먹는 것, 잠자는 것, 책 읽는 것,
자녀들과 대화하는 것, 부모님 모시는 것, 친구들 만나는 것,
회사에서 일하는 것, 친구들과 모여 술마시러 가고 노래방가서 놀고 즐기는
그 속에서도 내가 행하는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며
그때 그때의 현실에 충실할 수 있다면
이 모든 일상의 일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활 수행인 것입니다.

절에서 애써서 절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수행인 것입니다.
이처럼 수행하는 삶은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며,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고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이제 현실에 충실하는 그 실천의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현실에 충실한 다는 것은 완벽하게 현실을 깨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현실에 집중하여 마음을 다른 곳으로 빼앗기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또한 현실을 올바로 집중한다는 것은
항상 현실의 마음과 행동 하나 하나를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곧 집착을 놓고 살아가는 방하착(放下着) 수행을 의미합니다.

올바로 관할 수 있을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착(着)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괴로운 마음이 생길 때 그 마음에 얽매이면
우리는 이미 그 실체가 없는 괴로움에 노예가 되어
내 마음을 빼앗겨 버리며 한없는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 괴로운 마음이 일어날 때
일어났다는 것을 올바로 관찰하고 방하착하면
그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지눌스님은 수심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망상이 일어남을 두려워 말고 알아차림이 더딜까 두려워하라.
망상이 일어나면 곧 알아채라.
알아채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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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김용사]

분별하지 않으며
묵묵히 비추어 보십시요.

우리는 순간 순간
끊임없이 경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의 경계를 마주하는 것이지요.

경계를 마주하게 되면
우리 안에서는 자동적으로, 반사적으로
분별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보통 사람들일 경우
100가지 경계를 만나면 100가지 분별을 일으킵니다.

분별을 일으킬 때는
우선 앞선 나의 기억이나, 경험, 업식들을
하나 하나 샅샅이 뒤진 뒤에
지금 이 경계와 유사한 기억들을 끄집어 내게 되고,
그 색안경 같은 업식의 거울로
지금의 경계를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눈(안근)으로 장미꽃을 보면서(색경)
옛 애인에게 주었던 100송이의 장미꽃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것이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면
장미꽃 또한 기분 좋은 분별을 만들어 낼 것이고,
이후에 헤어진 애인이었다면
서글퍼 진다거나, 그립다거나, 원망스럽다거나
심지어는 격한 감정이 올라오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납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우리 마음 속에서는 충분히 그 사람을 분
별해 버립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어떤 사람인지 그것은 둘째 문제이지
그 사람의 본래 바탕에는 우선 관심이 없습니다.
우선 첫째는 내 안에서 분별부터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업식이 본래부터 텅 비어있다면
어찌 처음 보는 사람을,
처음 보는 풍경을
처음 행하는 일들에 대해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분별할 수도 없고 분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을 짓는 이유는 업 때문인 것이지요.

처음 보는 어떤 스님이 설법을 하십니다.
그 스님은 한 분이고 한 가지 설법을 하셨을 뿐이지만,
듣는 사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분의 스님을 분별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한 분이 아니라 듣는 사람 수 만큼의 스님이 되어 버립니다.

설법을 잘한다, 못한다,
말투는 어떻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쉽고 어렵고, 훌륭하고 그렇지 못하고,
내 안에서 업식이 비춰주는 한 끊임없는 분별이 이어집니다.

스님의 똑같은 말 한마디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해했고,
또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르게 이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업식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참 신기한 것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듣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저도 모르게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TV를 보면서도
연예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꼭 이런 저런 한마디를 거들고 끼어들어야 하고,
사소한 몸짓 하나, 몸매 하나를 보고도
꼭 시비를 걸고 욕을 하고 나무라고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
다.

그냥 가만히 보고 있지를 못하는 거지요.
TV를 보고 있지만무엇인가를 계속해서 궁시렁 궁시렁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은
결코 비추어 보지 못하고
매냥 남의 모습, 남의 말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거지요.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 보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말인 줄 잘 알기만 해도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아무 소득이 없음을 알고 있더라도
경계를 만나면 또다시 금새 궁시렁 거리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업식인 것이지요.

우리는 아무리 작은 경계를 만나더라도
업식에 비추어
입으로 몸으로 아니면 생각으로
끊임없이 분별과 그에 따른 행위를 이어갑니다.

이것이 모든 이들의 병통입니다.
이 분별이 바로 모든 업의 시작이기 때문이지요.
업에 비추어 모든 분별을 일으키고,
또 그 분별은 또다른 업의 씨앗이 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한도 끝도 없이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지독한 윤회의 수레바퀴 아니겠습니까.

수행이란
바로 이 분별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비우고 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새로운 업을 짓지 않도록 하고,
업의 그림자인
안에서 올라오는 경계며,
바깥에서 다가오는 경계를
그 자리에서 녹여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계와 맞닿은 순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분별을
잘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를 보고
싫다거나 좋다는 분별이 일어날 때,
바로 그 분별을 비추어 보고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일을 하면서
답답하다, 버겁다 하는 분별이 일어날 때
그 분별을 즉한 순간 비추어 보고 비워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을 때(눈)
또 무엇을 들었을 때(귀),
무슨 냄새를 맡았을 때(코),
무슨 음식을 먹고 맛을 볼 때(혀),
무슨 대상을 감촉하여 부딪기고 느낄 때(몸),
어떤 생각이 올라올 때(뜻),
그 여섯가지 경계와 맞닫는 순간
분명 분별은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올라오는 분별을 잘 단속해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분별이 올라올 때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대상을 보고 좋게 분별하여 집착과 애욕을 만들어 내고,
싫은 대상을 보고 싫게 분별하여 미움과 증오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선업과 악업의 씨앗이 되며
그로 인해 우리는 또다른 업을 짓게 되어
괴로운 삶을 스스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육근이 육경을 만날 때,
바로 그 때를 놓치지 말고
잘 비추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잘 비추어 보면 그대로 비워집니다.
관조(觀照)가 깊어지면 저절로 방하착이 됩니다.

모든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이란
분별을 여의는 일입니다.
분별을 여의기 위해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마세요.
그냥 담담해 지고 여여해 지세요.
이렇다 저렇다 취사 선택하지 말고,
잘잘못을 따지려 들지 마세요.
한 티끌도 분별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억지로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업이 있는 이상
저절로 분별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분별이 올라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잘 비추어 보아 관하라는 것이지요.

분별이 없으려며는
그냥 다 받아들이고,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아야 합니다.
다 인정하고 수용하며 섭수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묵묵히 비추면 됩니다.

그러면 조금씩 깨어있게 되고,
분별이 잦아들게 되어
어느 순간 무념(無念) 무심(無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
지금 분별 녹이는 연습을 자꾸 하고,
지금 관하는 연습을 자꾸 해야
그것이 성불인연 짓는 것이고,
그래야 나중에라도 성불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 생각도 그냥 놓아버리세요.
그것이 아닙니다.

나중이란 아무 필요도 없고
또 그런건 없어요.

지금 이 순간
비추어 보는 그 순간이
그대로 본래자리 자성부처님의 현현인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가 되야 하고,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무량수 무량광 부처 마음을 쓰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부처이며,
부처 마음으로 법계를 호령하며 산다는 것이,
이 꽉 찬 우주 법계를 자유롭게 꺼내 쓰고
자유자재 하게 굴리며 산다는 것이 말입니다.

치열하게 수행하고 정진하여
언젠가는 깨닫겠다, 부처 되겠다 그러면
공부 못합니다.

공부는 지금 이 순간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지금 이 순간의 일입니다.

다시한번 말하건데
애쓰지 마세요.
깨달으려 애쓰지 말고
성불하려 노력하지 마세요.

묵묵히 비추어 보고
온갖 분별을 여의기만 하면
바로 지금 이 자리가 자성불 본래자리인 것입니다.




욕심이란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하여
애착하고 좋아하며 생각하고
물들어 집착하는 것이다.

또한 귀는 소리를, 코는 냄새를, 혀는 맛을
몸은 감촉을 접촉하여 그것을 만날 때
애착하고 즐겨하며 생각하고 물들어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대상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거나 태어나지 않았거나
언제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써
존재하는 자연일 뿐이니
우리가 항상 보고 듣는 사물 그 자체가 욕심은 아니다.

이 세상의 갖가지 대상에 대하여
보고 들으면서 느끼고 생각하여 분별하는 것이 우리의 욕심이다.
대상에 대하여 일어나는 집착심을 잘 다스리는 것이
욕심과 집착을 벗어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길이다.

[잡아함경]


눈으로 사물을 볼 때,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혀로 맛을, 몸으로 감촉을 느낄 때,
또한 생각으로 온갖 번뇌를 일으킬 때,
바로 그 순간 집착이 생겨난다.

눈귀코혀몸뜻이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과 법을 만날 때,
바로 그 순간을 잘 비추어 보고 다스려야 한다.
모든 집착과 번뇌 분별들은 바로 그 순간 일어난다.

눈이 대상을 봄으로써 좋고 싫음을 일으키고,
귀로 칭찬이나 비난을 들음으로써 좋고 싫은 번뇌가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집착과 번뇌 분별의 시작이 바로
우리 몸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이 세상의 여섯 가지 대상을 만날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접촉점을 잘 살펴야 한다.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을 만날 때,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지, 어떤 분별이 일어나는지,
어떤 집착과 욕망이 일어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잘 살피고 지켜보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관찰하면
다만 주관이 대상을 만날 뿐,
더 이상 분별과 집착은 일어나지 않는다.

귀로 어떤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순식간에 그 말에 대해 좋거나 나쁘다는 분별을 하곤 한다.
바로 그 순간, 말과 귀의 접촉점을 잘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귀로 말을 듣는 순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그 말은 중립적인 말일 뿐이지 좋거나 싫은 말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좋거나 나쁜 어떤 극단으로 몰고 가려는 습성이 있다.
이 나쁜 습성의 치료약이 바로 알아차림이다.

눈귀코혀몸뜻의 대상에 접촉하여 일어나는
분별과 집착을 잘 관하여 다스림으로써
욕심과 집착을 벗어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수행의 길이고, 명상의 길이다.



어리석은 범부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게 되면 좋다거나 나쁘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범부들은 자기의 감정에 포로가 되어 집착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감정을 갖더라도 그것의 포로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은 두 번째의 화살을 맞는다고 말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두 번째의 화살을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잡아함경]





이를테면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여 욕을 하고 시비를 걸어 올 때
그것은 첫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 한마디에 휘둘리고 괴로워할 이유가 무엇인가.
어리석은 사람은 욕을 들음으로써 괴롭고,
연이어 그 괴로운 감정에 포로가 되어
오랫동안 그 욕 한마디에 집착하므로 또 한 번 괴롭다.

그러면서 온갖 화를 일으키고, 복수를 생각하거나,
똑같이 되갚아주려는 성냄을 일으킴으로써
몇 번이고 괴로운 화살을 연거푸 맞는다.
이것은 두 번째 화살 뿐 아니라
세 번째, 네 번째 화살을 연이어 맞는 격이다.

첫 번째 화살은 인연 따라 생겨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두 번째 화살부터는 내가 그 현실에 대한
좋고 나쁘다는 판단 분별을 일으키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즉 두 번째 화살부터는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니,
무엇 때문에 내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내
스스로 만든 고통에 빠져 괴로워해야 하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돈을 빌려가고 형편상 갚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첫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이지만,
그로인해 그를 원망하고, 욕하면서 몇 날 몇 일을 괴로워한다면
그것은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연거푸 맞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갔더라도
그것은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것이다.
이미 마음이 떠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애써 증오하거나, 복수하려 하거나, 잊지 못하면서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맞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두 번째 화살부터는 그 작자가 나다.
전혀 만들어 낼 필요가 없는 것을 내 스스로 만들어 낸 것 뿐이다.
내 생각, 내 분별, 내 판단이 연이은 수많은 고통을 가져왔다.
생각을 잘 관찰하고, 분별과 판단작용을 잘 관하면
두 번째 이후의 화살들을 맞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생각과 분별은 첫 번째 화살에 이은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만들어 내는 창조자이니
생각과 분별을 관하고 비우라.
지켜봄과 관 수행이야말로
빗발치는 화살을 막는 유일한 방패가 될 수 있다.



[사진 : 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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