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도 만일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 이유는 응당히 악도에 떨어질 만한 전생의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곧 소멸될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 겁 전의 과거를 생각해 보니 연등부처님 뵙기 전에도 팔만 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어 헛되이 지냄이 없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과 내지 어떤 산술적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는 공덕을 내가 다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업을 깨끗이 맑히는 법을 설해 놓은 이 분이야말로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살아야 하는지를 인과(因果)와 업보(業報)의 관점에서 쉽게 설해주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수행을 하고 금강경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이미 나는 깨끗해졌고 맑아졌으며 모든 괴로움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수행과 기도를 하며, 절에도 다니고, 경전 공부도 하니까 나에게는 괴로움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제 막 수행을 시작해 놓고, 혹은 이제 겨우 몇 년에서 몇 십년 마음공부를 실천해 놓고 ‘이제 나는 행복해 질 것이다’라고 바라지 말아야 한다. 절에 다니니까 나쁜 일은 모두 사라질 것이고 좋은 일만 올 것이라고 믿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은 새벽에 기도를 하고 출근했으니 오늘 하루 재앙은 말끔히 소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도 수행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진리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다. 물론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 수행하고 있고, 마음을 관(觀)하고 있으며, 순간 순간 깨어있을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영락없는 깨달음의 향기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느 한 쪽으로 고정 지으면 안 된다. 내가 바라는 쪽으로, 좋은 일만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수행 잘 하고, 마음 관찰 잘 하면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쪽으로 고정을 지으면 그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 깨어있음의 향기는 곳 사라지고 만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더라도 업(業)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업이란 과거 우리가 몸과 말과 뜻으로 지어 온 온갖 행위이기 때문에 그 업의 힘은 여전히 남아서 우리의 현실을 투영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마음을 비추어 보고, 수행하고,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업의 문제까지 다 소멸시킬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이다.
경전을 통해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도 만일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 이유는 응당히 악도에 떨어질 만한 전생의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곧 소멸될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하자. 이 금강경을 열심히 서사하고 수지독송하며 위인해설한다고 하자. 금강경을 늘 수지독송하며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 분명 이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진리 속에서 숨쉬고 있으며, 진리 안에서 환희심과 기쁨에 넘쳐 있을 것이다. 매일 금강경을 사경하고 7독씩 독경 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금강경을 공부하고 수행하며 남을 위해 해설해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 사람들은 ‘내가 금강경 수행을 열심히 하니까 좋은 일들만 많이 생길 것이다’ 라거나,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는데 나쁜 일이 설마 일어나겠어?’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이만큼 수행하니까 그만한 보상은 따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뒤따른다. 그리고 그 보상은 내 관점에서 내가 좋은 쪽의 일들이 많이 일어나 주고, 나에게 나쁜 일들은 일어나지 않고 비켜가기를 바라는 쪽으로 생각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좋은 일’ ‘나쁜 일’이라는 것은 ‘내 생각’일 뿐이다. 내 생각에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일 뿐이지 법계(法界)의 생각이거나, 진리의 생각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돈도 잘 벌리고, 남들에게 칭찬도 많이 들으며,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진리의 견해가 항상 ‘내 생각’과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지 말라. 진리의 생각은 다를 지 모른다. 물론 진리 또한 그러한 내 생각과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도울 수도 있다. 그리고 물론 때때로 기꺼이 그렇게 해 주곤 한다. 기도하는 자의 밝고도 간절한 서원(誓願)은 법계를 감동시킬 수 있기 때문에 분명 진리의 세계에서는 수행하는 자의 원을 듣고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법계의 견해는 당장에 ‘내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이란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우며, 좋고 나쁜 두 가지를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좋은 것을 선택하는 데에만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계에서는 좋고 나쁨이 없는 대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법계에서 수행하는 자의 원을 들어주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좋은 쪽일 수도 있지만 나쁜 쪽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분명 그것은 대긍정을 위한 일시적인 나쁨이란 말이다. 법계란 늘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무분별(無分別)의 진리만을 나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경전을 독송하고 금강경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도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열심히 수행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기며 미워하고 심지어 욕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길까?’하고 괴로워할 것이다.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해 그런가’ 싶기도 할 것이고, ‘수행을 해도 별 소용 없구나’ 싶기도 할 것이며, 때때로 ‘이 수행이, 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리석은 중생들의 마음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당장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만 좋은 일인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계의 입장은 다르다.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좋은 일이 다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인과응보의 이치, 업보의 이치를 관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근원적인 ‘좋은 일’ 다시 말해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대 긍정의 진리를 나투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수행을 열심히 하는데도 사람들이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전생의 업에 대한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전생에 내가 지은 업을 언젠가는 받아야 할 터인데, 금강경 수행을 열심히 할 때 받음으로써 그 업은 금강경의 밝은 광명에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금강경 독경을 열심히 하는데도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것은 업이 녹느라고 그러는 것이다. 업장이 소멸되느라 그러는 것이란 말이다.
수행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면 마땅히 악도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아야 할 것인데, 다행히도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수행공덕으로 가볍게 남의 업신여김을 당하는 정도에서 그칠 수 있는 것이다. 악도에 떨어질 만한 업장을 과거에 지어 놓았다면 그 결과를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업이란 반드시 그 과보를 받아야 녹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업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수행하는 사람은 업보를 받지도 않고 나쁜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인과응보를 모르는 어리석은 이의 얄팍한 이기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악도에 떨어질 만한 악업을 지었지만, 이렇게 금강경 밝은 가르침을 얻어 듣고 수지독송하게 되면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정도로 그 과보를 받음으로써 업장을 말끔히 소멸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소멸될 것이고 전생의 죄업이 모두 소멸되어야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업장이 무겁게 남아 있는데 어찌 깨달음과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이처럼 진리는 항상 무량수 무량광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절대 긍정의 차원에서 모든 일을 진행시킨다. 당장에는 욕을 얻어먹거나, 남의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나쁜 일이 일어나는 듯 해 보여도 사실은 그것이 ‘능히 내 업을 맑히는’, ‘능정업장(能淨業障)’의 길임을 이 분에서는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금강경 수지독송의 공덕이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는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수행을 시작하면서 더욱 마장(魔障)도 많이 생겨나고 자꾸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능정업장, 업장을 능히 맑히기 위한 법계의 배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100일 기도를 시작했는데 오히려 기도하지 않을 때보다 더 좋지 않은 일들이 자꾸만 생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기도의 힘으로 업장을 녹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셈이다. 가만히 놔둔다면 지옥에 떨어질지 모르는 업장을 기도 중에 오는 온갖 마장을 받아들이고 내 안에서 기도로써 녹임으로써 맑게 해탈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자는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당당히 가야할 길만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사사로이 눈앞의 좋고 나쁨을 따져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란다면 대장부의 걸림 없는 지혜의 길이라 할 수 없다. 참된 지혜는 좋고 나쁨을 초월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하는 구도자는 굳게 믿고 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좋고 나쁜 그 모든 일이 모두 다 진리의 길이며, 부처님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끌기 위한 길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당당해 진다. 완전히 내맡기면 자유로우며 걸림이 없다.
사사로운 ‘나’를 놓아버리고, 내 안의 참나, 내 안의 자성 부처님께 일체 모든 것을 완전히 내맡기고 살아간다면 우리 앞에 놓인 그 어떤 경계나 그 어떤 역경과 괴로움 조차도 즐거운 대 긍정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수행자의 힘은 이와 같은 마음에서 온다. 이 같은 대 긍정의 마음, 대 수용의 마음, 대 신심의 마음에서 오며, 나를 놓아버리고 내 안의 본래자리에 완전히 믿고 맡기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 정도의 마음이 수행자의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얼마나 걸림 없고 자유로울 것인가. 그 어떤 일이 우리를 휘두를 수 있으며,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이처럼 금강경 수행자의 길은 당당하고 훤칠하며 걸림 없는 지혜의 길이다.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 겁 전의 과거를 생각해 보니 연등부처님 뵙기 전에도 팔만 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어 헛되이 지냄이 없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과 내지 어떤 산술적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아승지(阿僧祗)란 도무지 산수(算數)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한량없이 많은 수를 뜻하며, 겁(劫)이란 마찬가지로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시간을 말한다. 나유타(那由他) 또한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숫자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승지처럼 무량한 수를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다시말해 부처님께서는 과거 연등부처님 뿐 아니라 그 이전에도 무량한 시간 동안 무량한 수의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되 헛되이 보내지 않았을 만큼 그 공덕이 무량하신 분이다. 한 부처님께만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더라도 그 공덕이 한량없을 터인데, 무량한 세월동안 무량한 부처님께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었으니 그 공덕이 얼마나 셀 수 없이 많을 것인가. 이 비유는 그만큼 부처님의 공덕이 많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부처님께서 한량없는 세월동안 한량없는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어 섬긴 그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산술적인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만큼의 더욱 무량한 공덕이 있다는 말씀이시다. 다시 말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야말로 도무지 말이나 그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는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렇게 금강경 수지독송의 공덕을 크게 말씀하시고 찬탄하는 이유는 금강경이라는 경전에 그 어떤 상을 두고 절대시하거나 금강경만 독송하면 모든 공덕을 다 얻는다는 등의 그런 단편적인 말씀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금강경이란 ‘아상을 타파하는 가르침’이며, ‘완전히 아상을 깨고 참나를 발견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불법의 대의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가르침을 수지하고 독송해야 한다는 말이다. 수지란 완전히 체득하여 그 가르침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며, 독송이란 그러한 깨달음의 바탕 위에서 그 가르침을 끊임없이 읽고 외움으로써 보다 완전히 체득하며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일은 곧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인 것이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유위의 공덕도 깨달음이라는 무위의 공덕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무궁무진한 산술적인 비유로 그 공덕을 표현하더라도 그것이 유위의 공덕인 이상 그 어떤 수학자의 비유라도 무위의 공덕에는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는 공덕을 내가 다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아마도 금강경을 처음 공부하는 이들은 이와 같은 금강경의 표현을 보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것이 한량없는 세월동안 한량없는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는 것에 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또 앞서 말했듯, 형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공덕이 동서남북과 네 간방과 위아래의 가히 생각할 수 없는 허공과도 같이 셀 수 없다고 하시는가. 처음 금강경을 공부하는 이들은 똑같이 하는 말이 너무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뿐인가. 금강경에서는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원동력이 되었던 ‘나’를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또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 되었던 욕심과 집착을 다 버리고 일체 중생을 위해 보시하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 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러한 가르침에 어찌 마음이 혼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여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위에서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말씀하셨지만, 아직도 모자란 것이 있으신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전부 다 말한다면 아마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부처님께서는 말이라는 것이 진리를 전부 담을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신다. 그렇기에 그렇게까지 말로써 수지독송의 공덕을 표현하시고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다 말한다면’ 이라는 표현으로 여전히 말로써는 다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 계신다. 무위(無爲)는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함이 없는’ 무위이기 때문에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 말로써 표현하는 순간 벌써 어긋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방편을 빌리지 않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표현하고 계시는 것이다.
계속해서 부처님의 당부는 이어진다.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헤아릴 수 없다. 이렇게 금강경을 해설하고는 있지만 이 해설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해설 속에 금강경의 뜻이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면 벌써 어긋나고 만다. 이 경은 그 뜻을 가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은 머릿속으로 헤아린다고 헤아려 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수지독송이라는 수행을 통해, 즉 완전한 내적인 깨달음으로써 수지하고, 그러고 나서도 끊임없이 독송함으로써 완전히 가르침이 나와 하나가 될 수 있을 때만이 그저 체험되어지고, 하나되어지는 것이지, 이 경은 뜻을 헤아린다고 헤아려 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실천과 수행만이 그 뜻과 하나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완전히 나를 놓아버리고 아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으로써 내가 곧 전체가 되었을 때 그 때 이 뜻이 그대로 내가 되고 전체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뜻을 헤아릴 ‘나’라는 주체가 완전히 소멸해야지만 이 뜻은 전체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 뜻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 뜻을 헤아리는 ‘나’가 있는 이상 이 뜻은 여전히 이해되지 못한다.
과보(果報)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수지독송의 과보는 깨달음이라거나, 무량한 복덕이라거나 하는 등의 원인과 결과로써의 어떤 과보를 생각하겠지만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완전한 무(無)이다. 완전히 무이기 때문에 완전히 전체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도 없기 때문에 한량없이 많을 수 있는 것이다. 과보가 있다면 그것은 셀 수 있는 것이며, 있고 없음의 틀 안에 갇힌 과보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유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 과보를 헤아리는 순간 이미 그 과보는 참된 과보일 수가 없다.
과보를 받을 ‘나’가 없어졌을 때, 내가 받을 ‘과보’ 또한 완전히 공(空)하다. ‘나’가 없다면 내가 받을 과보 또한 어디에 붙여 둘 것인가. ‘나’만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항상 무량한 과보로써, 무량한 복덕으로써 충만한 곳이다. 이 세상은 항상 부처님의 무량한 광명으로 충만한 곳이며, 무량한 복덕이 넘치는 곳이다. 아니 광명 그 자체이며, 복덕 그 자체이고, 부처 그 자체인 것이다. 다만 거기에 광명을 받으려는 내가 있고, 복덕을 누리려는 내가 있으며, 부처가 되려는 내가 있는 이상 참된 광명도 복덕도 부처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아상을 완전히 타파했을 때, 그 자리가 금강경 수지의 자리가 되며, 그 때 헤아릴 수 없는 뜻도, 헤아릴 수 없는 과보도 그대로 하나로 어우러져 광대한 법해(法海)를 이룰 것이다.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에 또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백천만억 겁 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아니하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수승할진대, 하물며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느냐.
수보리야,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경에는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니,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며,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수지독송하여 널리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니, 모두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과 같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리니 마땅히 알라. 이 곳은 곧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이 분에서는 경을 베껴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연설해 주는 데 대한 공덕을 설하고 있다. 경의 말씀을 아무리 설명해 주고 설해 주었더라도 훗날 경을 공부하는 수행자가 경전을 참되게 수지독송하지 못한다면 그 경전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경전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이 있는 경인가를 거듭 설명하시면서 진리의 길을 걷는 수행자들에게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해 줄 것을 요청하고 계신 것이다.
이 분에서 말씀하고 계신 금강경 수행법은 첫째 서사(書寫)이고, 둘째 수지독송(受持讀誦)이며 셋째 위인해설(爲人解說)이다. 다시 말해 첫째는 사경이며, 둘째는 독송이고, 셋째는 설법이요 법보시인 것이다. 이 세 가지 금강경 수행을 통해 금강경의 깊은 의미를 더욱 깨닫게 되고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글로 베껴 씀으로써 하나 하나의 의미를 더욱 면밀히 공부하며 공경하게 되고, 입으로 독송함으로써 잊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며, 법을 전하는 설법과 법보시를 통해 진리가 널리 일체 중생에게 회향될 수 있도록 하는 수행이다.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에 또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백천만억 겁 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아니하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수승할진대,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 수행자가 있어 수도 없는 몸으로써 나고 죽고를 반복하며 백천만 억 겁을 윤회하면서 끊임없이 보시하기를 매일같이 한다 하더라도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 복이 더욱 수승하다. 하물며 이 경전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법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는가.
항하사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써 아침과 낮 또 저녁으로 보시하기를 백천만억 겁 동안 하더라도, 아니 그 이상의 엄청난 보시를 행하더라도 자신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유위(有爲)의 공덕이 될 뿐이다. 즉 ‘내가 했다’는 상이 남아 있는 이상 그 어떤 보시를 행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어리석은 중생의 유위복일 뿐이다.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누구에게 보시했다는 그러한 일체의 상을 다 놓아버리지 않는 이상 아무리 셀 수 없는 무량한 보시를 했더라도 그것은 깨달은 자가 숨 한 번 쉬는 공덕에 미치지 못한다. 일체의 상을 여의고 본래 성품을 깨닫게 된다면 그 자체가 무량한 복덕이고 공덕이 된다. 일체의 상을 여의게 되면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법계가 그대로 내가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베풀 내가 없으며 베풀어 줄 대상도 없고 베풀 것도 없다. 베풀 주체인 ‘나’도, 베풀어 줄 대상인 ‘상대’도, 또한 베풀어 줄 ‘것’도 전부 공(空)했으며, 전부가 그대로 나와 둘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전체가 둘이 아닌 하나로써 그대로 나이고 그대로 우주인데, 주고받을 일이 무엇인가. 보시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공덕이란 말 또한 텅 비어 사라지고 만다.
그랬을 때, 본래 성품을 깨닫게 되었을 때, 존재 자체가 그대로 공덕이 되고, 보시가 되며, 지혜가 된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언설로도, 그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텅 빈 공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할진데 어찌 물질적인 보시로써 상을 타파한 깨달음의 세계와 견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언설로써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만큼 보시를 한다고 표현할지라도 그것은 유위복 밖에 되지 못할 뿐이다.
유위복은 아무리 많더라도 그 양이 정해져 있을 뿐이지만, 무위복은 그 양이 없다. 그 양이 전체이기 때문에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복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체의 상을 타파한 공덕이며,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그러니 금강경을 올바로 수지하는 공덕은 도무지 그 양을 셀 수 없는 것이다. 금강경에 담긴 진리의 크기를 어찌 유위의 양으로써 셀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의 가르침을 서사하고 수지독송하며 위인해설하는 공덕은 도무지 셀 수 없는 것이다. 몸으로써 백천만억 겁을 보시하는 것은 아무리 하더라도 유위의 공덕에 머물 뿐이지만,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공덕은 무위의 공덕이기 때문이다. 유위의 공덕을 아무리 많이 쌓더라도 그 결과 육도 윤회 가운데 천상세계를 갈 수는 있겠지만, 육도 윤회 그 자체를 떠날 수는 없다. 그러나 금강경을 깨닫는 공부를 무위라고 하는 이유는 이 공부로써 윤회의 수레바퀴 자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천만 억겁을 몸으로 보시하더라도 그 결과는 고작 육도 가운데 천상세계에 조금 더 오래 머무는 것이지만,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공덕은 육도 윤회 자체를 벗어나 대 해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느냐.
그러면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공덕을 얻고자 한다면 어떻게 금강경을 배우고 수행해야 하는가.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달아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대 해탈을 얻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을 통해 이를 수 있겠는가. 금강경에서는 서사와 수지독송 그리고 위인해설이라는 세 가지 수행법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금강경을 공부해 오고 있지만 여전히 머리로써는 언뜻 이해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아직 내 안에서 금강경이 춤을 추고 흘러들어오고 흘러나오지 못할 것이다. 아직은 내가 금강경 자체가 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금강경의 가르침이 내 삶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할 것이다. 아상을 타파하고, 일체의 상을 타파한다는 것이 말로써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얼마나 어려운 실천인가.
그래서 이 경에서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우리 삶 속에서 끊임없이 체험되어지도록 하고 깨닫도록 하기 위해 세 가지 실천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 가지 실천 수행법을 하나 하나 알아보자.
첫째, 서사(書寫)라는 것은 베껴 쓴다는 말로 다시 말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경(寫經)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경전의 가르침을 하나 하나 베껴 쓴다는 것은 그만큼 그 가르침에 집중하고 몰두할 수 있는 방법이다. 보통 사람들은 경전을 보더라도 소설책을 읽듯이 그저 읽어 내려가곤 한다. 그러나 경전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다. 경전은 단순히 읽어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하나가 되는 작업이다.
경전의 가르침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온 마음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 생각이나 판단, 혹은 이전에 배워 온 것들로써 경전을 해석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저 있는 그대로 하나도 남김없이 베껴야 하는 것이다. 책을 베낀다는 것은 똑같이 다시 쓴다는 말이다. 그처럼 우리가 경전을 볼 때도 마음에 똑같이 베껴야 한다. 내 안의 생각이나 판단, 관념들로써 걸러 들어서도 안 되고, 내가 원하는 부분만을 가려 읽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듣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내 생각이며 편견들을 경전에 비춰 보다 견고히 하는 아견을 증장시키는 일 밖에 되지 못한다.
경전을 볼 때는 반드시 사경을 해야 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들을 때도 사경을 해야 한다. 사경이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베끼는 작업이다. 의심하지 말고, 해석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 다만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베껴야 한다. 그래서 그 가르침이 그대로 내가 되도록 해야 한다. 내식대로 가르침을 취사선택해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 글자 하나 빼놓지 말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경 수행을 하는 이유다.
다만 글로써 베끼고 쓰는 것만이 사경인 것은 아니다. 마음 안에 베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 견해를 다 놓아버리고, 맑고 텅 비게 한 다음 아무런 시비 분별이나 판단 없이 다만 경전을 내 안에 베껴 새기라. 경전을 올바로 베껴 사경할 때 그 사경은 그 어떤 고정된 견해가 아니다. 그대로 베꼈을 때 자유롭다. 내 견해로써 색안경으로 투사한 것을 베꼈을 때는 내 견해 속에 스스로 빠지게 되지만, 완전히 베끼고 사경했을 때 그 가르침은 물처럼 유연하며 허공처럼 활짝 열려있는,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대 자유의 가르침으로 물결친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는 사경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처님께서 몸소 행하셨던 사경을 설해 주고 계신다.
“선남자여, 항상 부처님을 본받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바 세계에 오시기까지 법신(法身)인 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정진하여 물러나지 않으시고 수없이 많은 몸과 목숨을 보시하고,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사경하기를 수미산만큼 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사경을 위해 이렇게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왕의 자리나 궁전, 정원 등의 일체 소유와 갖가지 어려운 고행이 무슨 장애가 될 수 있었겠느냐.”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사경하기를 수미산만큼 하셨으며, 그만큼 법을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사경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다. 목숨은 유위이며 다만 인연따라 오고 가는 것일 뿐이지만, 부처님의 법을 지니고 사경하는 공덕은 무위이며 일체 윤회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수지독송(受持讀誦)을 말씀하셨다. 수지독송은 말 그대로 잘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는 말이다. 서사하고 사경함으로써 내 안에 법이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잘 받아지닌 것을 독송함으로써 항상 잊지 않아야 한다. 신구의 세 가지로써 업을 짓고 사는 우리들은 몸과 말과 생각을 통해 이 세상을 만들어 간다. 수행 또한 이 세 가지를 방편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몸으로써 서사하며 마음으로써 수지하며 말로써 독송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듯 몸과 말과 뜻으로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맑게 정화되고 진리로써 하나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을 수지하고 독송하는 공덕은 유위가 아닌 무위이다. 그렇다고 수지하지 않고 독송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유위의 공덕에 머물고 만다. 즉, 내 안에 그 참 뜻을 올바로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나날 동안 금강경을 독송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흡사 이해하지도 못하는 책을 입으로만 외워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것은 참된 수지독송이 아니다. 그래서 독송에는 꼭 수지라는 말이 함께 따른다. 마음으로 온전히 그 뜻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된 앎과 이해, 즉 경전에 대한 밝은 지혜 없이 입으로만 독송한다 한들 그것이 어찌 무위의 공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금강경의 수지독송 수행법 때문에 오래도록 불가에서는 금강경 독송을 주요한 수행법으로 알고 실천해 왔다. 매 예불과 기도 때마다 1독, 3독, 7독, 혹은 21독에서 108독씩 늘 독송하며 정진해 왔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도록 금강경 독송 수행이 내려져 오다 보니, 자칫 금강경 수행이 독송 그 자체에 그 어떤 공덕이 있고 영험이 있는 것인 줄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금강경의 뜻을 전혀 모르더라도 매일 3독, 7독을 하면 그 자체에 엄청난 공덕이 쌓인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뜻을 모르고서라도 마음을 맑게 비우고 또한 밝게 비추면서 금강경을 독송하게 된다면 지관(止觀)수행의 공덕이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수지독송이란 금강경의 참 뜻을 올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해 독송 수행을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혹 금강경 독송만 매일 하면 무조건 업장이 소멸된다거나, 밝아진다거나 하고 금강경 독송 그 자체에 그 어떤 상을 가져다 붙이고 있지는 않은가 비추어 볼 일이다. 그것은 금강경에 또 다른 상을 부여하는 일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금강경의 가르침에 또 다른 상을 가져다 붙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로 위인해설(爲人解說)의 수행법이다. 이것은 서사와 수지독송으로 우리 안에 금강경이 물결치고 꽃피우는 것을 일체 모든 중생들을 위해 회향(回向)하도록 이끄는 수행방법이다. 진리가 우리 안에 꽃피어날 때 저절로 우리 안에는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비의 동체대비심이 함께 꽃피어 나게 된다. 지혜는 곧 자비와 한 몸이기 때문이다. 금강경 수행을 통해 일체의 상이 타파되면,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이 사라지고, 일체는 모두가 ‘전체로써의 하나’가 된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내가 배고플 때만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데, 전체가 그대로 내 몸이 되다 보니 그 어떤 중생이 배고플 때 그것이 그대로 나의 일이 되며, 일체 중생이 어리석을 때 그것이 그대로 나의 어리석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이 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체대비심이란 말 그대로 동체, 즉 같은 몸이라는 자각에서 나오는 대자비의 마음이다. 동체대비심은 일체의 상이 타파되는 금강경의 실천에서 나온다.
완전히 금강경을 깨닫게 된다면 물론 위인해설이라는 수행법을 따로 만들어 둘 필요도 없다. 저절로 동체대비가 성숙해 지면 남을 위해 연설하고자 하는 마음은 저절로 따른다. 완전히 깨닫고 난 뒤에 남을 위해 설법해 주면 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분별일 뿐이다. 완전히 깨닫고 난 뒤에는 그런 생각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직 서사와 수지독송이 완전해 지지 않은 중생들에게는 위인해설로써 동체대비심을 기르는 연습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때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자가 바로 나의 위인해설의 대상이다. 일체 중생에게 법을 설해주겠다거나, 법보시를 하겠다거나 하는 생각도 다 부질없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다만 지금 이 자리에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가 바로 내 전법(傳法)의 대상이다. 유위의 세상에서는 유위의 공덕이 뒤따른다. 남에게 설법을 많이 해 주는 공덕을 짓는다면 설사 그 사람이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일지라도 유위의 공덕은 뒤따른다. 위인해설과 법보시, 전법의 공덕은 대선지식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는 공덕이 뒤따른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법을 전하라. 법보시의 공덕은 스승을 얻는 공덕을 얻고 나아가 깨달음의 공덕이 된다. 저 많은 수행자들이 스승이 없어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라. 인류의 수많은 수행자들의 공통된 소망은 바로 참스승을 찾는 일이었다. 참스승을 바로 찾게 되면 애써 돌아가지 않고도 바로 성품을 볼 수 있지만, 스승 없이 깨달음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법보시로써 스승이 되어줄 때 그 유위의 공덕이 무르익는 어느날 저 인도의 석가모니와 같은 부처님을 나의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열매가 열릴 것이다.
어쩌면 앞서 금강경 1분에서 금강경의 설법은 이미 끝마쳐졌다. 또한 구구절절한 설명 또한 14분까지 오면서 이미 다 설해 마쳤다. 지금부터의 금강경 강의는 앞서 했던 말씀에 대한 보충설명 정도이거나 부처님의 자비심에 의한 되풀이 되는 법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까지 공부해 온 독자 수행자들에게 금강경의 가르침은 저 깊은 심연에서의 어떤 나직한 떨림 혹은 아직 활찍 피지 않은 봉우리로써 꽃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우리가 우리 가슴 속에 몽우리져 있다. 물론 그것은 금강경을 공부하기 전에도 그랬고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그랬으며, 우리 뿐 아니라 온 우주 삼라만상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가 다 그러하다. 그러나 금강경을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 꽃봉우리는 더욱 선연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에서는 이 중요한 지금의 시점에서 금강경을 우리 안에서 완전히 꽃피우도록 할 이상의 세 가지 수행법을 제시해 주고 계신 것이다. 이제 앞으로 남은 금강경의 가르침을 주시하면서 한편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 가르침이 우리 안에서 고동칠 수 있도록 이 세 가지 수행법을 실천하는 일이 남아 있다.
수보리야,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경에는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니,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며,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다.
이 경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헤아리거나 생각으로 따져볼 수 없는 가르침이다. 이 경전을 머리로써 이해하고 생각하며 분석함으로써 깨닫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머리로써는 도무지 담을 수 없다. 머리로써 다 이해했다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이해했다는 생각에 불과하다. 그 이해는 생각의 틀을 넘어 서지 못한다. 또한 이 가르침의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아상 타파의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인지, 대 해탈의 깨달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헤아리려 하지 말라. 그 헤아림은 절대 내 경험과 생각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든 따지려 들거나 연구하고 분석하고 생각하여 정리하려는 습관이다. 그런 과학적인 연구 분석을 통해 무엇이든지 다 체계화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어떤 거사님께서 말씀하시길 불교가 상당히 과학적인 듯 하여 10년을 넘게 생각해 보고 연구해 보았는데 도무지 확연해 지질 않는다고 답답해 하셨다. 도무지 알 수 없을 뿐 확연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신경질적으로 말씀하시면서 도대체 해탈이 무엇이고, 불성이 무엇인지, 공이 무엇인지, 아상타파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가르쳐 달라는 말만 되풀이 하셨다. 10년 동안 도무지 모르겠고 답답해서 유명한 스님들은 다 찾아가 물어보고 했지만 머릿속에서 확실하게 정리시켜 줄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생각과 정리, 분석과 연구로써는 언제까지고 그 답을 알아낼 수 없으니 ‘지금 거사님께서 도무지 모르겠고 답답한’ 그 속으로 들어가서 ‘답답해 미치겠는’ 그것과 하나 되시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도무지 모르겠는 그래서 막막하여 오리무중인 그것이 바로 화두다. 그 화두를 따지거나 분석하는 것으로 풀고자 한다면 앞으로도 10년이 아닌 100년을 두고도 그 답은 얻을 수 없겠지만, ‘오직 모르는’ 그 속으로 들어가 ‘모르기만 할 뿐’ 다른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모르기만 할 때 그 때 완전히 알게 되는 수가 있을 것이니 그것이 화두인 것이다. 수행이 뒷받침되지 않고 머리로써만 헤아리려 하고 생각하려 한다면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이렇듯 이 경에는 생각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므로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에게, 또 최상승을 발한 이에게 이 경을 설하신 것이다. ‘대승을 발한 이’는 사사로운 아상에 갇혀 ‘나’라는 틀 속에서 이기심으로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아닌 진정 일체 중생을 위한 동체대비의 마음을 발한 이를 말하며, ‘최상승을 발한 이’는 소소하게 공덕을 키우겠다거나 복을 많이 짓고 착한 일을 많이 하겠다는 등의 이유로 수행하는 사람이 아닌 걸림없는 대자유와 대해탈의 열반을 얻고자 발심한 이를 말한다.
대승을 발한다는 것과 최상승을 발한다는 것은 수행자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발심의 요소가 된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첫째, 대승을 발심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보통 수행자라면 누구나 깨달음을 추구하게 마련인데, 그것이 자칫 이기적인 마음에서, 아상에 갇혀 있는 마음에서 발심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즉, ‘내가 깨닫겠다’ ‘내가 깨달아 부처가 되겠다’ ‘내가 깨달아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겠다’는 아상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마음은 어찌보면 아주 미세하게 일어나는 아상이기 때문에 자칫 놓치기 쉽고, 스스로 ‘나는 일체 중생을 위해 깨닫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상이 아니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상이 있는 중생인 이상 ‘내가 깨닫는다’고 하는 상은 언제까지고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그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아상이 없다면 발심할 필요가 없다. 아상이 없다면 이미 깨달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러한 아상을 끊임없이 놓치지 않고 주시할 수 있어야 하며, 원(願)을 세울 때 자칫 아상에 물들지 않을 수 있도록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위한 동체대비심을 바탕으로 하는 대승의 원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예민하게 돌이켜 비춰보라. ‘깨닫겠다’는 원 아래에는 ‘내가’라고 하는 아상과 이기가 바탕이 되어 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그 아상을 비추어 보고 놓아버림으로써 일체 중생과 일체 만 생명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이야말로 동체대비의 대승의 원을 발하는 것이다.
둘째로, 최상승을 발한다는 말은, 자칫 수행자가 복이나 짓고 착한 일이나 함으로써 선한 곳에 태어나길 바라기만 해서는 안 되며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대 자유, 대 해탈을 성취하고자 하는 원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사람들의 발심이 이처럼 투철한 최상승의 발심이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원칙적으로, 또 표면적으로는 최상승의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발심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선을 행하고 복을 지음으로써 천상에 나겠다는 이유로 수행을 하는 이들도 많다. 다시 말해 수행을 하는 이유가 내 몸 편하고, 내 마음 즐거우며, 좋은 곳에 나고, 좋은 인연 만나며, 다만 이 생이나 다음 생에서 행복하고 편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복적으로 기도하고, 유위의 복만을 짓고자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절에 다니는 신도님들 가운데 최상승의 원을 발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일반적으로는 보다 부자되길 바라고, 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길 바라며, 보다 안정적인 월급과 노후를 바라고, 적당히 복도 짓고 수행도 해서 편안하게 살길 바라며, 가족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거나 하는 등의 지극히 세속적이고 작은 안락에만 만족하여 수행하는 이가 많다. 대 해탈을 위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최상승의 발심하였는가 스스로 돌이켜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수지독송하여 널리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니, 모두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과 같다.
이상에서와 같은 금강경 설법을 듣고 능히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본다. 여래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 안에 깊은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본래의 성품이며 참마음이다. 우리가 마음 내어 발심했다면 그 순간 이미 여래의 마음에도 전해지게 마련이다.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본다.
또한 이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이란 바로 무위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다. 무위의 공덕을 말로써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기에 이렇게 긴 수식으로 방편을 써서 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이다. 즉, 이처럼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며 전법하는 이야말로 여래의 깨달음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여래의 깨달음이란 누구나 항상 지니고 있다. 우리 깊은 마음 자리에는 누구라도 여래의 깨달음을 간직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깨달아 있다. 다만 미혹할 뿐이다. 다만 모를 뿐이다. 미혹하여 스스로 착각하고 있다. 미혹 즉, 어리석음이 우리를 스스로 아상이라는 감옥에 가둔다. 그렇게 스스로 만든 아상이라는 감옥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감옥은 누가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누가 가둬 놓은 것도 아니다. 스스로 실체 없는 감옥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감옥에 가둬 놓았으며 그로인해 스스로 아파하고 고통당할 뿐인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그 사실을 일깨워 주고 계신 것이다. 스스로 만든 상이기 때문에 스스로 그 상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법을 설해주고 계신다. 스스로 그 상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수행법을 알려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수행법대로 수행하는 이가 바로 여래의 깨달음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미 깨달아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수행법을 알려주셨고, 그 수행법대로 실천하는 자야말로 여래의 깨달음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짊어지고 있다면 다시 찾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금강경을 수행하는 이는 이미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다시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깨달아 있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소한 법을 즐기며 따르지 말라. 작은 법에 머물러 기뻐함으로써 대승의 원을 발하지 못하거나, 소소한 선과 복을 따르는 법에 집착함으로써 최상승의 원을 발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참으로 금강경을 알아듣고 독송하며 전법하는 자라면 대승의 원을 발해야 하며, 최상승의 원을 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란 앞서도 설명했듯이 전부 ‘아견’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아견에 대한 다른 표현이고 서술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나라는 견해’에 집착하는 사람은 나를 즐겁게 해 주는 법을 즐긴다. 다시말해, 아견을 강화시키는 법, 나를 내세울 수 있는 법, 소승의 원과 선과 복을 짓는 소소한 법을 즐기게 된다. 대승과 최상승이 아닌 법이 바로 소소한 법이다. 그런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곧 ‘나라는 견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코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야,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리니 마땅히 알라. 이 곳은 곧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할 것이다. 이 경이 있는 곳은 곧 진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진리의 향기가 그윽하게 피어오를 것이다. 진리가 있는 곳에는 늘 공양과 공경, 찬탄과 예배가 있다. 인간이 삼보에 예배하고 공양 공경하듯 일체 세간의 모든 존재들 또한 응당 공양 공경하며 찬탄 찬양하게 될 것이다. 마땅히 이 곳은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진리는 항상 청정한 수행자로 장엄된다. 진리가 있는 곳은 늘 청정한 수행자의 공양과 공경 그리고 찬탄과 예배가 항상한다. 내 안에 진리가 살아 숨쉬게 하라. 이 경전을 서사하고 수지독송하며 위타연설하게 되면 곧 내 안에 이 경전이 꽃을 피운다. 또한 그곳은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공경 공양하며 에워써고 돌면서 꽃과 향을 뿌릴 것이다.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과 함께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쪽 어깨에 가사를 수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공경스럽게 두 손 모아 합장하여 예를 올렸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희유한 일입니다.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모든 보살들이 불법을 잘 전하도록 부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처럼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며, 모든 보살들에게 잘 부촉하고 있느니라. 내가 그대를 위해서 말하노니 잘 들으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이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그대에게 설하리라. "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기쁜 마음으로 듣고자 합니다."
선현기청분은 말 그대로 선현이 가르침을 청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선현이란 수보리를 말한다. 산스크리트 원문은 ‘수부티’(Subhuti)로 나와 있는데 그 이름이 가진 의미를 보면 ‘착한 존재’ 혹은 ‘잘 나타내 보인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의미로 옮기면 ‘선현기청분’이란 제목에서처럼 ‘선현’이 되고, 본문에서처럼 원어의 발음만 따서 ‘수보리’로 옮길 수도 있다. 본문에서 구마라집은 주로 수보리로 옮기고 현장은 선현으로 옮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그 때 그 때 제자들의 간청에 의하여 설법을 하고 계신다. 많은 경전에서 제자들의 이름이 언급되는 이유도 이처럼 제자들이 부처님께 궁금한 것을 여쭙고 그에 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금강경에서는 장로 수보리가 가르침을 청하고 그에 답변하시는 모습을 부처님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난 존자가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과 함께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쪽 어깨에 가사를 수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공경스럽게 두 손 모아 합장하여 예를 올렸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수보리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해공제일이라 불린다. 해공제일이라는 말은 공의 이치를 가장 밝게 깨달았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시허망’, ‘여몽환포영’ 등 공의 이치를 열어 보이고 있는 금강경의 법문을 청하는 제자가 해공제일인 수보리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수보리는 해공제일에서도 알 수 있듯 공의 이치에 밝은 분이며, 아라한과를 증득하신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수보리의 행동 하나 하나 또한 앞의 법회인유분에서 밝힌 것처럼 온전히 깨어있는 행동이며, 이미 도착한 이의 궁극의 순간 순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부처님의 평범한 일상을 가만히 묘사함으로써 부처님의 깨어있는 행을 보여준 것처럼, 여기에서도 아난은 수보리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까지 세심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장로 수보리 또한 부처님과 똑같이 좌선에 들어있다가 공양 때가 되어 가사와 발우를 수하고 부처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 사위성으로 들어가 탁발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와 공양을 마치시고 가사와 발우를 걷으신 뒤 발을 씻고 부처님 곁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다. 부처님 곁에서 이러한 부처님의 깨어있고 온전한 모습을 지켜보던 수보리는 부처님에 대한 한없는 감사와 경이로움을 느끼면서 그 순간 한생각 떠오르는 질문이 있었다. 그리하여 수보리는 아주 천천히 마음을 관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한 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한없는 공경스러움으로 합장하여 법을 청하는 예를 올린다.
어쩌면 이 질문은 수보리 개인만의 질문이 아닐 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해공제일인 수보리는 이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제자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제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위의 모든 도반들의 마음을 읽고 그 의문을 대신해 질문하기도 한다. 자신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도반들이 궁금해 하고 있는 점을 모두를 대신해 부처님께 사뢰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또한 바른 제자는 질문이 떠오른다고 답을 구하는 마음에 미리부터 얻어 들을 답변에 마음이 먼저 가 있지 않다. ‘어떤 답을 주실까’ 하는 조급한 마음이 없다. 온전히 깨어있는 행으로써 천천히 일어나기만 하고, 가사를 입기만 하며, 합장 공경을 하고, 질문 할 뿐이다. 이 모든 순간 수보리는 철저하게 깨어있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희유한 일입니다.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모든 보살들이 불법을 잘 전하도록 부촉하십니다.
늘상 보아오던 부처님의 일상이지만, 또한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이지만 수보리는 그러한 겉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이면 깊이에 한없는 지혜와 자비로움으로 충만해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경이로움과 희유함을 느끼고 있다. 겉 모습으로써의 부처님이 아니라 온 우주 법계에 두루 미치고 있으며 그것 자체가 되어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 한없는 지혜로움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이렇게 많은 어리석은 중생들을 하나같이 잘 보살펴 주시고 자비로써 감싸주시는 모습에 희유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수많은 보살 수행자들을 잘 보살피고 이끄시며, 또한 그들에게 내 수행의 완성으로 끝내지 말고 세상의 일체 모든 어리석은 중생들을 밝은 가르침으로 안내할 수 있도록 부촉하고 계시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즉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길로 들어선 모든 수행자들을 밝은 깨달음으로 안내하시며, 또한 그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고, 감싸주시며 거두어 주고 계신다.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호념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수행자들에게 또한 당부하여 부촉하고 계신다. ‘내가 너희들을 밝은 깨달음으로 안내하겠노라. 너희들을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잘 보살피고 감싸주며 호념하겠노라. 그러나 이러한 여래의 호념 아래에서 너희들은 너희 자신의 깨달음만을 위해 수행하여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너희들처럼 보리심을 발한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니, 아직 보리심을 발하지 않은 많은 어두운 중생들을 위해, 내가 너희를 호념하듯 너희들도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하며 잘 감싸주고 호념해야 할 것이다.’ 바로 수보리는 이러한 부처님의 호념과 부촉을 보면서, 부처님의 무량수 무량광 끝없이 펼쳐지는 자비로움에 경이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수보리 또한 이러한 부처님의 보살피심과 호념하심 속에서 이렇게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었으며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처님께 수보리는 어떻게 해서든 은혜에 보답을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누구의 도움을 바라는 분도 아니고, 은혜에 보답을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을 수보리는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 보답할 수 있는 길이 도저히 없는 것인가! 그것은 단 한 가지 부처님께서 수많은 보살들을 잘 보호하시고 깨달음으로 이끄셨던 것처럼, 제자들 또한 아직 보리심을 발하지 않은 수많은 중생들을 위해 부처님의 그것과 똑같은 자비로움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호념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만이 수보리와 또 다른 수많은 보살들이 부처님의 은혜로움에 보답하는 길이다.
부처님의 마음과 제자들의 마음은 이와 같이 서로 하나가 되어 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간절히 부촉하시며, 제자들 또한 부처님의 부촉에 마땅히 흔연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그런 마음은 이미 둘이 아닌 마음으로 이심전심 통하여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모든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한없는 자비로움과 보호하심에 한없는 감사를 해야 하고, 또한 그러한 부처님의 호념에 보답하는 길은 스스로 밝게 깨닫는 길과 모든 중생들을 섭수하는 일인 것이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너희들 스스로 밝게 깨달으라는 말씀을 생략하고 제자들에게 모든 중생들에게 법을 잘 전하도록 부촉하시는데 중점을 두신 이유는 지금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는 제자들 상당수는 이미 아라한과를 증득하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미 아라한과를 증득한 이든, 아니면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든 모든 이들을 부처님은 하나같이 잘 호념하고 계시며, 또한 모두에게 부촉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의 의미는 모든 보살 수행자들을 상구보리로, 깨달음으로 잘 이끌어 주신다는 의미이며, ‘모든 보살들이 불법을 잘 전하도록 부촉하신다’는 의미는 모든 보살 수행자들에게 하화중생을 잘 실천하시도록 이끌어 준다는 의미인 것이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우리 모든 수행자들에게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부촉하고 있는 것이다. ‘내 마땅히 너희 수행자들을 호념할 것이니 너희들은 나의 호념 아래에서 열심히 닦고 정진하여 위로는 깨달음을 증득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을 섭수하여 깨달음의 길로 안내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계신 것이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처럼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며, 모든 보살들에게 잘 부촉하고 있느니라. 내가 그대를 위해서 말하노니 잘 들으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이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그대에게 설하리라. "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기쁜 마음으로 듣고자 합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녀인’이란 마땅히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수행의 길로 들어선 모든 보살들이란 의미다. 여기에서는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란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 구마라집의 번역에서는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현장의 번역에서는 ‘발취보살승’으로 번역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무상정등정각으로, 이는 ‘더 없이 높고, 비길 데 없는 바른 깨달음의 마음’이란 의미로, 한 마디로 말하면 발보리심이라 할 수 있다. 즉, ‘보리’가 깨달음을 의미하니, 발보리심은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킨’ ‘깨닫겠다는 마음을 일으킨’이다. 현장 번역의 발취보살승이 범어의 원본의 의미와 좀 더 가까운데, 이는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범어 원본과 현장, 구마라집의 번역을 보았을 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이라는 것은,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이라고 해석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좀 더 쉽게 해석해 본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더 없이 높고 비길데 없는 바른 깨달음’이니 ‘최상의 올바른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했다는 말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발심한’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남자 선녀인이란 ‘부처님께 귀의한 사람’ 혹은 ‘불자’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불법에 귀의한 남자와 여자를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선남자와 선녀인’이란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보살의 길에 들어선 수행자들로, 여기에서는 첫째, 이미 깨달음을 얻은 보살의 의미와 둘째로, 아직 깨닫지는 못하였지만 초발심이라도 보리심을 발한 모든 수행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두 가지 모든 종류의 수행자들의 나아갈 길에 대한 해답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금강경의 가르침은 두 가지 수행자 중 전자의 의미, 즉 이미 깨달음을 얻어 보살이 된 수행자들을 주로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제자들도 있으며, 수보리처럼 이미 깨달음을 얻은 제자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보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지만 보리심을 발한 모든 수행자들을 위해 질문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처럼 깨달음을 얻었지만 열반적정의 저 언덕으로 가버리지 않고 이 언덕에 남아 하화중생의 발원을 가진 보살들을 위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수행자는 모두 상구보리(저 언덕) 하화중생이라는 공통된 발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발원의 성취를 위해 현재 이 언덕에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두가지 수행자 모두에게 중요한 법문으로 다가온다.
수보리는 부처님의 호념과 부촉을 찬탄하면서 이렇게 묻고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선남자 선녀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수행해 나가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이 질문이 바로 선현기청의 내용이며, 이에 답변을 하는 부처님의 말씀이 바로 금강경의 본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수행자는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고, 수행하며, 다스려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이야 말로 보리심을 발한 모든 보살 수행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물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구마라집의 번역에서는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는지’ 다시 말해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만 나오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의 물음은 생략되고 있는데 범어 원전에서도 등장하고 현장의 번역에서도 ‘수행’으로 번역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말과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 하는 의미가 비슷하기 때문에 생략하지 않았나 싶다.
이 부분을 해석할 때 보통 항복받는다는 의미가 선뜻 와 닿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는데, 항복받는다는 의미는 ‘마음이나 생각을 잘 다스려서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 정도로 이해할 수 있으며 쉽게 말해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로 해석할 수 있다.
불교 수행을 흔히 ‘마음공부’라고 이야기를 한다. 결국 이 세상 그 무엇이라도 화엄경의 말씀처럼 마음에서 나왔으며 이 마음이 세상을 짓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또한 어리석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이 마음을 잘 다스려 본래 마음자리를 되찾는 것이 마음공부의 핵심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날뛰는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지, 또한 잘 머무르기 위해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 어떻게 이 마음을 항복받고 다스려 나가야 하는지가 불교 수행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깨달았지만 이 언덕에서 하화중생의 발원을 실천하고자 하는 보살들에게 있어 어떻게 하면 저 언덕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다스려 이 언덕에서 중생을 교화할 수 있는지, 이 언덕에서 깨달은 마음과 교화 하겠다는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무르는지, 어떻게 하면 이 언덕에서도 다시는 퇴전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고 수행해 갈 수 있는지, 저 언덕으로 향하고자 하는 마음을 어떻게 항복받고 다스려 발원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른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를 칭찬하시면서, 수보리의 말을 그대로 긍정하고 수보리의 질문에 답변을 하시고자 하면서 선현기청분은 끝을 맺게 된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1250인의 큰 비구 스님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공양 시간이 되자, 가사와 발우를 수하시고 사위성에 들어가시어 차례대로 탁발을 하신 다음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하셨다. 공양을 마치시고는 가사와 발우를 제자리에 놓으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가부좌를 결하시고 몸을 곧게 세운 뒤 입가에 마음을 집중하시고서.)
법회를 열게 된 연유를 알리는 바로 이 부분, 제 1분이 금강경의 서분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금강경을 주해하신 많은 선승들께서는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부처님 최상의 설법이며 32분까지의 모든 가르침이 사실 이 제 1분에서 다 설해 마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계실만큼 제 1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언뜻 보면 아무 것도 설한 것이 없고, 우리가 공부해야 할 만한 그 어떤 가르침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저 평범한 부처님의 일과를 잠깐 이야기 한 것을 가지고 그렇게 거창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이러한 부처님의 일과를 단순하게 겉모습만 본다면 깨달음의 한 줄 작은 빛도 보기 어려울 것이지만, 마음의 눈으로 이러한 하루 일과를 온전히 살고 계시는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다면 수많은 선사 스님들의 그러한 고결한 안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마음의 눈을 맑게 씻고 2500여 년 전 부처님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그 마음을 살짝 들여다 보도록 하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여시아문’ 경전을 몇 번이라도 독경하고,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경전의 앞 부분에 늘상 등장하는 이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말은 경전이 부처님께서 스스로 쓰신 것이 아니라 법문을 들은 제자가 부처님께 들은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경전은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이신 아난존자에 의해 암송되고 옮겨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시고 20여 년 간을 홀로 전법의 길을 걸으셨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나고 나니 가르침을 배우려는 제자들도 나날이 많아지고, 또한 부처님의 연령 또한 많아지고 있었기에 제자들이 시자를 둘 것을 간곡히 권유하셨고, 부처님께서는 이윽고 허락을 하셨다. 제자들이 가만히 살펴보니 아난 존자는 총명하며 기억력도 뛰어나고 성품도 온화하였으며 외모도 출중하고 또한 부처님의 사촌동생인지라 부처님을 곁에서 시봉하기에는 적임자로 판단되었다.
부처님께서 29세에 출가하시고, 35세에 성도하셨으며, 55세 즈음에 비구 아난을 시자로 두었으니 아난은 부처님께서 80세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약 25년간을 곁에서 시봉하였다. 가장 오랜 기간 부처님 시봉을 하다보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아난이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을 하시자마자 상수제자인 가섭존자는 아난존자와 우파리존자를 위시하여 500아라한을 모아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게 되었다. 물론 그 때 부처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던 아난 존자의 역할이 중요하였을 것임은 분명하다. 부처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은 아난 존자가 가르침 즉, 법을 담당하고, 출가하기 전에 이발사였던 우파리존자가 처음 출가하는 수행자들의 머리를 깍아 준 인연으로 율에 대하여 가장 많이 들었기에 율을 담당하여 결집을 이루게 된 것이다.
경전을 결집하는 방법은 아난이 먼저 일어나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여러 대중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 때 아난은 언제라도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시작함으로써 내 생각대로 부처님 가르침을 함부로 이야기 하지 않고, 부처님께 들었던 사실만을 온전히 대중에게 이야기 하고자 하였다. 이 사실은 불교 경전들이 비교적 지금에 이르기까지 큰 혼란됨 없이 잘 이어져 내려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한 가지 말을 들었을 때, 백이면 백 다 제각기 자기 색안경으로 걸러 알아듣기 마련이다. 자기 판단과 고정관념이 개입되기 쉽고 그렇게 되면 특히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는 데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난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판단이 개입됨이 없이, 아무런 가감도 없이 그대로 부처님께 들은 것들만 있는 그대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이 무엇을 말할 때 대부분 ‘내 말’인 것처럼 이야기하기 쉽다. 물론 내 말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말은 사회에서, 학교에서, 책에서, 스승님들에게서 얻어 들은 말들이다. 그런 것들을 우린 오직 내 잣대, 색안경에 비추어 걸러내어 ‘내 식대로’ 조합하는 역할 정도를 할 뿐이다. 그리고는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 얻어 들은 것을 ‘내 생각’이라고 고집하며, ‘내 말’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곤 한다. 물론 자신 스스로도 그것이 온전한 내 생각인 줄로 착각하고, 옳은 생각인 줄로 착각을 하고 산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 혹은 부처님 말씀을 누군가에게 들려 줄 때, 아난 존자의 이런 겸손함과 진실함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말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또한 말을 순수하고 참되게 전달할 수 있으며, ‘내가 옳다’라는 아집와 아상이 비워진 텅 빈 진실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이야 그저 입가에 떠오르는 말들을 아무런 걸러짐 없이 그것도 자기 생각인 양 마구 끄집어내다 보니 여러모로 번거롭고 복잡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에게 주워들은 내용을 내 말인 양 마구 토해 내다 보니, 자신 내면에서 침묵과 명상을 통해 향기롭게 피어오르는 진실을 더욱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팔만대장경이라는 수많은 경전을 이렇게 생생한 부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었던 데는 아난의 역할이 가히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가감 없고 진실된 아난의 음성은 이 다음 구절에서부터 더욱 빛을 발한다.
한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1250인의 큰 비구 스님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공양 시간이 되자, 가사와 발우를 수하시고 사위성에 들어가시어 차례대로 탁발을 하신 다음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하셨다. 공양을 마치시고는 가사와 발우를 제자리에 놓으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가만히 이 광경을 그려보라. 1250인이라는 대식구가 저마다 보리수나무 아래 차분히 명상에 들어 있다. 아마도 아침 햇살 내리기 전 새벽녘에 밝게 깨어 저마다 좌선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공양 때가 되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처님을 위시하여 모든 비구스님들께서 가사를 수하고 발우를 들고는 차례로 줄지어 마을로 향한다. 배가 고파서 조금 빨리 걷고 싶더라도 ‘배고픈’ 마음을 관하며 차분히 대열에 서서 한 발 한 발 차분히 무겁고도 신중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을 것이다. 1250인이라는 수많은 스님들이 걷고 있지만 그 걸음 걸음에는 한없는 고요와 침묵만이 향기롭게 대열을 감싸고 있다.
사위성 큰 마을에 다다르자 스님들은 차례 차례 골목 골목으로 나뉘어 부처님께서 설법해 주신 것처럼 분별심을 놓고 부잣집, 가난한 집을 따질 것 없이 처음 정한 집에서부터 차례로 일곱 집을 걸어 탁발을 한다. 어쩌면 부처님께서 사시 때 일종식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시간에 맞춰 집 앞에서 음식을 준비해서는 부처님과 그의 청정한 제자들이 오기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아직 승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스님들은 저마다의 탁발한 음식이 다름을 보고 분별심을 일으킬지 모른다. 음식의 맛과 양 또 그 종류에 따라 때로는 탐심이 올라오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곧 다른 많은 스님들이 그렇게 하시듯 그 마음을 관찰하고는 분별심을 놓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고요히 탁발을 하시고는 다시금 본래 자리로 돌아오셔서 저마다의 자리에 앉아 공양을 할 것이다. 공양을 하기 전에 잠시 저마다 침묵으로써 명상을 할 것이다. 이 음식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수많은 인연, 온 우주 법계의 인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안으로 안으로 은은히 피어오르게 할 것이다. 행여 몸이 약하거나 병이 들은 도반이 곁에 있다면 내 발우에 담긴 몸에 좋은 음식이나 고기 등을 나누어 줌으로써 약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때때로 맛에 탐착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를 잘 관하며 고요히 공양을 할 것이다. 공양이 끝나면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금 고요히 선정에 들 것이다.
이러한 아난의 묘사에 어디 시끄럽고 복잡스런 느낌이 있는가. 이 많은 스님들이 일상을 살아가지마는 어느 한 구석 시끌벅적한 광경이 아닌 한없이 고요하고 여법한 광경일 뿐이다.
부처님의 시자 아난은 항상 그림자처럼 부처님 옆에 서 있다. 부처님께서 탁발을 나가실 때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부처님을 따르고, 공양을 하실 때 말 없이 옆에 앉아 함께 공양하며 항상 부처님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한 부처님에 대한 지켜봄이 있었기에 부처님의 일상 그 자체가 얼마나 큰 깨달음의 순간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우리가 보았을 때 시시콜콜해 보이는 이런 사소한 일상까지 아난존자는 경전에서 소중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수많은 선사 스님들께서 이 광경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으며 부처님 최상의 가르침이라고 하셨던 연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하루를 돌아보면 어떠한가. 잠이 안 깨니 자명종도 소리 큰 것을 사다가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출근하기 직전 빠듯할 만한 시간에 맞춰놓고 잠에 든다. 시끄런 자명종 소리에 일어나지 못해 푹 눌러 놓고는 또 자다보니 이만 저만 늦은 게 아니다. 그러니 아침이 얼마나 바쁘겠나. 정신없이 시계 보면서 씻고 화장하고 대충 밥 먹고, 아니 아마도 아침밥도 굶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서 후다닥 뛰쳐나가 회사로 학교로 출근을 한다. 하루의 시작이 정신없으니 어찌 하루가 온전할 수 있겠는가.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저녁 때 동료들과 어울려 한 잔 걸치고 집에 들어와서는 쓰러지듯 잠이 들곤 한다. 다 이렇지는 않겠지만 정신없이 마음 챙기지 못하고 사는 것은 이와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이런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 금강경 제 일분에 나오는 부처님의 평화롭고 고요한 삶과 우리의 허둥지둥 정신 없는 삶을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하루 일과는 모든 순간 순간이 그대로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밥 먹고, 걷고, 씻고, 앉는 이 모든 일들이 어느 하나 소중한 수행 아닌 것이 없으니 따로이 수행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다. 어느 한 가지 사소하고 덜 중요한 일이 없이 모든 일과가 그대로 소중한 깨어있음의 행이다. 우리들은 중요한 일이 있고 사소한 일이 있으며,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사소한 일들은 일일이 신경을 쓰지 못하곤 한다.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지간한 사소한 일이나 과정에서의 소소한 일들은 그냥 흘려 보내기 쉽다. 회사에 가야 된다는 목적 때문에 집에서 밥 먹고, 버스를 타고, 회사로 걸어가는 그런 일상은 사소하고 귀찮은 일 쯤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행에 있어 사소하고 중요한 분별은 없다. 낱낱의 모든 일상은 그대로 하나의 소중한 깨달음의 행이 된다.
밥 먹는 그 사소한 일상이, 밥 먹는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밥 빨리 먹고 나서 좌선에 들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오직 밥 먹는 그것이 그대로 목적이다. 밥 먹는 순간 온전히 밥만 먹는 것이다. 밥 먹으며 다른 생각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과거를 떠올리며 그렇게 번잡하지 않고, 오직 밥만 드실 뿐인 것이다.
밥을 먹는 순간, 발을 씻는 순간, 걷는 순간, 탁발을 하는 순간, 매 순간 순간 몸과 마음이 온전히 거기에 있다. 매 순간 도착해 있다. 어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이미 도착해 있기 때문. 도착지란 바로 지금 이 순간일 뿐, 또 다른 도착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도착하려고 애쓸 것도 없고, 깨달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이 괴로운 세상 잘 살아 보려고 애쓸 것도 없이 매 순간 순간 도착해 마친 것일 뿐이다. 그러니 더없이 평화롭고 향기로울 수 있는 것이다. 걷는 순간 오직 걸을 뿐, 탁발을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고, 발을 씻는 순간 오직 씻을 뿐, 빨리 씻고 좌선에 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낱낱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좌선이고 깨어있음이다. 모든 순간 순간 더 이상 도달할 곳이라고는 없다. 그 순간이 가장 온전한 순간이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들이 그렇게 찾아 나서던 궁극의 순간인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라. 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려 하고, 무엇인가 목적 달성을 위해 애쓰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욕망과 집착의 사슬에 빠져 한 시도 만족하지 못하며, 한 시도 도착의 평화로움을 맛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바로 이러한 점을 일깨우고 계신 것이다.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일과라도 매 순간 순간의 삶이 지금 부처님의 삶에서처럼 온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마조스님께서 말씀하셨던 ‘평상심이 도’라는 말 또한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선사 스님들께서 부처님의 일상을 언급하신 금강경 제 일분을 두고 깨달음 최고의 순간이며 최상의 설법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똑같은 일상이라도 그 일상이 깨달음의 순간이 될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중생들의 평범한 일과가 될 것인가 하는 데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똑같은 일상이라도 온전히 그 순간 집중을 하여 깨어있게 되면 그것은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늘상의 일과가 깨어있지 못한 우리들의 안목으로 보았을 때, 금강경의 제 일분이 얼마나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겠나. 그저 우리들의 삶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의 눈을 맑게 씻고 2500여 년 전 부처님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그 마음을 살짝 엿보게 되면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모든 일과가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겉모습은 서로 같더라도 그 내면에서는 하늘과 땅만큼의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도 배 고프면 밥 먹고 잠 오면 자고 역대의 고승들도 지금의 우리들도 모두 배 고프면 밥 먹고 잠 오면 자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듯 평범하고 똑같아 보이는 일상일지라도 내면에 중심을 세우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보내느냐 그저 정신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느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평화롭게 깨어있는 낱낱의 일들이 곧 좌선을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모든 일상을 살아감이 그대로 좌선하고 앉아 마음을 집중하는 것과 둘이 아니라고 말이다. 생활과 수행이 둘이 아니라고 말이다.
가부좌를 결하시고 몸을 곧게 세운 뒤 입가에 마음을 집중하시고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구절인데, 아쉽게도 우리가 많이 독송하고 있는 구마라집의 번역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일대일로 직역하는 것을 중시하는 현장스님의 번역이라던가, 진제, 보리유지 등의 다른 한역 금강경본에서는 모두 번역이 되고 있으며, 빠알리어 경전에서도 이 부분은 잘 드러나 있음을 볼 때, 분명 이 부분은 금강경의 원본에서는 나타나 있는 경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금강경 제 일분에서 말하고 있는 부처님의 일상 하나하나가 그대로 가부좌를 결하고 앉아 마음을 집중하는 좌선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이 부분에서는 말하고 있다. 앉아서 하는 좌선은 중요하고 법 먹고, 탁발하고, 발을 씻는 등의 일은 중요치 않은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낱낱의 행위가 그대로 마음집중의 수행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양이 끝나시고 부처님께서는 여느 때처럼 가부좌를 결하시고 몸을 곧게 세운 뒤 입술 바로 위쪽으로 호흡이 들고 나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시며 앉아 계신다. 호흡이란 지금 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스님은 이 부분을 ‘주대면념’이라고 하여, ‘전면에 마음을 집중하시고서’라고 해석을 했다. 빠알리어에서는 ‘전면’이라고 해석한 부분을 원본에서 ‘무카(mukha)’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얼굴, 혹은 입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하고, 산스크리트본에서도 무카는 입이나 얼굴을 나타낸다고 한다. 전후 사정을 보았을 때 아함경 등에서 나오는 사념처 수행에 빗대어 ‘얼굴에 마음을 집중한다’거나 ‘전면에 마음을 집중한다’는 해석 보다는 ‘입술 위 부분의 호흡이 들고 나는 곳에 마음을 집중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본다. 어쨌거나 여기에서는 호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순간 온전히 마음을 집중하여 깨어있다고 하는 점에 말씀의 중심을 새겨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금강경의 제일분에서는 부처님의 평범한 하루 일상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가르침을 열고 있다. 우리들의 삶과 부처님의 삶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똑같이 먹고 자고 걷는다. 그러나 부처님은 깨어있는 정신으로 오직 그것을 할 뿐이며, 오직 매 순간 순간 최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매 순간 다른 곳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달해 있기 때문에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 또한 부처님의 하루 일과를 보며 우리의 삶도 부처님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된다. 외양상으로는 그리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말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내면의 빛을 현실에 피어오르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들 또한 그대로 깨달음을 삶 속에서 피어오르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꾸 어디로 갈까 망설이지 말고, 자꾸만 욕망을 일으켜 도달할 곳을 찾지 말고, 번뇌와 집착으로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부처님의 삶과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을 일러주고 계신 것이다.
금강(金剛)이란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금강, 즉 다이아몬드는 금강불괴(金剛不壞)라고 하여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여 결코 깨어지지 않으며 그렇기에 그 어떤 변화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또한 희고 투명하여 청정하고 반짝이는 광명으로써 빛을 내뿜는다는 특성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금강의 특성을 비유로 하여 경전의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금강이란 불교적 의미로 첫째로, 불성(佛性)을 의미하며, 둘째로, 반야(般若)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본래자리 불성은 그 어떤 세상의 변화 속에서도, 성주괴공하고 생주이멸하는 이 우주의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결코 깨어지거나 파괴되는 일이 없으며 온전히 투명하여 청정하고 온 우주 법계에 대 광명의 빛을 은은하게 놓고 있다. 그러한 불성의 특성을 금강에 비유를 한 것이다.
또한 불성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지혜, 즉 반야를 금강에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 불성이란 본체를 의미하는 것이고 반야란 본체를 체득하는 지혜이므로 둘은 서로 다른 것이라 할 수는 없다. 본래 우리 안에는 반야 지혜가 숨어 있어 금강과도 같이 결코 파괴되지 않으며 청정하고 늘 우리 안에서 광명의 빛을 놓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비유를 든 것이다.
반야(般若)는 범어로 프라즈냐(Prajna)라고 하며, 팔리어로는 ‘판냐’라고 한다. 반야는 바로 팔리어 ‘판냐’의 음역어로써, 그 발음만 그대로 따온 것일 뿐 한자로는 특별한 뜻이 없다. 범어 ‘프라즈냐’를 중국말로 옮기기에 적절한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그 의미가 퇴색됨을 우려해 따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음역하여 ‘반야’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의미이기에 번역이 그리 어려웠을까 궁금할 것이다. 반야를 굳이 우리가 쓰고 있는 용어로 해석해 본다면 ‘지혜(智慧)’라는 말이 가장 가까운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지혜라는 의미 가지고서는 아무래도 반야를 대용하기에 많은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다.
반야는 우리들 범부의 사량 분별로써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단어다. 지혜라고 하면 우리들이 머릿속에 벌써 선입견이 생긴다. 그러나 반야는 그런 우리들 관념 속의 지혜가 아닌 우리들의 사량 분별을 뛰어 넘는 무분별의 지혜이고, 쉽게 말해 ‘최고의 지혜’ 앞에서 말한 금강, 즉 불성을 깨쳐볼 수 있는 부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번역자의 입장에서 반야의 그 본 뜻이 퇴색됨을 우려하여 쉽게 ‘지혜’라고 번역하지 않은 그 속뜻이 헤아려 질 것이다.
바라밀은 범어로 ‘파라미타(Paramita)'이며, 이 또한 중국에서 적절하게 옮길 만한 번역어가 없었기에 그대로 발음만을 따 와 바라밀다, 혹은 바라밀로 번역해 놓았다. 반야심경에서는 바라밀다로 번역하였고, 여기 금강경에서는 바라밀로 번역을 해 놓았다.
바라밀다, 바라밀을 해석해 본다면 ‘도피안(到彼岸)’, ‘도무극(到無極)’, ‘사구경(事究竟)’으로, ‘바라’는 ‘저 언덕(피안)’을 ‘밀다’는 ‘건넌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언덕’에서 부처님 깨달음의 세계인, 금강 반야의 세계인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을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언덕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즉 차안(此岸)으로 아직 깨닫지 못하여 탐진치 삼독에 물든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다른 말로 사바세계, 즉 인토(忍土)로 탐진치 삼독의 번뇌를 참아내야 하고, 오온(五蘊)으로 비롯되는 온갖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세계다. 또 다른 말로 예토(穢土)라 하여 삼독심에 물들어 오염된 땅을 말하기도 한다. 저 언덕, 피안(彼岸)이란 차안의 상대되는 개념으로 탐진치 삼독심에서 벗어나고 신구의 삼업이 청정하여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청정한 세계, 즉 정토(淨土)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의 세계,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한다.
경(經)이란 수트라(Sutra)로써 원 의미는 ‘실’ ‘줄’이라는 의미로 옛날에 경서들은 보통 대나무나 나무껍질 등의 판에 적어 여러개의 실로 묶어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이런 경을 연결하여 묶어주는 실처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소중한 깨달음의 내용들을 이어놓은 실이라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금강반야바라밀경이란 경의 의미를 해석해 보면 ‘금강과도 같은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가르침들을 설해 놓은 경’ 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