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의 법칙
얼마 전 <아바타>라는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흥행을 했습니다. 저 또한 그 영화를 보았는데요, 제법 흥미로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한 부분이 있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남자 주인공인 제이크 설리가 에이와에게 기도합니다.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해주세요.”
여기서 ‘에이와’는 인디언들의 표현으로 한다면 ‘어머니의 대지’, 혹은 근원적인 ‘진리의 본성’이고, 종교적으로는 ‘신성’이나 ‘영성’을, 또 불교식으로 표현하다면 ‘불성’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 기도를 듣고는 여주인공인 네이티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에이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오직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지.”
이 우주법계의 근원적인 진리의 에너지는 어느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주적인 에너지의 균형을 맞추고,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전쟁이 일어나거나 싸움이 일어났을 때, 혹은 사소한 축구경기를 놓고 보더라도, 과연 기도 잘하는 팀이 이길까요, 아니면 많이 연습한 팀이 이길까요? 당연히 연습 많이 한 팀이 이길 겁니다. 또 그게 맞지요. 기도 잘한다고 이기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시험을 보는 학생들 중에 시험에 붙게 해 달라고 기도 잘 하는 사람이 합격을 하겠어요,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 합격을 하겠어요? 당연히 공부를 많이 한 쪽일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이나 하나님은 기도를 잘 하느냐 못하느냐를 보고 무조건 나를 도와주는 분들이 아닙니다. 내 편 네 편을 나눠서 무조건 내편을 도와주는 분들이 아닙니다. ‘진리’와 ‘진리의 에너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지도 않고 열심히 운동하지도 않았는데, 기도만 무조건 열심히 했더니 성공하고 월드컵에서 승리하게 해줬다고 한다면 이 신이야말로 얼마나 불공편한 신입니까?
이 우주의 본질적인 에너지는 누구의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하느님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진리 또는 우주의 본성에는 편이 없습니다. 편은 커녕 진리는 그 어떤 것도 둘로 나누어 편들거나 차별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네 종교와 내 종교, 네 나라와 내 나라, 선과 악을 나누지 않습니다. 편을 나눠놓고 내 편을, 선의 편을, 혹은 우리나라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예로부터 본래부터 선악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 바탕에서는 서로 나뉘거나 구분되어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우주법계의 근원 에너지는 선과 악으로 나눠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불교만이 무조건 진리이고 다른 종교는 진리가 아니라거나 혹은 우리나라만이 옳고 다른 나라는 다 틀리다거나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우주법계는 항상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흐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직장 상사가 부하직원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또 돈을 빌려갔는데 의도적으로 안 갚고, 승진 리스트에서도 누락을 시킵니다. 그러면 직장상사와 부하직원, 이 둘 사이의 에너지가 어떻습니까? 평등하거나 균형을 이루고 있나요? 이 둘 사이의 에너지 균형은 이미 깨진 것입니다. 상사는 괴롭히면서 힘을 쏟아내어 속이 좀 후련해지겠지만, 욕설과 괴롭힘을 당한 부하직원은 아주 억울하고 답답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둘의 에너지 균형을 깨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에너지 불균형의 상태에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거나 그 두 사람이 헤어졌다고 칩시다. 헤어지고 이번 생에 만나지 못했어요. 그럼 어떨까요? 둘 사이는 이미 에너지 균형이 깨졌습니다. 그럼 다음 생에 만날까요, 안 만날까요? 당연히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만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우주법계는 이 둘 사이의 에너지 균형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다시 만나게 해줍니다. 그 만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게 바로 이 우주법계 진리의 ‘법칙성’입니다.
그럼, 다음번에 이 두 사람이 만났을 때는 어떻게 만나겠어요? 반대 입장에서 만납니다. 상사가 부하직원이 되고, 부하직원이 상사가 되어 거꾸로 똑같은 괴롭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이 둘 사이의 에너지 균형이 이루어질 것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단순히 이 우주법계는 항상 에너지 균형을 맞출 뿐입니다.
복수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우리가 ‘업(業)’이라고 하는 것, ‘업보(業報)’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업을 지으면 그 악업에 대한 과보를 받습니다. 그 과보를 받아야지만 에너지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했다, 그 사람이 내 돈을 훔쳐갔다, 나를 괴롭혔다’고 하면 내가 직접 가서 그 사람을 단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에너지 균형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반드시 원한을 갚아야지 후련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직접 찾아가서 똑같은 방식으로 괴롭힘으로써 내가 굳이 에너지 균형을 맞추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내 몫이 아니라 우주법계의 몫입니다. 내가 마음을 어지럽혀 가며 균형을 맞추려 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우주법계에서, 진리의 세계에서 알아서 다 해 줄 것입니다.
내가 일부러 찾아가서 복수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어요. 인과응보를 주관하고, 균형의 법칙을 주관하는 쪽은 언제나 우주법계입니다. 그것을 우주법계에서 하도록 우리는 그저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면 화와 증오, 미움과 원망을 가지고 복수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일을 그르치고 말 뿐입니다. 그 원망과 미움의 에너지는 정당한 균형을 맞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맞추었다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또 다른 불균형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법계에서, 진리의 세계에 내맡기게 되면, 우주는 아무런 분별심이나 복수심, 증오와 원망이 없는 텅 빈 자리에서 다만 자연스럽게 모든 삶의 균형을 맞출 뿐입니다. 거기에는 또 다른 불균형이 붙지도 않고, 모든 존재에게 완전히 평등하며 동시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균형의 법칙, 즉 인과응보를 주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주법계에 그 모든 것을 내맡긴 채,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미움과 증오로 오염된 나의 마음을 청정히 정화시키고 동시에 상대방을 용서 해 주는 것에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참회하고,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수행자가 균형이 깨진 상황을 다루는 방식이며, 오염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누군가가 미워 마음에 원망과 증오가 생겼다면 그 원망과 증오의 마음은 누구의 것일까요? 그것은 증오하는 대상의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내 마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방을 미워하면 다치는 것은 상대방 쪽이 아니라 내 마음인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증오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증오로 인한 상처를 받게 될 뿐입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 내가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미워할 때 사실 미워하는 그 마음은 내 안에서 싹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상대방에게 원한을 품는 것은 나 자신에게 원한을 품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이 우주법계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은 곧 결국 내가 나 자신에게 복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복수하려는 마음을 놓아버리고, 그것은 우주법계의 몫으로 넘겨버리고, 나는 오직 용서하고 참회하면 그뿐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용서하게 되었을 때 사실은 상대방이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참회를 통해 내 마음이 맑게 정화되고 비워져야지만 앞으로의 내 삶도 평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된 원수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학교를 다니던 아들이 같은 학교를 다니는 친구가 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부모는 복수를 결심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마음으로 아들을 죽인 원수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보니 그 아이는 소년소녀 가장이였어요. 부모도 없고, 동생을 돌보면서 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집이 가난해 먹을 것도 없이 굶고 있고 그나마 조금 있는 먹을 것도 자신은 안 먹고 동생에게 먹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니, 너무 불쌍하더랍니다. 그래서 누구라는 얘기도 없이 오히려 먹을 것을 사다 주고, 돈도 몇 푼을 쥐어주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너무 억울한 거예요. 그래서 다시 찾아갔는데, 가서 보니 또 불쌍해서 또 한 번 도움을 주고 왔습니다. 그 일이 반복되자 정이 들고 인연이 되어 점점 더 친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식을 죽인 원수 같은 놈인데, 그 아이에게 오히려 “나도 어차피 자식이 없으니까, 네가 내 자식이 되어줄 수 있겠니?”라고 했답니다. 그 아이들를 양자로 삼아 돌보면서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은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그 원한을 계속 가슴에 품고 있었다면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망쳤을 겁니다. 그 아이들도 괴로웠겠지만, 결국 자기 자신 또한 평생토록 그 원한과 증오의 마음을 안고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렸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다큐를 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연쇄살인범이 자신의 아내와 딸을 죽였고, 그 살인범을 향한 무시무시한 증오심으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병을 앓고 쓰려졌습니다. 마음에 증오심과 복수심이 불타고 있다보니 그 마음의 증오심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뒤덮어 자신의 몸이 아프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러 병들이 합병증으로 한꺼번에 오면서 더 이상 회생이 어려울 정도로 몸이 망가져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처럼 누군가를 지독히 미워하고 증오하게 되면 그 복수심을 갚기도 전에 내가 먼저 병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 우주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병으로 쓰러져 가던 어느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신창원이라는 저 사람도 얼마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 그랬을까? 행복하고 따뜻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과연 저렇게 되었을까? 지금껏 얼마나 끔찍한 환경 속에서 자라고 생활했을까? 이런 짓을 저지를 정도로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
오히려 저럴 수밖에 없던 연쇄살인범 또한 피해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그 아내와 딸을 죽인 살인범을 마음에서 완전히 용서해 주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함과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분이 가지고 있던 몸의 온갖 질병들이 다 녹아내리고 회복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몸이 가벼워지고 개운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완전히 회복되어 건강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나쁜 원수라고 할지라도 그를 미워하고 원한심을 일으키면 그 마음은 내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내 마음과 몸이 먼저 다치고 병이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증오를 품고 있으면 그것은 고스란히 내 안에서 어떤 어둡고 탁한 에너지의 형태로 작용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을 단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원수라고 할지라도 내 손으로 단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주법계의 몫입니다. 내가 나서서 행하지 않더라도 우주가 알아서 조화롭게 균형을 맞춰줄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원한심을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보냄의 법칙 끌어당김의 법칙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주법계는 항상 모든 존재 사이의 균형을 맞춰주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 사이에는 항상 균형이 맞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괴롭히고 헐뜯는 마음을 내보내면, 이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괴롭히고 헐뜯을 일들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의식의 상태를 이 세상은 언제나 고스란히 내 삶으로 투영시키는 것입니다. 미워하면 미움 받을 일이 생겨나고, 증오하면 나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감싸주고 고마워한다면, 주변에서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고마워하며 나를 감싸주는 따뜻한 인연들을 자꾸만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이 우주의 법칙은 언제나 ‘내보낸 것이 곧 끌어당겨 진다’는 균형의 법칙에 의해 운행됩니다.
언제나 우주는 내가 내보내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가 내보내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 바로 그것을 균형에 맞게 다시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내보낸 것이 곧 끌어당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에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말과 생각과 행동, 물질과 정신세계에 아울러 적용이 됩니다. 내가 어떤 말, 어떤 생각, 어떤 행동을 내보냈느냐에 따라 인생을 살면서 타인으로부터 어떤 말을 많이 듣고,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며, 타인이 내게 와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입니다. 어떤 행동을 하느냐, 어떤 말을 하느냐, 어떤 생각을 했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창조되어지고 있습니다. 신구의 삼업이야말로 나의 삶을 창조하는 세 가지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신구의 삼업 가운데 나는 이 세상에 무엇을 매일매일 내보내고 있는가? 긍정적인 말을 주로 많이 하는가,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부정적인 말이 나오니, 얼마 전 TV다큐 <욕>이라고 방영되었던 것이 생각나네요. 요즘 학생들이 대화를 하면서 얼마나 많이 욕을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는데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여중생 4명이 대화하는 것을 몰래 CCTV로 20여분 동안 촬영을 했는데, 거의 모든 말이 욕으로 시작해 욕으로 끝날 정도였습니다. 그야말로 요즘은 특별히 악의를 품고 있지 않더라도 습관적으로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세상에 욕을 내보내고 있단 말이죠. 그럼 뭐가 들어오겠습니까? 막 욕을 내보내고 있는데, 아주 거친 말을 내보내고 있는데, 사랑스런 말이 들어오겠어요? 내가 타인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내가 타인에게 행한 말이, 곧 머지않은 미래에 내가 누군가로부터 듣게 될 말이란 사실을 분명히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우주법계에 있는 모든 것은 에너지 파동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 한 마디에 독특한 에너지 파동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강력한 힘을 지닌 파동입니다. 양자물리학에서는 1cm³ 속에 담겨 있는 파동의 힘이 1094erg라고 하는데요, 이것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우주의 모든 물질에너지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 배 보다 많다고 합니다. 생각도 파동이고, 말 한마디도 파동이며, 물질적 정신적인 일체 모든 것이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생각 하나, 말 한마디가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의 에너지 파동으로 우주 끝까지 퍼져나갔다가 다시 내게로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내보낸 것이 끌어당겨 진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끌어당겨 질 때는 엄청난 힘을 동반한 채 내 앞의 현실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욕을 하는 것이겠지요. 욕을 하면 그 욕에 담긴 어둡고 탁한 파장이 머지않아 나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내보내는 것이 곧 나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 이 두 가지는 결코 다른 말이 아닙니다.
주는 것 = 받는 것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보내는 것엔 관심이 없고 들어오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돈 좀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내가 남들에게 인정받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남들에게 사랑받을까, 어떻게 하면 아내가 나한테 좀 더 잘할까, 우리 자식이 성적을 더 잘 받아올까, 어떻게 하면 남들이 나에게 잘할까 하는 나에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만 관심이 있단 말입니다.
내가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라는 그 이치를 모르다 보니 이처럼 내보내는 것이 아닌 들어오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내보내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이유가 내보내는 것은 왠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남들에게 보시하는 것은 손해 보는 것 같단 말입니다. 사실은 ‘주는 것’은 것은 곧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말이 아닙니다. 내가 ‘남들에게 물질적으로 나누어 준다’라는 것은 내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다’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닙니다. 동일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보내는 것, 자비를 나누는 것, 사랑을 베푸는 것, 이웃에게 기부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손해 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어오는 것에만 관심을 가져요.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많이 돈을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앞서 말씀 드린 이 우주법계의 인과응보의 법칙, 평등의 법칙, 내보낸 대로 받는다는 법칙, 뿌린 대로 거둔다는 법칙, 우주법계의 에너지 균형의 법칙을 바탕으로 어떤 업을 지을 것이냐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뭐가 들어오는냐 하는 것에만 관심이 쏠려 있는 것입니다. 업(業)에 따라 보(報)가 뒤따르는데 업은 짓지 않고 과보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폭발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유행한 것이 바로 『시크릿』이라는 책입니다. 여기에서는 항상 ‘끌어당김의 법칙’을 얘기합니다. 이는 우주법계의 평등성의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에요. 그것 또한 진리의 일부입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내보내는 것이 곧 끌어당겨진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내보내는 것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는 것에 중심을 둔 표현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에 사람들이 더 혹한단 말입니다. 내보내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들어오는 것에 관심이 있으니까,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입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부와 명예와 권력과 건강과 그 밖의 모든 것을 끌어당길 수 있다는 것에 중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끌어당길 수 있을까요? 내보내야만 끌어당겨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내보내느냐에 따라서 끌어당겨지는 것이 결정됩니다. 핵심은 끌어당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시크릿에서는 내보내는 것보다 끌어당기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구미에 더 와 닿는 것입니다. 내보내고 나누고 베풀고 보시하라는 말 보다는, 그 결과인 부자가 될 수 있다는데 초점을 맞춰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끌어당기는 데에만 중점을 두었을 때와 내보내는 것에만 중점을 두었을 때 어떤 차이가 생길까요?
끌어당기는 데에만 중점을 두었을 때를 가정해 봅시다. 예를 들어 부자가 되고 싶단 말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이 마음으로 풍요로움을 느끼고 만족하면서 남들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베풀어야 끌어당겨지니까요. 그런데 끌어당겨 지는데만 관심이 있게 되면, 이것을 알고 마음속에서는 ‘내가 먼저 베풀어야 끌어당겨지는 것이구나’ 하면서 계산적인 마음으로 베풀게 됩니다. 끌어당겨질 것을 염두에 두고 내보낸다 말이에요. ‘아, 내가 부자가 되려면 베풀어야지’ 하는 계산이 깔린 순수하지 않는 마음으로 베풀게 된단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어떻습니까?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라. 상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하라’고 말합니다.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순수하게 보시하라고 합니다. 내보낼 때는 들어오는 것을 생각하고 내보내면 안 됩니다. 마음에 계산이 깔리면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주법계의 근원적인 에너지, 근원적이 힘이 붙지가 않습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는 이런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끌어당김의 법칙’이 아니라 ‘내보냄의 법칙’을 말합니다. 무엇을 내가 세상에 내보낼 것이냐, 무엇을 베풀 것이냐, 어떤 업을 지을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내가 이것을 내보내면 저것이 끌어당겨지겠지 하는 계산이 깔린, 결과 지향적인 베풂이 아닌 그저 순수한 내보냄, 순수한 보시와 나눔을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끌어당김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목적과 결과를 중시하는 말이며, 미래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무엇을 내보낼지를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내보냄의 법칙은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이지만, 끌어당김은 그 결과 미래에 받게 될 ‘미래’의 문제인 것입니다. 미래와 결과에 치중하게 되면 그 순수성의 의심받게 되고, 그런 마음에는 우주법계의 무한한 지혜와 자비의 힘이 붙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주를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일체유심조와 업보의 법칙
이상에서 설명한 끌어당김의 법칙과 앞서 아바타에서 얘기했던 삶의 균형이라는 것은 모두 불교의 업(業) 사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 업인과보의 법칙 즉, 업보라는 사상입니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표현합니다.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짓는다는 의미입니다. 경전에서는 우리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서 이 세상이라는 도화지위에 마음먹은 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화엄경』의 사상인데, 이 바탕이 바로 인과응보의 법칙, 업보의 법칙인 것입니다.
업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즉 인간이 세상으로 ‘내보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는 말과 생각과 행동이라는 세 가지 형태로 행위를 내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고 하였습니다.
몸으로 남을 도와주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업(身業)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말로써 욕을 할 수도 있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말이라는 구업(口業)으로써 내보내는 것입니다. 또 의업(意業)은 생각을 내보낸다는 말입니다. 보통 선업을 지어라, 선업을 쌓아라 하는 것이 무엇을 내보낼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업보(業報)의 보(報)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얘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업을 지을 것이냐’, 즉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는 내 문제입니다. 내 자유 의지의 문제입니다. 반면 업에 따른 결과는 우주법계가 관할하고 관장하는 문제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보(報), 즉 무엇으로 받을 것이냐에 에너지를 쏟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행동을 할 것이냐, 무슨 업을 지을 것이냐, 무엇을 내보낼 것이냐가 지혜를 공부하는 수행자들이 중점으로 실천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불교는 항상 나를 중심으로 시작하는 종교입니다.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라 내가 이 순간, 현실에서 우주법계의 법칙을 어떻게 실천할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돼 있는 게 바로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불교에서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여섯 가지 감각을 육근(六根)이라고 합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고 해서 ‘눈귀코혀몸뜻’이라는 감각기관으로 세상과 접촉하는 겁니다. 그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각각 대상으로 여기는 바깥에 있는 경계는 육경(六境)이라고 하며, 색성향미촉법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업보(業報)라는 것은 바로 육근과 육경에 대한 법칙을 의미합니다.
즉, 업보에서 업(業)이라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짓는 것이고, 보(報)라는 것은 세상이 내가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업보의 법칙에 따른다면 결과인 보에 대해서는 우리가 관장할 부분이 아닙니다. 보(報)는 이 세상이, 이 우주법계가 나에게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죽음도 행복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아무리 선업을 지금 당장 쌓는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너무나도 큰 악업을 많이 지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악업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이 선업을 짓고 착하게 살고 다 좋은 일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도 나쁜 일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과거에 내가 지어왔던 과보를 받는 건 받는 문제이고, 내가 새롭게 짓는 건 별도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수행을 잘하는 참 존경할만한 수행자가 있습니다. 그분이 정말 열심히 수행하는데,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깁니다. 지켜보고 있던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수행을 하면 뭐해? 저렇게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기는데…….”
이것은 우주법계의 이치를 모르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한 생만 산 것이 아니라 수억 겁을 이어오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업을 지었습니다. 그것을 받는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 현재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행을 열심히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쁜 일이 생기는 이유는 과거의 업을 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또한 크게 본다면 좋은 소식입니다. 나쁜 소식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생애를 나고 죽고 나고 죽기를 반복하며 삽니다. 그 중 어느 생은 30생을 살다 죽었고, 또 어느 생은 90세까지 살았으며, 또 어느 생은 1살도 안 되어 죽은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1살도 안 되어 죽은 사람이 그 다음 생에는 90세까지 살 수도 있습니다. 즉, 몇 살을 사느냐를 가지고 과연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를 결정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생사가 둘이 아닌 자리에서 본다면 빨리 죽든 늦게 죽든 그것은 별 차이가 되지 못합니다. 천상세계에서는 인간계의 1,600년이 그곳의 하루라고 하는데, 그렇게 본다면 100년을 살다왔든, 10년을 살다왔든 천상세계에서 본다면 그저 잠깐 다녀온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말 그대로 오십보 백보일 뿐이지요.
전생에 누군가를 죽인 죄로 어느 한 생은 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업을 받아야 할 업보가 있다고 해 봅시다. 그 사람은 40세, 50세 되어 결혼해 자식 낳고 성공하며 잘 살다가 갑자기 죽는 것 보다 차라리 너댓 살까지 살고, 혹은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빨리 죽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한 생 과보를 받고 나면 어차피 다음 생에 새롭게 태어나 80년이고 100년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렇게 빨리 죽은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부모님 또한 자식을 빨리 보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업보를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빨리 죽었다는 그 사실 하나가 결정론적인 괴로움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생사의 관점에 얽매여 사는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것이 전부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생사를 넘어선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한 생 빨리 업보를 받고 온 것일 뿐이지요.
그래서 천상의 신들의 대화는 이런 식입니다.
‘지난 생 누구를 죽인 업보 받으러 다음 생에는 지구에 잠시 다녀오는게 낫지 않겠어?’
‘맞아, 어차피 한 번 받을건데, 이번 생에 빨리 다녀오는것이 좋겠어. 어디로 갈까? 어차피 잠깐 다녀올건데, 아프리카에 다녀오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그것도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돌아가셔야 하는 조건이면 금상첨화일텐데. 그래야 부모님 마음 고생도 안 시켜드리지. 아니야, 어차피 한 번 내려갈거 한국에 가서 철수와 영희 두 분을 부모님으로 모시고 태어났다가 오는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그 두 분은 나에게 진 빚도 있고, 그 두 분은 각각 지난 생에 영국과 미국에서 차로 아이를 치여 죽게 했잖아. 그 아이의 부모님들이 무척이나 괴로워했지. 어차피 그 분들도 그 과보 받으셔야 할텐데 한 번 여쭈어 봐야겠다. 인연이 정확히 맞아 떨어지니 좋아하실거야’
이처럼 천상의 존재들은 가볍게 대화를 나눕니다. 생사를 관조해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상태에서는 생사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살생이라는 업 또한 그다지 심각할 것은 없습니다. 죄의식과 두려움에서 놓여나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다시 환생을 해 인간계로 내려온다면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심각해지고, 괴로워하겠지만 말입니다.
이와 같이 근원에서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심지어 죽음에 대해서도 좋다거나 나쁘다고 해석하거나 판단할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다만 나에게 주어진 정확한 인과응보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지, 또한 내가 깨달아가고, 내가 업장소멸을 해 나가기 위한 정확히 필요한 자기다운 삶을 살고 있을 뿐이지, 좋거나 나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삶은 언제나 중립입니다. 삶에 대해 이리저리 시비를 붙이고 따지려 드는 것은 언제나 삶 쪽이 아니라 우리 쪽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시비만 붙이지 않는다면 중립적인 삶은 언제나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를 돕고 있는 바로 그 고맙고 감사한 순간에도 감사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짜증내고 화내며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살고 있을 수는 있지요. 그것도 내가 선택한 것일 뿐, 그렇게 원망하며 삶을 비관하는 그 순간에조차 사실 이 우주법계는 우리를 한결같이 자비로써 돕고 있습니다.
고맙게도 이 우주법계는 우리가 정확히 그 업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받을 수 있도록 업보를 보내줍니다. 우주법계는 항상 자비와 사랑의 관점에서 우리를 돕는 방향으로 과보를 보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말을 우주법계가 어떤 전지전능한 신이거나, 의도를 가진 존재라서 작위적으로 무언가 일을 벌이는 것을 잘못 해석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말 그대로 우주법계의 이치는 자연스럽게 의도 한 바도 없고, 의도할 주체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흐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수행을 열심히 하고 뭔가 정진을 열심히 할 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면, 이는 우주법계에서 ‘이 사람이 지금은 수행력이 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구나’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 업보를 이겨낼 수 있기 때문에 보내주는 겁니다. 만약 그 사람이 훗날 수행도 안 하고, 여러모로 힘든 상황을 겪게 될 때 그 좋지 않은 상황이 생기게 된다면 더욱 이겨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법계에서는 수행력이 있고, 주변에 지지해 줄 사람도 있고, 도움도 받을 수 있는 좋은 상황에 정확히 과보를 받게 해 줌으로써 도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더 깊은 차원의 일깨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수행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꾸 나쁜 일만 일어날 수가 있지’ 하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데바닷다라고 하는 반역자가 있었고, 부처님 당시에 아라한과를 증득한 비구니 스님은 먼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우도 있었고, 큰스님들의 일화를 보더라도 역경에 처하거나, 심지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거나, 살생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최악처럼 보이는 순간 조차 더 깊은 차원에서 본다면 무한한 자비의 순간일 수 있습니다.
업을 지음과 동시에 받는다
이상에서처럼 업을 짓게 되면 그것을 언젠가는 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좀 특수한 경우에는, 아니 본질적인 경우에는 우리가 내보냄과 동시에 받게 됩니다. 즉 업을 지음과 동시에 보를 받게 됩니다. 시간이라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허망한 생각만 놓아버린다면, 우리는 그 시간이라는 허상에 걸리지 않음으로써 업보의 동시성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큰스님이나 수행력이 깊은 수행자라면 마음을 일으킴과 동시에 곧바로 현실이 되곤 합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이 오랜 세월 후에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당장에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도반스님이 군에 군승(軍僧)으로 왔는데, 장병들 먹을 것을 사주고 싶어도 초코파이 조차 사 줄 돈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월급을 받아서 조금씩 사주곤 했는데, 어느 날 옛 도반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우리 선방은 가난해서 대중공양 오는 곳이 없으니 우리 선방에 대중공양 좀 와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스님이 없는 돈 쪼개가며 선방의 스님들께 대중공양으로 맛있게 올려 드리고 왔습니다. 그렇게 그나마 남은 월급으로 스님들께 대중공양을 해 드리고 올라오는데, 올라오는 차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예전에 알게 된 신도님인데, 문득 스님 생각이 났다면서 “스님이 장병들한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주시고 하는데, 제가 뭐 좀 도와드릴게 없을까요?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좀 보내드리고 싶어요” 하더랍니다.
무언가를 베푼다고 했을 때 빠를 경우는 이렇습니다. 베풂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다시 들어올 것이 결정됩니다. 이 우주법계와 일치를 이루고 있는 사람일수록, 집착과 번뇌와 욕망과 아상이 적은 사람일수록 베풂과 동시에 들어오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이처럼 사실은 마음을 냄과 동시에 현실은 이루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왜 시간이 걸릴까요? 사실 이 우주법계의 근원에는 시간이라는 게 없어요. 그런데 왜 시간이 걸리는가 하면, 우리 스스로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뭔가 마음을 내고 나서 ‘아,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과 판단이, 시간이라는 허망한 관념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양자물리학에서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시간은 없다. 원인 즉 결과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원인을, 씨앗을 뿌리고 나면 나중에 결과를 가져온다고 알고 있잖아요? 일반적인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차원에서는 원인 속에 결과가 100% 담겨 있습니다. 법계와 일치를 이루는 상황에서는 씨앗을 심음과 동시에 열매가 맺힌다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아직 법계와 일치를 이루지 않기 때문에, 시간의 관념 속에 묶여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주법계는 내가 믿는 대로 보내주는 겁니다. 시간이 걸린다고 믿으니까 시간이 걸리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우주법계의 원칙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와 같이 내보내는 것이 곧바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시간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일수록, 즉 깨달음을 얻은 사람일수록 내보냄과 동시에 받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무엇을 생각해야 됩니까? 무엇을 고민해야 합니까? 무엇을 받을 것이냐, 내가 얼마만큼 부자가 될 것이냐, 내가 얼마만큼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냐, 내가 얼마만큼 행복해질 것이냐 등에는 관심을 갖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받을 것이냐가 아니고, 무엇을 끌어당길 것이냐가 아닙니다.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 이 세상에 내가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 죽을 때까지 이 세상을 얼마만큼 내가 밝히고 떠날 수 있는가, 내가 내보내는 것으로 인해서 세상이 얼마만큼 밝아졌는가, 내가 따뜻한 말 한마디를 내보냄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이 행복해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사실 어두운 파장을 내보내면, 그 사람만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를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주법계는 너와 나라는 경계가 없습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A라는 사람이 나한테 도움도 안 될 것 같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인 것 같아 무시하고 욕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것은 우주법계를 무시하고 법계를 욕하는 겁니다. 부처님을 욕하는 것입니다. 결국 고스란히 돌아옵니다.
심지어 바보 천치라고 하더라도 부처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말단 사원이 사장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주법계에서는 내보내는 것이 들어올 뿐이지, 높다 낮다라는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내보내는 것이 바로 들어올 뿐입니다.
‘부자’를 원했는데 ‘가난’이 오는 이유
나는 오늘 하루 무엇을 내보냈는가 하고 사유해 보십시오. 지난 일주일동안 무엇을 내보내고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보통 사람들은 자식에게 “성적 좀 잘 받아오지, 성적이 이게 뭐냐?”라고 합니다. 좋은 성적 좀 받아오라고 막 닦달을 합니다. 이것은 바로 내가 자식을 향해서 나쁜 성적에 대한 에너지를 내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돌아오겠어요? 당연히 나쁜 성적에 대한 에너지가 더 들어오는 것입니다. 나쁜 성적 받아 온 자식을 보면서 ‘좋은 성적’을 받아오라고 주문하고 있지만 그렇게 좋은 성적에 집착할수록 사실은 부모님의 마음은 ‘나쁜 성적’에 더욱 마음이 머물게 됩니다. 나쁜 성적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기분이 나쁘다는 것 자체가 바로 나쁜 성적에 마음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만약 좋은 성적에 마음을 모았다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식에게 좋은 성적을 주문하면 할수록, 나쁜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면 받을수록 사실은 마음 속에서 ‘나쁜 성적’을 내보내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나쁜 성적을 내보내니 당연히 ‘내보낸 것이 끌어당겨진다’는 이치에 따라 또 다시 나쁜 성적을 받아 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식에게 좋은 성적을 집착해서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부모일수록 자식은 공부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부모님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공부를 더욱 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님의 그 마음이 자식의 마음에 단번에 가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식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마음을 내보내니, 곧바로 자식은 부모님에게 받은 것을 고스란히 공부 안 하고 나쁜 성적 받는 것으로 되돌려주게 되는 것입니다.
다이어트를 하려면 ‘다이어트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 생각이 크면 클수록 살은 더 안 빠집니다. ‘몸무게를 빼야 된다’는 집착이 크면 클수록 몸무게는 절대 못 뺍니다.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곧 ‘나는 뚱뚱하다’라는 마음의 집착과 에너지를 더욱 부풀리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뚱뚱하다는 마음을 내보내니 들어오는 것도 뚱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부자가 되고 싶지만, 마음속에 ‘나는 너무 가난하다, 내 연봉은 너무 적다’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가난하다’라는 에너지를 내보내니까, 가난을 보내주는 겁니다.
똑같이 연봉 3,000만 원을 받아도 누군가에게는 행복이고 누군가에게는 괴로움일 수도 있습니다. 현실은 같지만 “와, 이렇게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가, 얼마나 풍요로운가! 얼마나 만족스러운가” 하면서 만족하고 나누면서 행복해 하는 사람에게는 우주법계가 알아서 더 많은 경제적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게 될 것입니다. 반면 ‘내 연봉은 적다, 가난하다, 더 벌고 싶다’라는 에너지를 내뿜는 사람은 어떨까요? ‘적다’는 에너지를 계속 내뿜으니까 그만큼 밖에 보내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식 자체가 그 수준까지 가 있질 못하니까 큰돈을 보내줄래야 보내줄 수가 없습니다. 모두 한 생각입니다. 한 생각!
말 그대로 부자가 되는 것, 가난하게 되는 것 모두가 사실은 한생각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이, 생각이, 내면이 가난하니까 가난한 현실이 나타나는 것이고, 마음이 풍요롭고, 내면이 부유하면 현실세계도 머지않아 풍요와 부유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한생각을 어떻게 다스릴 것이냐 하는 것이 바로 마음공부인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나, 풍요로움 또한 마음공부를 잘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공부를 정말 잘 한다면, 애써 부자를 원하지도 않겠지요. 부자가 되건, 가난해지건, 외부적인 경제적 상황과는 상관 없이 마음이 온통 풍요로와져서 언제 어디서나 풍요로와 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애써 부자를 원할 것도 없이 그저 존재 자체로써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마음을 잘 다스려서 부자도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도 1차원적인 차원에서는 좋겠지만, 보다 깊은 차원으로 들어간다면 애써서 작위적으로 인위적으로 애써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명예와 권력을 손에 쥐고 하는 것을 통해서 명예로와지고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만들지 않더라도, 내보내고 끌어당기고 하지 않더라도 그저 지금 있는 그대로 여여하고 평화롭고 그저 충분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부자가 되기 위한 마음상태
그 말은 조금 더 뒤로 미루고, 일단 시작했으니 하던 돈 얘기, 부자 얘기를 조금 더 진행시켜 보도록 하지요.
예를 들어 쉽게 돈으로 얘기해 본다면, ‘10억을 번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대단한 얘기죠? ‘100억을 끌어들인다’는 것, 이것은 더욱 대단한 얘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인생에서 100억을 벌 수 있을까?’, ‘100억은 내 인생에서 꿈같은 돈이야. 나는 안 돼!’ 하는 한 생각에 묶여 있습니다. 한계선을 만들고, 스스로 딱 닫아놓는 것입니다. 우주법계는 내가 정해놓은 그 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스스로 정해놨으나, 과거 전생에 복 지은 것이 워낙 많다면 생각 에너지를 복 에너지가 넘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만든 울타리를 우주법계가 직접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을 어떤 기준에 두느냐에 따라 우주법계는 항상 그것을 보내줄 뿐입니다. 따라서 받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것을 내보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합니다. 친구가 좀 더 나한테 잘해주길 바라고, 배우자가 좀 더 나에게 잘 해주길 바랍니다.
남들 집에 가니까 아내는 내조를 잘하고, 남편은 돈을 많이 벌어오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보고 배우자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바랍니다. 자꾸만 배우자의 부족한 면만 보는 겁니다. 그 말은 곧, 자신이 배우자를 향해 ‘당신은 부족하다’는 에너지를 자꾸 보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한테 좀 더 잘해줄 수 없어?’ 하고 마음속으로든 말로든 부족한 걸 자꾸 내보내니까, 상대방이 나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내보내는 것이 부족한 거니까, 상대가 부족한 부분을 자꾸 나에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상대가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칙입니다.
부모님, 배우자, 자식은 모두 정확히 여러분의 인연과 딱 이치를 이루기 때문에 만난 것입니다. 정확한 진리를 만난 거예요. 나에게 필요한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자신이 바뀌지 않고는 결코 내 인연이 바뀔 수 없습니다. 내 의식이 성숙해지지 않고서는 절대로 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성숙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먼저 아내를 왕비처럼 모시고, 남편을 왕처럼 모시고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야 지금 당신 또한 왕처럼 왕비처럼 변모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남편을, 아내를 바라보는 만큼, 대우하는 만큼, 배려하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바로 딱 그 만큼만 배우자에게 돌려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대로, 중생세계에서는 ‘시간’이 걸립니다. 하루 이틀, 일이주일 정도 잘 해 놓고서 아무리 해도 상대가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그동안 서운하게 대한 만큼, 배우자가 나에게 질려서 마음을 닫은 만큼 아마도 시간은 사람에 따라 더 많이 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3주 이상은 걸린다고 보시면 됩니다. 무엇이든 3주라는 시간은 무조건 엎드리고, 잘 해주고, 배려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면서 무한한 자비로움을 실천해야 변할 수 있습니다. 절에서도 ‘3.7일(3주) 기도수행’을 하지 않습니까?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3주 정도도 노력 안 하고 ‘해도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내가 먼저 내보내야만 들어오지, 내보내지도 않았는데 들어올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더 잘난 사람을 만나면, 더 잘나게 되면 그때 더 좋아질 것이다’가 아니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만족하고 행복하고 감사한다’고 했을 때 내가 내보내는 것이 완전 만족이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일들만 계속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하는 겁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 우주법계는 변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그대로일지라도 마음공부를 하기 전과 후의 마음가짐은 완전히 다릅니다. 연봉도 똑같고, 배우자도 똑같고, 자식도 똑같고, 조건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마음공부를 했을 때와 안 했을 때는 천차만별로 달라져요.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에 세상이 달라져 보이는 것입니다.
동일한 조건 속에서 어마어마한 행복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큰 좌절과 불행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내보내느냐, 어떤 마음을 내보내며 사느냐 그것을 살펴야 됩니다. 사랑을 내보내고, 감사를 내보내고, 만족을 내보내고, 풍요를 내보내려면 어떻게 돼야 합니까? 내가 먼저 사랑을 베풀고, 풍요로워져야 됩니다. 먼저 사랑을 느끼고, 감사를 느끼며, 진정으로 만족하며, 풍요로움을 느껴야 합니다.
원금의 수백 수천 배를 받는다
그러나 그러고 싶어도 그게 안 됩니다. 풍요로움을 느끼고 싶지만 풍요로운 마음을 내보낼 수가 없어요. 왜 그럴까요? 마음속에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이 있으니까 남들에게 베풀고 보시하면 내 것이 자꾸 줄어들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내 돈과 마음은 한정이 되어 있어 있는데, 이 한정된 것을 자꾸 베풀면 내 것이 나가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에요.
정말 그럴까요? 이해하기 쉽게 돈을 예로 든다면 통장 잔고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베풂의 잔고는 통장잔고와는 전혀 다릅니다. 베풂과 나눔을 이웃에게, 우주법계에 저축하면 그 이자가 무한대로 늘어나 복리를 뛰어넘게 되고, 원금을 훨씬 뛰어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어떻게 베푸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베푸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단지 100만 원을 베풀었을 뿐인데도 수백 수천 수억이 들어 올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의식 자체가 베푸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면, 우주법계는 무한정 가져다줍니다. 이 사실을 저는 직접적으로 느껴요. 인색하게 굴 때와 베풀 때,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이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불교의 핵심은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지금 이 자체로서 완성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 완벽합니다. ‘완벽하지 못하다’는 내 생각과 판단만 있을 뿐이지, 완벽하지 못한 존재는 없습니다. 완전하지 못한 삶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완전하고 완벽해요. 완전히 풍요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내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부족한 겁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내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완성되어 있고 완전히 완벽하고 풍요롭다고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내가 무한정 넘칠 수가 있으니까 끊임없이 베풀어주고 나눠줍니다. 따뜻한 말도, 사랑도, 물질도, 부처님 가르침도, 진리도 다 내보내 줍니다.
그렇다면 나 스스로 만족하고, 내보내 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내가 풍요롭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를 알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존재이고 훨씬 더 깊은 존재입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깊고 풍요로운 존재입니다. 완벽하고 완전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완전히 내보내는 작용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동시에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과 직결돼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죽기 직전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예를 들어 여러분이 일주일 후에 죽게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계속 끌어당기며 살겠어요? 아닙니다. 내보내며 삽니다. 죽기 직전임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더 쌓고 모르려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기 직전에는 누구나 사랑을 내보내고, 물질도 내보내고, 못했던 따뜻한 말과 마음을 베풀 것입니다. 그것이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죽기 직전이 되면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저절로 깨달아 실천합니다.
그런데 왜 죽을 때까지 가서야 비로소 그렇게 합니까? 죽을 때를 기다리지 말고 바로 지금 그것을 해야 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왜 죽기 직전으로 미루고 살아야 합니까? 평생토록 그것을 미루고 또 미루며 비본질적인 것들만 하고 살다가 죽기 직전에 정말 해야 할 것을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어쩌죠? 죽음은 예고해 주지 않습니다. 차라리 죽기 직전에라도 죽을 거란 것을 알면 그 때라도 뒤늦게 깨닫고 본질적인 것들을 할지 모르겠지만, 삶은 우리에게 죽을 때를 미리 알려주지 않습니다. 바로 내일이 될 지, 몇 시간 후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정말 중요한 것을 가장 먼저 하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이 아니면 다음이나 내일은 오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기 직전에 가서야 비로소 ‘조금 더 나누고 살껄’ ‘조금 더 베풀고 살껄’ 하고 후회하지 말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보낼 것’을 결정짓고 실천해야 합니다. 무엇을 끌어당겨 모을 것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내보낼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이 아닌 ‘내보내는 법칙’에 마음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내보내는 것이 곧 당겨지는 것이니까요.
나는 오늘 배우자에게, 가족에게, 직장동료에게 무엇을 내보내고 있느냐를 항상 살피고 살 수 있어야 됩니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내가 내보내는 것으로 인해서 세상이 얼마큼 더 어두워졌는가, 내가 내보내는 것으로 인해서 세상이 얼마큼 더 밝아졌는가?’하는 것을 늘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삶을 지켜보고, 내 것을 많이 내보내고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까, 더 가져볼까, 더 소유할까, 더 끌어당겨 볼까가 아닌 어떻게 하면 더 베풀어 볼까, 더 나눠볼까, 내 것을 내보내 볼까에 대해 생각해 좀 더 사유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혜로운 이가 되면 좋겠습니다.
'마음공부 생활수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세상 모두가 헛된 그림자일 뿐 (0) | 2014.07.21 |
---|---|
삶에서는 '좋은 일'이나, '더 좋은 일'만 일어난다 (1) | 2014.07.13 |
군생활의 즐거움 - 군대의 장점들 (0) | 2014.07.09 |
도는 닦을 것이 없다 물들지만 말라 (0) | 2014.06.19 |
삶을 변화시키는 방법 (0) | 2014.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