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한 번 행위에 옮긴 것은 한 번의 경험이 되어 기억되고, 그런 행위가 반복되면 습관이 되어 우리 안에 업습(業習)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되면 그 때에는 자동반사적으로 저절로 업습따라, 습관에 따라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즉 과거에 경험하고 행위한 방식대로 습관적으로, 자동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일들이 우리 삶에는 대부분을 이룬다. 무의식적으로 깨어있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저절로 과거 습관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집에서 시간이 날 때 TV를 자주 보던 사람은 나중에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나도 모르게 TV를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습관적으로 리모컨을 손에 쥐고 사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이 날 때 자주 책을 보던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책을 보고 있는 자신을 자주 발견한다.
밤에 야식을 먹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고, 담배를 피우는 것도, 밥 먹을 때 술을 한 잔씩 마시는 것도 습관이다. 나중에는 정말 먹고 싶지 않더라도, 특별히 술을 마실 이유가 없더라도, 그냥 저절로 자동반사적으로 밤만 되면 먹을 거리를 찾거나, 담배나 술을 찾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언제 담배에 불을 붙였는지도 잊은 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담배가 입에 가 있다고 말하곤 한다.
이처럼 낡은 습관은 지난 기억의 잔재이며, 과거의 낡은 패턴으로 지금 여기라는 생생한 현재를 진부한 것으로 뒤바꿔 놓는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과거와 동일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다.
똑같이 집에서 쉬는 시간이 주어질 때 왜 늘 하던대로 TV를 켜야만 하는가. 왜 음식을 보면 자동 반사적으로 술을 마셔야 하는가. 오늘의 현재에는 과거와 다른 패턴으로 지금 이 순간을 경험하고 전혀 새로운 체험으로 바꿀 수도 있다.
지금 이 습관은, 과거에, 그 때의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있을 때 만들어 진 것일 뿐이다. 지금은 전혀 다른 현재이고, 그 때와는 다른 생각과 다른 삶의 목표와 전혀 다른 삶이 새롭게 놓여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연히 대응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업습대로 자동반사적으로 대응하게 되어, 매일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움으로써 간암이 왔다고 생각해 보라. 그 사람은 간암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낡은 패턴에 사로잡혀 도저히 담배와 술을 끊을 수 없다. 이제는 과거의 건강했던 상황이 아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도 되는 상황은 지나가고, 이제 전혀 다른 현재가 내 앞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마땅히 바꾸어야 하지만, 업습에 얽매이고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좀처럼 그 업습을 떨쳐내기 어렵다.
아인슈타인은 '문제를 만들어낸 사고 수준에 머물러서는 그 문제를 풀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업습이란 문제를 만들어낸 사고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새로운 무한한 가능성의 현재를 생생하게 살아가고자 한다면 과거의 업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 안에 이러한 상황에서 이렇게 반응하는 나의 업습이 있음을 먼저 직시해야 한다.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는 늘 같은 결정을 하고, 같은 반응을 함으로써, 전혀 다른 새로운 현재의 경험을 과거에 이미 경험해서 다 안다고 여기는 마음으로 과거의 경험 속에 가두어 둔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의 가능성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학교에서 늘 뒷자리에만 앉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콘서트 장에서도, 강연장에서도, 늘 뒷자리 신세를 면치 못한다. 자동 반사적으로 뒷자리를 찾는 것이다.
업습이라는 자동반사적 반응에서 놓여나려면, 먼저 매 순간이라는 현실에 내가 어떻게 습관적으로 반응하는지를 지켜보고 관찰하며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린 뒤에는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 반응의 가능성이 있음을 살펴 보고, 그 무한한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습관적인 것인지를 알게 되면, 꼭 그 자동반응만 할 필요가 없으며, 그러한 자동반응은 단지 과거의 의식수준에서 만들어진 것일 뿐, 지금은 전혀 다른 가능성과 다른 반응을 선택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명상을 시작할 때, 기초작업으로, 습관 바꾸기 작업을 해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되곤 한다.
평소 절대 안 하던 것을 한번쯤 도전해 보고, 안 보던 책들도 살펴 보고, 내성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행동도 해 보고, 늘상 가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도 다녀 보고, 매일 만나는 사람만이 아닌 전혀 새로운 사람과도 만나 보는 것이다.
이렇게 업습을 깨다보면, 과거의 의식에 얽매이고 사로잡혀 있던 마음이 활짝 열리면서 또 다른 새로운 무한한 가능성에 눈 뜨게 된다.
학창시절 싫어하던 친구를 절대 안 만나려고 하던 습관적 반응을 내려놓고, 학창시절 모임에 나갔다가 몰라보게 변한 친구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있고, 그 자리에서 만난 친구에게 놀라운 사업 아이템을 제안받을 수도 있다.
늘상 하던 일만 하고, 해오던 습관 대로만 했을 때 절대 만날 수 없었던, 절대 깨달을 수 없었던 수많은 새로운 가능성들이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실제 연세드신 어르신들이 새로운 삶의 변화가 잘 찾아오지 않는 이유는, 늙어서 그런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삶에 대해 업습에 얽매여 자동반응만을 보일 뿐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해 보지 않고, 마음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업습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에 마음을 열게 되면 나이가 들어서도 전혀 새로운 가능성의 삶을 눈부시게 살아갈 수 있다.
내가 히말라야에서 만난 70대 어르신의 도전이나, 얼마 전 책을 읽다가 갑자기 홀로 배낭여행을 떠난 정년퇴임 한 지 10년도 넘은 70이 넘은 할아버지의 도전을 보 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의 매 순간의 삶을 가만히 관찰해 보라. 내가 얼마나 업습에 매여 있는가, 얼마나 자동반사적인 반응에 익숙해져 있는가. 얼마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머뭇거리는가. 늘 하던대로 할 뿐 변화를 두려워하지는 않는가.
제행무상이라는 이치대로 변화라는 것이야말로 이 우주의 이치이기 때문에, 변화하는 세상에서 나 혼자 변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깨달음과 성장을 향해 마음을 닫는 것과 같다. 변화하는 역동성이야말로 우주의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반응하며, 과거의 낡은 틀을 늘 새롭게 깨고 새롭고 눈부신 눈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날 때 난생 처음 맞이하는 새벽인 것처럼, 처음으로 느끼는 아침 햇살일 것처럼 햇살의 따스함을 느끼게 될 수 도 있는 것이다.
매 순간순간 현실에 대응하는 나의 자동반응을 살펴보고, 이것이 업습에 의한 자동반응임이 밝혀질 때 잠깐 멈춘 뒤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있을 수 있는지를 살펴 보라.
무조건 새로운 선택만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에 마음을 열 수 있는 열린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 때, 우리의 깨어남은 빨라진다. 더 빨리 성장하고, 성숙하며, 과거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새로운 변화에 도전하게 되며, 하루하루라는, 매 순간 순간이라는 현실이 얼마나 놀라운 가능성의 신비인지를 깨닫게 된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월~금, 07:50~08:0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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