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해인사]
바가바드 기타는 힌두교 경전이면서도 그 사상이 너무나도 불교에 가깝다 보니 학자들 중에는 기타가 불교의 영향을 받아 엮어진 것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제가 읽어 보니 몇몇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지는 않지만, 정말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많이 닮아있고 그 깊이나 가르침의 내용이 아주 감동적이어서 왜 간디가 이것을 자신의 영적인 지침서라고 했는지, 또 왜 라마크리슈난, 비베카난다, 타고르 등 수많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는지를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특히 바가바드 기타는 이전의 힌두교 경전인 베다나 우파니샤드 같은 것들이 하층 천민들이 들을 수 없었거나, 하층 천민들의 해탈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또 너무 전문적인 비젼이라 일반인들에게 동떨어져 있었는데 반해 하층민들의 해탈 가능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언제나 서민의 삶 속에서 함께 지속되어 왔고 모든 지역, 계층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그래서 다양한 인도를 한데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인 격이라고 합니다.
[바가바드 기타]를 읽다가 카르마 요가라는 장에 시선이 머뭅니다.
"너는 네 명함을 받은 일을 행하라. 행함은 행하지 않음 보다 낫다. 행함 없이는 네 육신의 부지조차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집착을 떠나 언제나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하라. 집착 없이 행하는 자가 가장 높은 데 이르기 때문이다.
자나카나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완전에 이른 것도 행함에 의해서 된 것이다. 너도 이 세계의 유지를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때때로 공사상과 무아, 방하착, 무집착, 무소유의 사상에 빠져 허무주의로 빠진다거나, 내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여 빈둥거린다거나,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해 내지도 못하면서 무위를 즐기는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무위의 행을 위해 아무런 직업도 가지지 않는다거나, 자연 속에서 소요하면서 제 의식주 조차 해결하지 못하거나, 어떤 인위적인 일과 직업을 가지는 것을 심지어 수행자답지 못한 것으로 오인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무위, 공, 방하착, 무집착은 행함 그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에서 보듯이 다만 집착이 깃든 행위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위 기타의 게송은 그것을 좀 더 쉽게 풀어 주고 있습니다.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카르마 요가'라고 하여 행동의 수행, 행동명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수행이나 명상은 행함을 놓아버리고, 좌선을 함으로써 몸을 움직이지 않고 비우고 그치는 것을 제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카르마 요가에서는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머무름 없는 행동의 수행' '집착 없는 행위'야말로 중요한 삶 속의 수행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행함은 행하지 않음보다 낫다. 네 명함을 받은 일을 행하라...
내 삶에 주어진 일을 분명하게 해 내는 것이야말로 진리로 나툰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온전하게 해 내는 일일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내 명함을 가지고, 내 일과 직업을 가지고 그 일을 해 나가는 것은 수행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나요? 빨리 이 일을 해 놓고, 돈도 벌어 놓고, 훗날 퇴직하면 그 때라도 수행자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나요?
참된 수행은 삶 속에 있고, 행동 속에 있으며, 내 일과 속에 녹아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언제나 일과 직업을 마땅히 행하되, 다만 집착을 떠나서 행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참된 생활 속 수행이요, 카르마 요가인 것입니다. 기타에서는 이를 두고 집착 없이 행하는 자가 가장 높은 데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행하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에게 주어진 몫을 해 냄으로써 나라는 부처에게, 나라는 진리에게 주어진 다르마를 이번 생에 완성하고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기타에서는 이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이 삼계 속에서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또 얻지 못해서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렇더라도 나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이 세상에서 내가 반드시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하나도 없으며,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즉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할 것은 없습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며, 가져도 되고 안 가져도 됩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언제나 원만구족이며, 나 또한 언제나 원만구족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동해야 합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부처였다는 가르침만을 듣고 아무런 수행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빈둥거리기만 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본 뜻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행해야 합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 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반복하여 염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반복하여 독송해야 하고, 끊임없이 나를 낮추어 절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명함대로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온전히 해내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 그 일을 행하되 진리대로 행하고자 한다면 일하고 있으면서도 그 일에 얽매임이 없어야 합니다. 마음을 내되 머뭄이 없어야 하고, 일을 하되 집착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타에서는 말합니다.
"내가 만일 일하기를 그친다면 세계는 망해 버릴 것이다. 나는 혼란을 일으킨 자가 될 것이고,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지혜 없는 자는 일을 하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지만, 지혜 있는 자는 마땅히 집착함이 없이 우주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그와 같이 일해야 한다."
지혜 있는 자가 행하는 행은 집착이 없으며, 그러한 무집착의 모든 행은 우주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카르마 요가의 장에 다음의 게송도 눈에 띕니다.
"잘하지 못하면서라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남의 의무를 잘 하는 것보다 낫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이 좋으리라. 남의 의무는 무섭기만 할 뿐이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일을 나답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우주를 위해 행할 수 있는 가장 진리다운 몫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버리고, 끊임없이 남들의 몫을 부러워하거나, 남들의 의무를 좇기만 한다면 우리는 나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의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의 외모, 나의 능력, 나의 직업, 나의 특기, 그리고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바로 그것, 다른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조건을 부러워하지 않고, 지금의 나 자신으로써 나답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수행자답게 살아가는 카르마 요가의 길이요 명상 수행자의 길입니다.
남들을 부러워 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의 직업과 연봉과 능력을 보면서 나 자신을 질책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나로써 할 진리의 몫이 있습니다. 농부의 길도, 청소부의 길도, 수행자의 길도, 파출부의 길도, 사원의 길도, 사장의 길도, 그 모든 길들이 이 우주가 우리에게 맡긴, 법신 부처님께서 간절하게 우리에게 맡긴 온전한 진리의 몫인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집착없이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수행이고 행동명상이며 카르마 요가의 길인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