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명상'으로 자유로와지기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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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생활수행

'공의 명상'으로 자유로와지기

목탁 소리 2012. 3. 8.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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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거사님의 고민은
진급에 대한 불안에 있고,
한 보살님의 고민은
사업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있다.

거사님은 토끼 같은 자식들 공부라도 다 시키려면
어떻게든 끝가지 버티면서 진급에 목메지 않을 수가 없다.
또 보살님은 벌여 놓은 사업이 왜 신통치 않은지
날이 갈수록 고민만 쌓인다.

그런데 어느 날 설법을 듣고,
방하착에 대한, 무집착에 대한,
그리고 공의 명상에 대한 가르침 대목에서
큰 깨달음이 있었다.

조금 내려 놓으니 답이 없었던 것이,
완전히 내려 놓아 보니
시원한 답이 나왔던 것이다.

자식들 공부 시키고,
마누라 월급도 갖다 줘야 하고,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진급도 해야 하고,
특히, 자식 공부 끝날 때 까지는 포기할 수 없다고
끝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진급, 직장에 대해
완전히 내려 놓아 보았더니,
그래도 죽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진급 안 하면 우리 가족 다 죽는 줄만 알았고,
해결책이 없을 줄만 알았고,
진급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것만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해 왔는데,
사실,
정녕,
결정코,
그런 것인가?
결코 진급 없인 안 되는가?
하고 냉정하게 물어 보았더니,
그렇지는 않더라고 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진급 까짓거 안 되면
어떻게든 죽으라는 법이야 있겠느냐 하는 마음으로,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는 마음으로
내려 놓아 보았더니,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던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기가 한결 수월해지더라는 것이다.

보살님도 마찬가지다.
사업 포기는 있을 수 없다고,
내가 어떻게 일구어 온 것인데,
어떻게든 한 번 빛을 보고야 말 것이라고,
끝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사업인데,
‘이걸 놓으라고?’
‘절대 그럴 수 없어’
‘스님이 뭘 안다고 놓으라는거야? 남 사정도 모르면서’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단 말이야’
하고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사업,
그것을 까짓거 마음으로인데 어때 하고 받아들이고 났더니,
까짓거 놓아볼 용기가 생기더란다.

그래 사업,
내가 젊었을 때부터 일구어 왔고,
어렵게 어렵게 이렇게까지 끌고 왔는데,
한번 크게 성공도 못 하고,
본전도 못 찾고,
남들에게 성공했단 소리도 못 듣고,
여기서 끝내라고?
절대 할 수 없을 것만 같더니,
한 번 놓아 보자 한 생각에
내려 놓고도 살 수는 있을 것 같더란다.

억울하지만,
그리고 아깝지만,
까짓거 내려 놓을 수도 있겠더란다.
그렇게 내려 놓고 났더니,
그제서야 속이 후련해 지더란다.

이제까지 그 사업으로 인해 속끓이고,
골치 썩이고, 괴로워하고,
자식들과 놀아주지도 못하고, 신경도 못 써주고,
몸도 못 돌보고, 못 먹는 술도 먹어야 하고,
그 모든 것들이
까짓거 한 번 놓겠다는 마음 내 보았더니,
못 놓을 것도 없고,
오히려 속이 후련해지더라고 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마음에서 짐을 내려 놓고 나면,
실제 포기한 것은 아니더라도
마음은 훨씬 편안해 지고,
자유로워지고,
얽매임이 훨씬 줄어들게 됨을 경험한다.

이것 아니면 안 되겠다던 생각들이 놓여지면서,
훨씬 여유가 생기고,
잘 안 되더라도 일희일비 하지 않게 되고,
조금 잘 되더라도 쉬 들뜨지 않게 되면서,
조금 더 크게
자신의 사업에 대해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집착하게 되면,
그 집착이라는 좁은 소견에 갇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넓은 시선으로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게 되는
지혜로운 눈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가 될 지는 모를지라도,
내려 놓아야 할 때가 온다면
미련 없이 ‘그래 내려 놓고 말지’라는 큰 한 생각을 내고 나면
오히려 그 일에 대한 지혜와 통찰과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이게 바로
내려 놓아야 더 크게 잡힌다는 도리다.
물론 미묘하게도,
내려 놓으면 더 큰 것을 잡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과 계산은
또 다른 어리석음이며,
더 큰 것을 붙잡겠다는 무명일 뿐이다.

완전히 내려 놓아 보면,
상상할 수 없는 큰 공덕이 있다.

자유로움이 있고,
지혜가 있고,
여유가 생겨나고,
통찰과 직관이 깨어나며,
나만이 아닌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자비로움도 생겨나고,
매 순간의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힘 또한 생기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크게 한 번 내려 놓는,
그래서 본래 아무 것도 없었던 ‘무(無)’, ‘공(空)’
‘제로(0)’로 돌아가 보는 명상이다.

진짜로 사업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진급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삶을 포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집착을 내려 놓음으로 인해,
붙잡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는 참된 무소유를 통해,
공의 실천을 통해
더 큰 지혜와 사랑과 통찰이 열리는
귀하디 귀한 명상인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내려 놓아야 하는지 조차 모르고,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
놓으려면 어떻게 내려 놓아야 하는지를 모른다.

과연 나는 무엇을 잡고 있고,
또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내려놓아야 할까?
그리고 집착을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 ‘공(空)의 명상’이 있다.

누구나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하나씩 둘씩 붙잡고 집착하며
집착과 소유의 굴레에 사로잡힌 줄도 모른 채
무거운 집착의 속박에 갇히곤 한다.

처음엔 작게 시작되었던 집착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다 보면
그것이 어느 새 늘어난 줄도 모르고
집착의 무게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 시절에는
백 원짜리, 오백 원 짜리 동전 하나만 있어도 행복하다가,
대학생 때 쯤에는 몇 만원 쯤은 있어야 행복해지고,
직장생활 초년생 때는 월급 100만원에도 행복해지지만,
점차 월급도 연봉도 많아지면서
연봉 5,000만원, 7,000만원, 1억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욕심과
만족할 줄 모르는 집착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때때로 ‘공성의 명상’을 통해
내가 지금 어느 정도의 집착의 굴레에 갇혀 있는지,
내가 집착하고 있는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물론 소유하지도 말라는 말이 아니다.
소유하되, 거기에 소유 당하고 있는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늘 깨어있는 정신으로 알아차리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성의 명상은 무엇일까?

말 그대로 ‘0’으로, 즉 ‘무(無)’, 아무 것도 없음의
공(空)으로 돌아가 보는 명상이다.

우리가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고 생을 마치고 떠나가야 할 때,
우리가 본래 나왔던 바로 그 자리가 바로 공의 자리다.

이 나온 자리를 아주 생소하게, 낯설게,
‘나’라는 모든 수식과 정의와 규정들을 완전히 내려 놓고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무아(無我)의 나로 돌아가 보는 것이다.

우리가 나온 자리는 어디인가?
처음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어떤 존재로 왔는가?

아무 것도 없는 존재로 왔다.
소유한 바도 없었고, 집착한 것도 없었으며,
이루어야 할 꿈도 없었고, 커서 무엇이 되리라는 목표도 없었다.

동전 한 닢도 없었고,
돈도, 차도, 집도, 집착할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저 알몸 하나 달랑 가지고 태어나
매 순간순간의 삶을 살았을 뿐이다.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도 없었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두려움도 없었고,
오직 그 순간을 누리는 감각만 있었을 뿐이다.

이 자리가 바로 공의 자리다.
바로 이 자리로 다시 돌아가 보는 것이다.

내가 문득 낯선 여행지에 섰을 때,
히말라야 고지에 홀로 우뚝 서 있을 때,
문득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이 너무나도 낯설고 낯설어,
나의 이름도, 정체성도, 외모도, 학력도, 그 무엇도 잊은 채
그저 광대한 우주 속의 공이 된 한 존재를 느끼곤 했다.
그 순간이야말로 얼마나 자유스러웠던가.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바랄 것도 없고,
그저 그 어떤 수식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한 존재가 자유로이 서 있었다.

공의 명상을 위해,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수식과 정의와 규정들을
미련 없이 내려 놓아 보자.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의 목록이나,
나를 규정지을 수 있는 꼬리표들을 하나씩 내려 놓아 보는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
까짓, 그것 쯤 하나도 없다고 가정 해 보라.

내 집, 내 차, 내 직장, 내 위치, 내 학력, 내 외모,
지금까지 살아 온 나의 삶, 나의 가족, 내 자식,
내 꿈, 내 미래 비전, 그 모든 것들이 하나도 없었던
본래의 공의 자리로 잠시 나를 데려가는 것이다.

완전히 텅 빈 ‘제로’가 되어 보라.
아무 것도 없는 존재가 되어 보라.
그 무엇도 아닌 내가 되어 보라.
말 그대로 ‘0’, 제로가 되어 보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하나 하나 의식으로 내려 놓아 보고,
다 내려 놓은 뒤의 ‘아무 것도 아닌 나’를
가만히 느껴보고 주시 해 보라.

낯선 여행지에, 아니 낯선 별 위를
홀로 걷는 나그네가 되어
텅 빈 행성 위를 거닐어 보라.

아무 것도 아닐 때,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과연 누구인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 가 보자.

당신의 직업? 바로 그 직업을 잃었고, 가야 할 일터가 없다!
돈? 통장 잔고는 ‘0원’ 가진 거라곤 이 몸뚱이 밖에 없다.
집과 차? 물론 없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죽을텐가?
더 이상 살아 볼 도리가 없다고 생을 포기하고 말 것인가?

물론 어제까지, 아니 조금 전까지
사업이 잘 되지 않는다고 발버둥치고,
진급하려고 안달하며,
자식 성적 때문에 근심걱정하고,
집을 사려면 아직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던
그 ‘나’는 이제 꿈처럼 흩어지고 없다.

사업이 잘 되지 않는다고 발버둥칠 것도 없이
직업도 없고, 일터도 없고, 내 사업도 없다!
진급하려고 안달할 것도 없이
진급할 직장도 없고, 지위도 없다!
자식 성적 때문에 근심 걱정할 것도 없이
자식 학교 보낼 돈도 없어 학교를 다닐 수도 없다.
집을 사려고 돈을 더 벌 것도 없이
아예 집도 모아 놓은 돈도 하나도 없다.

그저 당장에 한 끼 입에 풀칠 할 일만도 버겁다.
당장에 오늘 밤에 어디에서 잘 지가 문제다.

그렇게 무소유의 공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
이제 하나 하나 제로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이제 당신은 어쩔건가?
그냥 다 포기하고 말 것인가?

아닐 것이다.
그럴 수가 없다.
그래도 어쨌든 삶은 계속될 테니까.

그런데 이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텅 빈 무(無), 제로인 공 속에서
생각지도 못 했던,
놀라운 빛과
텅 빈 무소유의 자유함,
무아의 걸림 없는 툭 트인 삶의 길이 열린다.

잘 안 풀리는 사업 때문에,
안 되는 진급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걱정하기에 앞서
‘내 삶의 공성’을 사유해 보라.

‘제로’인 공성 앞에서
그 모든 문제는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 때 비로소 완전한 무집착의 자유함을 만끽하게 된다.

아무 것도 없어도 삶은 계속된다.

아니, 기적과도 같이
폐허 속에서 피는 꽃처럼
전혀 새로운 무한한 삶의 가능성들이 일렁인다.

그 제로의 텅 빈 바탕 위에
무엇이든 쌓을 수 있는 자유함이 서린다.
텅 빈 도화지 위에는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이제 기쁘고 행복한 일만 남았다.
완전한 제로, 무소유의 상태에서라면
무엇을 하든 그 다음 부터는
어쨌든 제로에서 하나로, 둘로, 셋으로
이어지며 행복에 겨워질 수 있는 가능성들의 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누구나 때때로
이런 공성의 명상을 실천해 볼 일이다.

누구나 때때로
자신의 삶에 완전한 무소유, 무아라는
텅 빈 옷을 입혀 볼 일이다.

자식과 아내가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우린 지금 돈도, 집도, 차도, 음식도 아무 것도 없다.
거기에 가족 모두 배는 고프고 춥다.
그럼 무엇을 하게 될까?
먼저 당장에 먹어야 하고 먹여야 할 음식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 때 아버지는 무엇을 해서든
일단 가족을 위한 한 끼의 음식을 마련할 것이다.

그 한 끼의 음식이 해결되는 순간,
가족 모두는 고픈 배를 달랠 수 있는 행복을 만끽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아버지는 막노동이라도,
어머니는 식당일이라도 보려고 바둥거릴 것이고,
아주 작은 몸만 누일 수 있는 작디 작은 공간을 마련하여
아이들을 눕힐 수만 있어도, 가족 모두가 함께 있을 수만 있어도
모두는 행복해 질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은
진급이 안 될까를 걱정하기 전에,
이 직장에서 완전히 공으로 돌아가는 사유를 먼저 해 보라.
이 직장이 없다면,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

좋은 집을 살 여건이 안 되는 사람은
그 돈을 걱정하기 전에
집도 돈도 아무 것도 없는 제로를 사유해 보라.
아무 것도 없어도
삶은 계속되고,
당신의 행복을 향한 열정은 계속될 것이다.

과연 집착이란 무엇인가?
나는 과연 무엇에 집착하고 있나?

제로, 공성, 무의 명상을 통해
비로소 과연 내가 어디에 집착하고 있었는지,
본래 온 곳인 ‘텅 빈 공’의 상태에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쌓아 왔는지,
나는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얼마나 풍요로운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은 여전히 더 벌어야 하고,
더 나아가야 하며, 끊임없이 쌓고 쌓아야 하는 이가 아니다!

사실 당신은, 이 지구별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붙잡고 집착해 온 것이다!

처음 올 때
아무 것도 가져 오지 않았던 한 투명한 존재, 자유로운 존재가,
몇 십 년이 흐른 지금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있고,
그 붙잡은 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고,
더 많이 소유한 타인을 보며 자괴감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진짜 궁핍하고 가난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동안 이 생에서 쌓아 올린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던
바로 그 무지가 나를 가난하다는 의식으로 내몬 것은 아닌가.

오늘,
처음 이 생으로 여행을 오던 그 날로 되돌아가,
그 본래의 텅 빈 자리로 돌아가 보자.

그리고 다시 되돌아 온 뒤,
그동안 이 생에서 내가 붙잡은 것들이 얼마나 많으며,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들이며,
그것들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주 전체의 도움이 있었는지를
뜨겁게 뜨겁게 감사 해 보자.

그리고 요즘 내가 더 많이 가지려고, 얻으려고, 올라가려고 애쓰던
그 모든 욕망과 집착들이
얼마나 나를 속박하고 있었는지를 사유해 보자.

누구나 때때로
내 삶의 무소유, 공성의 명상을 실천 해 보라.

그럼으로써
자유한 나를 되찾게 될 것이다.

사실은 그렇게 아웅다웅하며,
그렇게 앞만 바라보며,
그렇게 소유와 돈을 갈구해가며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
풍요로운 존재이며,
사랑받고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찬탄과 경외감에 사로잡힐 지도 모른다.

텅 빈 그 자리에서 온 우리가
때때로
고향을 그리워하듯
우리의 본향인 그 텅 빈 공의 자리를
때때로 명상해 보고, 사유해 보며,
아무 것도 없었고, 아무 것도 아니던
그 자유했던 시절로 돌아가 보는 것,
그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속 시원하고
툭 트인 길인가.

텅 빈 공으로 돌아가
모든 것들을 내려 놓아 보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들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 풍요와 감사와 자비로운 도움 속에서
그동안 이렇게 살아왔다는 사실에
감동, 찬탄, 자족, 경이로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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