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정해져 있을까, 바꿀 수 있을까?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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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 즉문즉설

삶은 정해져 있을까, 바꿀 수 있을까?

목탁 소리 2011. 12. 29. 14:51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한 편으로는 모든 것이 법계의 큰 계획과 질서에 의해 운행된다는 것이 모순 아닌가요? 지금까지 제 맘대로 살아온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이 법계의 계획이었고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저의 삶도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아, 혼란스럽습니다.

업의 차원에서 조금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미 내가 지은 업이 있습니다. 그 업은 분명히 받아야 돼요. 그리고 남들이 지은 업도 분명히 그들이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이 지은 업을 받아야 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인연, 인과, 업보의 관계가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법계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존재들의 다양한 인과와 업보를 조화롭게 질서 있게 운행시킴으로써 저마다의 업에 걸맞는 응보를 저마다의 인연에 맞는 사람들과 존재를 통해 받을 건 받고 줄 것 주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계예요. 그런데 그 업은 누가 지었어요? 내가 짓습니다. 나의 자유의지로 업을 지어요. 다시말해, 이미 지은 업에 대해서는 법계의 질서대로 법계의 계획에 따라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법계의 인과적인 질서 이면에는 나의 자유의지가 바탕이 되어 있어요.

그 자유의지 속에는 복을 짓거나 수행을 하는 자유의지도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복과 지혜라는 자유의지가 모여서 나의 과거 업을 어떤 방식으로 받을 것인지를 법계는 충분히 감안하여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니 업을 받아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 업을 받을 때, 현재의 삶에 따라, 예를 들면 얼마나 깨어있는 삶을 현재에 살고 있느냐, 얼마나 복을 짓고 베풀며 살고 있느냐, 즉 지혜와 복덕을 순간 순간에 얼마나 꽃피우며 살았느냐에 따라 법계에서는 과거의 업들을 현재에 받기는 받되 다른 방식으로 받게 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금물의 비유’입니다. 한 움큼의 소금을 한 잔의 물 속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그것을 큰 그릇에 넣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 됩니다. 나아가 그 그릇에 온갖 양념을 하고 나물을 넣어 국이나 찌게를 끓인다고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도리어 맛깔스런 음식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과거에 악업을 지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 업을 기계론적이나 결정론적으로 반드시 나쁘게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업장소멸이라는 말이 이런 의미입니다. 업장이 받지도 않고 수행만 하면 그냥 소멸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행, 마음공부를 통해 업장을 받더라도 받지 않는 것 처럼 내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인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자유의지는 분명히 있습니다. 또한 우주법계의 질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서로 모순되지 않아요. 그 둘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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